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 목차로 돌아가기 |
신자의 생활 표본(롬12:1~13)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로마서 12장부터 16장까지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말씀 9절로 13절에서는 신앙생활, 즉 신자의 신앙생활 표본을 말씀합니다. 아주 항목적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때에는 왜 설명을 조금도 해주지 않나 싶기도 해요. 제가 어떤 책에서 읽었습니다마는 때때로 성경을 보면 설명이 부족해요. 요점만 딱 말하고 그 이상은 말씀을 안해요.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해주었으면 하는 대목에서 그래요. 그래 그렇게 누가 질문을 하니까 어느 교수의 대답이 "그래야 목사가 할 일이 있지"라고 합디다. 또 한 가지는 그 나머지는 자기가 해석하라는 거예요. 자기가 읽고,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해석하고, 읽고 또 생각하고 해석하고……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요점만 간결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해야 할 중요한 말씀은 다 했어요. 그런 것을 우리가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 생활의 표본을 열두 가지로 일러줍니다. Christian life의 paradigm, 그 중요한 표본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하나 생각해봅시다. 먼저는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9절)"합니다. 거짓이 없다는 말은 즉 성실하다는 말입니다. 참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지요. 참사랑이라면 거짓을 멀리할 수밖에 없어요. 그 성실성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진실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절대로 거짓이 함께 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문제는 '사랑은 감정이냐, 의지냐?'하는 것입니다. 거짓이 없다-이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예요. 그래서 늘 생각합니다. 사랑은 의지에 속한 것이에요. 또 성실이라는 것은 지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랑하고 내일 사랑 안하면 그것은 성실이 아니지요. 성실의 질적 특징은 시간적 지속성이에요. 꾸준한 것이에요.
변덕이 있는 것이 사랑이 아니에요. 그것은 욕정이에요. 사랑과 욕정은 달라요. 참사랑이라는 것은 변화가 없어요. 꾸준해요. 시작했다 하면 끝내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것이 성실한 것입니다. 지속성을 말씀함입니다. 변질되지 아니하고 끝까지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말씀합니다. 세상이 변하고, 대상이 변하고, 환경이 변해도 이 사랑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그것이 바로 거짓이 없다는 말의 뜻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사랑은 바로 외식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No hypocrites-절대로 위선적일 수가 없어요. 다시 말하면 겉과 속이 다를 수 없다는 말이에요. 사랑에 거짓이 없다-사랑은 겉과 속이 같다는 말이에요. 겉과 속이 다르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다면 거짓입니다. 사랑이 수단화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 따로 있고 뜻 따로 있다는 얘기예요.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겉과 속이 꼭 같을 때에만 사랑입니다. 사랑은 거짓될 수 없다, 사랑은 거짓이 없다는 거예요. 사랑은 형식적일 수 없는 것이에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사랑하면 주고 싶고, 사랑하면 참게 되고, 사랑하면 벌써 즐거워집니다.
어떻게 사랑을 속일 수 있습니까? 사랑이 어떻게 거짓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거짓된 사랑은 없을 뿐더러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 하는 말씀입니다.
