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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길을 즐거워하라(잠언 23:22-26)

by 【고동엽】 2024.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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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길을 즐거워하라(잠언 23:22-26)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 기지 말지니라 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 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 을 즐거워할지어다.

 

'고려장(高麗葬)'이라고 하면, 고구려 때에 늙고 병든 사람을 구덩이 속에 버려두었다가 죽는 것을 기다려 장사지냈다고 하는 우리네 고래의 속전(俗傳)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 옛날에 실제로 그런 풍습이 있었다고 하는 설도 있고 한낱 전설에 불과하다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마는 그거야 어찌되었건 간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같은 악습이 없어지게 된 내력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른바 '고려장 설화'인 것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 곳곳에 널리 분포되어온바 '기로전설(棄老傳說)'이라고도 하는 이 설화는 우리에게 자못 깊은 교훈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너 가지로 이야기되는 이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옛적, 사람의 나이가 많아지면 그를 산채로 산 속에 갖다버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한 노인이 있어 나이 일흔이 되었습니다. 그 아들이 이 늙은 아버지를 갖다버리려고 지게에 지고 산중으로 들어갔습니다. 적막한 산 속에 늙은이를 내려놓고 약간의 음식과 지게를 곁에 둔 채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내버린 그 지게를 같이 따라왔던 어린 아들녀석이 도로 메고 따라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까? 웬일인가 싶어 ", 그 지게는 왜 메고 오느냐?" 아버지가 물으니 어린 아들은 대답합니다. "아버지도 일흔 살이 되면 제가 이 지게에 지고 와서 버려야 될 것이 아닙니까?" 순간, 이 아버지는 크게 뉘우치고 깨달은 바 있어 늙은 아버지를 다시 지고 집으로 돌아왔으며 그 후로 정성을 다하여 봉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이 있고부터 '고려장' 악습이 없어졌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들의 불효를 강조하면서 어린 손자의 지혜를 해결의 실마리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마는, 아무튼 젊은 사람들이 흔히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이야기 속의 아들처럼 자기는 안 늙을 줄 아는 그것입니다. 지금은 젊지만 머지않아 늙습니다. 지금은 내가 자식의 위치에 있지만 머지않아 할아버지 할머니가 됩니다. 늙은 사람이 젊어지는 법은 없지만 젊은 사람은 반드시 늙은이가 됩니다. 이 이야기, 절대로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 만사, 심은 대로 거둡니다. 내가 늙은 부모를 잘 봉양하면 내 자식들도 나 늙었을 때에 그렇게 봉양해줍니다. 내가 늙은 부모 가벼이 여기면 내 자식들도 나 늙었을 때에 나를 가벼이 여깁니다. 나도 곧 늙어 노인이 됩니다. 무력해져서 의지할 데가 필요하게 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어머니가 늙어서 쓸모 없다고 생각한 아들이 그 노모를 등에 업어 내다버리려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이상하게도 등에 업힌 어머니가 손에 잡히는 대로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다 떨어뜨리곤 합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나뭇가지는 왜 꺾어서 버리세요?" 어머니는 천연스럽게 대답합니다. "얘야, 너는 매사에 덤벙거리는 것이 흠이 아니냐? 여기는 깊은 산 속이다. 지금은 이렇게 수월히 들어가지마는 돌아 나올 때에는 네가 필시 길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니 돌아올 때에는 내가 던져둔 이 나뭇가지들을 길잡이로 삼아라. 그렇게 하면 너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은 뚝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목이 컥 메입니다. 그는 어머니를 업은 그대로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으며, 그 후로 지성껏 효도를 다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이 있고부터 '고려장' 악습이 없어졌다고 이야기하는 설화입니다.

무릇 부모의 사랑은 저렇듯 일방통행입니다. 자신은 자식의 손에서 버려지면서도, 자신은 자식의 손에 죽음으로까지 내팽개치이면서도, 그 몹쓸 자식인데도 그 자식만은 잘되고 잘살기를 소원하는 그 사랑-----계산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이 바보같은 마음이 부모의 사랑인 것입니다.

