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 목차로 돌아가기 |
여기에 신앙인의 진실한 간증이 있습니다. 로마서의 구조는 이렇습니다. 1장으로부터 11장까지가 교리요, 12장으로부터 16장까지가 윤리입니다. 바울서신의 구조가 대게 그렇습니다. 첫부분에서는 '우리는 무엇을 믿느냐'-교리를 말씀합니다. 후반에 가서는 '어떻게 사느냐'-생활 윤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렇듯 믿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라고 가르치는 것이 그의 편지의 일반적인 구조입니다.
이제 우리는 로마서 1장으로부터 11장까지 말씀한 그 교리 중에서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됩니다. 사실상 이 교리의 결론은 지난 시간에 이미 말씀드렸고, 오늘은 그 결론 중의 또 결론입니다. 이것은 논리적인 결론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찬양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의 끝으로서는 시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번민도 있고, 간구도 있고, 혹은 탐구도 있고, 논리도 있고, 여러 가지 내용이 있겠습니다마는 맨 마지막에 가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happy end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언제든지 마지막에는 이렇듯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결론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고백, 모든 생활, 모든 학문, 모든 수고… 그 끝은 반드시 감사와 찬양으로 매듭지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에도 어려움이 많고 고통도 많고 슬픔도 많고 탄식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인생이 성공이었든 실패였든 간에 그 마지막에는 어떻습니까? 마지막 끝날 때에만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그렇게 끝이 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을 그 내용적으로 생각하면 한마디로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께 칭찬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잘하셨습니다'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할 때에 그 찬양의 요소는, 그 찬양의 소재는, 그 찬양의 주제는 언제나 세 가지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찬양입니다. '하나님, 참 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 위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참 놀라우십니다. 하나님, 정말 훌륭하게 잘하셨습니다'-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잘됐고 무엇이 잘못됐고, 하며 한동안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 상관없습니다. 무조건 '하나님 잘하셨습니다'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요. 병이 들었어요. 그러면 '하나님, 제가 병든 것 감사합니다'하는 거예요. 실패하게 하신 것 잘하셨습니다, 내 사업 망하게 하신 것 잘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떠날 때에도 하나님 저를 부르시니 감사합니다-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내가 인정하고 감탄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하셨다고 하나님께 칭찬을 드리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감사요 찬양입니다.
둘째는 언제나 우리 인간의 부족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동안에 내가 미련 떤 것 잘못했습니다, 그 동안에 내가 뭐 잘못되는 줄 알고 하나님을 원망한 것 참 잘못했습니다, 또 어떤 때에는 내게 주신 은사가 마땅치 않다고 해서 게으르고 나태하고 못되게 굴고 골 부리며 살았는데 하나님, 지금 생각하니 죄송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해서 그랬고, 미련해서 그랬고, 몰라서 그랬고, 우둔해서 그랬고, 어리석어서 그랬습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미처 모르고 그렇게 마음으로,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한 것 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이렇듯 자기 부족에 대한 고백, 과거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끄러운 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게 됩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어떻습니까? 부모와 자녀간에도 그런 일이 있잖아요? 아이들이 제멋대로 하려 하다가도 나중에 부모님한테 와서 "부모님이 옳았어요. 제가 그 동안 잘못했습니다."하고 나옵니다. 그 때에 부모님은 더없이 기쁜 거예요. "그래, 괜찮다.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됐다"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마음이에요.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에 대한 참회와 뉘우침,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러고도 헌신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이 처지에서 다시는 골 부리지 않으렵니다, 다시는 원망 안 하렵니다, 앞으로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걱정도 안 하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 뜻대로 하셔서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시옵소서, 나 자신 그대로 제물로 바칩니다, 하나님께 나를, 하나님께 내 운명을 그대로 헌신하겠습니다-이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말씀드린 이 세 가지에서 떠나면 그것은 하나님께 욕돌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소리 쳐봤자 소용없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돈을 많이 주신다면 하나님, 내가 매일 어찌어찌 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안주십니까?'-이것도 하나님 앞에 욕돌리는 거예요. 그냥 이대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힘, 하나님의 오묘한 역사를 깨달으며 감격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 속에는 나를 구원하신 역사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무슨 은혜가 있겠어요? 그런고로 우리가 희생한다, 봉사한다, 하는 것이 그리 중요한게 아니에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구속하신 은혜에 대한 행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째서 나를 구속하셨습니까, 어째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셨습니까, 인자가 무엇이관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나는 아무 것도 아닌 티끌과 같은, 버러지와 같은 인간인데 하나님, 너무너무 고맙습니다-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이 허물 된 나를 사랑하신 그 구속에 대한 은혜를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찬양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깊이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사랑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께 그 깨달음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바로 그런 것이지요.