또 사랑에 거짓이 없다는 말은 동기의 불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동기가 어디 있느냐-거짓된 사랑은 처음에는 좋은 동기로 시작되었다가 점점 시간이 갈수록 그 동기가 둔갑을 해요. 바뀐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드리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되고, 사랑함으로써 나는 기쁘다 했다가 그 다음에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다-이렇게 된다는 말이에요. 사랑이 기쁨이지 어떻게 슬픔이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다 동기가 변질되기 때문이에요. 사랑은 순수한 동기로 시작해서 성실하게 진행됩니다. 갈수록 깊어집니다. 갈수록 더 온전해집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동기가 순수하고 동기가 영원하다, 이것이 아가페다, 아가페의 사랑은 언제나 거짓이 없다 함입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라는 말씀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이렇습니다. 사랑이 성실하다는 말은 실천적이라는 말이에요. 실천해요. 사랑은 감성적인 것이 아니예요. 성실은 곧 실천으로 연결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재미있는 말을 했어요. 누군가 그에게 "사랑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사랑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고 대답했답니다. "사랑은 남을 돕는 손이 있다. 사랑은 궁핍한 자에게 달려가는 발이 있다. 사랑은 남의 슬픈 탄식과 괴로움을 들을 줄 아는 귀가 있다"--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랑하게 될 때에 봉사하게 됩니다. 사랑하게 될 때에 우리는 그를 찾아가게 됩니다. 만나게 됩니다. 또 사랑하게 될 때에 귀담아 듣게 됩니다. 오래 오래 들어요. 듣기 싫어지면 사랑이 아니에요. 흔히들 이렇게 말하지요? "말도 안돼"--그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하는 사람의 소리는 한없이 들어도 돼요. 저는 가끔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어떤 때에 보면 제 아내와 어머니, 그러니까 아내가 친정어머니와 꽤 늦게까지 얘기하더라고요. 밤새 이야기하는 것 같더라고요.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어요. 이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한없이 들어도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듣는 데에 성실해요. 억지로 들어주는 게 아니예요. 재미있어서 듣는 거예요.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랑엔 거짓이 없다고 성경은 확실하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9절)"-이것이 두 번째 생활표본입니다. 악을 미워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악의 결과는 미워하고 악 자체는 미워하지 않아요. 사실은 악 그 자체를 미워해야 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랑한다고 할 때에 그만 악도 사랑해버려요. 그 결과에 대해서만 미워하려고 해요.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아가페라는 것은 단순한 정열이 아닙니다. 절대로 사랑은 맹목이 아닙니다. 사랑은 장님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사랑에는 윤리가 있어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에 대해 정의할 때에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제가 꽤 많은 젊은이들의 결혼 주례를 섭니다. 그 때마다 제가 주례할 때에 쓴 성경책을 하나씩 선물해주는데, 지금까지 그 많은 사람들에게 똑같이 이렇게 써서 주었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꼭 이 한 구절을 써서 줍니다. 좀 두고두고 생각해보라고요.
그렇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이 진리를 떠날 때에는 슬픔이 되는 것이에요. 사랑은 진리와 함께 있을 때에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절대 불의로 기울어질 수 없습니다. 불의로 기울어 질 때에는 사랑이 아니에요. 진리를 떠났기 때문에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행복이 없는 거예요. 진리에 뿌리를 박아야 사랑에 행복이 있다는 뜻에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라고 써서 주는 거예요. 이것은 저들이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만 맹목적인 인간이 되어서 악까지 사랑하게 되면 안돼요. 죄는 미워하되 죄이는 사랑해야 됩니다.
악은 미워하되 사람은 사랑해야 됩니다. 냉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은 사랑하되 죄는 사랑해서는 안돼요. 결코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오늘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강하게 가르쳐 줍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항상 선을 지향해야 한다 함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새 번째로 오늘의 본문은 가르쳐줍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10절)"-조금 깊은 뜻이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필아델피아 에이스 알렐루스 필로스토르고이'라고 합니다. '필로스토르고이'-'필로스'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뜻이고, '스토르고이'라는 말은 부모와 자식간의 수직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혈통적 사랑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두 가지 의미를 합쳐놓은 것입니다. '필아델피아'라는 것은 형제사랑이에요. 그리고 '필로스토르고이'라는 말은 좀더 진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에요. 수직적 사랑이에요.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같은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서로서로 사랑하되 어떤 사랑이어야 하느냐, 일반적 형제사랑이 아니라 한 부모로 이해서 이루어진, 피로 맺은 사랑을 하라는 것이에요. 이것이 성경이 가르쳐주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서로 사랑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보고 너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보고 나를 사랑하라는 거예요. 저를 보고 저를 사랑하는게 아니예요. 복음성가에도 이런 가사가 있잖아요?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매를 사랑합니다.' 그 사람보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예요. 그리스도를 보고 형제를 사랑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필로스토르고이'입니다. 형제를 우애하되, 서로서로 사랑하되, 피로 맺은 그런 사랑을 하라-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사랑의 길입니다.
