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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선교관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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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선교관

 

오늘의 본문 가운데는 사도 바울의 선교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사로운 일이면서 바울 자신의 주관적인 의견이고, 또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겠다, 하는 그런 계획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한 선교사의 생애와 선교관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의미가 대단히 큽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가 다 이런 선교관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싶고, 또한 같은 맥락에서 우리네 신앙인의 생활규범을 찾아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분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곧 선교다, 이것을 위해서 나는 존재한다-그렇게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의 선교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집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선교,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됩니다. 첫번째가 복음의 절대화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전합니다. 그는 사람들의 필요에 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의 선교는 하나님의 뜻을 땅에 전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그 누구를 잘살게 해준다든가, 가난하니까 부하게 해주어야겠고, 병들었으니까 고쳐주어야겠고, 나라를 잃어버렸으니까 나라는 찾아주어야겠다…… 이런 소위 sociological need, political need-사회적인 필요, 정치적인 필요, 인간적인 필요에 부응하는 그런 의미의 선교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의 선교입니다. 여기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만이 구주요, 그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만이 종말론적 메시야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치도 양보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그는 이런 말씀까지 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9)"-내가 전하는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으면 천벌을 받아라 함입니다. 그만큼 그는 절대적인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무릇 언제든지 절대화할 때에 거기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상대화해서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그런데 이것이 더 좋은 것 같다'-이것 가지고는 생명적인 힘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복음은 절대적이에요. 예수 그리스도, 이에 대한 복음은 전하는 알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 내용입니다. 복음의 절대화, 오직 그리스도-이것이 그의 선교였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긴급성입니다. 주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입니다.

자기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한시바삐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아주 긴급한 마음으로 그렇게 바울은 복음을 전했어요. 특별히 이것은 종말론적 긴급성입니다.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속히 복음을 전해야지요. 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 복음을 듣지 못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런고로 너무너무 급한 거예요. 이런 초긴급성을 그는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빨리빨리 복음을 전하려고 온 세계를 그렇게 누비고 다녔습니다. 이런 긴박함, 긴급성이 그의 선교의 특징입니다.

세 번째 특징은 확실성입니다. 그는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이 확신은 합리적 이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얻어진 확신입니다. 이것이 체험에서 얻어진 것이지, 철학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고, 지식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고, 자기의 도덕성에서 얻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확신은, 이 확실성이라는 것은 오직 복음에 있고 그리스도와 자기와의 관계에 있었던 것이에요. 그 유명한 키에르케고르의 이론이 있습니다. '확신에서 합리적인 이론이 나오는 것이지, 합리적인 이론에서 확신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따져서 뭐라고 하면 '맞아, 맞는 말이야. 물론 맞고말고'라고 합니다. 하지만 가슴은 싸늘해요. 반면에, 이론은 맞지가 않아요. 그래도 확실함이 있어요. 그 다음에 확실한 이 사실을 놓고 이것을 설명하는 거예요. 합리적으로 설명해나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났어요. 이 확실한 체험 때문에 그는 확실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습니다.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관한 한 그는 철저한 자기 나름의 고집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전하는 복음이요, 또 전하게 되는 복음입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는 보편성입니다. 모든 사람이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귀족이고 천한 사람이고, 부한 자고 가난한 자고, 남자 여자가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꼭 같습니다. 예수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부한 자도 가난한 자도, 지식인도 무식한 사람도 상관없어요. 예수 믿는 일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에요. 이런 사람은 안 믿어도 되고 저런 사람은 믿어야 되고, 그런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 온 세계, 모든 인종, 모든 언어권, 모든 문화권이다 예수를 믿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바빴습니다.