오늘의 본문에 그 내용이 자세히 나타납니다. '깊도다'-이렇게 시작하지 않습니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33절)" -그렇습니다. 참 깊어요. 너무 깊어요. 그래서 그동안에는 잘 보지 못했어요. 우리는 가시적인 것을 원해요. 우리는 물질적인 것, 육체적인 것을 원해요. 또 지극히 현재적인 것만 은혜로 생각하려고 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아주 깊어요. 눈에 보이지도 않아요. 그래, 그 때에는 꼭 시련같고 고통처럼 느꼈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 동안은 잘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야 깨닫고 보니 거기에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다는 말씀이에요. 못 보았는데 분명히 있었어요. 그러나 이제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 때로는 너무 깊어서 알기 어려운 때가 있어요. 그러나 이제야 깨닫고보니, 확실해요. 이렇게 분명한 것을 내가 모르고 살았구나, 할 때가 너무 많아요. 내가 어리석었습니다, 내가 미련했습니다, 내가 눈이 어두워서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하나님의 은혜는 확실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조금 더 깊이 나아가서는, 때로는 아닌 것 같은데 실상은 이것이 맞구나, 하게 됩니다. 다시말하면 사랑이 아닌 것 같은데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경륜이 그 속에는 없는 듯이, 정말 벼려진 현실 같았는데 이제 보니 그 속에 하나님의 세밀한 돌보심과 하나님의 경륜이 있었어요. 하나님의 계획이 그 속에 있었어요. 그것을 이제야 깨닫는 거예요. 그러니까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혹 여러분은 아버지로부터 매를 많이 맞아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아버지로부터 매를 무척 많이 맞아보았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면서 때리시는고 하니 "너는 3대 독자다"하셨어요. 저는 맞으면서 속으로 '5대독자라고 하면서 왜 때리나?'하고 늘 불평을 했어요. 그런데 언젠가는 제가 그 생각을 그만 말로 해버렸어요. 5대독자라고 하면서 왜 이렇게 때리느냐고요. 아무튼 그 날은 더 굉장히 맞았습니다.
그 한마디했다가 얼마나 맞았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 때에는 왜 때리는지 몰랐어요. 왜 이렇게 내가 맞아야 하는지 몰랐어요. 어떤 때에는 내가 잘못한 것 같지 않은데도 맞아야 했어요. 그러나 뒤늦게 생각을 해보니까 이 전부가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만일에 제가 그렇게 맞지 않고 살았으면 아주 버릇없어질 뻔했어요. 여러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저한테 강한 훈련을 시켰어요. 이 시간에 고백합니다.
그런고로 보세요. 왜 이렇게 나를 고생시키나, 왜 이렇게 강한 훈련을 시키나, 왜 때리나, 하고 원망했지만 그 때에 몰랐어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엄한 아버지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어요. 이것이 바로 '깊은'거예요. 이렇게 아버지의 사랑은 깊어요, 언젠가 아버지가 저를 때린 다음에 어머니가 문밖에 나서는 아버지를 딱 붙잡고 한마디했어요. "사랑한다고 하면서 아들을 왜 자꾸 때립니까? 당신은 아들을 사랑하는 거예요, 안하는 거예요?" 그러자 제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식은 속으로 사랑하는 것이지 겉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오." 제가 그 말씀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사랑하기는 하는가보다' 했지요. 그렇게 밖에 생각을 안 했어요. 그러나 나이들면서, 철이 나면서 돌이켜보니까 그 아버지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너무너무 깊어요. 그런고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진노 속에서 구체화하는 것이에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God's love is concreted with his wrath'--유명한 신학적 요논증입니다. 그런고로 생각해야 됩니다. 너무 깊어요. 때로는 사랑이 아닌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시나,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 왜 이래야만 하나-아니예요. 지금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할 뿐이에요.
