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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에 매임이 된 사람(사도행전 20:13~25)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 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리고 또 그 다음날 밀레도에 이르니라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사도 바울은 긴긴 전도여행을 마치고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아시아 지방과, 지금은 유럽이라고 말합니다마는 그 당시로 보면 아가야 지방입니다. 소아시아 지방과 아가야 지방 쪽의 선교 여행을 다 마치고 서둘러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올라가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 일행들은 배를 타고 가라 하고 자신은 육로로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육로로 갔을까요? 육로로 가야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힘든 일이고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또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그럼에도 육로를 택하여 걸어가면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옛날에 전도했던 곳을 다시 들르면서 믿음을 격려하고 당부하고자 하는 사도 바울의 열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간혹 어떤 분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편한 교통수단보다는 오히려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차를 타기도 하고 버스를 타기도 합니다. 사람을 만나야 전도를 하니까 편한 길로 가기보다 오히려 굽은 길로 가고, 타고 가기보다는 걸어가고, 이렇게 하면서 될 수 있는 대로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 전도하려고 하는 바울의 열정이 그 여행 중에도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을 보니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한다, 그래서 급히 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왜 급히 예루살렘에 가려고 애를 쓰는가―이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생각하게 됩니다마는 아직도 확실한 것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곳곳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생활철학으로 미루어보건대 우선 예루살렘이 여러 해 동안 흉년 든 것으로 인해서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각 지방에 다니면서 헌금을 모았습니다. 처음 믿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사람들을 위해서 연보를 한 것인데,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오직 신앙적 동기에서 연보된 것입니다. 이것은 동족애나 민족애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로 헬라사람들이 유대사람들을 위해 헌금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이것은 기독교가 지닌 세계적 종교로서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 처음 되는 사건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까?
헬라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사람들을 위해서 헌금하다니, 지금으로 말하면 흔히 생각할 수 있지마는 옛날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입니다. 이런 귀한 일을 해놓았기 때문에 이것을 그저 인편에 보내지 않고 사도 바울이 직접 가지고 가서 "이것은 이런이런 성격에서 이렇게 귀하게 연보된 것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물질만 전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전하고 사랑을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사도 바울이 온 세계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에 좋은 얘기만 들은 것이 아닙니다. 오해도 많았어요. 이러저러한 일로 인해서 많은 오해와 유언비어도 있고, 잘못된 평판도 있었어요. 그래 예루살렘에 가서 그가 직접 그 많은 사람들을 보고 자기 변명을 하고 싶은 거예요. 오해를 풀어주고 싶은 거예요. 전혀 무근한, 잘못된 이야기들이 있는 것을 알고 '사실은 이러이러하다'라고 설명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는 그 동안에 선교를 하면서 여기저기 교회를 세우고, 몇 사람이 예수를 믿고, 얼마나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크게 확장되어가고 있는지, 또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어가고 있는지, 그런 실상을 가서 보고함으로써 예루살렘에 있는 교인들이 이 보고를 듣고 이 세계적인 교회에 대한 긍지를 가지게 하며 소위 christiandom ―그리스도의 나라를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합니다. 이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 하셨는가―그것을 말하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시고, 친히 역사 하시고 한 것을 보고 받으면 틀림없이 저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하셨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 그 귀한 사역과 실적을 가지고 가서 친히 보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래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갔다가 일단 그 일대의 선교 사업을 마치고 연후에 로마로 가고 싶은 거예요. 그런 계획이 그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는 길에 그는 밀레도라는 섬에 도달하게 됩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까지는 48킬로입니다.
100리 좀 넘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뱃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복음을 전했어요. 그의 전도 여행 중에는 한 곳에서 가장 오랫동안 전도한 곳입니다. 그곳이 에베소입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에 다시 들어가게 되면 할말도 많고 시간도 많이 걸릴 것 같아서 일부러 에베소에 안 들어가고 밀레도에 있으면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오라고 부릅니다. 초청을 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전하게 됩니다.
장로라는 것은 프레스뷔테로스라고 해서 presbyterian(장로교)의 연유입니다. 노인이요, 감독이요, 윗사람입니다. 혹은 대표자라는 의미입니다. 장로라는 직이 그 당시에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유대사람들 사회에 장로라고 하는 어른들이 있었으니까 풍속에 의해서 장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직도 장로교회 직분이 확정되기 전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장로들을 불렀다고 하는 것은 곧 교회 어른들을 불러들였다는 말입니다. 지도자급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유언과도 같이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니 이제부터는 당신들이 교회를 맡아서 인도해야 되겠소"하면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당부의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설교를 하게 되는데, 저들이 일반교인들도 아니고, 안 믿는 사람들도 아니고, 교회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만 따로 모아서 설교하는 것은 바울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중요한 내용을 갖춘 설교입니다.