네 번째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10절)"-피차 존경해야 함입니다. 서로서로 존경하라 함입니다. 존경이 중요합니다. 존경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남의 장점을 보는 마음이요, 남을 높이는 마음입니다. 무릇 사랑에는 세 가지가 있어요. 나보다 부족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 나와 같은 수준에서 수평적으로 사랑하는 형제의 사랑, 나보다 높여 사랑하는, 존경하는 '공경'이라는 사랑이 있어요. 오늘 의 성경은 서로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언제든지 나보다 남을 한 단계 더 낮게 여기라, 한 단계 더 높이 여기라는 뜻이에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같이 여기라는 게 아니에요. 높이 여기라는 거예요. 그 말은 바로 나를 낮추라는 거예요. 나를 낮추고 남을 더 높여요. 간단히 생각해서 부부 간에도 그래요. 남편이 나보다 훌륭하다-그렇게 살아가라는 거예요. 또 아내가 나보다 훌륭하다-그렇게 살아가라는 거예요.
제가 아는 장로님 한 분은 참 이상한 인사를 하셨어요. 고향 어른인데 일전에 돌아 가셨지요 어쨌든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하면 "잘 있네"하시고는 꼭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처 덕에 잘 있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들으니까 그것 참 이상하다 싶었어요. 세상에 그 렇게 대답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 분은 의학박사예요.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큼 유명한 분이고, 병원 원장도 오래 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한 분이에요. 그런데 꼭 "처덕에 잘 있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 제가 부득이 한번 물어봤어요. "장로님, 왜 처덕에 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성깔이 못됐거든. 밖에서는 내가 정말 좋은 사람 같아 보일지 몰라도 집에 들어가면 아주 까탈스럽게 군다네. 그런데 아내가 이것을 다 받아주는 거야. 얼굴 한번 찡그리는 일도 없어. 내가 거기서 위안을 받기에 밖에 나와서 또 힘차게 일하게 된다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처덕에 복 받고 사는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나라는 사람은 벌써 끝났을 것이네. 아무짝에도 쓸모 없었을 거야. 그래서 내가 진심으로 하는 말아야. 정말로 처덕에 사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럼 남편, 괜찮지요? 언제든지 각각 자기보다 잠을 낫게 여겨요. 이게 존경이에요. 서로 존경하라-상대방을 높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을 볼 때에도 '이 아이가 나보다 잘났다'-그렇게만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달라져요. '어쩌다 저런 게 태어났나'-이러니까 문제이요. 안그래요? 그래. 아이들이 못된 짓을 하거나, 버릇없이 밥상을 둘러엎거나, 잘못 할 때에는 꼭 한마디 해요. "용케 니 애비 닮았다"-그 심사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자기보다 남편이 못하다, 그거예요.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지요. 이제는 회개하세요. 각각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겨 서로 존경하세요. 존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해요. 존경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예요.
이제 구도적으로 설명합니다. 장점이 보이도록 사랑해야 사랑이에요. 불쌍해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예요. 사랑해야 내게 이로움이 있으니까 부득불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 아니예요. 장점이 보여요, 아무리 부족한 게 많아도 어느 사이에 그것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좋은 점만 보여요, 소중해요, 높이 존경할 것이 자꾸 보이는 거예요-그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또 장점을 보며 사랑하는 거예요. 인간이 불쌍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예요. 또 존경에 끌려서 사랑해야 해요. '이 분은 참 훌륭한 분이다. 내가 잘 모셔야지. 아주 고귀한 분이다. 내가 섬겨야지'-이런 마음에서, 장점에 끌려서 사랑할 때에 그것이 진짜 사랑이에요. '저 불쌍한 인간, 내가 돕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이런 구제하는 사랑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부인이 그 남편이 몹시도 못되게 구는데도 그를 사랑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믿음이 참 좋으십니다. 그 못된 남편을 그렇게 꾸준히 시중하고 사랑하니 참 용하십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대답하는지 아세요? "성경에 있잖아요?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세상에, 원수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 남편을 사랑하다니요. 큰일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어요. 그건 사랑이에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존경하기를 먼저하라---사랑하게 되면 장점이 보여요. 크게 보여요. 그 장점에 끌려서 사랑하는 거예요.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에요. 더구나 오늘은 본문은 full activity를 말씀하고 있어요. 존경하기를 먼저하라---그 말의 의미는 존경받고 존경하는 게 아니예요. 사랑받고 사랑하는 게 아니예요. 내가 먼저, 내 편에서 주도적으로 먼저 하는 거예요. 기다리는 게 아니예요. 보상을 바라는 것도 아니예요. 내가 먼저 존경하고, 서로서로 하되 언제든지 내가 먼저-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덕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또 성경은 가려쳐줍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11절)" 예수 믿는 사람은 부지런해야 합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려면 남보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더구나 새벽기도 나오시는 분들은 부지런해야 합니다. 예수 믿으려면 부지런해야 합니다. 남들이 안 하는 것을 하나 더 하지 않아요? 보통 부지런해 가지고는 않돼요. 이 '부지런'이라는 것은 사실 귀한 것입니다. 부지런해야 살고, 부지런해야 건강하고, 부지런해야 총명하게 되는 거예요. 자꾸 놀려고 하고, 자꾸 누우려고 하고, 자꾸 쉬려고만 하면 아주 푹 쉬게 됩니다. 이러면 안 됩니다.