다섯 번째로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고 하니, 이 복음을 누군가가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기도해야 되는 것이에요. 꼭 사람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에요. 누군가가 심부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에요. 거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앉아서 기도만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누군가가 나가서 몸소 뛰면서 이 소식을 온 세계에 전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 복음을 전하고 받는다는 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뭐니뭐니해도 가장 불쌍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귀머거리라고요. 왜냐하면 듣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말을 못합니다. 구조나 기능으로 보아서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들은 바가 없기 때문에 말을 못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실은 꼭 들어야 할 말씀을 못 들었어요.

들을 기회가 없었어요. 그것 때문에 그 일생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이에요. 생각하면 한 말씀, 바른 말씀의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것을 못 듣는 것이에요.

실례지만 북한에 가서 보고 너무너무 답답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저들은 들은 바가 아무 것도 없어요. 이야기를 해보면 생각이 아주 텅 비었어요. 집집마다 매달아놓은 조그마한 스피커 통에서 들은 소리밖에는 들은 것이 없어요. 신문도 없지요. 잡지도 없지요, 찾아와서 말하는 사람도 없어요. 그저 스피커 통에서 소리가 나오면 듣고, 안나오면 안 듣는 거예요. 그 통에서 스위치도 없어요. 끄지도 못하고 켜지도 못해요. 고스란히 다 들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 외에도 들은 바가 없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답답합니까? 못 듣는다는 것,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늘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복음을 듣고도 안믿는 사람이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지만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복음을 듣지 못해서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하고 늘 기도 드려봅니다.

지금도 숫자적으로 따져 보면 온 세계 인구의 40%가 한번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들을 기회가 없었어요. 언어권이 다르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이에요.

아직도 이렇게 밝은 세상에 한번도 복음 듣지 못한 사람이 많아요. 교회라는 게 무엇인지도 몰라요. 그래, 그런 사람한테 제가 물어보았어요. "교회라는 것을 들어보았습니까?" "몰라요" "그러면 예수라고는 들어보았습니까?" "그것도 못 들어보았어요." 정말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는 거예요. 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생각합니다. '꼭 누군가가 전해주어야 한다.