중요한 마지막 교육 행사였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의 내용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몇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18절에 보면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구구한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너희 가운데서 내가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씀합니다.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지는 말씀입니다. 말만이 아니고, 혹은 논리적이고 교리적이고 철학적인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고, 자기 신앙과 행위, 자기가 행한 바 실천, 자기 신앙적 인격이 담긴 확신한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은 말로만 증거한 사람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행하는 모든 행위, 행위를 통해서 복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고로 이 시간에 "너희가 다 아는 바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3년 동안 너희 가운데서 있을 때에 항상 복음을 전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잘 알 것이다―하는 말씀입니다.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행동에서 복음을 증거 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장로님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 자녀들을 모아놓고 유언을 하는 시간에 참여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 장로님이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너희들은 나와 더불어 20년 30년을 같이 살았다. 내가 이 시간에 무슨 다른 말을 하랴." 얼마나 중요한 얘기입니까? 그 다음 말이 중요해요. "내가 예수를 믿으면서 아주 크게 무슨 일을 한 것도 없고, 특별한 일을 한 것은 없지만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애썼던 것은 너희가 알 것이다." 그뿐이었습니다. 내 뒤를 따라서 믿음으로 살아주면 좋겠다, 그 말입니다. 무슨 일장 연설을 하겠습니까? 간혹 여기서 부도가 날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합니다. 또 예수 믿으라고 합니다. 진실 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가르치면서 때로 보면 그런 일이 있어요. 주일인데도, 야, 교회 갈 것 없다, 공부해라, 고 3이 어딜 가니―그래놓고 자기는 교회 갑니다. 아이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우리 어머니는 신앙이다 하나님 영광이다 하나님 제일주의다 하고 말만 했지 시험 앞에는 꼼짝못하는구나, 말하고 행동이 틀리는구나―하지 않겠어요? 무엇이 제일이냐 이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무엇을 제일주의로 사느냐―그것이 말로 통할 얘기입니까? 예수 믿어라 해서 믿게 됐습니까?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예수를 제대로 믿는지 안 믿는지 빤히 아는데, 생활 속에서 증명되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고로 할말이 없어요.
사도 바울은 여기서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서 항상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가 다 알고 있지 않느냐?'―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노출된 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입으로만 증거 하는 것이 아니예요. 행동으로 하는 것이예요. 심지어는 마음가짐으로 항상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살아 있는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기도가 되고,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생활 자체가 신앙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참된 의미에서 복음을 전할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말로만 는 것이 아니예요. 그래서 저들에게 본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 자세를 요약해서 지금 네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모든 일에 겸손했다는 것입니다. 겸손에 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수필을 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누가 나에게 당신의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러분, 여러분에게 딱 한 가지 소원만 말하라고 한다면 뭐라고 대답을 하겠습니까? 이 수필을 쓴 사람은 이렇게 대답을 하고 있어요. "겸손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또 가장 어려운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겸손하기가 제일 어렵다"라고 대답하겠다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겸손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겸손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겸손하기가 제일 어려운 것입니다. 뭐 좀 있으면 그저 그것 풀어내고 싶고, 좀 알면 말하고 싶고, 잘난 것 있으면 자랑하고 싶어요. 겸손이 아주 힘든 거예요. 여러분, 고민이 많다고 하지마는 사실은 다 겸손하지 못해서 고민이지 겸손하고 보면 고민될 것도 없고 근심할 것도 없습니다. 문제의 근본은 겸손하지 못해서입니다. 바울은 모든 겸손, 내가 너희 가운데에 있을 때에 내가 얼마나 겸손했는지는 너희가 알지 않느냐 합니다.
두 번째로 "눈물"이라 합니다. 이것은 그의 애정을 엿보게 하는 것입니다. 동정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볼 때에 눈물이 있어요. 또 죄인들을 볼 때에,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볼 때에 안타까워하는 뜨거운 정열이 있어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다 말라버린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정말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이 복음을 미처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을 볼 때에 눈물을 흘렸어요. 또 그 다음에는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라 합니다. 인내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에 있을 때에 얼마나 참았는지, 너희는 잘 알 것이다―인내란 참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의 인내에 관한 철학은 이렇습니다. 위대함의 바로미터는 인내입니다. 얼마나 크냐, 얼마나 참을 수 있느냐, 얼마나 믿음이 있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는 유명한 말씀을 합니다. 고린도서에 보면 사도권을 무시하고 있는 유대사람들이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권세가 없다, 자격이 없다 하고 비난을 하매 사도 바울이 이에 대하여 답변은 하는데, 첫 번째가 참았다는 말씀입니다.