계속해서 부지런해야 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어떤 분은 자기가 할 일은 식모한테 맡기고, 자기는 병원에만 왔다 갔다 합니다. 이러면 자연히 병원에 가게 되어 있어요. 자기 할 일을 안 하니까 하나님께서 '너는 병원에 다녀라' 하시잖아요? 하나님께서 병원 보내시잖아요? 여러분, 잊지 마세요. 부지런히 일하세요. 새벽부터 뛰세요. 한낮에 이렇게 저렇게 자니까 밤에는 몽롱해 가지고 숙면이 안되는 거예요. 바이오리듬이 거꾸로 돌아가는 거예요. 낮잠 자지 마세요. 그것, 못쓰는 거예요. 만약 낮에 쉰다고 해도 의학적으로 20분 이상 쉬면 안됩니다. nap이라고 하는 것은 점심 먹은 다음에 20분 정도 잠깐 쉬는 거예요. 사실 여러분도 낮잠 자보면 알 거예요. 20분만 자면 한 번 눈을 뜨게 됩니다. 그 때에 딱 일어나야 되는데 돌아누우면 이제는 끝이에요. 그 다음에는 점점 머리가 아프고, 무거워지고, 밤에는 이상한 꿈만 꾸는 거예요. 바이오리듬이 완전히 거꾸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렇게 하고도 건강하기를 바랍니까? 낮잠 자면 안돼요. 부지런해야 됩니다. 그저 무엇이라도 하세요.
제가 아는 장로님 부인은 아이들 공부를 참 잘 시켰어요. 그런데 그 부인은 국민학교도 못나왔어요. 그래, 어떻게 그렇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공부하는 게 너무 고맙고 예뻐서 자기는 옆에 않아서 뜨개질을 했답니다. 그냥 앉아 있는 거예요. 특별히 무엇을 뜨는 것도 없어요. 그저 떴다 풀었다 하는 것을 계속했다는 거예요. 절대로 아이가 공부하는데 옆에서 누워 잔 일이 없답니다. 그것 하나로 훌륭하게 가르쳤어요. 생각해보세요. 부지런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아주 부지런해야 해요.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라-부지런하면 피곤해질 줄 아는 모양인데, 아니예요. 그래야 건강하고 총명하고 지혜도 생기는 거예요. 신기하게도 머리는 써야 발전하고, 몸도 움직여야 건강합니다. 무릇 부지런해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몇 배 부지런해야 합니다.
저는 오래전에「리더스 다이제스트」지에서 이런 것을 읽었습니다. 세계적인 거부 백 명을 시카고에 모이게 해서 세미나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사결과, 저들에게 고통점이 있었습니다. 저들은 보통 사람보다 30분 정도가 아니라 3시간 일찍 일어나요. 다른 사람보다 3시간 일찍 이러나는 것이 부자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늦잠 자고서 부자되기를 바라지 마세요. 그렇다면 그런 줄 아세요. 사실이에요. 부지런해야 됩니다.
