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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인간성 회복의 길(로마서 8장 1절~11절)

by 【고동엽】 2022.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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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 회복의 길(로마서 811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늑대와 춤을--- 한때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한 영화의 제목입니다. Dances with Wolves라는 이 원제는 아메리칸 인디언 추장이 주인공인 백인 군인에게 붙여준 별명에서 따온 말입니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가면 노을이 붉게 물든 저녁 어스름에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아메리칸 인디언 부락을 쳐들어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오랫동안 살던 거처를 버리고 멀리 산 속으로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활과 창으로 총을 대항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수() 또한 중과부적입니다. 하는 수 없이 산으로 피난을 갑니다. 그런데 추장과 절친하게 지내오던 백인 군인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노을이 붉게 물든 그 저녁, 헤어지는 장면에서 추장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한마디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좋은 방법은 진정한 인간으로 사는 것입니다"--문명인 백인을 향한 뜻깊은 충고의 말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자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문명도, 지식도, 권력도 아닙니다. 진정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가장 귀중한 세상살이의 방법인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사는 모습들을 봅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비인간적 처우에 대한 반항이 아닙니다.

고통과 번민에 대한 다툼도 아닙니다.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음식이 몸에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먹습니다. 어떤 행동이 나를 망치고 가정을 망치고 나라도 세계도 망치고 만다는 것을 잘 들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동을 합니다. 누구보다도 똑똑하면서, 멸망의 길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무책임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살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답게 살기를 포기했습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방탕하고, 그래서 폭력을 휘두르고, 갖은 못된 짓을 서슴지 않는 것입니다. 절망과 죄악, 참으로 문제입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의 소외를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바 있습니다. 현대인이 다섯 가지 경우에서 소외됨으로써 비인간화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노동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창조적 행위에 참여함으로써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화초 하나도 창조주의 섭리에 감사하며 가꾸어야 합니다. 농사를 짓는 것도, 공장에서 제품을 만드는 것도 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해야 합니다. 수고하는 가운데 창조적 능력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창작자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창조에 가담한 기쁨으로 즐겁게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모두가 생활수단의 일환입니다. 먹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좀더 잘살기 위하여 일합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하는 것일 뿐입니다. 노동 자체의 의미가 변질됨으로써 인간이 비참해졌습니다. 노동이 한낱 생활수단이 된 것입니다.

둘째로, 생산과 소비의 과정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생산자가 소유자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자동차 공장에서 몇 십 년을 일했는 데도 내 자동차는 없습니다. 모두 남의 자동차일 뿐입니다. 예컨대 여기 계신 자매 님들이 가정에서 맛있는 음식을 정성껏 만들었다고 합시다. 만들었으면 같이 식탁에 앉아서 먹어야 합니다. 만들어 대령하기만 하고 자신은 부엌에서 누룽지나 먹어야 한다면 살 재미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인간일 수 없습니다. 오늘의 사회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각기 따로 존재합니다. 생산의 감격도 소비의 기쁨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점점 비인간화되어간다는 말입니다.

셋째로, 공동체로부터의 소외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가정이라는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한 가정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사실이 즐겁고 자랑스러워야 합니다. 나아가 학교도 직장도 교회도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속해 있는 이 공동체가 나를 기쁘게 하고 있습니까? 한 공동체의 일원이 됨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합니다. 남편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십시다. 식구들을 벌어 먹이기가 힘듭니다. '내가 왜 결혼을 했던가' '아이는 왜 낳았던가'--마침내 후회합니다. 가정이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짜증나고 원망스럽습니다. 인간됨이 점차로 사라집니다.

넷째로, 이웃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사람 만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이제 사람 만나기가 무섭습니다. 두려워졌습니다. 실례의 말씀입니다 마는 제가 교회 사무실에 있느라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어서 오십시오'하며 맞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늘 기도합니다마는 그렇게 하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좋은 일로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뭣좀 달라고 오는가 하면 팔아달라고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나는 것이 반갑지를 않습니다. 도망가고 싶습니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웃을 수단화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보기 때문입니다. 내게서 덕을 보려 하고 내게서 얻어가려 하는 사람들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웃과의 관계가 수단화할 때에 불신이 싹트고 불편하게 됩니다. 이웃이 거추장스럽습니다. 이리하여 나의 존재는 점점 변질되어갑니다.