전하는 자가 있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부름받았다.' 그런 입장에서 선교라는 것은 말씀이 있고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말씀 전하는 자가 있어야 되고, 말씀이 있어야 되고, 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끔 기도하는 자기 있어야 됩니다. 이렇게 될 때에 복음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4절에서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들으면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전파하려면 보냄을 받아야 합니다. 이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단적으로 말하면 베드로는 히브리사람들에게 보냄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사람에게 보냄 받은 사람입니다. 기능이 다릅니다. 사명이 다르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특별히 이방의 사도로서 어떤 전략을 썼느냐-바울은 전략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요새도 Strategy of mission according to Paul-바울의 선교 전략에 대해 아주 많은 사람들이 논문을 씁니다. 연구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울은 전략이 없다는 게 전략이에요. 한 번도 계획을 짜가지고 이리 가고 저리 가고, 몇 월 몇 일에 어디 가서 몇 사람에게 전도를 하고, 부흥회를 하고…… 그런 게 없어요. 그는 성령이 인도하는대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오늘의 성경에서도 봅니다마는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22)"-너희에게 여러 번 가려고 했지만 길이 막혔도다 함입니다. 삼팔선이 있는 것도 안이에요. 가려면 가지, 못 갈 것도 없어요. "길이 막혔도다" -그는 막히면 그만두라는 줄 알고, 열리면 가리는 중 알아요. 아주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요. 바울에게도 큰 계획은 있어요. '로마에 갔다가 서바나까지 가고 싶다'-그 마음은 있지만 길이 막히면 막히는가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보다, 열리면 가라는가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행했습니다. 또 자기 앞에 길이 막히고 열리는 이 현실적 상황을 잘 파악하면서, 이 상황과 하나님의 뜻을 함께 생각하면서 겸손하게 전략을 짰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전략이 없는 것이 전략이었어요. 그렇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선교 정책을 세웠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가 선교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생각으로 다니면서 전도를 했는가-가만히 보면 여기에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무엇인가 하면, 선교 본부와의 긴밀한 연락입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고,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고 선교사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 말을 들어? 누구 지시를 받아야 하나?'-그렇게 생각할 것도 같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았어요. 바울한테는 분명히 선교 본부가 있어요. 맨 처음에는 그곳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사람들을 위해서 교회 본부가 옮겨집니다. 안디옥교회로요. 그래, 바울은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습니다. 선교 본부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안디옥에서 파송을 받아 전도를 합니다. 일 년 이 년 동안, 혹은 삼 년 오 년까지 돌아다니며 전도를 하고 다시 본부로 돌아갑니다. 돌아가서 다시 본부사람들에게 지시를 받아요. 거기서 기도를 하고 다시 새로워져요. refresh, 다시 힘을 회복하고 재충전을 합니다. 그리고는 또 나가요. 1차 전도 여행을 하고 돌아와요, 2차 전도 여행을 하고 돌아와요, 3차 전도 여행을 하고 돌아옵니다. 이렇게 그가 '돌아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어요. 이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에요. '내가 주님의 명령을 받고 일하는데, 돌아가기는 어디로 돌아가? 보고는 누구에게 한다는 말이야? 나는 나대로 할 거야'하고 줄달음을 친 게 아니예요. 여기에 인간의 약점도 있고, 인간이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바로 이런 이유로, 선교사를 파송할 때에는 대개 오 년 후에는 돌아오게 합니다. 돌아와서 일 년을 머무르라고 해요. 그리고 다시 가고, 또 오 년 후에 돌아오게 합니다. 왜 돌아오라고 하느냐,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오래 있으면 피곤하니까 그렇기도 하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은 어떤 환경에 가든지 일단 가면 거기에 적응하게 됩니다. 소위 acculturate, 문화화 해버리는 것입니다. 자꾸 그 쪽에 동화해버려요. 그래서 본래 가졌던 그 복음, 본래 가졌던 그 본래성을 자꾸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고로 다시 얼마 후에는 돌아와야 됩니다. 안돌아오고 그냥 있으면 거기에 풍덩 빠져버려서 어디까지가 내가 가졌던 사명인지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다같은 인간의 약점이에요. 선교 역시 그렇습니다. 그 나라에 가서 살면서 그 나라 풍속에 동화되어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때때로는 선교사의 본질,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려요. 여기에서 떠나게 됩니다. 이런 일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선교사를 파송할 때에는 반드시 오 년 후에 돌아와서 일 년 동안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다시 보냅니다. 이것이 선교 정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렇게 바쁘다고 긴급하게 복음을 전하면서도, 계속 전하지 않고 한 바퀴 획 돌고는 돌아왔어요. 본부와 긴밀한 연락을 했어요. 그리고 자기의 믿음, 자기의 신학, 자기의 신앙 체제를 항상 원점으로 돌아와서 새롭게 하고, 그 다음에 다시 또 나갔다는 것입니다. 선교학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에 가서 선교하는 사람이 그 곳의 원주민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네의 언어를 나에게 가르쳐주십시오. 내가 돈을 드릴 데니까요." 그런데 한사코 안 가르쳐주겠다는 것이에요. "내가 당신보고 예수를 믿으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돈 받고 언어만 가르쳐주세요." 계속 선교사가 강권하니까 마지막에는 원주민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내가 당신에게 우리 인도말을 가르치다가는 내가 예수 믿게 되니까 안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예요? 서로서로 우리는 변화하는 되어 있는 것이에요. 선교사가 이방인 속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 얼마 가다 보면 자기 신학, 자기 신앙도 이방 종교와 타협을 해버려요. 점점 이방화하기가 쉽다는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다시 자기를 파송한 원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에요.

