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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얻는 길(사도행전 27:38~44)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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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얻는 길(사도행전 27:38~44)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날이 새매 어느 땅인지 알지 못하나 경사진 해안으로 된 항만이 눈에 띄거늘 배를 거기에 들여다 댈 수 있는가 의논한 후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는 동시에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해안을 향하여 들어가다가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 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원을 얻으니라

 

바울을 비롯한 276명의 많은 사람들과 또 많은 짐까지 실은 이 알렉산드리아 배는 지금 풍랑을 만나서 그 운명이 경각에 이르렀습니다.

무려 보름이나 표류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저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돛을 내리고, 닻을 걷어올리고,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킷줄도 걷어올렸습니다. 이제는 키도 돛대도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그야말로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대로 끌려갔습니다. 그대로 흘러갔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이제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능력의 한계, 인간이 자기의 노력과 의지, 수고, 기술, 경험, 지식 등을 다 포기했을 대, 완전히 손을 들었을 때, 백기를 들고 완전히 항복했을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인간 궁극의 시점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문말씀 2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저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내 말을 듣고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라고 지난 일을 돌아보게 합시다. 저들은 바울의 말씀을 듣지 않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비록 쇠고랑을 찬 죄인의 모습으로 여기에 있지만 분명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저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볼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레데를 떠날 당시에는 아주 세력 있는 사람, 다시말해서 백부장, 선장, 선주, 선원들, 그리고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고 바울의 말씀은 묵살합니다. 결국 바울의 말씀은 듣지 아니하고 미항을 떠났다가 이 어려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이제 이렇게까지 위태로워진 바로 이 시점에서 바울은 '내 말을 듣고 떠나지 아니했다면 좋을 뻔했다' 그리고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내 말을 안 들었기 때문이다. 내 말을 안들은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안들은 것이다.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을 안 듣고 거역한 결과로 이렇게 큰 타격을 받게 된 것이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내용은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원점으로 돌아가서 지금이라도 내 말을 들으시오'----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풍랑이 있기 전에는, 어쩌면 풍랑을 맞은 지 하루이틀째였더라도 바울의 이 말이 통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제는 죽을 지경이 됐어요. 보름 동안이나 헤매는 처지가 되고 보니까 바울의 말씀이 귀에 들어옵니다. 바울은 다시 말씀합니다. '이제라도 내 말을 들으시오. 나 하라는 대로하세요'-----여기에 다들 유구무언입니다. 누구 하나 거역할 사람이 없습니다. 말대꾸조차 할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다들 숙연해졌습니다. 모두가 바울의 말씀을 듣습니다. 바울이 말씀하는 대로될지 안될지, 바울의 말씀을 믿든지 안 믿든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상관없습니다.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밖에 없는 심경이지요. '내 말을 들었으면 좋을 뻔했는데 큰 타격을 보았소.

이제라도 내 말을 들으시오'---그래야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 함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많은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멀리멀리 갔었지만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원점으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었다면 많은 타격을 본 후에라도 아직 목숨이 살아 있거든 지금이라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처음 시점에서 자세를 바로 하고 믿음을 수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 말을 들으시오'라고 바울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믿음을 줍니다. 아주 깊은 뜻이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3장 11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이사 앞에서야 할 것이다. 어쨌든 로마에 갈 것이다. 언제 가느냐고는 묻지 말아라'----이 말씀을 들은지 거의 3년이나 지나서 바울은 로마로 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든 너무 초조해하지 마세요. 오늘들은 말씀이 내일 아침에라도 당장 이루어진다면 좋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시간은 그렇지가 않아요. 시간과 방법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좀 달라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매를 맞고 고생할 때에 말씀하셨어요.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다.' 바울은 '아멘'하고 기다립니다. 그렇게 3년이 흐릅니다. 일은 자꾸 비뚤어지기만 하고, 로마 갈 길은 멀어지기만 합니다. 이대로 죽는가보다 했습니다. 더우기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을 허송세월 했습니다. 그러나 보세요. 바울에게는 이런 과정이 꼭 필요했습니다. 그러니까 시간과 방법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어느 시간에든지 약속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초조해하지 마세요.