다섯째로, 자신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가정이다 직장이다 사회다 하다보니 내가 없어졌습니다. 내가 실종되었습니다. 웃고 우는 것도 내 마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이끌리어 같이 기뻐하고 같이 분노하고 같이 걱정합니다. 감정도 더는 내것이 아닙니다. 나의 존재가 없어진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이 주체성을 상실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소외된 인간은 비인간화합니다. 인간의 본질로부터 전락합니다. 버려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고아 의식은 평안치가 않습니다.

어머니를 찾는 아이에게 어머니 아닌 아무리 좋은 다른 것을 준들 아이가 행복하겠습니까? 탕자는 영원히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집을 나갔다가 탕자가 되어 돌아옵니다 마는 만일에 출세하여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잘살 수 있었을지라도 그는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사람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아들 되기를 포기한 사람은 영원히 행복할 수 없습니다. 고아 의식, 탕자 의식 속에 인간은 비인간화하고 마침내 자기의 자기됨을 포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는 것이 짜증스럽게 됩니다.

절망감과 허무감에 빠집니다.

인간화의 길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아마도 물질일 거야, 부자가 되면 나아지겠지' 합니다. 이제 부자가 되어보십시다. 생각대로 됩니까? 언젠가 저는 어느 재벌 부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아주 어렵게 살았다고 합니다. 너무도 가난하여 죽 한 그릇으로 아침을 때워야 합니다. 남편과 둘이 마주 앉아서는 서로 더 먹으라고 권합니다. 아내는 '하루종일 밖에 나가서 일해야 하니 한술 더 뜨세요'합니다. 또 남편은 '아이들에게 시달릴 텐데 당신이 더 먹구려'합니다. 서로를 위하여 양보하고 권합니다. 그러한 사랑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십시오. 재벌이 되었답시고 남편을 남의 사람으로 내어준 지가 언제적 일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열흘에 한 번도 얼굴 보기가 힘듭니다. 여러분,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십시다. 가난하여 어렵게 살기는 했습니다마는 그런 대로 사랑이 있고 행복했던 지난 시절입니다. 오늘에 와서는 좀 살만하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행복해졌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제도를 바꾸어보고 지식을 더해봅니다. 평등사회다 복지국가다 운운합니다. 우리는 아직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마는 먼저 도달한 사람들이 이미 다 경험했습니다. 소위 선진국에 더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더 불행합니다. 할 일이 없어서 자살합니다. 아편, 마약, 폭력을 일삼습니다. 심심해서 이혼을 합니다.

도덕적 타락과 인간성의 타락이 이제 막바지까지 온 느낌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공부 많이 했다고 인간이 됩니까? 개꼬리는 3년을 묻어두어도 개꼬리일 뿐입니다.

황모(黃毛)가 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재력이나 지위와도 상관없는 것이 사람됨입니다. 사람됨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된 인간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영이 그 이성을 지배하고 이성이 육체를 지배하여 온전한 인격을 이룰 때에 비로소 사람입니다. 인간을 세 부류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첫째는 육체주도적 인간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체와 이성과 영이 있습니다마는 그 가운데 육체가 주도하는 사람을 말함입니다. 생리학적 인간이라고도 합니다. 모든 것이 육체적 욕망에 지배됩니다. 싸움과 분노와 원망이 모두 육체적인 것입니다. 육체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곧 감정이 주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철학적 인간입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합니다. 이성이 주도합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매사에 냉정한 판단을 내립니다. 그러나 영성이 없는 이성은 절망과 허무주의로 빠지게 마련입니다. 똑똑한 나머지 앞서 생각한다는 것이 다 쓸데없다는 것입니다. 영성이 없는 도덕성도 문제입니다. 인간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셋째는 영 주도적 인간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세웁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이성을 지배하고 도덕성을 지배하고 육체를 지배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인간인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육신에 있는 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곧 육체에 거한다는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육체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헬라 원문대로 보면 전자는 '살키노스,' 후자는 '살키코스'입니다.

먼저 '살키노스(;of the flesh)'를 보십시다.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 안에 있습니다. 육체와 함께 있습니다. 아무도 부인할 수가 없는 사실입니다. 육체를 지배하여 삽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고 영이 육체를 지배합니다. 이것이 바른 관계입니다. 다음으로 '살키코스(;carnal-minded)'를 보십시다. 혈과 정욕, 곧 인간의 욕망이 정신도 영도 마음도 다스리고 있습니다.