그 속에 깊은, 아주 깊은, 보이지도 않고 잠깐은 깨닫지도 어려운 사랑이 그 속에 확실히 나타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 더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지혜와 지식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세요. 그는 '능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34절)"-'마음'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특별히 히브리 개념에서는 감정의 요소가 아니고 지식의 요소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고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 즉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understanding, knowledge, 그 뜻한 바가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아는 자가 누구뇨, 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르고 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하시는 일인데 나는 몰랐다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합니다.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우화가 있어요. 어떤 당나귀 두 마리가 짐을 지고 주인과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한 당나귀에게는 돈을, 다른 당나귀에게는 곡식을 지게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돈은 그 분량이 적지 않습니까? 그래 작은 자루에다 넣어 등에다 지고 가니까 가볍기도 하고 또 부피가 적어서 걷기도 좋았어요. 반면에, 곡식자루는 어떻습니까? 이것은 도대체 부피도 크고 무거워서 곡식을 진 이 당나귀는 너무도 힘들었어요. 그런데 돈 자루를 지고 가는 당나귀가 곡식을 지고 가는 당나귀를 슬슬 비웃는 것이었습니다. "이 녀석아, 주인님은 나를 귀하게 여겨서 나한테는 이렇게 귀한 돈 자루를 지게 한 거야. 그런데 봐라, 너는 미련하니까 그렇게 무거운 쌀자루를 지게 하지 않았느냐?" 곡식을 지고 가는 당나귀는 뭐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달리 할말이 없었어요. 그래서 "글세, 그런지도 모르지"하고 대충 얼버무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강도가 나타났어요. 주인은 강도와 맞붙어 싸웠습니다. 그런데 서로 이 돈 자루를 얹어놓은 당나귀만 붙들면서 잡아뜯고 붙들고 때리고 하는 것이었어요. 그래 이 당나귀는 많은 상처를 입었어요. 물론 돈 자루도 뺏겼지요. 아무튼 그렇게 상처를 입고 걸어가고 있을 때, 쌀자루를 지고 가는 당나귀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너는 똑똑해서 언제나 피를 많이 흘리는구나." 보세요. 잠깐은 자기가 좋은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니었어요. 이것을 누가 알았겠어요? 세상사는 것도 만사가 다 그렇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잘 몰라서 원망도 하고 불평도 해봅니다마는 얼마 후에 생각하면 오히려 그것이 잘된 일이었어요.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0년 동안 결혼생활을 한 부부가 있었어요. 남들 보기에는 어엿한 가정이었지만 늘 불화가 많았답니다.
두 사람이 다 자존심이 강해서 서로 양보를 안해요. 한번 싸웠다 하면 며칠을 말을 안해요. 그야말로 팽팽하게 맞섰지요. 이렇듯 남들 보기에는 근사해 보여도 내적으로 고민이 많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이 탄 차가 사고가 났어요. 그리고 나서 생각해보니까 지난날 자기가 정말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둘이 깊이 화해를 했어요.
그 다음부터 얼마나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지 몰라요.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작 이런 차사고가 났었더라면 10년 동안 그렇게 허송세월을 하지 않았을 건데, 그 좋은 시절을 다 보내고 이제 와서야 깨닫다니……"
보세요, 막상 일이 닥치면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그 속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있거든요. 그런고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아무도 몰랐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사랑,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원망, 불평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게 잘못이었어요. 그런고로 사건이라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없어요. 필연일 뿐이에요. 때로는 이것이 저주인 줄 알았고, 하나님께서 내 죄에 대한 책망과 징계로 주시는 것인줄 알았어요.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절)."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하실 때에 이렇게 잡을 줄 알았더면, 그 때에 감사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하실 때에 '밤새 헛수고했지만 이제는 잡았다, 감사합니다, 주여, 할렐루야'하면서 그물을 던졌다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틀림없이 저 베드로는 입이 함박만해져서 던졌을 거예요. 안 그렇습니까? 바로 이것을 말씀하는 거예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이렇게 인도하시는 주의 마음을 진작 알았더면 왜 눈물방울을 흘렸겠나, 왜 걱정을 했겠는가, 왜 원망을 했겠는가, 왜 불복을 했겠는가, 다 주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에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이지-이것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질문은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34절)"입니다. '모사(謀士)'라는 말은 영어로 adviser, counselor라고 합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세요. '모사'는 이래야 합니다, 저래야 합니다, 하고 선생노릇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과거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세요. 과거에 우리가 언제 우리 마음대로 한 것이 있습니까? 자신 있게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다 모르고 한 일이지요. 똑똑한 척했었지만 그실 다 모르고 산 거예요. 어쩌면 되는대로 살았어요. '나는 이런저런 특별한 계획을 세우고 자신 있게 살았다'-이런 소리는 교만한 소리예요. 사실 그런 게 없었어요. 그런가하면 현재 여러분이 열심히 기도하지만 이렇게 해야 잘됩니다, 저렇게 해야 잘됩니다, 라고 말할 자신이 있어요? 어떻게 돼야 잘되는 것인지 누가 알아요?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미래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사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이래야 됩니까, 저래야 됩니까?'-감히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미래에 대하여 누가 하나님의 모사가 되겠어요? 그런고로 기도할 때에 우리는 너무 고집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주의 뜻이면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아주 온유 겸손하게 기도해야지요.