우리도 이 세상에 나가 삽니다. 예배당 문을 나설 때에는 확실한 마음으로 나갑니다. 하지만 나가서 살다보니 그 다음이 조금 희박해졌다가, 토요일쯤 되면 도대체 믿는 사람인지 안믿는 사람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그러면 또 주일날 교회 나와 가지고 말씀을 듣고, 재충전하고, 회개하고, 말씀을 받아 들여가지고, 다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또 나가서 살아요. 그리고 또 돌아와서 회개하고 말씀을 받아 들여가지고 다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나가서 살고, 또 돌아오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꼭 교회에 와야 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연구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마는, 넉 달만 교회 안나오면 non-Christian이 된다고 합니다. 안 믿는 사람이 되어버려요.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요. 여러분도 이런 경험 해보셨지요? 한 주일 안 나가면 꺼림칙해요. 두 주일 안 나가면 걱정돼요. 넉 주일 안 나가면 내가 나가야 되겠나 안나가야 되겠나 해요. 그러니까 한두 달만 안 나가면 그 다음에는 전혀 믿었던 것 같지도 않게 되고 말아요. 그런고로 잘 믿는 사람은 한 주일도 안 빠지는 사람이에요. 그래야 계속 마음에서 불붙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선교 본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본부로 다시 돌아오고는 했습니다. 이것이 바울 선교의 첫째 방법입니다. 그의 겸손이기도 하고, 온유한 마음이기도 하고, 또 실제적인 체험이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소아시아와 아가야 지방을 집중적으로 전도합니다. 사도행전 1215절까지가 바로 그 내용입니다. 이렇듯 집중적으로 전도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한 일을 가만히 보면 Church planing -교회 살림을 선교 방법으로 했습니다. 어디 가나 교회를 세웠어요.

선교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의료봉사 할 수도 있고 구제할 수도 있고, 학교를 세울 수도 있고…… 참으로 여러 가지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마는,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세웠어요. 오직 교회, 교회 설립을 선교 정책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의료사업하지 않았어요. 병 고친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의 사명은 아니었어요.

