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심야의 찬송(사도행전 16:19~25)

by 【고동엽】 2022. 10. 31.

 

처음 되돌아가기

심야의 찬송(사도행전 16:1925)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 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바울은 어디 가서 복음을 전하든지 순탄하게 교회를 세운 일이 거의 없습니다. 어느 도시에 가든지 핍박과 고난을 당했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고난 당했던 이야기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고후 11 : 23)"--그러나 그는 그 같은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하고 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럽으로 복음이 건너오면서 첫 성 빌립보에 이르고, 강가에서 루디아를 만나고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면서 어렵지 않게 교회가 설립되고…… 어쩐지 순탄하다 싶었는데 그렇지 않아요.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바울은 여기서도 결국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한다거나 우상숭배 문제라거나 해서 복음에 정면적으로 충돌되는 사건이 있어서 핍박을 당했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하겠는데 이건 오늘에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아주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로 인하여 그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어쩌면 바울이 당한 많은 고통 중에서 가장 애매하고 가장 부당한 일로 당하는 고난일 것입니다. 그것은 빌립보교회 사건입니다. 다른 데서 고난 당한 것과는 질적으로 달라요.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고, 옥에 가두고, 착고에 채웠다고 합니다.

착고에 채웠다는 것에 대하여 조금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옛 우리 나라에서는 칼을 씌운다 해서 두꺼운 널빤지로 길쭉하게 만들어 죄인의 목만 끼일 만큼 구멍을 뚫어 가지고 거기에 죄인의 목을 끼워 고정시킨 형틀이 있었는데 이 칼을 쓰고 옥에 갇히면 눕지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므로 고통이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착고라고 하는 것은 한층 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구멍이 다섯 개입니다. 널빤지에 뚫린 다섯 개의 구멍에 목과 두 팔목, 두 발목을 끼우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를 이 착고에 채워서 가두고 지키라 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재판도 없었거든요. 죄목도 메기지 않았어요.

무슨 죄로 매를 치고, 무슨 죄로 감옥에 가두는지, 명분이 없었습니다.

구실을 잡고야 때리든 말든 할 수 있을 게 아닙니까? 죄목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말하자면 "네 죄를 네가 알렷다!"하는 으름짱으로 실토케 취조하는 것도 아니예요. 도대체 매는 왜 맞는 거냐, 이 말입니다. 심문을 한다면 바울이 술술 얘기를 할 것인데 물어보지도 않고 을러메지도 않아요. 그냥 끌어다놓고 따타부타없이 옷을 벗기고 때렸어요. 맞는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맹랑한 노릇이지요. 억울하기 짝이 없어요.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지난 시간에 본 바와 같이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이 있었는데 그 주인에게 적지 않은 수입을 올려 준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여종이 바울과 실라가 길을 지나갈 때마다 따라오면서 소리지르기를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합니다. 여러 날을 이렇게 하는데 이게 바로 귀신들린 여자거든요.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야 얼마나 좋은 전도입니까? 정말 귀한 일이지요. 그러나 정신나간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하고 다니면 이건 정말 복음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는 믿지 않으면서 그런 소리를 하거든요. 그래서 바울은 심히 괴로워합니다. 참다못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하고 여인을 향해 소리칩니다. 귀신은 그 시로 내쫓기고 여종은 깨끗해졌습니다. 정신병자가 성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온전해졌으니 다행으로들 여겨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라 합니다. 더는 이 여종을 통해서 돈을 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란을 떠는 거예요. 자기들에게 돌아올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 하나야 미치든 죽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게 돌아오는 이익, 그것만 생각하는 동안에 다른 일은 전혀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기주의자들이 다 그렇습니다. 물질주의자들이 다 그렇습니다. 물질과 이기심에 취하고 말면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남편도 안보이고, 아내도 안보입니다. 자식도 안보이고, 친구도 안보입니다. 오로지 돈벌 생각뿐입니다.

