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 목차로 돌아가기 |
구원의 유일한 길(롬10:1~15)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구원의 유일한 길, 구원 얻는 길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느냐, 또 예수를 믿어 구원 얻는다는 것은 사실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들을 우리에게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공부한 바와 같이 로마서 9장, 10장, 11장, 이 석 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문제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전도여행에서 대부분 유대사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저들을 사랑합니다. 계속해서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언정 저들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내가 그리하겠다, 나의 육체적 고난, 육체적 생명을 버리는 것은 문제가 안된다, 영적으로 내가 영원히 지옥으로 가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그리하겠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그는 간절하게 그 동족 유대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교육자는 적어도 두 가지 자세를 가져야 한다. 첫째,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한다.' 어떤 사람을 본다 해도 희망을 잃지 않아요. 어떤 나쁜 사람을 본다 해도 희망을 잃지 않아요.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보면서도 그 사람에 대해서 절대로 실망하지 않아요.
여러분, 가장 무서운 욕이 바로 '나는 당신에게 실망했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나오면 다 끝난 것입니다. 우리가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놓고 실망했다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흔히들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도 뜻대로 안돼서 실망했다느니, 그렇게 쉽게 말하는데, 이는 참으로 잘못하는 것입니다. 실망은 가장 무서운 죄가 됩니다. 그래서 교육자는 절대로 실망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또 '둘째는 음성을 높이지 않는다'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론적으로 설명했다고 납득이 가는 게 아니예요. 음성이 높았느냐 낮았느냐가 문제예요. 어떤 눈빛으로 말했느냐 하는 것이에요.
그저 생글생글 웃으면서 밝은 얼굴로 얘기하면 '나가 죽으라'고 해도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아무리 좋은 말을 한다 하더라도, 아무리 이론에 맞고, 도덕적으로 맞고, 신앙적으로 옳은 얘기를 한다 하더라도 음성이 높으면 소용없는 거예요. 자고로 교육자는, 정말로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절대로 음성을 높여서는 안됩니다. 음성을 부드럽게, 얼굴을 밝게-이것이 절대조건이에요. 바로 이 두 가지를 지키지 못해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화목이 이루어지지 않고, 문제가 생기는 것이에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끝까지 저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음성을 높이지 않습니다. 절대로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무엇을 말씀하는고 하니, 오늘의 본문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불신을 지적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또 잘 믿어주지 않는 것은 무식하기 때문이다, 합니다. 무언가 잘못됐어요.
something wrong, 무언가 잘못돼가지고 그만 마음이 어두워져서 듣지 못해요. 깨닫지 못해요. 그래서 이렇게 된 것이지 본래 나쁜 것은 아니예요. 사도 바울은 저들이 깨닫기만 하면 언제라도 돌이킬 수 있다고, 내가 깨닫는 것처럼 깨닫고, 내가 아는 것을 저들도 알 수만 있다면 곧 주님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모르니까 가르쳐야지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이 엄청난 죄도 무식 탓입니다. 몰라서 그 짓을 한다는 거예요. 또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거예요.
몰라서, 모르기 때문에-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교육적 관점입니다. 또 신앙적 자세이기도 합니다. 병리와 생리 중 이것은 병리적인 것이라는 거예요. 뭔가 잘못돼서 이렇게 된 것이지, 절대로 근본적으로 나쁜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가끔 이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문제아가 있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요. "그 애가 나쁩니다. 그 애는 근본적으로 나쁩니다. 그 애의 조상적부터 나빴습니다." 하지만 그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우리 아이가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뭔가 잘못돼서 이런 거예요. 본디 나쁜 아이가 절대 아니예요."-그렇게 끝까지 말하고 싶은 거예요. 이것이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을 위함이니(1절)"-이스라엘이 왜 문제가 됩니까? 율법을 먼저 알고, 하나님의 법을 먼저 아는데 왜 그리스도께로 안돌아오느냐, 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지 않아요. 바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무식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의 무식이 무엇이냐-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2절)"-열심은 있으나 지식이 없다 합니다. 경건은 결코 무식의 소치가 아닙니다. 무식은 경건이 아닙니다. 단순한 열심, 그것 가지고 경건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지나친 열심 때문에 무식해졌는지 몰라요. 너무도 열심이어서 이것 때문에 무식하게 됐는지도 모릅니다.