우리나라사람들이 세계적으로 조소를 받는 아주 못된 성격이 하나 있다고 하지요. 바로 '빨리빨리'입니다. '공기(工期) 단축'---잘못된 사건들이 전부 빨리 하자는 생각에서 비롯됐어요. 여러분, 이제는 확 돌이켜서 '천천히'합시다. 말도 좀 천천히 하고, 생각도 좀 천천히 하고, 결정도 좀 천천히 합시다. '빨리빨리'하다가 빨리 죽어요. 안 그렇습니까?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약속을 받았으면 이제 느긋하게 기다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오. 반드시 이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오'---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길로 어느 때에 이루어지는지 궁금해하고 초조해하고----그러지 마세요.

이스라엘 백성이 크게 실수한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젖과 꿀이 흐르는 저 가나안 일곱 족속의 땅을 준다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일곱 족속의 이름이 수없이 나와요. 무슨 족속, 무슨 족속……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저절로 외게 됩니다. 자, 하나님께서 이 일곱 족속이 있는 가나안땅을 준다고 약속하셨어요. 그러면 그런 줄 알아야지요. '무슨 방법으로든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광야로 가든, 홍해로 가든,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약속은 받아놓은 것이니까요.' 이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초조해했어요. 오늘이냐 내일이냐, 아침이냐 저녁이냐…… 뜻대로 안 된다고 원망했습니다. 이래서 크게 하나님 앞에 범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약속해주셨어요. '좌우간 너는 가이사 앞에 설 것이다'--바울은 '아멘'으로 기다립니다. 그러면 된 거예요.

이 약속이 그 다음날에 이루어진 게 아니예요. 바울이 원래 생각했던 시간, 바울이 생각했던 방법도 아니었어요. 오묘한 하나님의 선교적 경륜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쓰신 각본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없어요. 바울도 이해 못했으니까요. 그도 뒤늦게 깨달았지요. 하나님께서는 오묘한 방법으로 역사 하십니다.

그리고 바울 하나를 보내기 위해서 나머지 275명이 다 무사했습니다. 바울 하나를 위해서 이 배가 무사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배에 탄 사람 전원이 다 무사해야 했습니다. 모두가 증인이 되어야 하니까요.

몇 사람이라도 죽으면 안됩니다. 문제가 생깁니다. 전원이 무사해 가지고 이제 바울을 통해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풍랑을 겪습니다. 재산의 손실도 봅니다. 배도 파손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능력, 인간의 의도를 다 포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인 바울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모두가 꼼짝못하고 바울에게 순종해요. 평상시 같았으면 어림도 없습니다. 바울이 이 많은 사람 앞에서 '형제들이여'하고 나서보아야 누가 듣기나 했겠어요? 그러나 지금은 키 작은 이 조그마한 사람바울이, 쇠고랑을 찬 사람 바울이 서서 외칠 때에 모두가 숙연했어요.

그의 말을 전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게 되었어요.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하나의 작품인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지금 바울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바울이 명령을 합니다. 첫째 명령은 '먹어라'---먹어야 산다, 기운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저들은 열 나흘 동안이나 굶었습니다. 이제는 무엇 하나 제대로 먹을 수 없고, 죽은목숨이라 생각하니 입맛도 없어요, 그러나 바울은 말씀합니다. '먹어라'--앞에 닥쳐올 일이 있으니 먹어야 기운을 차릴 수 있고, 기운을 차려야 이 마지막고비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말씀에서 보겠습니다마는, 이 배가 깨지거든요. 그러니 헤엄을 쳐야 합니다. 헤엄 못치는 사람은 널쪽이라도 붙잡고 개헤엄이라도 쳐야 육지가지 건너갈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기운을 차려야 합니다. '먹어라'----첫째 명령에 저들은 먹어야 했습니다.

둘째는 오늘의 본문에 보니 밀을 바다에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배를 가볍게 하려 함이지요. 이미 저들은 자기들의 짐을 다 벼렸습니다.