그 여종의 주인들이 정신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여종이 성하게 된 것을 보고 사도 바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될 것입니다. 중국에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금방에 젊은 사람이 하나 들어와서 금덩이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다짜고짜 집어들고 달아나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보았어요. 잡혔지요. ", 이놈아!"하고 주인이 "아무도 없을 때라면 몰라도 남들이 다 보는 데서 벌건 대낮에 그걸 가지고 도망가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도대체 너는 어찌된 놈이냐?"하고 야단을 칩니다. 그랬더니 이 젊은이 왈 "금덩이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안보였습니다." 이게 금이 가진 매력입니다. 여러분, 이걸 알아야 합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들에게 돌아오는 이익밖에 몰랐어요. 이것이 끊어졌다고 해서 발광을 하는 거예요. 여종이 성하게 된 것은 기적이 아닙니까? , 귀신들린 그 여자가 하는 소리도 좀 귀담아 들을 줄 알아야지요.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어요. 다만 손해난 것만 가슴 아픕니다. 바울 때문에 손해났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란을 떠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들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현실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로마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21)"--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일깨우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풍속을 전하는 게 아닙니다. 남의 풍속을 해치는 게 아닙니다. 다시말 하면 복음이란 문화의 문제가 아닙니다. 초문화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문화적 사건으로 받아들였어요. 이것이 바로 복음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지난주간에 일본에 가 있었습니다. 일본 교역자들 수양회에 가 있었습니다. 일본의 교회가 부흥이 안됩니다. 우리보다 역사가 길어서 2백 년이나 되었는데도 교회는 여전히 부흥이 안되고 있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가 뭐냐하면, 저들은 기독교를 서구 문화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는 "기독교를 서국 제국주의의 앞잡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를 받아들이는 것도 자기네 문화를 빼앗기는 일이라고,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착각이 소위 지성인들의 마음속에 2백 년 동안을 흘러내리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문화의 장벽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때, 복음을 전하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풍속이나 문화의 문제가 장벽으로 가로막히면 안됩니다.

벽안(碧眼)의 선교사들을 처음 보았을 때, 우리네 조상들이 얼마나 이상하게 여겼겠어요? 눈알은 새파랗고, 얼굴은 하얗고, 머리카락은 노랗고, 물색 없이 키는 크고, 우뚝하니 코는 크고…… 이런 양반들이 와 가지고 갓을 쓰고, 담뱃대까지 물고 다녔어요. 문화의 장벽을 허물고자 함이었지요. 기다란 담뱃대까지 물로 당나귀를 타고 전도하러 다녔어요. 세월이 조금 지나간 다음에는 당나귀 대신 자전거를 타고 다녔어요. 자전거 소리가 나면 동네 아이들이 양귀신 왔다면서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이런 판국이니 저들이 얼마나 애썼는가 보세요. 처음 예배당을 지을 때에 초가집으로 지었어요. 제가 어릴적 처음으로 다니던 교회도 초가집이었습니다. 기역자 집이었어요. 남녀가 유별했던 때라 남자 여자가 섞여 앉으면 큰일나기 때문에 기역자였습니다. 남녀가 섞여 앉는 것, 도대체 안 되는 것이예요. 그 때 사람들이 지금을 보면 기절을 할 것입니다, 기역자 예배당에 한쪽으로는 남자가 들어오고, 다른 쪽으로는 여자가 들어오고, 남자 여자가 서로 못 보게 했어요. 목사님만 보는 것이지요. 기독교가 풍속에 저촉되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 나라 풍속 때문에 복음이 손해를 봐서는 안도는 일이지요.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니 저들은 바울 등이 이상한 풍속을 전한다고 했어요. 복음을 전했지 풍속을 전했습니까? 그걸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문화의 문제가 아니예요. 잊지 말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문화를 가지고 우리 문화 안에서 복음을 믿습니다. 기독교는 풍속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핍박하는 사람은 복음 자체를 복음으로 이해하지 않고 꼭 풍속으로 이해합니다. 복음은 정치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기독교를 정치적인 문제로 돌립니다. 그래서 핍박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핍박당하는 이유입니다. 복음은 내셔날리즘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은 꼭 이것을 내셔날리즘으로 파악합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저 북한도 기독교를 핍박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유민주주의 앞잡이라는 것이지요. 미제국주의 앞잡이라고 몰아붙입니다. 기독교를 복음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 사건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깊이 생각해보면 빌립보사람들이 핍박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초문화적인, 초풍속적인 사건으로 받지 않고 하나의 풍속으로, 하나의 정치로, 하나의 사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합니다. 근본적으로 오해요,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풍속과 관계가 없습니다. 언제나 초문화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본문에 보니 무리가 소동을 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자기가 손해를 보았다고 해서 소란을 떨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선동되어서 군중심리가 발동한 것입니다. 바울 죽여라, 실라 죽여라 하고 저들은 소란을 떨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끌고 가 매를 쳤다고 합니다.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아요.

군중 심리적인 감정의 격함이 이 같은 엄청난 사건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 점을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애매한 고난이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고난입니다. 이런 매도 맞아야 되는 겁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는 대로 사도 바울은 매를 맞을 때, 왜 때리느냐, 좀 알아보고 때려라, 얘기도 좀 해보자, 재판장을 만나자, 시장을 만나자, 하고 따질만한데도 그냥 매를 맞았습니다. 여러분,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재판 이전입니다. 아무 판결도 없이 매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마디의 변명이 없습니다. 정당성을 피력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온유, 겸손한 가운데 매를 맞습니다.

