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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지상권세(사도행전 5:12~16)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우리는 지금 사도행전을 통하여 교회의 뿌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본래 모습은 어떤 것이며 교회의 성격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늘 생각합니다마는 교회가 교회됨의 본모습 을 찾아야만 능력을 가지게 되고, 능력을 가져야만 교회가 부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교회가 원상(原狀)으로 복귀할 수 있을는지, 어떻게 해야 교회가 본래의 모습으로, 참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는지 - 그 해답을 찾고 이행해나가는 일은 우리가 부단히 노력하고 애써야 될 하나의 피할 수 없는 긴 과정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보면 초대교회의 교회상(敎會像), 또 교회 의 위상(位相), 교회의 권세, 이런 것들을 간결하고도 자세하게 설명 해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교회의 성격은 어떠한지, 교회의 능력의 소재(所在)는 어디인지, 그리고 세상을 향한 위상은 어떤 것인지 - 이런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초대교회는 앞서 공부한 바와 같이 성령충만한 교회입니다. 그것이 특징입니다. 성령이 임하면서부터 교회가 존재하기에 그렇습니다. 나아가, 성령충만한 교회임으로 성령충만한 역사가 사람들의 감정에 나타나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쉽게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소유욕이 다 없어집니다. 이웃을 보는 눈이, 시각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웃의 필요가 무엇인지, 이웃의 필요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의 마음, 그 사랑의 시각으로 사회를 보고 세상을 봅니다. 그 사랑의 눈으로 스스로를 봅니다. 결과적으로 유무상통 하는 현상도 나타납니다. 유무상통은 성령의 역사의 한 열매일 뿐입니다. 전부는 아닌 것입니다. 한 부분일 뿐입니다. 유무상통이 목적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유무상통이 초대교회를 말해주는 단적인 표현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성격을 말해주는 한 면인 것은 사실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유무상통하고, 그리고 한 가지 뺄 수 없는 것은 핍박입니다. 초대교회에 핍박이 있었습니다. 성령충만한 교회에 핍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고 굉장한 능력이 있는 그 현장에 핍박이 있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그 같은 교회에는 핍박이 있어서 안될 것 같습니다. 오늘같이 교회가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비난받는 때라면 핍박도 충분히 예기할 수 있겠습니다마는 어찌하여 그렇듯 은혜가 넘치고 신앙이 생활화한 그런 사회, 그런 교회에 핍박이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연히 핍박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요 교회가 교회된 본분을 떠났기 때문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도 아니었습니다. 은혜 충만한 교회에 핍박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관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도들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합니다. 야고보 같은 이는 목베어 죽임을 당하고, 스데반은 무참하게 돌로 쳐죽임을 당합니다. 교인들은 고향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재산을 몰수당합니다. 갖가지 핍박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교회가 교회된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있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교회는 핍박과 함께 부흥하고, 핍박과 함께 성장하고, 핍박과 함께 생명력을 찾아온 것이 2천 년 교회사의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표적이 있었습니다. 믿음에 핍박이 있고, 핍박과 함께 표적이 있었습니다. 능력과 권능 곧 표적과 이적이 있는데도 핍박이 있어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듯 능력이 나타나는데 왜 핍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성령충만, 유무상통, 핍박과 고난, 이적과 표적 - 이 모든 사건을 통하여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날로 날로 확장되어나간다는 사실입니다. 깊이 전해지고 널리 전해집니다. 뒤에 공부하게 됩니다마는 사도 행전 8장을 보면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핍박 때문에 흩어졌지요. 가고 싶어 간 것이 아니었어 요. 핍박 때문에 사방으로 흩어졌고, 흩어졌을 바에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온 세계로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핍박이 없었더라면 그냥 예루살렘에 머물러들 있으면서 다만 주님의 재림이 나 기다리자 하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복음 전할 생각을 못했을 것 만 같아요. 우리만 천당가면 되지, 주님 오실 날 가까이 왔는데…… 이러면서 말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좁은 소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핍박이 결국은 그들을 강권으로 내몰아서 온 세계로 복음을 전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야 합니다. '큰 핍박은 있었다. 그러나 핍박이 있음으로 하 여 그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선교가 효과적으로 이루 어졌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대로 초대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먼저 오늘의 본문에 비친바 가장 중요한 것은 '사도들의 권위'입니다. 'Apostolic authority'가 드높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대단한 권위입니다. 그런데 이 권위가 어디로서 주어진 것입니까? 요샛말로 낙하산을 통해서 세워진 것도 아닙니다. 선거운동 해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임명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수직적으로 임명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택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것입니다. 권세는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선적으로 저들을 지명하셨습니다. 그리함으로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공생애 3년에 동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에 동참하고,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뵙습니다. 거기까지가 사도의 권세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오. 