근자에 서울대 이면우 교수가 쓴 재미있는 책 한 권이 있습니다.
「신사고 이론 20」이라는 제목의 책인데, 요즈음 아주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라고 합니다. 그 책에 보면 신사고(新思考) 이론 스무 가지 중에 열 번째로 이런 말이 있어요. 사회 공적 이론-공적(公敵)이라는 말은 공공한 적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무슨 공을 세웠다는 얘기가 아니라, 공공한 적이 있다, 악이 있다, 그 말입니다. 이면우 교수는 재미있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세 가지 부류의 공적이 있다. 첫째는 무식한 사람이 전문직에 앉아 있는 경우, 둘째는 무식한 사람이 소신을 가지고 있는 경우, 셋째는 무식한 사람이 부지런한 경우다. 이 세 가지가 다 문제가 된다.' 이들은 장기적인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사회의 공적이요, 또한 그 행태가 어쩌면 지존파보다 더 나쁘다는 거예요. 왜 그런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사회 공적에 대하여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사회가 이 사람들에 대해서 관대하다는 것이에요. 이들의 공통점은 고학력 소지자요, 명문대 졸업생이요, 주위로부터 선망의 대상이고, 가족들이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얼마나 무식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옛날에 일류대학 나온 것만 생각하고 있거든요. 이게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이게 제일 무식한 거예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자, 이제 이런 사람이, 전문분야의 지식이 없는 사람이, 무식한 사람이 전문직에 있게 되면, 더욱이 중요한 자리에 오르게 되면 그 취임사 때에 주로 무슨 말을 합니까? '이 분야에 대하여 전문지식도 없고, 여러 모로 부족한 제가 이렇나 중책을 맡게 되어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겸손한 것 같은데, 사실 알고 보면 무식해서 하는 소리거든요. 그러니 그 회사가 무엇이 되고, 그 나라꼴이 무엇이 되겠느냐 그 말이에요. 둘째는 무식한 사람이 소신을 가지고 있는 경우입니다. 식견이 부족한 사람이 소신을 갖고 있으면 공부할 생각을 안해요. 소신만 내세워요. 고집만 있는 거예요. 다 잘못해놓고도 '소신껏 했습니다'라고 말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다 망친 다음에 소신만 남겠어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셋째는 무식한 사람이 부지런한 경우입니다. 이는 정말 문제입니다.
보세요. 이런 사람이 부지런하면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 다 건드리고, 갈곳 안갈 곳 다 다니고, 끌어들이지 말아야 할 것도 다 끌어들이고, 쉬지 않고 모두 찾아다니면서 사고만 만들고 있는 거예요. 무식하고 부지런하면 큰일이에요. 차라리 게으른 게 낫지요. 안 그렇습니까? 세대가 변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이렇게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유대사람들, 정말 무식해요. 그러면서도 자기가 제일 많이 안다고 생각을 해요. 율법에 대해서는 다 안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예수를 영접하지 않아요. 정말 소신이 있어요. 열심도 있어요.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몰라요, 성경도 몰라요, 그리고 율법도 모르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열심은 있으나 지식이 없다-이것이 그 첫째입니다.