베드로전서 219절에 보면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라고 말씀합니다. 은혜가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매를 맞을 때,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인은 말이 없어야 돼요. 잊지 말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말할 필요가 없어요.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가만히 보면, 따질 것 다 따지고 매를 맞으려 해요.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뭐라고 말을 하는데 며느리가 똑똑해 가지고 자꾸 따지거든요. 시어머니가 ", 또박또박 그렇게 자꾸 말대꾸할 거냐?"하면 "말대꾸가 아니라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합니다.

여러분, 이치란 보는 대로 달라요. 각도가 달라요.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아무리 애매해도 설명을 하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세요. 팔자가 어떻다느니 이치가 어떻다느니, 억울하다느니, 원통하다느니 변명을 하지 마세요. 도대체 세상에 변명처럼 불 신앙적인 게 없어요.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정말 이유가 없었습니까? 바울이 지금 매 맺는 순간에는 억울하고, 분하고, 부조리한 매라고 생각하지만 지나간 다음에 생각해보세요. 어때요? 그게 얼마나 큰 사건이었습니까?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받으시고, 그것을 통하여 빌립보교회는 확고한 기틀을 잡게 되지 않습니까? 내 생각에는 이유가 없지마는 하나님께는 이유가 있어요. 내 좁은 생각에는 부당한 것 같지마는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는 이유가 있어요. 우리에게는 우연이 있지마는 하나님께는 필연이 있을 뿐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모든 것이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아야 돼요. 잠시잠깐 스스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머리가 좀 똑똑하다고 해서 따지고…… 그래서 말이 많아지는 거예요. 따지기로 들면 저쪽은 저쪽대로 할 말이 있어요. 나만 똑똑한 게 아닙니다. 그런고로 침묵하세요. 언제든지 진정한 신앙은 고통 앞에서 침묵하게 마련입니다. 더구나 매를 맞을 때에는 곱게 맞아야지요.

거기에 변명이 있던가 불만이 있고 원망이 있으면 그 고난은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바울과 실라의 입장을 생각해봅시다. 유대사람들은 보통 사람을 때릴 때에 율법에 있는 대로 사십에서 하나를 감합니다. 태형 마흔을 넘기면 사람이 죽을 수 있거든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입니다. 고린도후서 112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고 말씀합니다. 매를 많이 맞은 것 같아요. 사실 매를 맞는다는 게 어려운 것이거든요. 태형이라는 것이 유대사람들에게는 그런 율법이 있어서 그것을 지키고 있지마는 이방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이건 정말 인정사정 없어요. 마구잡이로 내려치는 거예요. 사십에 하나 감하는 것도 없어요. 50도 좋고 60도 좋아요.

그리고 본문에 보니 바울과 실라가 매맞고 기절했다가 밤중에야 깨어난 것 같아요. 몸은 쑤시고 아픈데 그들은 그 시간에 기도를 합니다.

찬송을 합니다. 그래서 감옥 안에 은혜가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 깊은 밤중에 조용히 찬송을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찬송을 할 때에 감옥 문이 흔들리면서 기적이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 매를 맞아보았습니까? 매도 한 번쯤 맞아보는 것은 해롭지 않아요. 못 맞아보았으면 매맞는 게 어떤 것인지 실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도 좀 억울한 매를 맞아보았어요. 군에 있을 때에 작전이 잘못되어 책임을 지게 되어서 하나, …… 그냥 내려치는데 열 넷까지는 셌는데 더는 못 셌어요. 까무라쳤어요. 어느 때인지 정신을 차려보니 영창 안이었습니다. 으시시하고 온몸이 쑤시고 아픈데, 억울하고 분해서 좀 울었어요. 어렸을 때라서 훌쩍훌쩍 울었더니 깜깜한 데서, 보이지 않는 데서 웬 사람이 "울 거 없어. 세상사는 것이 다 그런 거야. 잘 참으라고. 죽지 않았으니 됐지 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 누구요?" 물었더니 "작전과장이야"합니다. 나는 통신과장이었는데, 작전과장인 그 사람도 매맞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과 사귀었는데 그 사람은 뒷날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다 만나면 그 때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웃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라도 매를 맞아보았으므로 나는 매맞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실감할 수 있어요.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정신을 잃은 채 옥에 갇혔다가 정신이 깨어날 때, 몸이 쑤시고 아픈데도 보세요.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순간에 기도를 합니다. 기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생각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나를 때린 사람, 그 형편없는 인간들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쪽으로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하거든요. 생각의 방향이 문제입니다.