내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주도하시는 교회요, 현재는 성령이 역사 하는 교회요, 실제적으로는 사도가 주관하는 교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초대교회를 보면 내막적으로는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요, 실제적으로는 성령을 받아서 성령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사도들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지시를 따르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도들의 가르침 속으로 귀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도의 권세라고 하는 것이 구심점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도들의 그 능력을, 교회의 주인 됨을, 핵심 되고 지도자 됨을 말해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표적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아이디 카드'입니다. 그래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납니다. 마태, 마가, 누가의 공관복음에는 '표적'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이적'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이적'은 헬라어로 '테라스'이고 영어로는 'wonder'- 아주 놀라운 사건, 깜짝 놀랄 사건, 초자연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가면 표적이라고 합니다. '테라' 혹은 '세메이아,' 영어로는 'sign'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이적'과 '표적'을 다 사용합니다. 표적은 뭐고 이적은 또 뭐냐---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같은 사건인데 표적이 라는 관점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에 보이는 발전적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예수님께서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시고, 문둥병을 깨끗케 하시고, 귀신을 내쫓고 하실 때에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야, 굉장하구나'했습니다.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그 속에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 속에 있는 말씀적 의미는 사도행전에서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런고로 오늘에 와서는 이적이 단순한 이적이 아닙니다. 표적과 이적입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어요. 그러나 그 속에 있는 말씀을 이제는 읽을 줄 알아 야 해요. 그 뜻을 알고 있어요. 다시 다른 말로 정리해드리면 이것은 '계시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병이 나았다던가 앉은뱅이가 일어났다던가 하는 사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신다, 특별히 더욱 중요한 것은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나타나셨다, Living Christ가 지금 이 사건 속에 역사 하시고 계시다는 것, 곧 그 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래서 표적입니다.
표적이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시 그런 영적인 눈으로 한번 보면 표적 아닌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모든 사건이 표적입니다. 초대 교회에 있었던 표적 가운데서 특히 중요한 표적은 지난 시간에 공부 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입니다. 이것도 사실은 이적입니다. 우리 는 '이적'하면 병 걸린 사람이 나았다던가 하는 것만 생각하지만 건강'한 사람이 병드는 것도 이적입니다. 더구나 표적의 시각으로 본다면 엄청난 표적이지요. 이걸 알아야 해요. 하나의 사건이 단순한 물리적 사건으로 머물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는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의미 없는 사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베드로의 발 앞에서 죽었습니다. 보고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도 표적입니다. 성령을 속일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합니다. 말씀의 능력이 함께 하고,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위임된 그 권세가 여기서 나타납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표적 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적과 표적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닙니다. 어느 시간과 공간 안에 머무는 사건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현존을 이로써 깨닫고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성도가 성령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성도를 주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왜 성령을 속이느냐 - 꼼짝못하고 이 심판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늘 사도들과 함께 하시고 그 사도들을 초대 교회에서 지도자로 세우시고 계시다는 것,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세우시고 계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표적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들이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고 말씀합니다. 이것 이 또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일찍이 솔로몬 행각에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초대교회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면서 모였습니다. 그런데 핍박이 심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 보십시오. 얼마나 용기가 있습니까? 예루살렘 성전 동편에 있는 솔로몬 행각에 모여서 집회를 가지 는 것입니다. 이것은 막 쳐들어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연상케 하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일이 있지 않습니까? 소 팔고 양 팔고 비둘기 팔고 돈 바꾸는 것을 둘러엎으시면서 어찌하여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드느냐고 책망하시고 다 몰아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쳐들어가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케 하시다 - 이것은 한낱 외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마는 오늘 여기서는 조용한 것 같으나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하고 예배하는 가운데 삼천 명, 오천 명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솔로몬 행각은 일 백 육십이 개의 큰 기둥으로 된 건물입니다. 아 주 큰집입니다. 이런 집에 모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당시 유대사람의 기존 종교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한가운데 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집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이 성전의 주인 됨을 증거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소를 어느 골방이나 어느 마당이나 어느 들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 한가운데로 잡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대단한 일이지요. 절대로 핍박을 피하려들지 않았습니다. 왜 이 말씀을 중요하게 얘기해야 하는고 하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또 교회를 핍박하는 장본인이 예루살렘 성전 그 안에 있는 제사장이거든요. 대제사장인 것입니다.