정욕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을 가리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결혼 주례를 많이 합니다. 결혼하는 당사자들이야 일생을 통하여 단 한 번뿐입니다 마는 저는 1년이면 거의 3백 번쯤은 주례를 해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참 문제입니다. 그건 그렇고 두 사람이 식을 마친 후 팔짱을 끼고 돌아서 걸어나가는 것을 보느라면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제발 무사히 살아다오'--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좀더 깊은 데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거반 대학을 마치고 공부도 많이 해서 똑똑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전에는 한동안 살다가야 권태기라는 것을 맞고는 했습니다만 요새 사람들은 첫날밤부터 문제라고 합니다. 결혼식이 끝나는 동시에 시작됩니다. 주도권 쟁탈이 그것입니다. 결혼 전에 못된 친구들이 사람을 버려놓아서 그렇습니다. 신랑 친구들은 신랑에게 단단히 이릅니다. "정신차려라. 처음부터 여자를 꽉 잡아야 한다. 사흘에 한 번씩 치는 한이 있더라도 꽉 잡아야지 한 번 놓치면 평생 공처가 신세 못 면할 것이다"--초반에 '기강'을 확실히 잡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가하면 신부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란 여자가 길들이기 나름이다. 처음에 이것저것 다 해주면 평생 꼼짝 못하고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처음부터 확실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래서 두 사람은 첫날부터 전쟁을 벌입니다. 팽팽하게 맞섭니다.

종국에는 다 없어지고 다 망하는 줄도 모르고 피가 나도록 싸웁니다. 종전이 되기는 합니다마는 그때는 이미 하나는 죽고 하나만 살아 있습니다. 하나는 노예로 전락하고 하나는 폭군이 된 것입니다. 어느 쪽이 되든 이것을 올바른 가정이랄 수 있겠습니까? 어쩌다 이렇게 된 것입니까?

주도권 때문입니다. 가진들 어떠하고 못 가진들 어떠합니까? 어떤 부인은 자랑삼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제 남편이 저를 3년 동안 졸졸 따라다니면서 결혼해 달라고 사정하여 하는 수없이 결혼해 주었지요." 자랑삼아 떠벌립니다마는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 너절한 남자와 평생을 사니 당신은 참으로 한심하오'하는 생각이 듭니다. 안산다면 몰라도 그런 남자와 살아온 자신은 뭐가 그리 대단합니까? 그 얼마나 망신스러운 소린지, 왜 모르는 것입니까? 남편이 훌륭하면 그 아내도 덩달아 훌륭해집니다. 남편을 깎아 내려놓고 자신이 왕 됩니까?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주도권을 포기하십시오. 오늘로써 주도권 쟁탈에서 완전히 물러나십시오. 이스라엘사람들의 격언 가운데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네 남편을 임금처럼 높여라. 그러면 너를 여왕처럼 사랑할 것이다. 만일 네가 네 남편을 종으로 부리려 들면 네 남편은 네게 폭군이 되리라.' 참으로 의미 깊은 말입니다. 주도권을 깨끗이 포기하는 날, 그날로부터 사랑과 행복이 넘칠 것입니다.

마음속에 번민이 있습니다. 갈등과 고민이 많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영적인 것이냐 육적인 것이냐, 하나님의 뜻이냐 나의 뜻이냐--주도권 싸움 때문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주도권을 깨끗이 반납하는 그 순간에 여러분은 비로소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비로소 큰 은혜 안에 살아갈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느 효자는 매사를 아버지에게 묻는다고 합니다. 큰 일은 물론 자그마한 일에까지 '어떻게 할까요?'라고 묻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하라'하면 그대로 따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네 마음대로 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주도권을 반납할 때에 나의 주도권이 확립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기독교인의 4대 자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가 누리는 자유 만큼 인간됨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철학적 자유, 육체적 자유, 경제적 자유, 정치적 자유--이 모든 자유의 근본은 영적인 자유입니다. 기독교인의 4대 자유란 곧 진노로부터의 자유,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사망 권세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근본적인 자유를 소유한 자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만이 인간다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대조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6-8)"--영으로 살 때에만 생명과 평안과 참 자유를 누린다고 누누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참인간의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 병사들이 미국 포로들을 죽이기는 해야 하겠는데 총알이 없었습니다.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다가 마지막으로 생각해낸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서로 죽이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기차간에 포로들을 다 집어넣고 며칠을 굶긴 다음 빵 하나를 던져주기로 했습니다. 서로 먹겠다고 싸우다보면 살인이 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며칠을 굶긴 후 빵을 하나 던졌습니다. 한 병사가 받았습니다. 서로 먹겠다고 달려듭니다 마는 그 순간 이 병사는 빵을 높이 들고 소리칩니다.