 

그러나 남은 것이 있었어요. 바로 이것마저 지금 다 버립니다. 여기에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소유욕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고집을 버리고……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밀, 곧 식량마저 '이것까지도 다 버리라. 깨끗이 버려야 한다' 함입니다. 본문말씀 18절로 돌아가서 읽어보세요. "짐을 바다에 풀어버리고"----처음에 풍랑이 일어났을 때에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저들은 먼저 짐을 버렸어요. 그 아까운 것, 로마에 가서 장사할 밑천이었지만 다 버렸어요. 그러나 밀은 남겼어요. 왜요? 먹어야 하니까요. 얼마나 이 풍랑 속에 있을지 모르지만 좌우간 먹어야 하니까 식량만은 남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까지도 버리라고 사도 바울은 명령합니다. 생각해봅시다. '이제 식량마저 버리면 내일은 무엇을 먹습니까? 이제 한겨울 동안 무엇을 먹고살라는 말입니까? 로마에 가려면 겨울을 나야 할 텐데 이것을 버리면 대체 무엇을 먹을 것이오?'----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명령 앞에서 저들은 아무 질문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밀을 버리라 할 때에 스스로 그 남은 식량을 다 버리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은 생명 위주의 세계관을 수습하라는 얘기입니다. 지금은 살아남는다는 것이 중요해요. 내일은 무엇을 먹느냐, 그것도 걱정할 문제가 아니예요. 바로 지금 사는 것이 중요해요. 그래서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선장, 선주, 그리고 이 모든 물건의 주인들에게 있어서 '버리라'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그래도 바울의 명령 앞에 꼼짝을 못합니다. 살기 위해서는 버리라, 버려야 산다함입니다. 저들은 다 버렸습니다.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셋째 명령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여러 가지가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최선책을 세웁니다.

"닻을 끊어 바다에 버리라(40절)." 배를 타보거나 배를 보면 아시겠습니다마는 어느 배에든지 닻이 있습니다. 닻이 없는 배는 없습니다. 어디에 가든지 배가 바다에서 정박할 때에는 뭍에 댈 때를 제외하고는 닻을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작은 배든 큰배든 커다란 쇳덩이의 닻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닻줄을 끊어버리고 맙니다. 다시 말하면 정상적으로 정박하는 것을 포기하는 거예요. 이제 이 배는 배 구실을 못해요. 정상적으로 정박할 계획, 소원, 그것을 포기하는 거예요. 좌우간 닻줄을 끊었다면 그 배는 끝입니다. 마지막입니다. 닻을 내려서 배가 안정을 취하는 법인데 이 마지막 방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동시에 킷줄을 늦추고(40절)"라고 말씀합니다. '킷줄을 늦추고'-----이것, 아주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닻은 끊어놓고, 이렇게 되면 배가 멎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킷줄을 늦추었습니다. 여기서 배의 구조를 좀 상상해보아야 합니다. 배에는 반드시 키가 있거든요. 키를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면서 배를, 즉 뱃머리를 운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키를 걷어올리면 키가 물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제 역할을 못해요. 그런데 킷줄을 늦추면 키는 물 속에 쑥 들어가서 효력을 발휘합니다. 키가 제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는 배가 혹 어디에 걸릴까 해서 키를 걷어올렸던 것입니다. 이럴 때에 킷줄을 늦추라 함은 그실 행선 준비를 함입니다. 또한, "돛을 달고(40절)"----돛을 달면 당연히 킷줄은 늦춰야지요. 이를테면 방향을 정하고 이제 바람을 맞게 하여 제대로 운전을 하는 거예요. 행선 채비를 갖추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닻줄은 끊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행선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갈는지, 몇 시간 걸릴는지 모릅니다. 좌우간 닻줄을 끊었으니 이제는 어디에고 정박하지 못합니다. 마지막 종착지를 향해서 그대로 돌진할 뿐입니다. 키를 낮추고 돛을 올리고 바람 부는 대로 육지를 향해서 돌진할 뿐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last chance인 것입니다.

또 31절을 보세요. "바울이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이 모든 일을 누가 합니까?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마는 이런 일을 하려면 선원이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저들은 육지가 가까워온 줄 알고는 눈치 빠르게 자기들만 살려고 조그마한 거루를 내려 가지고 도망가려 하지 않아요? 바울이 이것을 알고 거룻줄을 끊어버리게 했어요. 그렇게 저들이 못도 망가게 해놓고 한 말씀입니다. 자, 키를 늦추는 것이나 돛을 다는 일은 누가 합니까? 이것은 선원들이 하는 것입니다. 선원이 필요해요. 기술자가 필요해요. 지금까지는 전혀 필요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안 그래요. 이 마지막 남은 기회에 선원이 절대 필요해요. 기술이 필요해요. 노력이 필요해요. 인간의 수고가 여기에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 last chance에 우리가 가진 회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닻줄을 끊고, 킷줄을 늦추고, 돛을 올리고, 또 밀까지 다 풀어버려서 배를 가볍게 하고, 그리고 육지가 보이는 쪽을 향해서 그대로 돌진하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마지막 기회입니다. 배가 파손될 것을 뻔히 알았지만 이 길밖에 없었습니다. 이렇듯 그대로 바람에 맞추어 가지고 육지를 향해서 돌진했다----이것이 오늘의 본문 내용입니다.