생각을 하나님께로 향해요. 하나님께로 향해서 우러러봅니다.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의 뜻이 생각나고, 하나님 앞에 있는 자기 모습이 보이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이 고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중에 당하는 고난이거든요.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그런 사건이 있는 게 아닙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생각하기 시작한 줄 압니다.

그리고 특별하게 생각한 것이 하나 있었을 것으로 보는데, 바로 스데반을 죽일 때의 일입니다. 내가 스데반을 돌로 쳐죽였는데 나는 매맞고도 아직 죽지 않았어요. 순교하던 스데반의 그 모습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길이 환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시던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사도된 다음에 복음을 전하느라고 이곳저곳에 다니면서 교회를 세우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예수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고, 거기에 가담하고, 그리고 발악을 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벼락을 맞고 지옥으로 떨어져야 할 사람이 나인데,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이 나인데, 하나님께서 그런 나를 강권으로 붙드셔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로잡으셔서, 포로 하셔서 내가 사도가 도고, 복음을 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영광된 매를 맞고 이제 죽는다면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니 이 얼마나 큰 영광이냐--감사,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매를 맞는 것도 감사하고, 감옥에 있는 것도 감사하고, 이대로 죽는 것도 감사합니다. 이렇게 찬송을 하면 감옥밖에 나가리라고, 그런 기적을 기대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기대가 있어서 찬송하고 기도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지금의 이 모습, 이 형편 이대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쓰셨어요. 지금까지 여기저기 복음을 전한 것으로 만족해요. 더 바랄 것이 없어요. 이대로 죽어도 좋아요.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찬송을 하게 됩니다. 대체로 이스라엘사람들이 당시에 부르던 찬송은 시편입니다. 시편에 곡을 붙여서 우리네 시조 읊듯이 읊조리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시편 23편을 읊조렸는지도 모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들은 여러 찬송을 기억나는 대로 불렀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같은 시련 속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무도 미워할 것 없어요. 뿐만 아니라, 절망할 것도 없어요. 낙심할 것도 없어요. 좌절할 것도 없어요.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송하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감사기도 하고, 찬송을 하는 그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여기에 기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도 조용하게 기도하고, 찬송하고, 어떤 때에 많은 비난과 문제에 부닥칠 때에도 그 마음이 항상 고요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 해 동안 그 같은 마음의 평안을 보면서 참으로 우러렀어요. 나 같으면 이런 때에 화를 내겠다, 나 같으면 이런 때에 절망을 하겠다, 나 같으면 이런 때에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잠을 못 잘 것이다 싶은데도 그분은 그렇지 않았어요. 누가 그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내가 과연 그런 사람일는지 모르겠으나 내 삶의 모든 상황에서 내가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 비결은 성경 마지막 장을 믿기 때문이야." 성경 마지막 장--요한계시록 22장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환상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은 평안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 아무 것으로도 우리는 참 평화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고난을 당할 때마다 사선을 넘어서, 요단강 저편, 저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아주 작고 가난한 교회의 목사님의 아내가 마흔네 살인데 악성 폐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떠나기 전 44일 간 투병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매일매일 일기를 썼습니다. 힘이 드는데도 교회에 나가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다가 마침내 교회에 나갈 수 없게 되었을 때에는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일기를 썼습니다. 그 일기가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력이 다되었을 때, 죽기 바로 이틀 전에 그녀는 이런 시 한 수를 남겼습니다. "내 신음이여, 내 찬미의 노래가 되어라. 내 괴로운 숨결이여, 내 신앙의 고백이 되어라. 내 눈물이여, 내 노래가 되어라. 주님 찬양하는 내 노래가 되어라, 내 열이여, 땀이여, 내 숨결이여, 최후까지 내 구원의 주를 찬양할 노래가 되어라."

여러분, 우리는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빌립보감옥에서 매를 맞고도 그 죽을 지경에서, 그 억울함에서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바울과 실라의 모습을 생각할 것입니다.

