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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백성의 절대조건(요한복음 3장 1절~8절)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 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림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구원의 절대조건을 읽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 문제를 신학적으로 바로 이해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신앙적인 혼란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5절)"--이들 말씀은 구원에 관계된 것이기에 더욱더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다는 것의 뜻부터 제대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믿는다는 것의 내용을 알아야만 하겠습니다. 특별히 구원의 절대조건에 관계된 것이니만큼 반드시 알아야 하겠습니다. 기독교 윤리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어차피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이니만큼 세상에 사는 동안 하는 데까지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완성이야 기대할 수 없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바라시는 수준에까지, 그 방향으로 향하여 나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구원에 관한 것, 특별히 구원에 관한 절대조건이라 한다면 이것은 반드시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원으로 가는 길에 혼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의 주제는 언제나 구원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구원입니다. 그런데 '구원(救援)'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개념에 대해서 우리는 낱말 그대로 쉽게도 파악하고 마는가 하면 철학적으로도 설명해보고 혹은 심리학적으로, 혹은 윤리적으로, 혹은 사회학적으로도 설명해보는 등, 이렇게 저렇게 합리화하여 정의하고자 애를 씁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제를 여러 모로 교묘하게들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생각합시다. 구원의 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 할 것 없습니다. 구원은 천국과 관련된 일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주님께로 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느니 하나님의 영역이라느니 하고 제아무리 복잡하게 설명하려들어도 설명되는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이 소리 저 소리 다 제쳐두고 예수님의 말씀에 잘 귀기울여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아주 쉽게 말씀하십니다. 쉽게, 편하게 말씀하신 것을 사람들이 일삼아 복잡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에 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어서 주님 앞에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언제나 종말론적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종말론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정리해서 생각할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여기에 문제는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 곧 구원의 절대조건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그리 복잡하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회개와 믿음---회개하고 예수를 믿어라, 이것이 구원의 조건입니다. 왜 복잡하게 생각할 것입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라고 바울이 말씀합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 2:38)"라고 베드로도 말씀합니다. 초대교회 벽두에 삼천 군중 앞에서 힘있게 선포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회개와 믿음이 인간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 회개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회개를 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를 믿습니까?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 그리했습니까? 아마도 처음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는 아직까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의 의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회개한 것이 내가 한 것 아닙니다. 나는 회개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질 쳤어요. 안 믿으려고 애를 썼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붙드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을 수 없도록 이끄셨습니다.
또, 나는 믿음 밖으로 도망가려고 안간힘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큰 믿음을 주셨습니다. 안 믿고 배길 수 없게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그 때부터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회개---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믿음---역시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인간 된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사실'은 있는데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사건'은 있는데 그것을 내가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신비인 것입니다. 신비롭다---없다는 것도 아니요 몽롱하다는 것도 아니요 모호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사실'인 것입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도 생생하게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마는,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처음에는 눈에도 안 보이는 것이 들어가 생명이 되어 점점 커갑니다. 심장이 생기고 머리가 생기고, 몸이 있어서 손발이 생기고 합니다. 엄연한 사실이 이렇듯 확실하게 존재하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눈에도 안 보이는 그 작은 것에서, 어디서 어떻게 되어서 심장이 나오고 핏줄이 생기는 것입니까?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어서 그 생명은 아버지 어머니를 용케도 닮는 것일까요? 엄연한 사실이 이렇게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구차하게 설명을 해보았자 거짓말일 뿐입니다. 결국 '신비 '인 것입니다.