"성찬식을 합시다. 다같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 모두들 숙연해졌습니다. 인간됨이 이에 있지 않습니까? 미국의 한 유명한 교회에 젊은 목사가 있었습니다. 공명심에 사로잡혀서 성직을 버리고 정계로 나가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야심적인 활동을 펼쳐나갑니다. 본심은 아니었지만 신앙이 점점 박약해지고 교회와 멀어지게 됩니다. 친구들이 충심으로 충고합니다. 만나서 대화하는가 하면 편지로 권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 물리치고 사회적 명성과 정치적 권력으로 큰 역사를 이루어 보겠다고 세상으로 나간 것입니다. 마침내 불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만취되어 집으로 돌아오자 3살난 귀여운 딸아이가 쪼르르 따라오더니 말합니다. "아빠, 저 글 읽을 줄 알아요." "그래? 한번 읽어보려무나." 딸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조그마한 성경책을 펴들고 읽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박또박 읽고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마는 이게 웬일입니까? 아버지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흐릅니다. 견디다못한 그는 딸을 물리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한참이나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비록 이 처지에 있지마는 진정 주를 사랑합니다'--회개하고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으로 사람되게 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환경을 바꾸면 될 것 같습니까? 사람이 사람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감동해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성령이 귀를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고, 성령이 눈을 열어서 십자가를 똑바로 쳐다보게 할 때에 비로소 사람되는 것입니다. 인간화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 나를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 나를 위하여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감동이 있을 때에 비로소 새롭게 태어납니다. 성령으로 중생하고 성령으로 심화되고 성령이 충만할 때에 용기의 사람, 능력의 사람, 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스가랴 46절에서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나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높고 놀라운 기적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

 

인간성 회복의 길(로마서 811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늑대와 춤을--- 한때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한 영화의 제목입니다. Dances with Wolves라는 이 원제는 아메리칸 인디언 추장이 주인공인 백인 군인에게 붙여준 별명에서 따온 말입니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가면 노을이 붉게 물든 저녁 어스름에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아메리칸 인디언 부락을 쳐들어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오랫동안 살던 거처를 버리고 멀리 산 속으로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활과 창으로 총을 대항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수() 또한 중과부적입니다. 하는 수 없이 산으로 피난을 갑니다. 그런데 추장과 절친하게 지내오던 백인 군인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노을이 붉게 물든 그 저녁, 헤어지는 장면에서 추장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한마디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좋은 방법은 진정한 인간으로 사는 것입니다"--문명인 백인을 향한 뜻깊은 충고의 말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부자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문명도, 지식도, 권력도 아닙니다. 진정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가장 귀중한 세상살이의 방법인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사는 모습들을 봅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비인간적 처우에 대한 반항이 아닙니다.

고통과 번민에 대한 다툼도 아닙니다.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음식이 몸에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먹습니다. 어떤 행동이 나를 망치고 가정을 망치고 나라도 세계도 망치고 만다는 것을 잘 들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동을 합니다. 누구보다도 똑똑하면서, 멸망의 길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무책임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살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답게 살기를 포기했습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방탕하고, 그래서 폭력을 휘두르고, 갖은 못된 짓을 서슴지 않는 것입니다. 절망과 죄악, 참으로 문제입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의 소외를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바 있습니다. 현대인이 다섯 가지 경우에서 소외됨으로써 비인간화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노동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창조적 행위에 참여함으로써 기쁨을 얻어야 합니다. 화초 하나도 창조주의 섭리에 감사하며 가꾸어야 합니다. 농사를 짓는 것도, 공장에서 제품을 만드는 것도 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해야 합니다. 수고하는 가운데 창조적 능력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창작자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창조에 가담한 기쁨으로 즐겁게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모두가 생활수단의 일환입니다. 먹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좀더 잘살기 위하여 일합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하는 것일 뿐입니다. 노동 자체의 의미가 변질됨으로써 인간이 비참해졌습니다. 노동이 한낱 생활수단이 된 것입니다.