또하나, 저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있어요. 자기의 의만 알고, 하나님의 의를 몰라요. 자기의 의와 하나님의 의를 대결시키려고 해요. 이런 바보같은 사람들이 어디 있어요?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히 그럴 수 있습니까? 오늘의 본문에도 보면 그런 말씀까지 있지 않아요?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다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6, 7절)."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음부에 내려가겠느냐'--다 건방진 소리지요. 우리가 어찌 감히 하나님의 의 앞에 내 의를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들은 자기의 의를 내세우면서 하나님의 의를 수용할 생각을 못합니다. 그런고로 무식한 것이지요. 자기의 의에 집착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하지를 않아요. 이 얼마나 외람되고, 이 얼마나 망녕된 무식입니까? 이렇게 자기의 의와 하나님의 의를 대결합니다. 이렇게 하다보니 십자가 위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하는 이 진리를 알 리가 없지요. 우리가 로마서 1장에서 보지 않았습니까? '십자가 위에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었다'-이것이 로마서의 주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하나님 의가 계시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것을 모르는 거예요. 깜깜한 거예요. 자연히 알 수가 없지요. 자기의 의에 집착하고 있으니까. 그런고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의, 그것을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창세기부터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6)" -아브라함이 의로워진 것은 그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의롭다 함을 입은 것입니다. 의로 인정을 받은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를 내가 수용한 것일 뿐입니다. 이 엄청나고 귀중한 위에 대해서 유대사람들은 무식했어요. 전혀 몰랐어요. 그런 채로 그저 자기 의, 자기 선… 이것만 붙들고 있었어요. 그러는 동안에 점점 죄에 깊이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성경의 총 주제요, 믿음의 근본이데 이 신비롭고 엄청난 사실을 저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왜요? 자기의 의를 고집하느라고, 자기의 의를 자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무시하는, 그러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4절)"-"Christ is the end of the Law." 유명한 말씀입니다. 신학적으로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the end of the Law-그리스도로 인해서 율법의 효력은 끝났어요. 율법의 요구는 정지됐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은 다 완성됐어요. 그런고로 그리스도는 the end of the Law, 율법의 끝이다,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바로 우리들을 위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그와 같은 귀중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아주 깊고 오묘한 말씀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다 지키셨습니다. 율법을 지키시기 위하여 그는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 죄와 위선으로 가득한 성전에서 그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율법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그는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율법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그는 모든 법, 유대사람들이 정한 그 법을 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는 죄인처럼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마치 율법을 못 지킨 자인 것처럼, 율법을 전혀 못 지켜서 저주받은 자인 것처럼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율법을 못 지키고 죽었으면 못 지킨 죄값으로 죽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율법을 다 지키신 분이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그 죽음은 율법을 못 지킨 자를 위하여 죽으심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오묘한 것입니다.
율법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율법 자체에도 철두철미하게 예표적 의미가 있습니다. 예표-거기에는 반드시 그가 지향하는 reality, 실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선 의식법을 생각해봅시다. 레위기에 보면 많은 제사들이 있습니다.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이렇게 계속 제사를 드립니다. 이 제사라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그림자로, prototype로, 예표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언적이고, 예표적인 것이에요. 그렇다면 이제 이 그림자는 본체가 오면 물러가게 마련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끝이 되십니다. 또한 도덕법을 생각해봅시다. 십계명이라는 것은 도덕법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무엇무엇을 하지 말라, 말라, 했지만 이 모든 법은 예수님 말씀대로 '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면 끝난 거예요. 그러하신 예수님께서 참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참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셔서 친히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자, 우리는 이제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그런고로 도덕법은 완성된 것입니다. 예수로 인하여 완성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그 제사법이 완성되고,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도덕법이 완성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그 의를 힘입어 의식법을 완성하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뜻을 따라서 사랑하면 모든 율법을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긍정적인 것은 언제나 부정적인 것을 다 소화해버립니다. 다시 말하면 부정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 안에서 소화되는 것입니다. 상징은 실제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본체 앞에서 사라지는 것이에요. 예언이란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언이 성취되는 그 실제가 이루어지는 순간에 예언은 자기 본분을 다 끝낸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약혼식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약혼식도 중요하고, 약혼기간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결혼식과 함께 그 모든 일은 다 지나가고 마는 거예요. 만약 결혼해놓고도 '약혼했을 때가 좋았어. 그 때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런고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이다-이렇게 엄청난 사실이 있는데, 그렇게도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저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어요. 왜 모르게 됐느냐, 자기의 의에 노예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꼬집어 말씀드리자면, 유대사람들이 가장 치중하고 힘쓰고 노력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제사예요. 저들은 그저 많은 제사를 드리려 했어요. 그러다 보니 외식주의에 빠졌어요. 제사 드리는 일만 열심히 했지, 그 제사의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제사만 드리고, 그 제사가 가지는 의미는 상관하지 않아요. 이것처럼 잘못된 일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제사 드리면 죄사함 받는다 하니까 제사드릴 셈치고 죄짓는 거예요. 마음대로 죄짓는 거예요. 제사만 드리면 되는 걸로 아는 거예요. 그저 소만 몇 마리 드리면 되고, 양만 몇 마리 드리면 된다, 1년만에 한번 속죄제를 크게 드리면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완전히 외식주의에 빠지고, 그의 생활은 제사 드리는 자의 거룩한 본분과는 상관없이 생활이 되었어요.