고려장이 없어지게 된 내력을 이야기하는 설화 가운데 역시 널리 전승되는 것으로 앞의 두 이야기와는 형태가 조금 다른 것이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고려장이 국법으로 정해져 있는 나라의 재상으로 있는 어느 효자가 아버지가 늙어 고려장을 할 때가 되었는데도 차마 그럴 수가 없어 아버지를 남몰래 숨겨두고 봉양을 합니다. 그러던 중에 한번은 중국에서 사신이 이르러 그 나라 사람들의 지혜를 떠볼 양으로 어려운 문제를 내어 풀기를 요구해왔으나 아무도 풀지를 못하여 온 나라가 근심에 싸였는데, 재상의 숨겨놓은 늙은 아버지가 문제의 해답을 일러주어서 일이 무사하게 되었고, 그 일을 계기로 나라에서는 '늙은이도 쓸모있다. 모름지기 나이든 사람의 지혜를 빌릴 것이다'라는 판단을 내리게 됨으로 마침내 '고려장'을 국법에서 폐지하였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현대판 고려장이 있었습니다. 연전 426일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경남 창녕 경찰서에 존속유기치사(尊屬遺棄致死) 혐의로 어떤 부부가 체포되었습니다. 곡절인즉, 이들은 무허가 흥신소에 백이십만 원을 주고, 뇌졸중으로 중풍병자가 된 팔순의 친노모를 버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부탁받은 흥신소 사람들은 도저히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이 노인을 아파트 계단에 내버려서 숨지게 했습니다. 이것이 두 젊은 부부가 구속된 연유입니다. 그야말로 문제입니다. 현대판 고려장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런 의미의 고려장은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도록 내버려두고, 죽을 곳에 몰아넣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부모로 하여금 스스로 "내가 죽어야지"라는 말을 하도록 만드는 것---결국 고려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단지 옛날 이야기일 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알게 모르게 우리 가운데에 고려장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이래서야 어떻게 우리가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20:12)"라고 말씀합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19:3)"라고 말씀합니다. 그밖에도 '부모에게 순종하라. 청종하라'라고 잠언 18, 41절 등 여러 곳에서 말씀합니다. '공경하라'는 것은 수직적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친하다'하는 것과 같은 상대적 관계가 아닙니다. 보다 높은 차원에서 부모님을 높이고 우러르는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부모를 거역한다든지 효를 다하지 않는 자가 있거든 벌하라고 성경은 엄하게 말씀합니다.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21:17)"--부모를 향해서 욕설을 하고 저주하는 자가 있거든 돌로 쳐죽이라 함입니다. 부모의 명예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21:15)"----부모에게 손찌검을 하는 자가 있거든 가차없이 끌어내어 돌로 쳐죽이라 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사람이 돌로 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돌로 치실 것입니다. 사람이 쳐죽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쳐죽이실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과 심판이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25)"라는 말씀으로 효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씀입니다. 좀더 높은 차원에서 말씀합니다. 기독교에서 효()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다른 어떤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명령이요 계명입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에게 복으로, 복된 길로 주신 것입니다. 이 길을 통하여 복을 받도록 그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네 부모를 기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부모를 기쁘게 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 방법을 자세히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먼저는 부모에게 청종하고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부모의 경륜과 지혜를 인정해야 합니다. 부모님은 인생의 선배입니다. 더 많은 고통을 겪었고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하였습니다. 그 많은 시련 속에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철이 나도 몇 번은 더 났습니다. 보세요. 나이 드신 노인 분들은 건망증도 심하고 때로는 약해진 기력으로 인하여 자기 몸 가누기도 힘들지만, 지혜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인생 경험의 노하우(know-how)가 있습니다.