부부싸움에서도 누가 정신 연령이 위입니까? 육체적인 연령은 접어두고 정신 연령이 어느 쪽이 위냐, 어느 쪽이 어른이냐 할 때에 참는 쪽입니다. 못 참는 자는 나이가 얼마든지 간에 유치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참지를 못해요. 참는 데 약합니다. 그렇지만 어른들은 그럴 수가 없어요. 혹 잘못하는 것을 봐도 참아요. 오래오래 참는 거예요. 그 인내가 어느 정도냐, 그것이 그 사람의 신앙의 덕을 말해주는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참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대하여 사도가 아니냐, 내가 너희들을 참지 않았느냐, 참는 것을 보면 내가 사도가 아니냐―못 참는 것은 유치한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의 간계 많은 시험에 잘 참는 것을 너희들이 보지 않았느냐―얼마나 귀중한 말씀입니까?
또 그 다음에는 꺼림이 없이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용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꺼리더냐, 내가 사람의 눈치를 보고하더냐-하나님보고 일했지요. 언제나 하나님께 충성하고 거리끼는 것 없어요. 누구의 정실에 매이지 않고, 담대하게 신앙적 용기로 그렇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알고 있지 않느냐-이것이 그가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지낼 때에 되어졌던 이야기를 요약한 말씀입니다. 그런 자세로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겸손과 눈물과, 그리고 인내와 용기, 이것을 너희가 알고 있지 않느냐―참 위대한 사도입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3년을 같이 지낸 사람들을 앞에 하고 하는 말씀입니다. 확실하게 나는 겸손과 눈물과 인내와 용기로 너희 가운데 살았다, 너희가 다 아는 바다―자신 있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 전파 방법에 대해서는 전하고 가르치고 증거 했다고 말씀합니다. 때로는 전파합니다. 때로는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가르치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의 생활을 통하여 직접 증거 합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고 합니다. 맹수들이 있는 곳에도 던져져서 고생을 한 것 같아요. 그런 고생을 다 했더라도 그것이 바로 증거이지요. 부활 신앙의 증거이지요. 조금도 꺼리지를 않고, 핍박과 환난을 감수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증인입니다. 그리고 그가 전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하나님께 대한 회개, 예수께 대한 믿음, 이것이 그의 메시지의 내용이었어요. 회개라고 하는 말은 '메타노이아'로 '뒤로 돌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막연하게 돈다는 것이 아니예요. 세상으로 가던 사람이 뒤로 돌아서 하나님께로, 하나님께 대한 회개입니다. 이것은 아주 바로 된 말입니다. 뉘우치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세상적인 것을 끊어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지요. 그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수용하고 그리스도께 충성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 대한 회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그가 복음 전한 것을 딱 한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오늘도 보면 아직도 우리가 덜 회개한 것이 많아요. 하나님께 가야할 사람이 세상에 매여 있어요. 그의 행동이나 그의 성품이나, 그의 말이나, 그의 사회생활 속에서 아직도 세상에 매여 있어요. 아직 회개가 덜 되었어요.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계속적으로 우리가 훈련을 받고, 말씀을 듣고, 또 예배하고 또 기도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22절 이하의 말씀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현재적 고백이 나타나 있습니다. 과거는 그렇고 현재적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심령의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갔다―심령의 매임을 받았다(에돈메노스)라고 말하는데, 매인다는 말은 포로 된다, 혹은 붙들린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심령입니다. 프뉴마―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의 영도 프뉴마고 성령도 프뉴마입니다.
보통은 프뉴마 하기오스라 해서 성(聖)자를 붙여놓으니까 문제가 없는데 여기서는 그냥 영이라고만 했거든요. 이것은 성령을 가리킨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사도 바울 자신의 영을 가리킨다고 할 수 도 있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본문에는 "나쁜 심령의 매임을 받아"라 하니까 내 영인 것처럼 되는데, 표준 번역이나 공동 번역에는 성령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매임을 받아"라고 많은 사람이 택합니다. 성령과 우리의 영이 만나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좋겠습니다마는 그러나 오히려 직설적으로 성령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이 뜻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에 묶였다고 함은 성령에 포로 되어서 붙들려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강력한 영적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일을 종종 당했던 것 같습니다. 평상시의 성령의 감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감동하는 것,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은사적인 것입니다. 의례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평상시에 성령에 충만하고 은혜 가운데 사는 그런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비상한, 은사적인 성령의 특별한 체험을 말하는 것이예요.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사도행전 16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성령은 복음을 전하는 영인데 아시아에서 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주 강하게 역사 하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체험이었다고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릅니다. 역시 말하려고 하니 말이 안되고, 말을 할 수가 없고, 마음이 불안하고―곧 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게도냐로 건너가게 되지 않습니까? 이젠 이 근방에 전하지 말고 저쪽으로 건너가라―자나깨나 그 쪽이 생각났던 것 같아요.