상상을 해보세요.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요. 그러나 마지막으로 주어진 이 기회에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 기술을 다 발휘하는 것입니다. 지혜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들은 바울의 명령에 따라 육지를 향해서 그대로 배를 몰고 갑니다. 자, 이렇게 가다가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당하여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혀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41절)"-----배 뒤쪽 이 아예 동강이 나면서 깨져버렸습니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이 있어요. 지금 군사들이 가진 의무가 있는데 저들은 그 의무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명령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입니다. 백부장이 주동해서 이 모든 죄수들을 풀어주라고 한 것입니다. 죄수들은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이대로 놓아두었다가는 물에 빠지면 꼼짝없이 죽어버려요. 다른 사람은 헤엄치지만 저들은 헤엄칠 수도 없습니다. 그런고로 죄수들을 풀어줘야겠는데 그들이 도망가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참으로 큰일이거든요. 옛날에는 간수나 군사가 죄수를 노예로 부리다가한 사람이라도 도망갔다 하면 그 책임을 그들에게 묻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기억나는 성경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세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감옥에 있을 때에 찬송을 부르니까 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다 풀어지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보고 옥사장이 어떻게 했습니까? 자결하려고 했어요. 바울이 도망간 줄 알고 말입니다. 보나마나 이제 자기가 책임지고 바울 대신 사형 당하게 생겼습니다. '사형 당하느니 내 손으로 죽고 말지'하는 생각에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합니다. 바로 그 순간에 바울이 '도망간 사람 없다, 걱정하지 말라, 죽지 말라'하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감동이 되어 옥사장이 예수를 믿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바울을 자기 집에 데려다가 씻겨주고 음식을 주고…… 정성껏 대접합니다. 왜 죽으려고 했느냐?------그것은 자기책임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도망가면 그 대신 자기가 죽어야합니다. 당시는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일에 죄수를 놓치게 될 성싶으면 차라리 죽여버렸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자기가 무사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도 배가 파손될 지경에 이르니까 죄수들의 쇠사슬을 풀어줘야겠는데 풀어놓으면 도망갈 것이고, 도망가면 자기들이 책임져야 하니까 군사들이 저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바울도 함께 죽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백부장은 그 동안에 이루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죽 보면서 이미 감동된 바가 큽니다. 마음속에 깨달은바가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살리기 위하여 죄수 전부를 풀어주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대단한 사건입니다. 군사로서 자기 의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법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자기가 평생 지녀온 군사 지식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오로지 바울 하나를 살리기 위한,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신앙입니다. 바울 하나를 살리고 내가 대신 죽는다 하더라도 그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입니다. 바울을 살리기 위해서 한마디로 로마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용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책임진다. 풀어줘'---이렇게 해서 죄수들을 다 풀어주게 됩니다.

그래서 저들은 배가 개질 때에 전부 헤엄치고, 헤엄칠 줄 모르는 사람은 널쪽을 타고서라도 육지로 올라와 다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런 일이 있으니까 먹어서 기운을 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먹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뒤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기회에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바울이주도합니다. 바울이 명령합니다. 그리고 저들은 순종합니다. 지난날에는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순종합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구원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큰 풍랑을 당했을 대에나 이런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 같은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일이 어떻게되느냐, 장차 어떻게 되느냐는 고사하고 우선 착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배가 깨지는지, 자기가 사는지 죽는지는 알 바 아닙니다. 위기를 당했으면 내 선의를 점검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위기를 당할 때마다 믿음을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이라도 착하게, 더 선하게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오래 전에 신문에 났던 얘기입니다. 강원도 어디선가 차 사고가 났어요. 아주 큰 사고라서 많은 사람이 죽고 또 중상을 입었습니다. 구조대는 죽어 가는 사람이나 너무 피를 많이 흘려서 가망 없는 사람들보다는 살 가능성이 있는 부상자부터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버려둔 중상자 중의 하나가 구조대원에게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내 피는 O형입니다. 웬만한 사람에게는 맞을 것입니다. 내 피를 뽑아서 피가 모자라는 사람에게 수혈해주세요." 죽어 가는 마당에 자기 피를 다른 사람에게 넣어달라고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사실 나는 이름난 깡패라오. 참 못된 짓도 많이 했지요. 이 시간에 돌이켜보니 좋은 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이 마지막 시간에라도 한번 좋은 일을 하고 싶소. 자, 내 피를 뽑아서 다른 사람에게 수혈해주세요."