'꼭 이렇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안되면 안됩니다.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안 주시면 예수 안믿으렵니다'-이런 기도는 잘못하는 것입니다.
감히 누가 하나님 앞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살든 죽든 어느 쪽이 좋은지 누가 알아요? 누가 하나님의 모사가 되겠어요? 누가 감히 하나님더러 '이래야 합니다 저래야 합니다, 잘했습니다 못했습니다, 이런 것은 안됩니다, 저런 것은 안됩니다……'한다는 말이에요? 이제 생각해 보니 아무 말도 할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가 주의 모사가 되겠느뇨"라는 간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누가 주께 먼저 드려 갚으심을 받았느뇨(35절)"-아주 귀한 말씀이에요. 이것이 율법주의적 배경에 대한 도전입니다. 주께 먼저 드려-보상을 받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누가 하나님께 먼저 드렸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을 합니다마는, 내것 드리는 것처럼 헌금을 하지마는 사실 우리가 누구 것을 받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있는 것이에요. 내가 드리는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주셨고 내가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먼저 받은 것이지, 내가 먼저 드린 것이 아니예요.
그런고로 '누가 먼저 드리겠느냐'-무슨 말씀인고 하니, 보세요.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서 부상으로 복을 받고,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께서 상급으로 주시고-이런 기대를 어떻게 감히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뭔데요?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잘한다고 해봐야 뭐 잘하는 게 있고,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하고,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고,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합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가 드린 것이 없어요. 더구나 먼저 드린 것은 더더욱 없어요. 다 받은 것뿐이에요.
그저 받은 것에서 우리가 조금 드리는 것이지요. 받은 바가 전부요, 드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이런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리겠느냐? 갚으심으로, 보상으로 살아갈 자가 누구냐?'하고 말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그가 주도적으로 역사 하시고 주도적으로 주세요. 우리는 그것에 응답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적은 응답이 있을 분이에요. 그런고로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이제 우리의 진정한 자세는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받은 것은 많고 드리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허물뿐입니다. 너무나 부족하고 죄송합니다. 받은 은혜는 크고 나는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지 못했습니다'-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함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간증이며 찬양입니다.
그런고로 마지막에 그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36절)"-모든 것이 주께로서 와서 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주께로 돌아갑니다, 그런고로 주님께만 세세토록 영광이 있습니다, 주께만 영광이 있습니다, 하고 끝납니다. 여러분, 엄밀히 따져보면 우리가 잘못 기도하는 게 참 많아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하는 기도가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예요. 가만히 보면 우리는 버릇이 되어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여주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여기에 또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언제 영광 돌릴 것입니까? 안 그렇습니까? '영광 돌리게 하여주옵소서'-도대체 이게 뭡니까? 영광 돌리는 일은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잘하셨습니다. 하나님, 영광 받으시옵소서'-이런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저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이렇게 마지막은 전부 '주시옵소서'로 끝나요. 이게 병이에요. 얼마나 굶었으면 이 모양이에요? 거지근성이 있어 가지고 달라는 것밖에 없어요.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내 기도가 어떤지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주시옵소서'가 없습니다.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당신께 있습니다, 당신께만 돌아갑니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아멘'하고 끝납니다. 항상 이러한 찬양, 이러한 감사, 이러한 기도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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