둘째로, 생산과 소비의 과정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생산자가 소유자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자동차 공장에서 몇 십 년을 일했는 데도 내 자동차는 없습니다. 모두 남의 자동차일 뿐입니다. 예컨대 여기 계신 자매 님들이 가정에서 맛있는 음식을 정성껏 만들었다고 합시다. 만들었으면 같이 식탁에 앉아서 먹어야 합니다. 만들어 대령하기만 하고 자신은 부엌에서 누룽지나 먹어야 한다면 살 재미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인간일 수 없습니다. 오늘의 사회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각기 따로 존재합니다. 생산의 감격도 소비의 기쁨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점점 비인간화되어간다는 말입니다.

셋째로, 공동체로부터의 소외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가정이라는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한 가정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사실이 즐겁고 자랑스러워야 합니다. 나아가 학교도 직장도 교회도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속해 있는 이 공동체가 나를 기쁘게 하고 있습니까? 한 공동체의 일원이 됨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합니다. 남편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십시다. 식구들을 벌어 먹이기가 힘듭니다. '내가 왜 결혼을 했던가' '아이는 왜 낳았던가'--마침내 후회합니다. 가정이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짜증나고 원망스럽습니다. 인간됨이 점차로 사라집니다.

넷째로, 이웃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사람 만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이제 사람 만나기가 무섭습니다. 두려워졌습니다. 실례의 말씀입니다 마는 제가 교회 사무실에 있느라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어서 오십시오'하며 맞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늘 기도합니다마는 그렇게 하지 못 할 때가 많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좋은 일로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뭣좀 달라고 오는가 하면 팔아달라고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나는 것이 반갑지를 않습니다. 도망가고 싶습니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웃을 수단화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보기 때문입니다. 내게서 덕을 보려 하고 내게서 얻어가려 하는 사람들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웃과의 관계가 수단화할 때에 불신이 싹트고 불편하게 됩니다. 이웃이 거추장스럽습니다. 이리하여 나의 존재는 점점 변질되어갑니다.

다섯째로, 자신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가정이다 직장이다 사회다 하다보니 내가 없어졌습니다. 내가 실종되었습니다. 웃고 우는 것도 내 마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이끌리어 같이 기뻐하고 같이 분노하고 같이 걱정합니다. 감정도 더는 내것이 아닙니다. 나의 존재가 없어진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이 주체성을 상실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소외된 인간은 비인간화합니다. 인간의 본질로부터 전락합니다. 버려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고아 의식은 평안치가 않습니다.

어머니를 찾는 아이에게 어머니 아닌 아무리 좋은 다른 것을 준들 아이가 행복하겠습니까? 탕자는 영원히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집을 나갔다가 탕자가 되어 돌아옵니다 마는 만일에 출세하여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잘살 수 있었을지라도 그는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사람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아들 되기를 포기한 사람은 영원히 행복할 수 없습니다. 고아 의식, 탕자 의식 속에 인간은 비인간화하고 마침내 자기의 자기됨을 포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는 것이 짜증스럽게 됩니다.

절망감과 허무감에 빠집니다.

인간화의 길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아마도 물질일 거야, 부자가 되면 나아지겠지' 합니다. 이제 부자가 되어보십시다. 생각대로 됩니까? 언젠가 저는 어느 재벌 부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아주 어렵게 살았다고 합니다. 너무도 가난하여 죽 한 그릇으로 아침을 때워야 합니다. 남편과 둘이 마주 앉아서는 서로 더 먹으라고 권합니다. 아내는 '하루종일 밖에 나가서 일해야 하니 한술 더 뜨세요'합니다. 또 남편은 '아이들에게 시달릴 텐데 당신이 더 먹구려'합니다. 서로를 위하여 양보하고 권합니다. 그러한 사랑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십시오. 재벌이 되었답시고 남편을 남의 사람으로 내어준 지가 언제적 일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열흘에 한 번도 얼굴 보기가 힘듭니다. 여러분,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십시다. 가난하여 어렵게 살기는 했습니다마는 그런 대로 사랑이 있고 행복했던 지난 시절입니다. 오늘에 와서는 좀 살만하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행복해졌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제도를 바꾸어보고 지식을 더해봅니다. 평등사회다 복지국가다 운운합니다. 우리는 아직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마는 먼저 도달한 사람들이 이미 다 경험했습니다. 소위 선진국에 더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더 불행합니다. 할 일이 없어서 자살합니다. 아편, 마약, 폭력을 일삼습니다. 심심해서 이혼을 합니다.