사회봉사 하지 않았어요. 정치운동 하지 않았어요. 오직 교회 설립-이것이 바울의 선교 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설립되기만 하면 곧 떠나고, 설립되면 또 떠나고…… 자꾸 옮겨가면서 계속 새로운 교회를 설립했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특별히 그의 선교정책을 가만히 보면 대도시 중심적입니다. 저 시골까지는 가지 않았어요. 대도시에 교회를 세웠어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그런 것을 많이 볼 수 있어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교회를 세웠어요. 또 골로새에도 교회가 세워집니다. 골로새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것이 아니에요. 에베소교회에서 예수믿은 사람들이 골로새에 가서 세웠어요. 이것이 골로새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큰 도시만 다니면서 교회를 세웠어요. 많이 세우지도 않아요. 한 도시에 딱 하나만 세우면 되었어요. 종자는 뿌려놓았으니까 점점 퍼질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다른 곳으로 또 가요. 대도시 중심적으로요. 왜요? 사람이 많이 모이니까, 그러고 지도력이 있으니까, 중요한 인물들이 거기에 있으니까요. 대도시에서 교회만 세우면 이로써 그 지방까지 다 교회가 설립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내다본 것입니다. 이렇듯 도시 중심적으로 했다는 것은 오늘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어떤 의미에서는 지도력이 있는 중요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선교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거기서 데이빗 B. 바렛트라고 하는 분이 쓴 논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한 도시의 인구가 백만 명이라면 큰 도시입니다. 백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거대 도시, 이것을 megalopolis라고 하는데, 온 세계에 이 megalopolis390개 있습니다. 이 가운데 교회가 하나도 없는 곳은 180개밖에 없어요. 전체가 다 믿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가 하나 이상 있는 도시가 결국은 절반 이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바울은 입장에서는 적어도 세계의 절반 이상이 예수 믿는다-이렇게 보아야 되겠지요. 가능성이 있어요. 바울식으로 생각하면 선교는 끝났어요. 이제는 그 안에서 역사가 이루어져야 되는 것이지요. 사실 지금 나온 통계에 의하면 세계 인구의 33.7%가 기독교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래서 사방에 꼭 대도시 중심적으로 선교를 했다는 것이에요. 이것을 우리가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하나, 사도 바울은 기존 회당을 이용했습니다. 이미 있는 사설, 이미 있는 기구를 이용했어요. 회당에 들어가서 핍박받으면서도 기존 시설을 이용해서 전도했습니다. 그 다음에 핍박이 있으면 피하고, 문이 열리면 갔습니다. 그래서 닫힌 문을 두드리지 않았어요. 닫힌 문을 두드리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닫힌 것 기다리고, 열린 곳으로 갔어요. 이렇듯 아주 온유하고 겸손했어요. 또 어떤 의미에서 효과적이고 능동적이었어요. 그렇게 전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생각할 것은, 바울은 동역자를 기용했습니다. 디도, 디모데…… 이런 사람들을 다 기용해 가지고 교회를 세워놓고는 그 후배들에게 맡겨놓고 자기는 다른 마을로 갔어요. 동역자를 세우고 신뢰하고 그에게 위임했다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역시 훌륭한 분입니다. 본문에도 반영됩니다마는, 그는 분명히 개척자로서만 역사합니다. 자기를 늘 씨 뿌리는 자로 생각하고, 자기가 해야 할 기능이 별도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고는 다른 사람에게 맡깁니다. 고린도전서 3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바울은 계속 심기만 했어요. 물주고 가꾸고 추수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맡겼어요. 내가 할 일만 내가 한다-그것이 사도 바울의 선교 전략이었습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을 거슬러 20절을 보세요.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한 사람이라도 예수믿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거기 따라가서 다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안한다, 그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개척, pioneer적인 그런 선교 사역을 담당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서 보니까 그는 이런 말씀을 합니다.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23)"-그가 로마를 거쳐서 서바나로 가려고 했다 함입니다. 재미있는 말씀이에요. 사실 바울은 지금 안디옥교회에서 파송 받아 여기까지 왔어요. 거기서 파종해주었고, 길을 열어주었고, 비용도 대주었어요. 또하나, 선교사를 파송하고 그를 위해서 계속해서 기도해주었어요. , 바울은 물질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특별히 영적으로 전적으로 기도해주는 분들에 힘입어서, 거기서 파송을 받아서 지금 여기까지 왔어요. 이제 그는 로마로 가겠다는 거예요.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24)"-'그 다음에 너희들이 보내주어서 내가 서바나로 가기를 원하노라. 거기서 서바나가 가까우니까. 그런고로 너희들이 나를 보내다오. 파송해다오. 또 나를 위해서 기도해다오. 그 동안에는 내가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선교사로 일했지마는, 내가 너희를 거쳐서 서바나로 갈 때에는 로마교회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로 서바나에 가서 일하고 싶다'-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니까 지금 그는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25)"라고 말씀합니다. 성도 섬기는 일로 인하여 당분가, 시간을 좀 내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 함입니다. 보세요. '교회'라는 것은 세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케뤼그마(케뤼세이),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기능이 케뤼그마인데, 이 말은 선포라는 뜻입니다. 전도하는 것입니다. 케뤼세이라는 것은 복음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코이노니아-fellowship, 친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디아코니아-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봉사가 선교의 수단은 아닙니다. 봉사 자체가 기능입니다. 우리가 봉사하면서 '이것 줄 테니까 이것 구제받고 교회나오라'할 것이 없어요. 그냥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는 것이에요. 봉사는 봉사로서 기능이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받고 교회 나오라고, 이렇게 조건적으로 봉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디 가난 교회를 설립하고는 그들로 하여금 헌금을 하게 했어요.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으니까 도와줍시다-그래서 헌금을 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바쳤으니, 이 헌금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헌금한 것은 잘 지켜야 되는 것이에요. 이것을 잘못 관리하면 안되는 것이에요. 여기에는 기도가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에 관리를 잘해야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다른 사람을 보낼 수도 있어요. 또 가지러 오라고 편지해서 보내도 돼요. 얼마든지 신실한 사람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직접 가지고 가려고 했어요. 왜요? 성도들이 낸 귀중한 성금이니까, 귀중한 헌금이니까요.