참으로 깊은 밤의 찬송입니다. 인생의 깊은 밤의 찬송입니다. 형통하는 날이 아침이라면 이 고난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밤이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깊은 밤에서 정말 거룩한, 깨끗한 찬송을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낮에 멀리 보는 것 같아서 사실은 밤에 멀리 봅니다. 이 세상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때에 가장 멀리 있는 별빛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볼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 깨끗한 눈으로 주님의 얼굴을 더 밝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야 참으로 소망적인 찬송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심야의 찬송(사도행전 16:1925)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 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바울은 어디 가서 복음을 전하든지 순탄하게 교회를 세운 일이 거의 없습니다. 어느 도시에 가든지 핍박과 고난을 당했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고난 당했던 이야기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고후 11 : 23)"--그러나 그는 그 같은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하고 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럽으로 복음이 건너오면서 첫 성 빌립보에 이르고, 강가에서 루디아를 만나고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면서 어렵지 않게 교회가 설립되고…… 어쩐지 순탄하다 싶었는데 그렇지 않아요.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바울은 여기서도 결국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한다거나 우상숭배 문제라거나 해서 복음에 정면적으로 충돌되는 사건이 있어서 핍박을 당했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하겠는데 이건 오늘에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아주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로 인하여 그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어쩌면 바울이 당한 많은 고통 중에서 가장 애매하고 가장 부당한 일로 당하는 고난일 것입니다. 그것은 빌립보교회 사건입니다. 다른 데서 고난 당한 것과는 질적으로 달라요.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고, 옥에 가두고, 착고에 채웠다고 합니다.

착고에 채웠다는 것에 대하여 조금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옛 우리 나라에서는 칼을 씌운다 해서 두꺼운 널빤지로 길쭉하게 만들어 죄인의 목만 끼일 만큼 구멍을 뚫어 가지고 거기에 죄인의 목을 끼워 고정시킨 형틀이 있었는데 이 칼을 쓰고 옥에 갇히면 눕지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므로 고통이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착고라고 하는 것은 한층 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구멍이 다섯 개입니다. 널빤지에 뚫린 다섯 개의 구멍에 목과 두 팔목, 두 발목을 끼우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를 이 착고에 채워서 가두고 지키라 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재판도 없었거든요. 죄목도 메기지 않았어요.

무슨 죄로 매를 치고, 무슨 죄로 감옥에 가두는지, 명분이 없었습니다.

구실을 잡고야 때리든 말든 할 수 있을 게 아닙니까? 죄목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말하자면 "네 죄를 네가 알렷다!"하는 으름짱으로 실토케 취조하는 것도 아니예요. 도대체 매는 왜 맞는 거냐, 이 말입니다. 심문을 한다면 바울이 술술 얘기를 할 것인데 물어보지도 않고 을러메지도 않아요. 그냥 끌어다놓고 따타부타없이 옷을 벗기고 때렸어요. 맞는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맹랑한 노릇이지요. 억울하기 짝이 없어요.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지난 시간에 본 바와 같이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이 있었는데 그 주인에게 적지 않은 수입을 올려 준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여종이 바울과 실라가 길을 지나갈 때마다 따라오면서 소리지르기를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합니다. 여러 날을 이렇게 하는데 이게 바로 귀신들린 여자거든요.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야 얼마나 좋은 전도입니까? 정말 귀한 일이지요. 그러나 정신나간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하고 다니면 이건 정말 복음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는 믿지 않으면서 그런 소리를 하거든요. 그래서 바울은 심히 괴로워합니다. 참다못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하고 여인을 향해 소리칩니다. 귀신은 그 시로 내쫓기고 여종은 깨끗해졌습니다. 정신병자가 성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온전해졌으니 다행으로들 여겨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라 합니다. 더는 이 여종을 통해서 돈을 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란을 떠는 거예요. 자기들에게 돌아올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 하나야 미치든 죽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게 돌아오는 이익, 그것만 생각하는 동안에 다른 일은 전혀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기주의자들이 다 그렇습니다. 물질주의자들이 다 그렇습니다. 물질과 이기심에 취하고 말면 눈에 보이는 게 없습니다. 남편도 안보이고, 아내도 안보입니다. 자식도 안보이고, 친구도 안보입니다. 오로지 돈벌 생각뿐입니다.