그러면서 제사 드리는 일만 열심히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런가하면 이 계율과 도덕법에 대해서는 형식주의에 빠졌어요.
율법을 지키는 것 같기는 한데 형식적으로만 지켜요. 내적으로 지키는 것이 없어요. 안식일만 하더라도 그렇지요. 안식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쉬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그것을 실천하는 거예요. 이것이 안식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한 마디로 말해서 거룩하게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형식주의에 빠지다보니 그에 대한 계율이 많은데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그 장로들의 유전들만 지키느라 힘쓰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 율법의 본뜻은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 도대체 율법의 목적이 뭐냐 하심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이 얼마나 시원한 말씀입니까? 그런데 저들은 전승에 매여서 심지어는 이런 것까지 정해서 지켰다고 합니다. '안식일에 무거운 것을 들고 다니면 안 된다. 어느 정도 무거우면 안 되느냐, 두 개의 마른 무화과보다 더 무거운 것을 들면 안 된다. 그리고 어떤 음식이든지 먹는 것은 안식일과 아무 관계가 없지만 만드는 것은 아니 된다. 그러니까 미리 만들어놓았다가 먹어야지, 그날 만들면 안 되는 것이다.
또 병에 대해서도 병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돕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아니지만, 병을 치료해서 낫게 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한 것이다. 막대기 하나도 절름발이가 들고 다니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두 다리가 멀쩡한 사람이 지팡이를 들고 다니면 그것도 죄다…' 하여간 여러 가지였어요.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놓고는 지켰다고 해서 교만하고, 못 지켰다고 해서 절망하고, 남 못 지킨다고 멸시하고… 이렇게 되어버렸어요. 이렇게 자기 의, 자기자랑에 그만 도취되어 있는 동안에 율법의 본뜻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거이에요.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래서 오늘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끝이시다. 이 엄청난 진리를 이 교만한 율법주의자들, 유대사람들은 몰랐다. 그런고로 열심은 있으나 무식하다'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구원은 어디에서 오느냐-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내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의를 내가 수용하는 것이다.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이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느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이에 대해서 본문은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마음으로 믿어(10절)"-여기서 '마음'이라고 하는 말을 헬라어로 '칼디아'라고 하는데, 이 말은 우리네 생각과는 좀 다릅니다. '마음'하면 우리는 지(智)․정(情)의(意), 이렇게 삼 요소의 감정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사람들이 생각하고, 헬라원문이 가리키는 이 '마음'은 지적 요소를 말합니다. 정적(情的) 요소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마음으로 믿어'라는 말은 '마음속에서부터 이것을 이해하여'라는 말씀이에요. 옳습니다, 바로 그게 옳습니다, 하고 합리적으로 이해라는 거예요. 납득을 하는 거예요. 이것이 마음으로 믿는다는 뜻이에요. 아무 의심도 없이 '옳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이렇게, 깨달으면서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것이 마음으로 믿는 것이에요. 그저 가슴에서 '믿습니다. 좌우간 믿습니다'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의 지성으로, 잘 생각해서 '그것이 옳다'하고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랑과 지식을 겸한 것이에요. 한 마디로 말해서 요샛말로 total acceptance, 전적으로 수락하는 거예요. 북한말로 '전적으로 접수'하는 거예요. 여기에는 이의가 없어요.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하고, 가슴을 열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야말로 '아멘'하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제는 어떤 의심도 없어요. 만족하게 받아들입니다. 이게 바로 마음으로 믿는다 하는 뜻입니다.