회개는 후회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 뉘우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스스로의 힘으로 못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지난 일을 후회합니다. 곧잘 후회합니다. '잘못했구나'하고 후회하는 순간, 뉘우치는 순간에 절망을 맛봅니다. 절망에 빠져듭니다. '나는 구제불능이다' '나는 소망 없다' '나는 끝난 인생이다'라고 개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는 뉘우치는 마음도 후회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지난 일을 반성하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는 오직 믿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하나님의 은총을 믿는 믿음에서만 회개는 이루어집니다. 형벌 앞에서 회개하는 것은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때리고 맞게 되니까 "살려주시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거짓말입니다. 사랑을 느낄 때에 용서를 느끼고, 사랑을 느낄 때에 감격하면서 정말로 잘못했다고 엎어지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형벌의식에서 나타나는 반사작용으로 뉘우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요 변명일 뿐입니다. 형벌을 피하자는 속셈일 뿐입니다. 정말로 뜨거운 사랑을 느끼면서 뉘우치는 것, 이것만이 참된 의미의 생산적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로 계시된 그 사랑과 귀한 은혜를 깨닫고, 그리하여 믿음이 생길 때에야 회개가 가능합니다. 내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 없는 회개는 절망으로 통합니다. 믿음이 있고야 회개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나'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역시 인간의 '신념'일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의지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신앙과 신념을 혼동하는 일이 있습니다. '신념이 중요하다'라고 곧잘들 말합니다. '확신이 있어야 한다'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확신 곧 확실한 믿음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확신'과 '확실한 믿음'은 엄연히 다릅니다. 확신은 인간의 의지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참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수락하는 마음이 참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영접하는 마음이 곧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내용을 내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너는 내 자녀다, 내가 너를 용서했다'라고 하시는 말씀이 들리는 순간에 '용서받았다'하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나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조금도 거침없이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곧 믿음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라고, 믿는다는 것과 영접한다는 것을 같은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요한 신앙'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저러한 믿음, 저러한 회개에서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회개와 믿음을 위하여 이루어지는 생명의 역사(役事)--이것이 중생(衆生)곧 거듭남입니다. 중생은 회개와 믿음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회개와 믿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생명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때로 믿음, 회개, 중생을 따로따로 떼어서 생각하다보니 어려워집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 역사가 한 측면에서 보니 믿음이요 다른 측면에서 보니 회개요 또 다른 측면에서 보니 중생입니다. 이렇게 입체적으로 파악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이 곧 중생입니다.
신비로우면서 전인적(全人的)인 것입니다. 인간 지식 밖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사역입니다. 재창조의 역사입니다. 몸으로는 이미 태어났지만 영으로는 중생한 그 순간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 주도적인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 주도적인 사역입니다. God in action이요 God's initiative입니다. 전적으로 그러합니다. 구월의 문제는 여기서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여기서 '본다'라는 것이 헬라어 원문으로는 '안다'라는 말도 됩니다. 사람이 중생하지 않고는 하나님나라를 알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씀이 됩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중생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중생이 구원의 절대조건인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마가․누가의 세 복음서를 가리켜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 부르고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은 '제4복음'이라고도 부릅니다.
마태․마가․누가 복음에는 비슷한 데와 같은 데가 많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는데, 이 세 복음서에는 '중생'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용어가 다릅니다. 앞서 말한대로 중생은 하나님 주도적인 구원의 사역입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어떤 말로 표현하느냐 하는 것은 문화적 여건, 지식의 여건에 따라 다르게 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또다른 구원의 조건이 있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와 같아지는 것---이것이 구원의 조건인 것입니다. 이것이 곧 회개요 믿음이요 겸손이요 중생인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아진다는 것과 중생은 같은 말인 것입니다. 중생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요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는 마음이 곧 믿음인 것입니다. 구원은 여기서 이루어진다 하심입니다.
중생(衆生)은 단위적인 것입니다. '중생'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중생'은 사도 요한의 전용어입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이 '중생'이라는 말은 몇 군데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과 23절의 두 곳에 "거듭나게 하사(아나겐나오)"라는 표현이 있고, 디도서 3장 5절에 "중생(팔리게네시아)의 씻음과……"라는 표현이 있으며, 요한복음에는 단 두 번, 3장 3절과 7절에 "거듭나지 아니하면" "거듭나야 하겠다"라고 부사(副詞)용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겐네데 아노센(is born from above)'입니다. 탄생 곧 '생명의 시작'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위로부터(from above)' 태어남--이것이 중생인 것입니다. 하늘로부터입니다.