그런 자가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서, 바로 그 한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증거 하고자 모였으니 예삿일입니까? 절대로 소극 적으로 대하지도 않고 도피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사도들을 모시고 부활을 증거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큰 집회를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겸해서 생각할 것은 당당했다는 것입니다. 눈치보면서 모인 것이 아닙니다. 숨어서 모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개적으로 모이는 것이었습니다. 핍박이 있으나 핍박을 각오한 것이었습니다. 핍박은 과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자, 베드로가 잡혀가서 늘씬하게 매맞고 나왔습니다. 협박을 받았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많은 사람을 몰고 들어가서, 그것도 솔로몬 행각에 들어가서 큰 집회를 열고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엄청난 결단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앙적 용기입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렇다고 합시다. 원체 매를 맞고 핍박받는 것을 영광으로 아니까 문제가 없습니다마는 중요한 것은 교인들까지도,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 초대교회 교인 수천 명도 모두가 같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용기이겠습니까? '부활신앙'의 용기입니다. 예수님처럼 죽으면 예수님처럼 부활 할 수 있다고 하는 부활신앙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저 들은 매맞는 것 두렵지 않았습니다. 죽는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살다가 예수의 이름으로 죽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솔로몬 행각에 모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임 자체에 큰 의미가 있고 신앙간증 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너무 안일하게 믿으려고 합니다. 핍박 없이 믿으려고 하는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문젯거리입니다. 8․15 해방 후 6․25전까지 저는 북한에 있었습니다. 한창 젊었을 때입니다 마는 주일날이면 교회 못나가게 하기 위하여 학교에서 오라고 합니다. 학교에 소집합니다. 그러나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매를 맞아도 안 갔습니다. 그래서 월요일 날은 으레 공부 못하고 매맞는 게 일 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일날 교회에 나갈 때도 참 어려웠습니다.
나가다가 잡혀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주일날이 되면 일부러 이보란 듯이 큰 성경책과 찬송가책을 버젓하게 들고 교회로 갑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어느 귀신한테 소리소문 없이 잡혀죽을지 모르는 세상이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하루는 저녁예배 드리고 나오는 데 "동무, 이리 오시오"하고 다가서는 사람에게 붙잡혀간 일도 있어요. 그렇게 위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책 안 가지고 다닌다거나 조그만 성경책 몰래 감춰 가지고 다닌다거나 다른데 가는 것처럼 위장하고 가다가 "동무 어디 가오"하면 "저기 놀러가요" 따위로 둘러대면서 교회로 가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교인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책 버젓이 들고 담대하게 한바퀴 빙 돌아갔어요. 일부러 이보란 듯이. 신앙이란 공개적인 것입니다. 요새도 보면 조그마한 성경책 하나 핸드백에 넣어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어디 가요?" 물으면 "시장 가요"하면서 오다가 교회로 쥐구멍 찾듯이 쏙 들어옵니다. 못써요. 어디 가느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교회 갑니다" 해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공개적이어야 합니다.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당당하게 - 이게 어디입니까? 예루살렘 성 전 안에, 솔로몬 행각에 저들은 모였습니다. 거기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아주 능력 있는 교회였습니다. 본문 16절 끝에 보니 "다 나음을 얻으니라" 합니다. 병자가 오면 다 고쳐요. 아무 리 생각해도 참 부러워요. 우리도 이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다 나음을 얻으니라" - 귀신들린 사람이 오면 깨끗해지고, 병자가 오 면 낫습니다. 심지어는 '권세'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 여기, 교회의 대단한 위엄이 있습니다. 사도에게 굉장한 권세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손으로 안수하고 한사람, 한사람 어루만지면서 고치는 것이 정도(正道) 입니다. 사람들이 우 몰려와서 안수해달라고 하지만 설교할 일이 바쁘거든요. 설교 시간인 것입니다. 설교하러 가야 합니다. 그런 이를 붙들고 감히 '환자 있는데 고쳐주고 가세요'하고 막무가내로 매달리겠습니까? 베드로가 길을 쓱 나서면 감히 붙들고 내 딸 고쳐주세요, 내 아들 고쳐주세요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삽비라처럼 죽을까봐서도 못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편에서 "이리 데려와"한다면 모르거니와 "나 바쁘다"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감히 붙들지 못합니다. 이렇게 높은 권세를 행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말은 못하고 있다가 베드로가 지나가는 길에 환자를 놓고 그림자라도 좀 비쳤으면 하는 것입니다.