그 여종의 주인들이 정신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여종이 성하게 된 것을 보고 사도 바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될 것입니다. 중국에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금방에 젊은 사람이 하나 들어와서 금덩이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다짜고짜 집어들고 달아나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보았어요. 잡혔지요. ", 이놈아!"하고 주인이 "아무도 없을 때라면 몰라도 남들이 다 보는 데서 벌건 대낮에 그걸 가지고 도망가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도대체 너는 어찌된 놈이냐?"하고 야단을 칩니다. 그랬더니 이 젊은이 왈 "금덩이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안보였습니다." 이게 금이 가진 매력입니다. 여러분, 이걸 알아야 합니다.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들에게 돌아오는 이익밖에 몰랐어요. 이것이 끊어졌다고 해서 발광을 하는 거예요. 여종이 성하게 된 것은 기적이 아닙니까? , 귀신들린 그 여자가 하는 소리도 좀 귀담아 들을 줄 알아야지요.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어요. 다만 손해난 것만 가슴 아픕니다. 바울 때문에 손해났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란을 떠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들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현실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로마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21)"--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일깨우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풍속을 전하는 게 아닙니다. 남의 풍속을 해치는 게 아닙니다. 다시말 하면 복음이란 문화의 문제가 아닙니다. 초문화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문화적 사건으로 받아들였어요. 이것이 바로 복음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지난주간에 일본에 가 있었습니다. 일본 교역자들 수양회에 가 있었습니다. 일본의 교회가 부흥이 안됩니다. 우리보다 역사가 길어서 2백 년이나 되었는데도 교회는 여전히 부흥이 안되고 있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가 뭐냐하면, 저들은 기독교를 서구 문화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는 "기독교를 서국 제국주의의 앞잡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를 받아들이는 것도 자기네 문화를 빼앗기는 일이라고,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착각이 소위 지성인들의 마음속에 2백 년 동안을 흘러내리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문화의 장벽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때, 복음을 전하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풍속이나 문화의 문제가 장벽으로 가로막히면 안됩니다.

벽안(碧眼)의 선교사들을 처음 보았을 때, 우리네 조상들이 얼마나 이상하게 여겼겠어요? 눈알은 새파랗고, 얼굴은 하얗고, 머리카락은 노랗고, 물색 없이 키는 크고, 우뚝하니 코는 크고…… 이런 양반들이 와 가지고 갓을 쓰고, 담뱃대까지 물고 다녔어요. 문화의 장벽을 허물고자 함이었지요. 기다란 담뱃대까지 물로 당나귀를 타고 전도하러 다녔어요. 세월이 조금 지나간 다음에는 당나귀 대신 자전거를 타고 다녔어요. 자전거 소리가 나면 동네 아이들이 양귀신 왔다면서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이런 판국이니 저들이 얼마나 애썼는가 보세요. 처음 예배당을 지을 때에 초가집으로 지었어요. 제가 어릴적 처음으로 다니던 교회도 초가집이었습니다. 기역자 집이었어요. 남녀가 유별했던 때라 남자 여자가 섞여 앉으면 큰일나기 때문에 기역자였습니다. 남녀가 섞여 앉는 것, 도대체 안 되는 것이예요. 그 때 사람들이 지금을 보면 기절을 할 것입니다, 기역자 예배당에 한쪽으로는 남자가 들어오고, 다른 쪽으로는 여자가 들어오고, 남자 여자가 서로 못 보게 했어요. 목사님만 보는 것이지요. 기독교가 풍속에 저촉되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 나라 풍속 때문에 복음이 손해를 봐서는 안도는 일이지요.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니 저들은 바울 등이 이상한 풍속을 전한다고 했어요. 복음을 전했지 풍속을 전했습니까? 그걸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문화의 문제가 아니예요. 잊지 말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문화를 가지고 우리 문화 안에서 복음을 믿습니다. 기독교는 풍속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핍박하는 사람은 복음 자체를 복음으로 이해하지 않고 꼭 풍속으로 이해합니다. 복음은 정치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기독교를 정치적인 문제로 돌립니다. 그래서 핍박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핍박당하는 이유입니다. 복음은 내셔날리즘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은 꼭 이것을 내셔날리즘으로 파악합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저 북한도 기독교를 핍박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유민주주의 앞잡이라는 것이지요. 미제국주의 앞잡이라고 몰아붙입니다. 기독교를 복음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 사건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깊이 생각해보면 빌립보사람들이 핍박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초문화적인, 초풍속적인 사건으로 받지 않고 하나의 풍속으로, 하나의 정치로, 하나의 사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합니다. 근본적으로 오해요,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풍속과 관계가 없습니다. 언제나 초문화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본문에 보니 무리가 소동을 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자기가 손해를 보았다고 해서 소란을 떨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선동되어서 군중심리가 발동한 것입니다. 바울 죽여라, 실라 죽여라 하고 저들은 소란을 떨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끌고 가 매를 쳤다고 합니다.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아요.

군중 심리적인 감정의 격함이 이 같은 엄청난 사건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 점을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애매한 고난이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고난입니다. 이런 매도 맞아야 되는 겁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는 대로 사도 바울은 매를 맞을 때, 왜 때리느냐, 좀 알아보고 때려라, 얘기도 좀 해보자, 재판장을 만나자, 시장을 만나자, 하고 따질만한데도 그냥 매를 맞았습니다. 여러분,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재판 이전입니다. 아무 판결도 없이 매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마디의 변명이 없습니다. 정당성을 피력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온유, 겸손한 가운데 매를 맞습니다.