도덕적 타락과 인간성의 타락이 이제 막바지까지 온 느낌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공부 많이 했다고 인간이 됩니까? 개꼬리는 3년을 묻어두어도 개꼬리일 뿐입니다.

황모(黃毛)가 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재력이나 지위와도 상관없는 것이 사람됨입니다. 사람됨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된 인간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영이 그 이성을 지배하고 이성이 육체를 지배하여 온전한 인격을 이룰 때에 비로소 사람입니다. 인간을 세 부류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첫째는 육체주도적 인간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체와 이성과 영이 있습니다마는 그 가운데 육체가 주도하는 사람을 말함입니다. 생리학적 인간이라고도 합니다. 모든 것이 육체적 욕망에 지배됩니다. 싸움과 분노와 원망이 모두 육체적인 것입니다. 육체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곧 감정이 주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철학적 인간입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합니다. 이성이 주도합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매사에 냉정한 판단을 내립니다. 그러나 영성이 없는 이성은 절망과 허무주의로 빠지게 마련입니다. 똑똑한 나머지 앞서 생각한다는 것이 다 쓸데없다는 것입니다. 영성이 없는 도덕성도 문제입니다. 인간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셋째는 영 주도적 인간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세웁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이성을 지배하고 도덕성을 지배하고 육체를 지배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인간인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육신에 있는 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곧 육체에 거한다는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육체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헬라 원문대로 보면 전자는 '살키노스,' 후자는 '살키코스'입니다.

먼저 '살키노스(;of the flesh)'를 보십시다.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 안에 있습니다. 육체와 함께 있습니다. 아무도 부인할 수가 없는 사실입니다. 육체를 지배하여 삽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고 영이 육체를 지배합니다. 이것이 바른 관계입니다. 다음으로 '살키코스(;carnal-minded)'를 보십시다. 혈과 정욕, 곧 인간의 욕망이 정신도 영도 마음도 다스리고 있습니다.

정욕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을 가리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결혼 주례를 많이 합니다. 결혼하는 당사자들이야 일생을 통하여 단 한 번뿐입니다 마는 저는 1년이면 거의 3백 번쯤은 주례를 해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참 문제입니다. 그건 그렇고 두 사람이 식을 마친 후 팔짱을 끼고 돌아서 걸어나가는 것을 보느라면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제발 무사히 살아다오'--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좀더 깊은 데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거반 대학을 마치고 공부도 많이 해서 똑똑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전에는 한동안 살다가야 권태기라는 것을 맞고는 했습니다만 요새 사람들은 첫날밤부터 문제라고 합니다. 결혼식이 끝나는 동시에 시작됩니다. 주도권 쟁탈이 그것입니다. 결혼 전에 못된 친구들이 사람을 버려놓아서 그렇습니다. 신랑 친구들은 신랑에게 단단히 이릅니다. "정신차려라. 처음부터 여자를 꽉 잡아야 한다. 사흘에 한 번씩 치는 한이 있더라도 꽉 잡아야지 한 번 놓치면 평생 공처가 신세 못 면할 것이다"--초반에 '기강'을 확실히 잡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가하면 신부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란 여자가 길들이기 나름이다. 처음에 이것저것 다 해주면 평생 꼼짝 못하고 노예처럼 살아야 한다"--처음부터 확실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래서 두 사람은 첫날부터 전쟁을 벌입니다. 팽팽하게 맞섭니다.

종국에는 다 없어지고 다 망하는 줄도 모르고 피가 나도록 싸웁니다. 종전이 되기는 합니다마는 그때는 이미 하나는 죽고 하나만 살아 있습니다. 하나는 노예로 전락하고 하나는 폭군이 된 것입니다. 어느 쪽이 되든 이것을 올바른 가정이랄 수 있겠습니까? 어쩌다 이렇게 된 것입니까?