요새는 너무 한다 싶은 경우가 있어요. 교인이 전화를 걸어서 "목사님, 교회를 가야겠는데 차가 없으니 차 좀 보내주세요"하는 사람도 있어요. "내가 아픈데 심방 오세요" 합니다. 바빠서 못 간다고 하면 "교인이 아프다는데 목사가 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하고 나무라 는 교인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그림자라도" 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르지 않습니까? 물론 그림자로야 고칠 만큼 능력이 있을까 의심스럽지만 "그림자라도" 합니다. 그 뜻을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감히 붙들고 내 딸을 고쳐주세요, 내 아들을 고쳐주세요, 지금 당장 손을 얹고 고쳐주세요, 하지 못하는 것은 베드로의 높은 위상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말을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교회가 바로 초대교회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이 대사도 들을 향하여 교인들이고 일반인들이고 감히 함부로 말을 못했어요. 왜일까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듯 큰 권세가 나타나고 큰 이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현장이기 때문에 감히 나쁜 마음을 품지 못하고 함부로 말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위엄(dignity)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교회를 보면 어떤 때에는 권세를 다 잃어버렸어요. 교회 안에서 언성을 높이지 않나, 마음대로 떠들고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겠어요? 이렇게 되면 위상이 없어집니다. 교회의 이미지가 흐려지고 맙니다. 사도행전 19장 12절에 보면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 고"라고 말씀합니다. 바울로서는 전도를 해야 하니까 노상 환자만 고 쳐주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바울을 보고 염치불고 손을 대달 라, 안수해달라 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수건이라도'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높은 능력, 높은 위상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본문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또 하나의 특징은 '모이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고 합니다. 모이는 것입니다. 모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모임으로써 예배하고 모임으로써 기도하고 모임으로써 저들은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사도들로부터 성경을 배우고, 그리고 교제하고 봉사하고 모였습니다. 모이는 데에 힘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잘 모입니다. 열심히 모입니다. 소망교회 교인들, 열심히 모입니다. 모이는 데에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의 교회들을 보면 요새 와서 참 마음 아픈 일이 많아요. 예배당은 큰데 교인은 없어요. 그래서 예배 시간에 가보면 사람은 적은데 본당은 물색 없이 크고 보니 한쪽 구석에 있는 조금만 방에서 예배를 드려요. 이삼십 명쯤이 모여 서 말입니다. 참 마음 아픈 일입니다. 모이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모이는 그만큼 교인들의 마음속에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이는 것이 믿음의 증거입니다. 겸손의 증거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열심히 모였습니다. 사도를 중심으로 해서 모였습니다.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거기에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또 한 가지, 본문에 보니 마음을 같이했다고 합니다.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는 것입니다. 크게 중요한 말씀입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 흔해빠진 요샛말로 민주주의적이라거나 만장일치라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전체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도의 권능 앞에 모두가 하나같이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직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이지 수평적 관계에 서 이루어지는 하나가 아닙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였어요. 여러 문화의 사람들이 모였어요. 여러 형태의 사람들이 모였어요.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다같이 사도를 중심해서 하나가 되는 수직적 관계입니다. 수평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이 있는 교회를 들여다보면 이상한 일이 있어요. 분명히 만장일치로 결정하거나 다 수결로 결정을 했어요. 결정이 났으면 전부가 따라야겠는데 결정하나마나 입니다. 몇몇 사람은 제멋대로 반대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안됩니다. 자신은 하나가 못되고 반대하면서 "하나가 돼야 합니다"하고 소리높이 떠듭니다. '나를 따르라' '나한테 오라'하는 마음보인 것입니다.