베드로전서 219절에 보면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라고 말씀합니다. 은혜가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매를 맞을 때,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인은 말이 없어야 돼요. 잊지 말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말할 필요가 없어요.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가만히 보면, 따질 것 다 따지고 매를 맞으려 해요.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뭐라고 말을 하는데 며느리가 똑똑해 가지고 자꾸 따지거든요. 시어머니가 ", 또박또박 그렇게 자꾸 말대꾸할 거냐?"하면 "말대꾸가 아니라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합니다.

여러분, 이치란 보는 대로 달라요. 각도가 달라요.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아무리 애매해도 설명을 하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세요. 팔자가 어떻다느니 이치가 어떻다느니, 억울하다느니, 원통하다느니 변명을 하지 마세요. 도대체 세상에 변명처럼 불 신앙적인 게 없어요.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정말 이유가 없었습니까? 바울이 지금 매 맺는 순간에는 억울하고, 분하고, 부조리한 매라고 생각하지만 지나간 다음에 생각해보세요. 어때요? 그게 얼마나 큰 사건이었습니까?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큰 영광을 받으시고, 그것을 통하여 빌립보교회는 확고한 기틀을 잡게 되지 않습니까? 내 생각에는 이유가 없지마는 하나님께는 이유가 있어요. 내 좁은 생각에는 부당한 것 같지마는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는 이유가 있어요. 우리에게는 우연이 있지마는 하나님께는 필연이 있을 뿐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모든 것이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아야 돼요. 잠시잠깐 스스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머리가 좀 똑똑하다고 해서 따지고…… 그래서 말이 많아지는 거예요. 따지기로 들면 저쪽은 저쪽대로 할 말이 있어요. 나만 똑똑한 게 아닙니다. 그런고로 침묵하세요. 언제든지 진정한 신앙은 고통 앞에서 침묵하게 마련입니다. 더구나 매를 맞을 때에는 곱게 맞아야지요.

거기에 변명이 있던가 불만이 있고 원망이 있으면 그 고난은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바울과 실라의 입장을 생각해봅시다. 유대사람들은 보통 사람을 때릴 때에 율법에 있는 대로 사십에서 하나를 감합니다. 태형 마흔을 넘기면 사람이 죽을 수 있거든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입니다. 고린도후서 112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고 말씀합니다. 매를 많이 맞은 것 같아요. 사실 매를 맞는다는 게 어려운 것이거든요. 태형이라는 것이 유대사람들에게는 그런 율법이 있어서 그것을 지키고 있지마는 이방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이건 정말 인정사정 없어요. 마구잡이로 내려치는 거예요. 사십에 하나 감하는 것도 없어요. 50도 좋고 60도 좋아요.

그리고 본문에 보니 바울과 실라가 매맞고 기절했다가 밤중에야 깨어난 것 같아요. 몸은 쑤시고 아픈데 그들은 그 시간에 기도를 합니다.

찬송을 합니다. 그래서 감옥 안에 은혜가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 깊은 밤중에 조용히 찬송을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찬송을 할 때에 감옥 문이 흔들리면서 기적이 나타나게 됩니다.

여러분, 매를 맞아보았습니까? 매도 한 번쯤 맞아보는 것은 해롭지 않아요. 못 맞아보았으면 매맞는 게 어떤 것인지 실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도 좀 억울한 매를 맞아보았어요. 군에 있을 때에 작전이 잘못되어 책임을 지게 되어서 하나, …… 그냥 내려치는데 열 넷까지는 셌는데 더는 못 셌어요. 까무라쳤어요. 어느 때인지 정신을 차려보니 영창 안이었습니다. 으시시하고 온몸이 쑤시고 아픈데, 억울하고 분해서 좀 울었어요. 어렸을 때라서 훌쩍훌쩍 울었더니 깜깜한 데서, 보이지 않는 데서 웬 사람이 "울 거 없어. 세상사는 것이 다 그런 거야. 잘 참으라고. 죽지 않았으니 됐지 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 누구요?" 물었더니 "작전과장이야"합니다. 나는 통신과장이었는데, 작전과장인 그 사람도 매맞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과 사귀었는데 그 사람은 뒷날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다 만나면 그 때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웃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라도 매를 맞아보았으므로 나는 매맞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실감할 수 있어요.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정신을 잃은 채 옥에 갇혔다가 정신이 깨어날 때, 몸이 쑤시고 아픈데도 보세요.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순간에 기도를 합니다. 기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생각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나를 때린 사람, 그 형편없는 인간들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쪽으로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하거든요. 생각의 방향이 문제입니다.