그리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헌금을 소중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 사랑을 전달하고 싶은 거예요. '예수 믿은 지 한 달밖에 안되고, 예수 믿은 지 일 년밖에 안되고, 처음 믿는 사람들이 복음을 들어 구원을 받아서 감사 감격해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복음의 모체가 되는, 교회의 모체가 되는 예루살렘교회의 교인들이 어려움을 당한다는 말을 듣고 저들이 자원해서 헌금을 했습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그 설명을 하면서 전하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예루살렘교회가 이것을 부탁했거든요. 이렇게 해달라고요. 그러니까 이 부탁에 대한 순종도 되고, 그 부탁을 들어주는 일도 되는 것이에요. 예루살렘교회와의 유대관계도 매우 중요하니까요. 오늘의 본문에 보니까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27)"-신령한 것을 받았으니까 물질적으로 나누어주는 것은 당연하다, 이래서 헌금을 가지고 가노라 함입니다.

바울은 이렇듯 귀중한 헌금을 직접 가지고 갑니다.

그런데 이 길이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024절에서 이미 우리가 보았습니다마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갈 때에 어떤 위험한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생명이 위험해요. 사도 바울은 그것을 알면서도 충성을 다하고 싶은 거예요. '나는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서바나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될 귀한 몸인데, 이 헌금을 들고 가서 내가 위험을 당해서야 되나?'-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문자 그대로 작은 일에 충성을 먼저 했어요. 그렇습니다. 오늘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먼저예요. 앞으로 큰 일을 하겠다고 지금 내 앞에 맡겨진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로 가서, 서바나로 가서 큰 역사를 할 계획이 있지마는 지금은 내 손에 맡겨진 헌금부터 먼저 처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면 좋고, 안 열어주시면 못가는 것이다. 로마로 가게 되면 가고, 못 가면 그만이다. 서바나로 못 가면 못 가는 것이다. 거기에 가기 위해서 오늘 내게 맡겨진 일을 등한히 할 수는 없다'하는 것이에요.

대개 보면 큰 일을 한다고 작은 일을 소홀히 여깁니다. 앞으로 큰일하겠다고 지금 하는 일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어요. 생명을 걸고 충성을 다했어요. 목숨을 걸고 지금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려고 했어요. 이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만일에 핍박을 받아서 죽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편지를 쓰는 거예요. 로마에 못 가게 되면 이 편지도 대신하고 싶어서지요. 바울의 그 진실한 신앙과 충성의 의도를 여러분이 잘 이해해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무슨 큰 일을 한다고 해서 내게 맡겨진 일을 소홀히 할 때가 있어요. 교회 일을 한다고 하면서 가정 일을 소홀히 여기고, 사회의 큰일을 한다고 해서 내게 이미 맡겨진 자녀 교육을 소홀히 여기고…… 잘못된 것이지요. 다른 일 못해도 괜찮아요. 그것은 물론 내 꿈으로, 내 계획으로 가지고 있을 거이에요.

기회가 오면 할 것이에요. 그러나 지금은 작은 일이지만 내 손에 맡겨진 이 일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된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엄청난 일을 앞에 놓고도 지금 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만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위험을 느끼면서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이제 너희들에게 가서 얼마간의 위로를 얻고 서로 위안을 얻은 다음에 너희들의 보내줌을 받아서 나는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나노라'-언젠가 주님이 허락하시면 반갑게 만나게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면, 하나님의 뜻이라면 만나게 될 것이라 함입니다. 참으로 얼마나 깨끗한 믿음입니까? 얼마나 훌륭한 겸손입니까?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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