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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브로 선교(사도행전 13:4~12)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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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브로 선교(사도행전 13:412)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 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이 박수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기니라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3)"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그후로 기독교 2천 년에 있어온 선교사 파송의 첫 번째 사례입니다. 공식적으로, 정식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은 이것이 처음입니다. 흔히'missionary and sending body'라고 합니다. 선교사와 그를 파송하는 자, 보냄 받은 자와 보내는 자--이렇게 함께 갖추어짐으로 정식 선교사가 됩니다. 간혹 보면 혼자서 자비량(自備糧)하고 어디 가서 선교사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스스로가 의사로 간호사로 어느 나라에 나가 일하면서 선교사라 칭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이런 사람은 선교사가 아닙니다. 파송자, sending body가 있어야만 선교사입니다. 어느 곳에 선교사가 있으면 사람들은 으레 묻습니다. "누가 당신을 보냈습니까?" 어떤 신앙 공동체나 교회가 파송하고, 선교비도 보내주고, 위하여 기도하고, 그리고 보냄받은 그는 sending body에게 종종 보고서를 보내거나 한번씩 돌아와 직접 보고를 하고, 다시 지시를 받아 나가고--이렇게 함으로 해서 그는 선교사입니다.

나 혼자 마음대로 다니면서 전도를 한다고 해서 선교사가 아닙니다. 보낸 자가 있어 보냄을 받았을 때에 선교사입니다. 보낸 자의 지시를 받고 기도의 성원을 받으면서 일할 때에 선교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공식적인 선교사입니다. 선교사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해야 됩니다. 표면상으로 생각하면 빌립도 선교사입니다. 그러나 그는 핍박에 쫓겨서 혼자 나갔던 사람입니다. sending body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공식적인 선교사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3절에서 본대로 안디옥교회에서는 정식으로 두 사람을 세워서 안수하고 기도하여 선교사로 파송하게 됩니다. 이것은 first missionary입니다. 교회사상, 그리고 초대교회에 있어서 처음으로 정식 선교사를 파송하는 사례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한 '사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델이 됩니다. 도대체 선교사란 어떤 것이냐,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어떻게 일하는 사람이냐--이런 것을 이 첫 번째 모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먼저 강하게, 아주 간절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냄을 받아"라고 말씀합니다. 표면상으로는 분명히 안디옥교회가 보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안디옥교회도 성령의 역사에 쓰임받을 뿐입니다. 가는 쪽이나 보내는 쪽이나 다같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선교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선교가 선교될 수 없으며 선교사가 선교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형식적으로는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는 것이지만 내면적으로 실질적으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성령이 가라 하시니 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역사 하는 것입니다. 비단 이런 선교사뿐이겠습니까?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것도, 목사를 모셔오는 것이나 목사가 와서 사역하는 것이나 다 성령 안에서 되는 일이라고 이해해야 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오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보내고----이렇게 이해할 때에 비로소 교회가 교회 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선교사를 지명하십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지명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지명합니다. , ,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령이 지명하신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성령의 지명을 받았다 하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누구나 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지명해서 세우시는 것입니다. 아무개야, 너는 선교사로 일하라--이렇게 성령이 개인적으로 지명함으로 비로소 선교사가 되는 것이며, 또 그 일로 인해서, 그 결과로 마음 속에 열정이 생깁니다.

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곳에서 그런 말을 합니다. 내가 육체에 약하므로 복음 전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제가 연구하고 결론을 내리는 바는 이렇습니다. 문자 그대로입니다. 그는 선교하지 않으면 건강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도 그런 것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일하지 않으면, 특별히 하나님의 일하지 않으면 병들어요. 건강을 유지하지 못해요. 마음의 평온도 유지할 수 없어요.

사실 하나님의 일 열심히 해야 할 사람이 많은 은사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정도로 많은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안 한다면 결국은 재산도 건강도 잃고 맙니다. 그런 일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해야 할 사람이 안하고 기피할 때에 그 사람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적어도 성령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은 그렇습니다. 성령이 저를 보내는데, 성령이 그 마음속에 선교의 열정을 줍니다. 입 다물고 있을 수가 없어요. 답답해서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습니다. 잠을 잘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선교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열,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남편이 예수 안 믿는데 집사라는 그 아내가 기도도 안해요. 어떻게 잠이 옵니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꼭 전도하여 믿게 해야겠는데 내가 기도 안할 수가 없지요. 마치 뭐와 같은고 하니, 여러분의 자녀들이나 사랑하는 자가 지금 병들어 있다면 잠이 옵니까? 병원에 가서 지켜앉아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병이 나을 것도 아니요 덜 아플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집에 들어앉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서 곁에 앉아 붙들고라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곁에, 병실에라도 앉아 있어야 마음이 좀 낫지 집에서 잠만 잘 수는 없잖아요?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사람이지요.