저리 가야 한다―그런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령의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꽉 차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하고는 비교가 안됩니다 마는 우리는 다 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가끔 이런 체험이 있을 것으로 압니다. 제가 이 시간에 이런 얘기를 하자면 참 얘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신비스럽게 생각할까봐, 그 말씀으로 안하고 하나만 얘기하겠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에,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하는데, 학교는 나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교회 다닌다고 졸업장을 안 주었거든요. 졸업장이 없어요. 진학은 해야 하는데 안되겠거든요. 그런 입장이어서 잠깐 국군들이 올라갔을 때에 다시 학교를 들어갔습니다. 졸업장을 타기 위해서 학교에 들어간 것이지요. 마침 학교의 교무과장이라고 하는 분이 저의 외사촌이에요. 와세다대학을 나온 분인데 그분이 교무과장이니까 찾아가서 한 학기만 더 공부해서 졸업장을 타야겠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해서 학교에 수속을 했습니다. 학교가 우리 집에서 40리길입니다.
그런데 이모네 집이 거기 있고, 삼촌네 집이 거기 있어서 책상까지 둘러메어 갖다놓고 이부자리 갖다놓고 학기 동안 하숙을 할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하루 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국민학교, 중학교, 다녔지마는 전부 개근입니다. 저는 예나 지금이나 결석하는 것 질색입니다. 아무튼 하루 공부하고 그날 밤 집에 와서 자는데 밤에 꿈을 꾸었어요. "빨리 집으로 가라"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를 나갔어요. 박창환 목사님의 아버지가 시무하는 교회였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교무과장 형님한테 갔더니 그가 나무 밑에서 이를 닦고 있었어요.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왜 하루 다니고 그만두려 하느냐 합니다. 이유는 묻지 마라 했습니다. 오늘만 안 오겠다는 거냐, 아주 안 오겠다는 거냐? 아주 그만두렵니다, 참 별놈 다 봤다, 아무튼 간에 네 마음대로 해라―그래 이불 보따리, 책상, 책 다 가지고 40리길을 내려왔어요. 내려온 다음날 그 학교가 폭격을 당했어요. 나중에 가보니까 우리 교실을 폭격했는데, 친구들의 머리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합니까? 아마 소망교회 목사 되라고 살려놓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심령에 매임을 받는 수가 있어요. 그 길로 가지 않고는 견디지를 못해요.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종종 가져요. 사도 바울이 스스로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안갈 수 없어요. 피할 수도 없어요. 핍박이 있어요.
가면 죽을는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 돼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을 만날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했으면, 무슨 일을 만나게 될는지도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점치는 영이 아닙니다. 가끔 보면 성령 충만히 받으면 어디 가서 뭘하고 누구와 결혼을 하고…… 별소리 다 합니다마는 그것은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바울이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갈 뿐 무슨 일을 만날 것인지는 모른다고 했어요. 성령을 받아 가지고 점칠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 주님 말씀으로 보니까 핍박이 있다는 것, 그것은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에 대한 각오는 서 있어요.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3, 24절)"―이미 하나님께 헌신해버렸어요. 무슨 일을 만나도 상관이 없어요. 살든지 죽든지 상관이 없어요. 예루살렘으로 갈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비장한 각오였습니다. 특별히 여기에 보면 나의 달려갈 길을 가려 한다고 경주자로 생각을 하고 있어요. 경주자가 뛸 때에는 목표를 향해서 뛰는 것입니다. 온 정력을 다해서 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로 14절이나, 디모데후서 4장 7절은 '경주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달려갑니다. 마치 경주자가 뛰는 것과 같이 뛰는 것입니다. 그 길에는 거칠 것이 없어요. 주저할 것도 없고요.
이것은 사명에 사는 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두 가지 삶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소유의 양식이요, 또 하나는 존재의 양식이다"라고. 소유의 양식이란 물질을 얻고, 권세를 얻고, 명예를 얻고, 얻으려 얻으려 하다가 아무 것도 못 얻고 죽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있고, 또 하나의 양식인 존재의 양식은 의미를 생각하고, 목적을 생각하고, 사명에 사는 것입니다. 무엇을 얻었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나 사명에 충실했느냐 입니다. 그것만 입니다. 사명을 위해 삽니다. 왜요? 사명이 내 생에 생명보다 더 중요하니까요. 살고 죽는다는 것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해요. 이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내 목숨 아무 것도 아니다, 언제 죽어도 좋다, 그런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세상에 났으니까, 나는 이것 때문에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니까, 이것 전하고 어디서 어떻게 끝나도 상관이 없어요. 다시 말하면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고, 그것을 위해 사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17, 18절에 보면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리라 합니다. 피를 쏟아 붓는다고 해도 나는 기뻐하리라 합니다. 살고 죽고, 편안하고 편안하지 않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다만 내게 맡긴 사명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것이 내 생명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의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모름지기 이런 생을 사는 사람, 다시 말하면 존재의 양식으로 사는 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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