주도권 때문입니다. 가진들 어떠하고 못 가진들 어떠합니까? 어떤 부인은 자랑삼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제 남편이 저를 3년 동안 졸졸 따라다니면서 결혼해 달라고 사정하여 하는 수없이 결혼해 주었지요." 자랑삼아 떠벌립니다마는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런 너절한 남자와 평생을 사니 당신은 참으로 한심하오'하는 생각이 듭니다. 안산다면 몰라도 그런 남자와 살아온 자신은 뭐가 그리 대단합니까? 그 얼마나 망신스러운 소린지, 왜 모르는 것입니까? 남편이 훌륭하면 그 아내도 덩달아 훌륭해집니다. 남편을 깎아 내려놓고 자신이 왕 됩니까?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주도권을 포기하십시오. 오늘로써 주도권 쟁탈에서 완전히 물러나십시오. 이스라엘사람들의 격언 가운데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네 남편을 임금처럼 높여라. 그러면 너를 여왕처럼 사랑할 것이다. 만일 네가 네 남편을 종으로 부리려 들면 네 남편은 네게 폭군이 되리라.' 참으로 의미 깊은 말입니다. 주도권을 깨끗이 포기하는 날, 그날로부터 사랑과 행복이 넘칠 것입니다.

마음속에 번민이 있습니다. 갈등과 고민이 많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영적인 것이냐 육적인 것이냐, 하나님의 뜻이냐 나의 뜻이냐--주도권 싸움 때문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주도권을 깨끗이 반납하는 그 순간에 여러분은 비로소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비로소 큰 은혜 안에 살아갈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느 효자는 매사를 아버지에게 묻는다고 합니다. 큰 일은 물론 자그마한 일에까지 '어떻게 할까요?'라고 묻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하라'하면 그대로 따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네 마음대로 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주도권을 반납할 때에 나의 주도권이 확립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기독교인의 4대 자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가 누리는 자유 만큼 인간됨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철학적 자유, 육체적 자유, 경제적 자유, 정치적 자유--이 모든 자유의 근본은 영적인 자유입니다. 기독교인의 4대 자유란 곧 진노로부터의 자유,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사망 권세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근본적인 자유를 소유한 자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만이 인간다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대조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6-8)"--영으로 살 때에만 생명과 평안과 참 자유를 누린다고 누누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참인간의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 병사들이 미국 포로들을 죽이기는 해야 하겠는데 총알이 없었습니다.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다가 마지막으로 생각해낸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서로 죽이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기차간에 포로들을 다 집어넣고 며칠을 굶긴 다음 빵 하나를 던져주기로 했습니다. 서로 먹겠다고 싸우다보면 살인이 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며칠을 굶긴 후 빵을 하나 던졌습니다. 한 병사가 받았습니다. 서로 먹겠다고 달려듭니다 마는 그 순간 이 병사는 빵을 높이 들고 소리칩니다.

"성찬식을 합시다. 다같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 모두들 숙연해졌습니다. 인간됨이 이에 있지 않습니까? 미국의 한 유명한 교회에 젊은 목사가 있었습니다. 공명심에 사로잡혀서 성직을 버리고 정계로 나가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야심적인 활동을 펼쳐나갑니다. 본심은 아니었지만 신앙이 점점 박약해지고 교회와 멀어지게 됩니다. 친구들이 충심으로 충고합니다. 만나서 대화하는가 하면 편지로 권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 물리치고 사회적 명성과 정치적 권력으로 큰 역사를 이루어 보겠다고 세상으로 나간 것입니다. 마침내 불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만취되어 집으로 돌아오자 3살난 귀여운 딸아이가 쪼르르 따라오더니 말합니다. "아빠, 저 글 읽을 줄 알아요." "그래? 한번 읽어보려무나." 딸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조그마한 성경책을 펴들고 읽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박또박 읽고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마는 이게 웬일입니까? 아버지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흐릅니다. 견디다못한 그는 딸을 물리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한참이나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비록 이 처지에 있지마는 진정 주를 사랑합니다'--회개하고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으로 사람되게 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환경을 바꾸면 될 것 같습니까? 사람이 사람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감동해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성령이 귀를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고, 성령이 눈을 열어서 십자가를 똑바로 쳐다보게 할 때에 비로소 사람되는 것입니다. 인간화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 나를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 나를 위하여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감동이 있을 때에 비로소 새롭게 태어납니다. 성령으로 중생하고 성령으로 심화되고 성령이 충만할 때에 용기의 사람, 능력의 사람, 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스가랴 46절에서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나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높고 놀라운 기적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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