여러분, 이 위기, 배가 개지는 이 순간, 살는지 죽을는지 모릅니다.

어떤 일이 있을는지 몰라요. 이 시간에 해야 할 일은 착한 일입니다. 한번이라도 선한 생각,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이예요. 옛날 우리네 선조들은 이러했어요. 몇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나라에서 감옥 문을 열고 특사령을 내렸어요. '아마도 억울한 죄수가 있어서 하늘이 노하셨나보다'해서요. 우리가 공정하게 재판을 한다고 하지만 그 재판이 다 옳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잘못된 경우도 많아요. 그래, 아무튼 좋은 일 하고 보자, 해서 한발이 내릴 때에는 감옥문을 열고 죄수를 석방했어요.

이 역시 그런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하바라다」라고 하는 인도의 유명한 서사시가 있는데 그 중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디스트히라라고 하는 왕이 세상에서의 생활을 다 정리하고 아내와 형제와 더불어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아내도 죽고 형제도 죽었어요. 오로지 집에 데리고 있던 개 한 마리가 계속 따라올 뿐이었어요. 하늘나라로 향하면서 여러 번 넘어지기도 하고 죽을 뻔했지만 이 때마다 개가 도와줬어요. 이윽고 왕은 천국 문에 이르렀습니다. 천국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면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왕은 대답했어요. "내 아내도 아직 못 왔고 내 형제들도 아직 못 왔는데, 나 혼자 무슨 재미가 있겠소? 안 들어가겠소." 이에 문지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아내나 형제는 이미 죽어서 오래 전에 들어갔소.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시오." 그래서 왕은 자기 개를 데리고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문지기가 "개는 안돼요"하고 거절하는 것이었어요. 이것 참 난처하게 됐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개가 많이 도와줬거든요. 이 개를 버리고 혼자 들어간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왕은 개도 같이 들어가게 해달라고 사정사정하다가 결국은 "정 개를 데리고 들어갈 수 없다면 나도 안 들어가겠습니다"라고 했어요. 순간, 그 개가 정의의 신이라는 드르마 신으로 변신을 합니다.

그래서 왕은 정의의 신과 함께 손을 잡고 천국 문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에 문지기가 말합니다. "당신은 당신을 도와준 개마저 이렇듯 사랑했기 때문에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어떤 위기를 당할 때에 나 하나만을 생각하는 마음은 있을 수가 없어요.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 선을 생각하고, 의로움을 생각하고, 겸손을 생각하고, 믿음을 생각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제 배가 깨지는 순간입니다. 이 시간에 백부장은 생각했습니다.

'바울을 살려야겠다.' 그리고 아마도 백부장 입장에서 죄수들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좋은 일을 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죄수들을 다 놓아주라고 명령합니다. 도망가도 상관 안 해요. '놓아 주라. 내가 책임진다.' 드디어 배는 파손됩니다. 그리고, 22절의 예언대로 생명들은 무사하고 오직 배만 손상된 것입니다. 모두가 헤엄쳐서 살아남게 됩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애시당초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이 하라는 대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파국이 온 것입니다. 그러나 늦게라도, 죽을 지경이 된 시간에라도, 이 마지막 기회에 바울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 이치에 맞든 안 맞든, 생각에 맞든 안 맞든 저들은 바울의 명령에 그대로 따랐습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먹으라, 할 때에 순종했습니다. 결국 저들은 이 순종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더욱더 순종을 가능케 한 것은 고난입니다. 이 엄청난 고난이 바울의 카리스마적 권위를 높여주었습니다. 결국 저들은 죄수 중의 한 사람인 바울의 말을 온유하고 겸손하게, 잘 듣고서야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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