오래 전 일입니다. 별로 좋은 사례는 아니지만 실제로 본 일입니다.

내외간의 연령 차이가 한 20년 되는데, 장로인 남편이 고혈압으로 쓰러졌어요. 그래서 지금 교회에서 문병간 사람들이 그 장로를 붙들고 기도를 합니다. 장로는 눕지도 못합니다. 숨이 차 가지고 헐떡헐떡하는데 부인은 옆에서 잡니다. 장로가 아내의 그 자는 모습을 보면서 웁니다. 정말로 웁니다. "내가 저걸 마누라라고……"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육신의 문제에서도 그렇게 무심할 수는 없는 법인데, 하물며 영생의 문제, 생명의 문제를 놓고 어떻게 평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선교사란 이런 사람입니다. 전도하지 아니하고는 도대체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가슴이 폭발하는 정열이 있어서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령에 이끌리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이렇게 표현합니다. 간단한 이 한마디 속에 엄청난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평생을 살았어요. 스스로도 빚진 자로 살아간다 하지 않습니까?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야만인에게나 나는 복음에 빚진 자다, 이것은 갚지 않고는 나는 전혀 자유할 수가 없다.--평안할 수 없다고 그는 뜨겁게 말씀합니다. 바로 성령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용기, 성령이 주시는 지혜, 그리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방향으로 가고 오고 했습니다. 일생이 그렇게 이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이 마음 문을 여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전도한다고 다 믿던가요? 처음 만난 사람에게 몇 마디 전도를 하는데, 성령이 마음 문을 싹 열어서 한두 마디밖에 안 했는데도 벌써 예수를 믿고 자기 집에 모셔드려요.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빌립보의 루디아가 그랬습니다. 강가에서 잠깐 만나 전도했는데, 보십시오. 자기 집을 open house하고 교회로 만듭니다.

성령이 마음 문을 열었다는 이야기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특히 사도행전에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래서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야 선교사입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느냐--복음을 듣지 못한 자 에게입니다. 로마서 1014절을 봅시다. 사도 바울의 신학이 있습니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논리가 분명합니다. 복음은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복음은 들으면서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못내 슬픈 일은 저 북녘 땅이 복음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많은 방송이 있지만 라디오가 없습니다. 아무도 복음을 들을 수가 없다는 것--참으로 괴롭고 답답한 일입니다. 잘살고 못살고는 상관없어요. 제발 자유롭게, 저 중국만큼이라도 복음을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다못해 저들이 방송만이라도 마음대로 들을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이제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그 같은 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듣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 소아시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걸어다니면서 목이 터져라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족족 복음을 전했어요. 자기 문화권에는 이미 복음이 전해졌으니까 전함 받은 사람으로부터 또 전해지고 또 전해지겠지요. 그 그래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전해질 테니까요. 그러나 타문화권입니다. 문화권이라는 게 참 중요하거든요. 언어권이라는 게 그렇듯 중요해요. 정치적 장벽과 문화적 장벽이 가장 두터운 것입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말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도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타문화권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선교였다는 것입니다.

본문 4절 말미에 "구브로에 가서"라 합니다. 구브로는 지금의 키프로스(Kypros)이며 영어로는 사이프러스(Cyprus)입니다. 썩 아름다운 섬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섬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지중해 제 3의 큰 섬으로 기후 여건이 좋아 별장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옛날에 구리 광산이 있었고, 조선업이 성했습니다. 잔잔한 항구들이 많아서 거기서 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주 풍요한 섬이지요. 특기할 것은, 비너스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우상이 많았어요. 비너스라고 하면 소위 미의 여신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런지 사치하고 환락가가 많습니다. 음탕하고, 부도덕하고, 그리고 쓸것이 많은 곳입니다. 바울은 여기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섬이라고는 하지만 길리기아에서 8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배타고 바로 건너가면 구브로입니다.

살라미라고 하는 곳은 그 섬의 가장 큰 도시이고, 또 바보라고 하는 도시는 수도입니다. 여러 도시에 다니면서 도시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도시 중심으로 전도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단 한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해도 그 사람에 의해서 다음 사람 다음 사람으로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번 더 생각할 것은 이방에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방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두 가지의 특기할만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선교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분명히 구브로입니다. 유대나라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브로 섬의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전합니다. 살라미라는 곳이 큰 도시이기 때문에 유대 교포들이 모이는 교민 교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디아스포라의 교회, 이 교회에 안식일이면 사람들이 모이므로 그 모인 곳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 하는 말씀입니다. 디아스포라의 선교학적 의미를 말해주는 사실입니다.