부모는 우리보다 인생을 더 많이 산 입장에서 높은 지혜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혜를 인정하라. 그리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는 우리를 사랑하기에, 우리는 마땅히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잔소리든 무슨 말이든 간에 전부가 나를 사랑해서 하는 말씀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해서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거역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복된 길이 됩니다. 여러분, 불효하는 가정에는 복이 없습니다. 불효하면서 만사가 복되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효가 곧 복의 길이요, 화목의 길이요, 형통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강한 것은 바로 이 전승(傳承)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지혜로울 수 있는 방법은 부모에게 주어진 그 많은 지혜를 내가 터득하는 데에 있습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지혜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형통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다시 말해서 중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 존재를 높이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책후한서에 보면 곽거라고 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와 거의 비슷한 이야기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책삼국유사에는 손순이라는 사람의 지극한 효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 중에서 중국의 곽거에 대한 이야기는 저희 할아버지께서 몇백 몇천 번이고 제게 수없이 들려주셨습니다. 당신이 곽씨 성()을 가져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쨌든 저를 앉혀놓고는 "곽거는……"하고 말문을 여시곤 하셨습니다. 좌우간 어찌나 많이 들었던지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곽거에게는 아들 삼형제가 있었는데, 며느리들이 같은 시기에 모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큰아들과 며느리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가 좀더 오래오래 살고싶구나. 그렇게 하려면 여자의 젖을 먹어야 한다더라. 그러니 태어난 네 아이는 땅에 묻어버리고 네 아내의 젖은 내가 먹어야겠다." 그 아들이 아버지에게 무어라고 대답했겠습니까? "아버지가 나이가 많아지더니 노망이 들었나? 웬 정신나간 소리를 하세요"라며 대번에 거절합니다. 둘째아들도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거절합니다. 그런데 셋째아들은 달랐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자식은 또 낳으면 되니까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내다가 땅에 묻으려고 남편은 곡괭이를 들고 아내는 아이를 안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아버지도 같이 따라나섭니다. 곽거는 어느 나무 밑에 다다르자 "여기를 파라"고까지 지적합니다.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금종이 나왔답니다. 여러분,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도주의적으로나 합리주의적으로 평가하려고 하지 마세요. 적어도 이 두 이야기가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면, 자식보다 부모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 자식사랑 한다고 하면서 그저 자식만 위합니다. 그리고 나서 자식들에게 효도 받겠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부모에게 불효하면서 자식 키워 가지고 효도 받을 것 같습니까?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못 보았는데 어떻게 그 자식이 커서 자기 부모에게 효도를 하겠습니까?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 전래되는 이야기 가운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 자식이 ", 이거 맛있겠다"하면서 늙은 할아버지의 맛난 음식을 자꾸 뺏어먹습니다. 보다못해 자식을 내다버리는 그런 부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세요. 자식 위한답시고 부모는 저리가라입니다. 바로 이것이 잘못되었습니다. 순서가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모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풍속 가운데 제사를 모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면 살아생전에는 부모님을 잘 안 모시다가 돌아가신 다음에 제사 차리느라고 야단입니다. 저는 도대체 이런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언젠가 책에서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 쓸모 없는, 능력 없는 부모에 대해서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죽어서 귀신이 된 뒤에는 자기들에게 복을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생전에는 안 모시다가도 돌아가신 다음에는 제사를 올립니다.

'잘 모셔야 귀신이 되어서 우리 가정에 복을 주시지'라는 샤머니즘(shamanism)이 제사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되, 먼저 부모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어느 가정에 심방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분명히 그 집에 노모가 계신 줄 알고 인사를 드리려고 했더니, 글쎄 골방에 가두어 놓고서는 "목사님, 들어가지 마세요"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문을 확 열고 들어가 보니 퀴퀴한 냄새가 진동합니다. 저를 보시고 그 노모께서 얼마나 반가워하시는지, "이리 오셔서 같이 예배드립시다"하십니다. 그런데 옆에서 "아유, 그만두세요"하고 만류하는 것입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며 결국은 같이 모시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를 붙들고, 하루종일 누구와도 말을 못해서 입에서 냄새가 날 지경이라고 말씀하시던 그분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여러분, 모름지기 부모님의 존재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보세요. 오늘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부모를 귀히 여기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제가 얼마 전에 잠시동안 장모님을 모셔본 적이 있습니다. 장모님이 어디 가실 곳이 없어서 제가 모신 것이 아닙니다. 슬하에 자녀만도 63녀로 9남매나 두셨습니다.

서로서로 자기네가 모시겠다고 했지만, 제가 간곡히 부탁해서 저희 집에 모셨습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생각해서 대신 장모님을 모시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집안에 어른이 계시니까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저녁에 집에 들어갈 때에 어머님이 계시면 참 반갑고 좋습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이런 말씀을 드려보았습니다. "집에 들어올 때에 어머님이 계시면 저는 이렇게 좋습니다. 그런데 안 계시면 마음이 쓸쓸해지고 집에 들어올 재미가 없어집니다." 그랬더니 언젠가는 어머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빈말인 줄 알지만 듣기가 참 좋구나." 여러분, 부모의 존재를 인정해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저도 제 아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단추를 단다든지 다림질한다든지 하는 일은 일부러 어머님께 부탁을 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나는 이 집에 필요한 사람이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 그릇 하나라도 깨뜨릴라치면 '왜 깼느냐'라고 자꾸 다그치면 결국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나는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하고 그 존재의미를 잃어버리게 되고 맙니다. 이것이 고려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삶의 가치, 존재의 의미를 높여드려야 합니다. '저희에게는 어머님, 아버님이 필요합니다. 어머님, 아버님이 여기에 계셔야만 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중히 여기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은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의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정한 자의 부모는 슬플 것이요, 부정부패한 자의 부모는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딸이 시집을 갔습니까? 옳게 시집살이를 잘해야 그것이 바로 효녀입니다. 자식이 직장에 나갔습니까? 옳게 살아서 의롭게 되어야 비로소 부모님께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새로이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시대가 되어서 그런지, 오히려 출세 못하고 돈 못 버는 남편들이 아내에게 큰소리를 친다고 합니다. "봐라, 내가 출세 못하고 돈은 못 벌었지만 다 의로워서 그런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살다보니 이런 '괜찮은' 시대도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입니다. 의가 효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부자가 효가 아닙니다.