우리가 중생의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에 나타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곧 이스라엘사람들의 선민사상(選民思想)과 연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민'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인간의지로 말미암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중생의 교리를 파악하기가 한결 쉬워질 것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1절)"--주님께서는 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입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니고데모는 주님께 "이상한 말씀도 다 하십니다" 하는 표정으로 여쭙니다. 이에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5~7절)."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세리가 주님 앞에 왔을 때에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간음하다 붙들려온 여인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더러운 여자야, 중생하라"하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네가 중생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하시지 않았습니다. 세리 마태가 주님을 따를 때에도, 삭개오한테도 너는 중생해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구원이 너희 집에 임하였느니라"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이미 중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회개하고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구원이 너희 집에 임하였느니라"라고 다정스럽게 말씀하셨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에게는 조건을 다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여러분, 과연 중생이란 무엇입니까? 니고데모야말로 체면이 많은 사람입니다. 고관이요 부자요 지성인이요 종교적인 사람이요 바리새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뵈어야 할 줄은 알면서도 낮에 오지를 못하고 밤에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좋지 못한 별명을 가지셨기에 예수님과 가까이하다가는 자신의 명예에 누가 될까봐 밤을 타 몰래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이렇듯 니고데모는 교만한 사람이요 거만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밤에 몰래 혼자서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하는 이야기도 보십시오. 그 첫인사가 참으로 깁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절)." 이렇듯 그 인사가 깁니다. 그러나 긴말치고 진실인 경우가 없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수상한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로 할말이 있다면 '주여,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라고 단번에 여쭈어야지, 죄인이 주님 앞에 나오면서 뭐 그리 말이 많습니까? 거창하게 '예수님 어쩌고……' 하는데, 다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이런 인사치레가 예수님의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위에도 보면 중생해야 할 사람이 많습니다. 믿기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자기가 제일인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체면에 매여 교회까지 와서 수준 낮은 사람이 옆에 앉으면 기분이 나쁘다느니, 어디를 갔더니 거기 모인 사람들이 나하고는 영 수준이 맞지 않는다느니…… 이런 소리나 하고 앉았습니다. 다 건방진 소리입니다. 가졌으면 얼마나 가졌고, 알면 얼마나 압니까?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이런 거추장스럽고 쓸데없는 자기 체면에 매여 좀처럼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중생입니다. 한마디로 옷 벗어버리는 것이 중생입니다. '입고 있는 옷을 깨끗하게 벗어버려라'--이것이 니고데모에게 꼭 필요했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무슨 하늘나라를 가겠습니까?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그 많은 날 교회에 다니면서도 하늘나라 못보고, 중생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중생 못한 교인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그 사람들은 아직도 체면, 위신에 매여 어느 학교 출신인지, 공부는 어느 정도 했는지, 심지어는 초등학교 때에 우등생이었던 것까지 별스럽게 자랑하고 다닙니다. 여러분, 초등학교 시절에 100점 맞았노라고 하는데 그 때 100점 안 맞아본 사람도 있답니까? 별 시시한 것을 잔뜩 머리에 이고 앉아서는 이것 때문에 성경을 바로 읽지 못합니다. 누구에게 한번 제대로 인사하지를 못합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나 불쌍해요? 이런 사람들을 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부부간에도 그렇습니다. 20년 30년을 부부로 살면서 아직껏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네가 크냐 내가 크냐, 네 족보가 좋으냐 내 족보가 좋으냐, 네가 공부 잘했냐 내가 공부 잘했냐를 따지느라 불행한 부부들이 있습니다. 사실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데, 이런 사소한 다툼 때문에 행복하지를 못합니다. 한번도 진실된 사랑을 받아보지도, 해보지도 못했습니다. 얼마나 시시한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 역시 오늘 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거듭나야만, 중생해야만 할 것입니다.
또한, 중생은 신기원적(新紀元的)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에 있던 것이 발전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데서 더 알고, 가진 데서 더 가지고, 가던 데서 더 새롭게 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원점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생이란 신기원적인 것입니다. 생각도 못해봤고, 느껴보지도 못했고, 들어보지도 못했던, 체험 한번 해보지 못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가끔 보면 안믿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는 '예수 믿는 것이란' '교회란 무엇을 하는 곳인가' '기독교인이란' 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심지어는 "교인이 이렇게 많은데 왜 우리 나라가 이 모양입니까?"라고 대놓고 질타하는데, 그분들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다 잘못된 현상입니다.
중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자세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교회를 논하는 것은 더욱 불손한 행동입니다.