문화권을 넘어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요사이 우리네를 보니 인도네시아다 파키스탄이다 하는 데를 선교사들이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이를테면 파키스탄을 갔다고 합시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말을 좀 배워 가지고 가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는 잘 안되지요. 그러므로 파키스탄에 간 선교사가 맨 먼저 찾아야 할 곳이 어디냐 하면 거기서 장사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면서 사는 한국인 교민을 먼저 찾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민들은 파키스탄말인 우르두어(Urdu)도 구사하고 한국말도 구사하거든요. 그런 교민이 복음을 받아 예수 믿게 되면 선교사가 떠나와도 그 사람이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무릇 사람들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산다는 것이 참 중요한 일입니다.

유대사람들이 이미 사방에 흩어져 있다는 것, 이것이 사도 바울의 선교 전략에 있어서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회당이 있으니 거기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런 유대사람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이 생기면 그는 현지 전도자가 되고 말더라 이 말씀입니다. 얼마나 효과적입니까? 이제 사도 바울이 구브로에 처음으로 가서 그곳 문화며 풍속이며 언어며, 이런 것 다 익히려고 덤빈다면 선교 사역은 참으로 먼 길이 됩니다. 그래서 그곳 문화 전반에 익숙해진 사람을 만나고자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우리 한번 높은 선교학적 시각으로 보십시다. 우리 한국 민족이 잘살아서는 그렇게 되지 않았을는지 모르지만 주로 625이후에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지금은 어디에 가나 어느 나라에 가나 한국사람이 많아요. 얼마 전에 알래스카의 앵커리지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었는데 거기에도 한국 교포가 5천 명쯤은 산다고 해요. 생각해보세요. 인구 5십만 중에 5천 명이니 그게 어딥니까? 여기저기서 한국사람을 많이 만나요. 온 세계에 이렇듯 한국사람이 흩어져 있다는 것은 선교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인 것입니다. 이제는 선교사가 어느 나라에 가든지 거기 있는 한국 교포만 만나면 선교는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로부터 정보를 얻습니다. 어디에 가야 사람이 많이 모이는지, 그곳 사람들은 무슨 말을 좋아하고 무슨 말이 싫어하는지, 어떻게 말하면 되고 어떻게 말하면 안되는지…… 거기서 다 배우게 되거든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인들 곧 디아스포라가 선교학적으로 소중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우리 한국민족이 온 세계에 흩어져 있다는 것 또한 선교적 차원에서 말세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함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생각이 있거든 이제라도 다 걷어치우고 멀리 나가서, 오지에 가서 한번 비즈니스를 해보세요. 비즈니스를 하다가 거기서 선교사를 하나 부르세요. 마침내는 훌륭한 선교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무튼 구브로 살라미에 들어가 사도 바울은 유대인 회당을 찾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그곳의 유대인 회당에 들어간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것은 성경에 잘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436절에 보면 바나바가 구브로 태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나바는 자기네 고향으로 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낯선 곳이지만 바나바의 입장에서는 고향 찾아간 것입니다. 전도하러 고향에 간 것입니다. 고향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을 모시고 간 것입니다. 이 점을 또한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가능한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지요. 바나바의 향토애가 여기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향사람들이 예수 믿어야 되겠다, 어느 곳보다도 먼저 고향사람들부터 예수믿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곳에 전도가 이루어졌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문화적으로나 인적으로나 효과적으로 가능케 하는 선교 방법을 택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오늘의 본문에서 보면 5절에 보니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 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합니다. 요한이라는 사람, 마가 요한 이 사람은 '마가의 다락방'의 주인의 아들입니다. 당시의 굉장한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를 믿었어요. 그리고는 따라나섰어요. 바나바의 생질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 삼촌을 따라나섰다가 구브로까지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분명히 수종자라고 했어요.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마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 때부터 시작해서 사도 바울은 늘 수종자를 둡니다. 언제나 수종자, assistant를 동반했어요. '수종자'는 헬라어로 '휴페레텐'인데 이 말은 "따라 모신다" "밑에서 수종한다" 혹은 "시중을 든다"하는 뜻입니다. 역시 혼자 다니기보다는 수종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수종자를 두는 더욱 중요한 이유는 교육하기 위함입니다.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쳐요. 그래서 후계자를 삼았습니다. 나아가서는 교회를 세운 다음에 수종자로 하여금 후속 목회를 하게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저기 복음을 전하지만 꼭 어디는 요한이요 어디는 디모데요 어디는 디도요…… 이렇게 늘 수종자를 두어서 그들로 하여금 사도 바울이 떠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어떤 때는 몇 달, 어떤 때는 몇 년 계속해서 목회를 하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무슨 일에고 나 혼자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나에게서 끊어지면 안됩니다. 반드시 계속 되어야 합니다.