그 다음 말씀은 "열심을 품고(11절)"-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라 함입니다. 이것은 그 영이 뜨겁게 끓어올라야 한다는 거예요. 열심히 한다는 것은 마음을 담아서 한다는 거예요. 또 자발성을 말하고 자원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열심히 하세요. '하는 척'하는 것은 나빠요. 적극적인 사람이 되세요. 무엇을 해도, 공부를 해도, 노는 것도, 운동을 해도 열심히 하세요. 하지만 먹는 것만은 열심히 안해도 될 것 같아요. 어째든 열심이 체질이 되어야 해요.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을 하기는 하는데 꼭 소극적이에요. 게을러요. 열심히 하지 못해요. 뜨겁지 못해요.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7)"--심히 하지 않으면 마귀들이 틈을 타요. 내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쓸데없는 일에 생각을 돌리고, 쓸데없는 일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흘러가는 물은 썩는 법이 없어요. 그런고로 열심히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은 본문은 "주를 섬기라(11절)"라고 말씀합니다.
주를 섬긴다는 말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바로 포착하라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소자 중 하나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다. 소자 중 하나에게 하지 아니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아니하는 것이다'-그런고로 불쌍한 사람을 돌아보는 것이 주를 섬기는 것이요, 봉사하는 것이 주를 섬기는 것이요, 교회를 위하여 섬기는 것이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하라 하심입니다.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 향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하라시는 말씀입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열심히 주를 섬기라 함입니다.
제2차세대전 당시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포로생활을 겪었던 리차드 범브란트라는 분에 대한 책을 아마도 여러분이 많이 읽었을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루마니아의 어느 교도소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빛이 안 들어와서 앞이 캄캄하고 사람이 잘 안 보이는 그런 침침한 감방에 목사님을 비롯한 한 30명의 죄수들이 갇혀 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죄수 한 명이 들어왔어요. 그를 자세히 보던 목사님은 깜짝 놀랐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은 바로 목사님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게 한 비밀경찰 대령이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비밀 경찰 하던 사람이 이렇듯 기독교인들이 갇혀 있는 감옥에 왔을까, 하고 모두들 궁금해했습니다.
그래 누군가가 "당신은 어떻게 해서 여기에 오게 됐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과거에 나는 비밀경찰 노릇을 하면서 참 많은 기독교인들을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열두 살 난 조그마한 소녀가 세 송이의 꽃을 가지고 내게 왔어요. '대령님, 이 꽃을 받으세요'라고 하더군요. 그래, 이게 웬 꽃이냐, 하고 물었더니 그 소녀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 생일 때마다 어머니께 꽃을 드렸습니다. 저의 유일한 선물이었지요. 그런데 대령님이 우리 어머니를 데려 가셨잖아요? 그래서 이제는 어머니께 선물을 드릴 수가 없어서 이렇게 대령님께 꽃을 가지고 왔어요. 대령님, 이 꽃을 사모님께 갖다드리세요.' 이 말을 듣고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내가 그렇듯 못된 짓을 했구나, 하고 깨달았지요. 바로 그 때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은 그도 체포되어 가지고 감옥에 온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어린 소녀의 그 뜨거운 마음이, 그 주를 섬기는 깨끗한 마음이 모든 사람의 마음, 특별히 비밀경찰 대령인 그 악한 사람의 마음도 녹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이것이 주를 섬기는 거예요. 사람보고 사람을 섬기는 게 아니예요. 주님을 생각하고 봉사하는 거예요. 그러면 위대한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12절)"-즐거움이라는 것은 현재에 있기 쉬어요.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사람들은 대개 과거의 일은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현재는 고통스럽다고 생각하고, 미래는 암담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세계관은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는 다 잘못된 것이었어요, 그러나 현재는 너무도 감사합니다. 미래는 항상 소망적이에요. 내가 건너갈 요단강이 눈에 보이잖아요? 영원한 하늘나라가 약속되어 있어요. 그런고로 소망 중에 즐거워해요. 하나님의 그 약속 안에서 즐거워해요.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 -참 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현재를 가지고 즐거워하는 것은 순간적이에요. 별것 아니예요. 여러분이 다 알고, 또 너무 구체적인 이야기라서 죄송합니다마는, 우리는 지금 전직 대통령 두 분을 감옥에 보냈습니다. 그 사건이 텔레비전에 나올 때마다 제가 안쓰럽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어요.