출세가 효가 아닙니다. 오직 의롭게 사는 것이 그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부정축재나 부정입학으로 인해 가문 망신시키지 말 것입니다. 의롭게 사는 것이 효를 이룬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지혜롭게 사는 것이 효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라고 24절에서 말씀합니다. 지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미래지향적인 지식입니다. '오늘'이나 '물질'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먼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보다 더 깊은 세계를 생각하고 영원한 세계를 생각할 줄 알고 사는 것--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혜가 아닌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은 자, 우둔한 자, 정욕에 빠진 자,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자는 부모를 욕되게 합니다. 지혜로운 자가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네 마음을 내게 주며"---마음을 달라고 합니다. 마음은 물질이 아닙니다. 나아가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내 길'이란 무슨 말씀입니까? 부모의 길, 부모의 기억, 부모의 지향했던 목적과 가치관, 그리고 부모의 소원을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가령, 자식이 부모를 보고 이런 말을 한다고 합시다. "아버지는 왜 하필이면 그런 직업을 택했어요?" 이런 것이 불효입니다. 부모님이 하고 있는 그 일이 소중하고 의미 있다는 것을 인정해드려야 합니다. 부모에게는 그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즐거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성공하셨습니다. 절대로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희생이 있어서 내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거룩함이 있어서 내가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기도가 있어서 내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절대로 헛된 생을 살지 않으셨습니다'하고 인정해드리는 것---이것이 효도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홀어머니가 제일 슬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당신께서는 자식 하나를 키우면서 갖은고생을 다하시고 그렇게 외로운 생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이제 나이 들어서 한다는 소리가 "어머니, 누가 혼자 살라고 합디까?"라고 합니다. 세상에 이것처럼 불효의 말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의 진실, 부모의 길, 부모의 간절한 마음, 그 가치를 높이 인정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가난해도 좋고 어렵게 사는 것도 좋습니다. 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저 아버지 어머니의 진실과 그 살아온 길을 기뻐하고 자랑스럽게 여길 뿐입니다. 내 면류관처럼 기뻐합니다"---이렇게 말하는 자식이 있다면 바로 그 자식이 효자입니다.

결코 헛되지 아니함을 인정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어버이의 마음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학자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이 어느 무더운 여름날, 복잡한 장터에서 홀로 몇 시간이고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인사를 해도 인사도 받지 않고, 말을 걸어도 대답도 않고 그냥 서서 눈물만 흘립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벌써 다섯 시간째 그대로 서 있는 것입니다.

지켜보던 제자들이 대체 왜 그렇게 서 있느냐고 물어보자 그제야 대답을 합니다. "사실은 50년 전, 우리 아버지가 바로 이 자리에서 낡은 책을 사고 파는, 헌책장사를 하셨었지. 그런데 손님들과 어느 날 어떤 책을 갖다주기로 약속하셨던 모양이야……"하며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런데 막상 그날이 되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오늘은 내 몸이 아주 좋지를 않구나.

네가 나 대신 오늘 하루만 시장에 좀 나가주렴." 아들은 "헌책장사 하시는 것도 창피스러운데 내가 그런 심부름을 할 것 같아요?"하며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간절한 청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힘들어도 내가 나가야지." 아버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장터에 나가서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무리를 했던 탓인지, 그날 이후 몸이 약해져서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50년이 지난 지금, 그 아들이 그 자리에 서서 아버지의 청을 거역했던 그 때를 생각하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종일 서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디에 서서 얼마나 울어야 할 것입니까? 얼마나 많은 후회가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뉘우침이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나 하나 복되고 나 하나 잘되어서 큰일을 하겠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래도 어느 만큼 성공했다'하는 사람들의 주위를 가만히 살펴보세요. 모두 다 효자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불의의 길을 따르면 성공이 없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서 어찌 기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효를 축복의 길로 주셨습니다. 장수도 형통도 축복도 모두 여기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6:13).

여러분, 보약만 먹는다고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효자가 되어야 건강합니다. 효자가 되어야 장수합니다. 효자가 되어야 형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덕의 기본이요 모든 의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효가 무너졌기에 세상이 암담한 것입니다. 무너져 가는 효를 다시 세워봅시다. 효가 바로설 때에 비로소 모든 일이 잘되고 장수하고, 나아가 복된 생을 영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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