이어지려면 후계자가 필요합니다. 제자가 필요합니다. 돕는 자가 필요합니다. 꼭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나는 한 번 일하고 언젠가는 끝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은 후계자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것을 미리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시듯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일하실 것입니다. 후계자 양성, 후계자 훈련, 후계자를 교육해나간다는 것이 이렇듯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 총독 서기오 바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마의 총독으로 이 구브로 섬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 총독은 본문에 보니 지혜로운 자라고 했습니다. 낯선 자가 와서 복음을 전하고 있을 때에 그는 그를 불러들여서 듣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지혜였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박해부터 먼저 하지 않아요. 듣기를 좋아합니다. 그는 바울을 일부러 불러 들여 가지고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참 중요한 일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언제든지 들어요. 지혜롭다는 것이 따로 있는 것 아닙니다. 잘 듣는 것이 지혜입니다. 잘 듣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서기오 바울은 권세를 가진 사람입니다. 얼마든지 배척할 수 있고 남의 얘기 듣지 않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낯선 전도자들을 불러들여서 복음을 귀담아 들었다고 합니다.

참 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을 듣고자 할 때에 방해자가 있었어요. 언제나 훼방꾼은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 훼방꾼이 박수무당입니다. 이 사람은 미신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박수무당 하면서 아마도 좀 인기를 모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만약 총독이 예수 믿게 되면 자기는 손해를, 불이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무당이야 죽는 것이지요. 무당으로야 온전히 손해보는 일이 아닙니까? 그 손해를 안 보기 위해서 총독이 예수 믿으려 하는 것을 정면으로 방해하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에는 으레 훼방꾼이 있는 법입니다. 선교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엄격합니다. 10절에 보니 이 박수를 보고 바울이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합니다.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함입니다. 복음이 바로 전해지는 것을 굽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이게 마귀입니다. 마귀의 자식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방해하고, 복음 사역이 확정되는 것을 방해하는 자, 누구건 그는 마귀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네가 왜 가로막느냐, 그치지 않겠느냐고 바울은 성령이 충만해서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표적이 따릅니다.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11)"고 바울이 말씀하는 순간에 그 박수는 눈이 어두워졌고 자기를 인도할 사람을 두루 찾습니다. 이 꼴을 보고 총독이 믿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절대로 그런 것으로 좌절될 수 없음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서 강조되는 것은 성령이 충만하여 핍박을 받을 때에 더 충만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강력하게 담대하게 이루어나갔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표적까지 따랐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9절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 뒤로는 계속 바울로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사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바울입니다. 당시에는 이름을 두 가지로 가진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히브리사람인 경우에는 히브리식 이름이 있고 헬라식 이름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식 이름은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거나 부르기가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식 이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들 중에도 더러 그런 분들이 있어요.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미국에서 자신의 본 이름을 사람들이 잘 못부르니까 다윗 김이라 부르게 했어요. 이렇듯 다른 나라에 가서 살 때에는 그 나라 사람들이 부르기에 좋은 이름을 하나 더 가지는 수가 있거든요.

사도 바울에게도 히브리식으로 사울과 헬라식으로 바울이라는 두 가지 이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게바'라는 이름은 히브리말이며 '베드로'라는 이름은 헬라말입니다. 뜻은 같아요. 다같이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도마'라는 말도 '쌍둥이'라는 말입니다. 도마는 헬라말이고 히브리말로는 이 이름이 '디두모'가 됩니다. 이렇게 같은 뜻으로 이름을 번역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전혀 다른 두 가지의 이름도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사울'은 히브리적인 말입니다. '바울'이라는 말은 헬라적인 말입니다. 오늘의 영어가 세계 공통어로 된 것처럼 당시에는 대표적인 언어가 헬라어였습니다. 헬라어만 하면 어느 나라에 가든지 쓸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때부터 히브리적 인상이 짙은 사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바울이라는 이름을 택합니다.

선교적 편의를 위하여 헬라식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하나의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울이라는 말은 본래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의 이름과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파울로스)이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보면 작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키가 좀 작아서 그러게 불렸던 것 같아요. 별명처럼 불린 모양인데 이제는 상관없지요. 작다고 하든 크다고 하든 이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스스로 택합니다. 마침내 13장 이후에는 언제나 바울로 불리어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선교를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소중히 여기던 이름도 과감히 버렸습니다. 바울의 선교 열정이 그토록 뜨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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