그것이 바로 그 자녀들이에요. 자녀들이 무슨 죄가 있어요? 하지만 검사들 이 부르니까 왔다 갔다 합니다. 저들이 오늘에 와서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습니까? 한때는 대통령의 아들딸들이라고 해서 큰소리치고 특권층처럼 영광을 누렸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어요. 오늘 와서 보니까 팔자도 기구하지, 이제 그 일생동안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보세요. 한 사람이 부끄러워질 때에 그 자녀들까지 부끄러워집니다. 세상 영광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예요. 권세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현재라는 것은 전부가 그런 거예요. 가져봐도, 먹어봐도, 소유해봐도, 순간 순간 그냥 지나가는 거예요. 언제나 즐거움은 소망한 자, 미래에 있는 거예요.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특별히 오늘 내가 당하고 있는 이 현실이 영원한 세계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연계되어 있는 거예요. 이대로 가면 천국이요, 이대로 가면 영원한 세계요, 이대로 가면 영광이에요. 그럴 때에 이 순간순간 전부가 영광스러운 것 아니겠어요? 이대로만 가면 되니까요. 이것이 바로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것이에요. 소망에 합당한 오늘을 살 때, 그 길 자체에서 현재도 즐거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환난 중에 참으며 (12절)"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참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고, 소망 중에 참으라 함입니다. 소망이 없는 인내는 굴욕입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에 쉽게 참을 수 있어요. 믿음이 없는 인내는 거짓입니다. 사랑이 없는 인내는 무력합니다. 그것은 슬픈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있고,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넉넉히 참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기도에 항상 힘쓰며(12절)"-역시 기도도 힘써야 합니다.
기도할 시간을 만들고 정성을 다해서 기도 시간을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13절)"-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사도행전적 교회가 유무상통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아볼 줄 아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듯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할 줄 아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라 함입니다.
마지막으로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3절)"라고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요새는 이런 일이 좀처럼 없어요. 요새는 걸핏하면 식당으로 갑니다마는, 옛날에는 전부 집에서 대접했어요. 손님을 집으로 모셔다가 음식을 만들어서 대접하고는 했어요. 웬만큼 덕 있는 집에는 손님방이 따로 있잖아요? 가는 사람 오는 사람을 다 불러다가 대접했지요. 그런데 요새는 손님대접이 너무 적어요. 아니, 적은 게 아니라 아예 없어요. 아무쪼록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기 바랍니다. 제가 이 시간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마는, 가능하면 주일날 교회에 나왔다가 돌아갈 때에 자기네 집안식구들끼리만 식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적어도 주일날 그 시간만은 오늘은 김 집사님 댁에서, 다음은 박 집사님 댁에서, 또 그 다음은 오 권사님 댁에서…… 이렇게 두 집씩 세 집씩 꼭 모였으면 좋겠어요. 어른들끼리 모이고, 아이들끼리 친해지고, 오늘은 이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다음은 저 집에 가서 간단하게 먹고-이렇게 손님을 대접하고, 서로서로 대접하세요. 마음 문을 여세요. 그런데 마음 문을 꼭꼭 닫아놓고 그저 자기들끼리만 모입니다.
그러면 사실 기쁨도 없어요. 할 이야기도 없고요. 그래가지고 둘이서 여행을 간다고 좋아했다가 사흘만에 돌아오잖아요? 할 말이 없어서요.
게다가 싸우고 돌아옵니다. 그러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세요.
두 집, 세 집이 같이 가세요. 그래야 할 말도 많고 재미도 있잖아요?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세요.
성경은 저렇게 열두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덕목들이 우리 생활에서 실제로 생활화 할 때에 그 신앙생활이 윤택하여질 것입니다.
'◑ 자료 18,185편 ◑ > 곽선희목사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로 덕을 세우라(롬14:13~23) (0) | 2024.03.19 |
---|---|
신앙인의 간증(롬11:33~36) (0) | 2024.03.19 |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세기 4 : 1~10) (0) | 2024.03.19 |
아담의 현주소(창세기 3:7-13) (0) | 2024.03.19 |
신앙인의 담력(빌립보서 1 : 12-21)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