생각을 하나님께로 향해요. 하나님께로 향해서 우러러봅니다.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의 뜻이 생각나고, 하나님 앞에 있는 자기 모습이 보이고, 나아가서는 자기의 이 고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중에 당하는 고난이거든요.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그런 사건이 있는 게 아닙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생각하기 시작한 줄 압니다.

그리고 특별하게 생각한 것이 하나 있었을 것으로 보는데, 바로 스데반을 죽일 때의 일입니다. 내가 스데반을 돌로 쳐죽였는데 나는 매맞고도 아직 죽지 않았어요. 순교하던 스데반의 그 모습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길이 환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시던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사도된 다음에 복음을 전하느라고 이곳저곳에 다니면서 교회를 세우던 일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예수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고, 거기에 가담하고, 그리고 발악을 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벼락을 맞고 지옥으로 떨어져야 할 사람이 나인데,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이 나인데, 하나님께서 그런 나를 강권으로 붙드셔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로잡으셔서, 포로 하셔서 내가 사도가 도고, 복음을 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영광된 매를 맞고 이제 죽는다면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니 이 얼마나 큰 영광이냐--감사,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매를 맞는 것도 감사하고, 감옥에 있는 것도 감사하고, 이대로 죽는 것도 감사합니다. 이렇게 찬송을 하면 감옥밖에 나가리라고, 그런 기적을 기대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기대가 있어서 찬송하고 기도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지금의 이 모습, 이 형편 이대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쓰셨어요. 지금까지 여기저기 복음을 전한 것으로 만족해요. 더 바랄 것이 없어요. 이대로 죽어도 좋아요.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찬송을 하게 됩니다. 대체로 이스라엘사람들이 당시에 부르던 찬송은 시편입니다. 시편에 곡을 붙여서 우리네 시조 읊듯이 읊조리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시편 23편을 읊조렸는지도 모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들은 여러 찬송을 기억나는 대로 불렀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같은 시련 속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무도 미워할 것 없어요. 뿐만 아니라, 절망할 것도 없어요. 낙심할 것도 없어요. 좌절할 것도 없어요.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송하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감사기도 하고, 찬송을 하는 그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여기에 기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도 조용하게 기도하고, 찬송하고, 어떤 때에 많은 비난과 문제에 부닥칠 때에도 그 마음이 항상 고요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 해 동안 그 같은 마음의 평안을 보면서 참으로 우러렀어요. 나 같으면 이런 때에 화를 내겠다, 나 같으면 이런 때에 절망을 하겠다, 나 같으면 이런 때에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잠을 못 잘 것이다 싶은데도 그분은 그렇지 않았어요. 누가 그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내가 과연 그런 사람일는지 모르겠으나 내 삶의 모든 상황에서 내가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 비결은 성경 마지막 장을 믿기 때문이야." 성경 마지막 장--요한계시록 22장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환상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은 평안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 아무 것으로도 우리는 참 평화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고난을 당할 때마다 사선을 넘어서, 요단강 저편, 저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아주 작고 가난한 교회의 목사님의 아내가 마흔네 살인데 악성 폐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떠나기 전 44일 간 투병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매일매일 일기를 썼습니다. 힘이 드는데도 교회에 나가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다가 마침내 교회에 나갈 수 없게 되었을 때에는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일기를 썼습니다. 그 일기가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력이 다되었을 때, 죽기 바로 이틀 전에 그녀는 이런 시 한 수를 남겼습니다. "내 신음이여, 내 찬미의 노래가 되어라. 내 괴로운 숨결이여, 내 신앙의 고백이 되어라. 내 눈물이여, 내 노래가 되어라. 주님 찬양하는 내 노래가 되어라, 내 열이여, 땀이여, 내 숨결이여, 최후까지 내 구원의 주를 찬양할 노래가 되어라."

여러분, 우리는 어떤 고난을 당하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빌립보감옥에서 매를 맞고도 그 죽을 지경에서, 그 억울함에서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바울과 실라의 모습을 생각할 것입니다.

참으로 깊은 밤의 찬송입니다. 인생의 깊은 밤의 찬송입니다. 형통하는 날이 아침이라면 이 고난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밤이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깊은 밤에서 정말 거룩한, 깨끗한 찬송을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낮에 멀리 보는 것 같아서 사실은 밤에 멀리 봅니다. 이 세상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때에 가장 멀리 있는 별빛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볼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 깨끗한 눈으로 주님의 얼굴을 더 밝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야 참으로 소망적인 찬송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