이렇게 된 바탕이 있습니다. 본문은 다시 십자가 사건을 말씀하는데, 예수의 십자가를 보면서 이것을 제사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제물과 내가 identify,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옛날 제사법으로 말하면 그렇습니다. 죄인이 제사를 드립니다, 제단 앞에 끊어 엎드리고 있습니다. 제물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 죄인은 '나는 곧 저 제물이다. 내가 지금 저 제단에서 죽고 있다'하는 마음으로 통회자복하며 기다립니다, 이제 그 제물이 다 탄 다음에 제사장이 그를 일으킵니다-본문의 '마음'은 바로 그런 마음을 가리키는 거예요. 예수의 죽음이 내 죽음이요, 예수의 십자가가 곧 내 십자가요, 예수의 십자가 바로 그 현장에서 옛사람인 나는 죽었어요, 완전히 죽어버렸어요-이러한 믿음, 이것이 마음으로 믿는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할 때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내가 살아나는 것이에요. 다시 출발하는 거예요. 다시 사는 것이에요. 율법으로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에요. 나로 죽고, 은혜로 사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마음으로 믿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받아들이면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이것을 마음으로 믿는 순간에 이제 나는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죄인은 죄인이로되 의롭다 함을 얻은 죄인입니다,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구원받은 정체감을 가집니다-이것이 마음으로 믿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입으로 시인하여(10절)"-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입으로 그리스도를 주(主)로 시인한다는 말입니다. 주로 시인한다-이 말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고 하니 고백적 의미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고백합니다. 여러분, 결혼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혼식은 잠깐이지만 그실 아주 중요합니다. 저는 결혼식 주례를 참 많이 섭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 처음 만난 것도 아니고 벌써 몇 년 동안 연애도 하고, 같이 돌아다니고, 그렇게 친하게 지내요. 그런데 결혼식은 역시 결혼식인가봐요. 가만히 보면 참 심각해요. 심각하다보니 실수도 많이 하고요. 어떤 사람은 결혼식 할 때에 막 눈물을 흘리며 아주 감격합니다. 그래 저는 결혼식 끝난 다음에 그렇게 물어봅니다. "이게 생각했던 것보다 어렵지?" 그러면 "예, 정말 심각합니다"라고 대답해요. 보세요. 결혼식이 중요해요. 왜요? 이것은 public initiation이에요. 모든 사람 앞에서 공포(公布)하는 거예요. 이 사람은 내 남편이요, 나는 이 사람의 아내입니다, 우리는 부부입니다, 하고 모든 사람 앞에 공포하는 거예요. 고백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여기서 나를 아노라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아노라 하리라.' 그런고로 공개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가지고 있고, 공개적으로 사람 앞에서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나 자신이 믿음으로 구원받았기에 입으로 시인하는 순간에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가장 낮고 겸손한 마음. 그리고 많은 사람 앞에는 그리스도인으로 삽니다.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요. 이것이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해야 합니다.
여기서 '주'라고 하는 말에는 특별히 중요한 의미가 네 가지 있습니다. 일반적 의미로는 '주'를 '큐리어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일반적인 경칭(敬稱)입니다. 존경해서 부르는 칭호입니다. 특별히 노예가 주인을 향해서 주라고 부릅니다. 둘째로 로마황제를 향해서 '주'라고 합니다. 셋째로 헬라사람들은 자기들의 신을 향해서 '주'라고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이 말씀하는 '주'에는 대단히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십계명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지요. '주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그런고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못 부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여호와'라고 써놓고 읽기는 '아도나에'라고 읽습니다.
'주'라고 읽습니다. '여호와'라고 쓰고는 읽기는 '주'라고 읽어요. 그렇기 때문에 칠십인역에서는 '여호와'라고 변역하지 않고 '아도나에' '큐리어스' '주'라고 번역을 합니다. 이것은 이방사람들이 읽어야 되는 책이니까요. 그래서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실 때에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7절)"라고 말씀합니다.
'주'라고 나옵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에서 인용한 것인데 그 원본을 보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신 6:16)"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여호와'가 신약에서는 '주'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여기서 '주로 고백한다'라는 말은 '하나님으로 고백한다'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글자풀이 할 문제가 아니예요. 이것은 엄청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그렇게 시인하면, 그렇게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함입니다.
종교학적으로 크리스찬이란 이렇습니다. '기독교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주로 믿는 자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오늘의 본문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3절)"라고 말씀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이것은 무엇입니까? 자, 실제생활 속에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하는 말은 찬송도 되지마는 결정적인 것은 기도를 말합니다.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는 기도의 대상이요, 축복의 대상입니다. 축복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리스도로부터, 성부, 성자, 성령으로부터 복이 임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요. 모든 일에서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도의 대상으로, 축복의 근원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분으로, 다시 말해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하신 바로 그러한 분으로 항상 주님을 부르는 자입니다. 주여,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것을 이해해주시옵소서-이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함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고-이런 자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렇나 내용의 믿음을 가질 때에 그에게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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