중생이란 의식 이전의 일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8절)"-중생은 의식 이전의 일로 본인조차도 그것을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혹시 어머니 젖을 먹던 것이 기억납니까?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5살까지 젖을 먹은 사람일 것입니다. 어머니들이 자식에게 '내가 젖을 먹여가며 너를 키웠노라' 합니다마는, 말짱 헛일입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봤댔자 본인은 기억이 안나니까요. 사람은 네 살 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간혹 세 살 때의 일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예외입니다.
어렸을 때의 일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부모님이 자식에게 '내가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뉘며 너를 키웠노라' 한들 알 수 있나요? 기억이 나지 않는걸요.
기억은 네 살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의식이 발달하기 때문입니다. 그 전의 일은 잠재의식에 속하거든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네 살 이전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네 살 이전에 받은 사랑이 진짜 사랑이 아닙니까? 어머니가 열 달 동안 나를 뱃속에 품고 다닌 것이야말로 진짜 사랑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생명을 물려받은 것입니까? 어머니가 산부인과에서 죽을 고생을 했기에 내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렇듯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 네 살 이전에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기억은 하나도 안나거든요. 전혀 모르고들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느니 안 하느니 불평이나 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의식 이전의 일입니다. 생명의 신비로운 중생의 역사는 의식 이전의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똑똑해서인지 '나는 몇월 며칠에 중생했노라'고 떠듭니다마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보다 중생의 역사가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중생의 역사가 의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의식된 날로부터 중생을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8절)"----이 말씀은 헬라어 원문대로 보면 "텔레이 프네이 토 푸슈마"입니다. 영이 임의로, 자의로 분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내게 나타나는 것을 내가 의식할 수는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언젠가 붙들렸습니다. 나도 모르게 언젠가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임하셨습니다. 나도 모르게 언젠가부터 다른 마음, 다른 기쁨, 다른 감정, 다른 지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내가 체험했다'라는 말을 합니다. 체험이란 의식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는 의식 이전의 일입니다. 의식보다 먼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너무 지식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열심히 성경공부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나의 마음을 열어주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이 나의 마음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공부되지 않습니다.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그 많은 날 교회 다녀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실 때에 보면 성경 구절 구절이 전부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와 닿습니다. 설교말씀이 전부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와 닿습니다.
시간 시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느껴집니다. 말씀 그대로 믿어지고 깨달아지고 받아들여짐으로, 그 말씀에 내 생명과 운명을 위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비로운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두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해서 사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자기가 자기 마음도 못 믿는 세상인데 어느 남자의 마음을 믿겠습니까? 어느 여자의 마음을 믿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생을 같이하기로 약속을 하고 결혼을 합니다. 이를 두고 재미있게 쓴 글이 있습디다. 거기에 보니 '한번 실수해야 결혼을 할 수 있다'라고 씌어 있더군요. 보십시오.
'저 남자와 일생을 살겠다, 저 남자에게 내 운명을 맡기겠다'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이 바로 실수하는 순간입니다. 제정신 가지고 하는 생각이 아니거든요. 홀렸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내 의지가 아닙니다. 무엇엔가 붙들린 것입니다. 그래서 인지 대개 나이가 들어 노처녀 노총각이 되면 결혼하기가 힘들어집니다. 말짱하게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놈을 믿고 살아'라고 말짱하게 생각하기에 시집 못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철이 없을 때에 그냥 화끈해 가지고 정신없이 한 사람에 매여 '저 사람 아니면 죽는다' 할 정도가 되어야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정신나간 사람이지 제 정신입니까? 사랑도 그러고 보면 내 마음대로 한 것 같아도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결혼주례를 할 때면 늘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당신 둘이 같이 살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심으로 된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가르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셨다고 하는 믿음 위에 세워진 결혼이어야 합니다. '죽자고 따라다니니까 내가 결혼해줬지'라는 마음을 품고야 무엇이 되겠습니까? 이래서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중생의 역사는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사랑이 의식 이전 일이듯, 중생의 역사는 훨씬 더 깊은, 의식 이전의 일입니다. 나도 모르게 어느 때에 벌써 믿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어느 때에 회개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어느 때에 회개의 눈물이 나왔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내가 뉘우치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심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절망하고 서러워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중생한 자의 세계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중생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길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중생 ---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 놀라운 신비의 역사가 우리 생의 절대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주님 안에서 영적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기 정체의식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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