저는 참 큰 것을 하나 회개한 일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 가 처음 목회할 때에는 모든 일을 만장일치로 결정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언젠가 그 생각을 바꾼 게 아니라 회개했어요. 만장일치란 있을 수 없습니다. 5대 4라도 좋아요. 다수결로 결정하면 결정 한 그 날부터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가하면 예 하세요"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결정 났다 하더라도 그것을 두고 만장일치라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회의록에는 '만장일치'라고 되어 있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만장일치는 인본주의적 발상입니다. 사람의 짓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는 그런 일없습니다. 다만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 앞에 묵묵히 순종할 따름입니다. 사도의 말씀을 따라갈 뿐입니다. 초대교회는 그래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무슨 일을 두고 투표한 적 없습니다. 오직 한마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적 권위 안에서 하나가 되고,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3절에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라고, 성령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13절을 다시 한번 보면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라고 합니다. '그 나머지'라고 하는 말은 교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킴입니다. 교인이 아닌 사람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직 믿지 않는 사람, 또 하나는 예수를 핍박하는 사람, 곧 아예 안 믿기로 굳어진 사람입니다. 이 두 부류 사람을 가리켜 본문은 '나머지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감히 그들 과 상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도 안 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음 안 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핍박하는 사람들에게서 잠시 핍박이 없었다는 이야기요, 감히 비난하는 자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감히 비난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워낙 권세가 높으니까 이 높은 권세 앞에서 잠시 핍박자가 없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어나가는 판인데 제사장인들 겁이 안 나겠어요? 감히 누가 상종하겠어요? 그런 순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러나 이런 일이 오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다시 핍박이 생깁니다.
또 한 가지, 그 다음 말씀을 보면 "백성이 칭송하더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까지도 교회를 높이 칭찬하더라 함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설사 교회는 안나가더라도 말입니다. 직접 솔로몬 행각까지 가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교회는 좋은 곳이다, 아름다운 곳이다, 귀한 곳이다 라고 칭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칭찬하더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럼으로써 교회의 사회성이 입증되고, 그로써 교회는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교회는 이런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핍박하는 사람도 감히 함부로 대들지 못합니다. 교회 안나오는 사람도 교회를 우러러봅니다. 칭송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열심히 모이고, 열심히 봉사하고 하다보니 어떻게 됩니까?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14절)." 날로 부흥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입니다. 은혜가 충만하고, 권능이 충만하고, 권세가 있습니다. 지상권세(至上權勢) - 이로써 교회는 부흥합니다. 저러한 존재를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우리 교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동시에 우리 교인 하나, 하나의 마음속에 교회에 대한 존엄성, 교회에 대하여, 그 권세에 대하여 다같이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전에 부산진교회에 시무 하던 친구 목사님이 한 분 있는데, 그 교회는 90년된 교회입니다. 역사가 오래된 교회이지요.
친구 목사님이 옛날 당회록을, 수십 년 전 당회록을 한번 읽어보았더니 장로님의 아들이 교회에 하루 빠졌다고 해서 장로님을 책벌했다는 이야기가 있더랍니다. 책벌인즉 1년 동안 장로 휴무더랍니다. 굉장하지요. 그런데 그 장로님은 아무 소리 없이 그 책벌에 순종했고, 1년 후에야 책벌이 풀렸다고 합니다. 굉장한 이야기로 들리지요? 요새 그런 일이 있었다면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데모 같은 것을 할지도 모릅니다. 말도 안 된다고들 하겠지요. 장로가 안나왔다는 것도 아닙니다. 장로의 아들이 안나왔어요. 그런 것을 두고 합당치 못하다며 책벌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는 그렇듯 권세가 있었습니다. 요새는 권세 다 추락했어요. 책벌했다가는 다른 교회로 가버리는걸요. 도대체가 순종할 줄을 몰라요. '감히 상종하지 못하고' '그림자라도' - '그림자'라고 하니 생각납니다마는 전에 인천에 있을 때에 나이 많은 목사님이 계셨는데, 교인들 사이에 돌아가는 말이 있었어요. 모두들 조그마한 가게들을 가지고 있을 뿐으로 어렵게 사는 때인데 그 목사님이 자기 네 가게 앞으로 지나가는 날에는 장사가 잘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그 목사님이 자기네 가게 앞으로 지나갔으면 했다는 것 아름다운 이야기지요? 얼마나 아름다운 믿음입니까? 목사님이 지나가면 정말로 장사가 잘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들은 그렇게 믿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권세는 인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이 다시 사도들을 믿는 마음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 안에 함께 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쓰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의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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