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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한 손님 비유(누가복음 14 : 1 - 1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저희가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장은 여섯개의 비유가 있는 장입니다. 특별히 그 중 다섯 개는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라는 특징을 가진 비유들입니다.
그 첫 번째가 되는 본 비유는 그 배경에 있어 조금 특이한 면을 가지고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어떤 특별한 사람의 초청을 받아서 대접을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에 성경을 보면 세리 마태, 세리 삭개오, 마리아와 마르다 즉 나사로의 가정에서 대접을 했다는 정도이고 그래도 조금 고관으로 생각되는 집에서 대접을 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리새인의 집, 그 중에서도 두령의 집에서 대접을 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접은 했습니다마는 그분위기로 보아서는 마음에서부터 예수님을 존경하는 좋은 뜻에서 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생각하기에는 그저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 보자는 심사에서 초대를 하고 대접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집에서 대접을 받게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식일에 대접을 했다는 것에는 보다 중요한의미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거룩하게 지킬 뿐만 아니라 안식일은 반드시 가족과 함께 지키는 것을 관례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두 세 가정이 함께 모여 지내기도 하는데 음식은 그 전날 만들어 놓았다가 회당을 다녀온 후 쭉 둘러앉아 오찬을 나누며 지내는 것입니다. 이 때의 음식은 안식일에 먹는 것이어서 그렇게 푸짐하거나 고급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은 으례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날인지라 그저 둘러앉아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잔치는 누구를 대접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자기를 과시하는 대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오늘은 우리 집으로 가십시오"라고 하였을 때 여기 이 바리새인 두령쯤 되면 요즈음 말로 오픈 하우스(open house)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손님을 가려서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대체로 그 이면에는 우리는 안식일이면 이렇게 손님을 초대합니다하는 교만한 마음이 작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도 보면 청하고 대접하는 것에 대한 뚜렷한 목적도 없는 가운데 마련된 자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인과 손님은 언제나 비슷한 데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교만한사람이면 그 주인이 청하는 사람도 교만한 사람들이며 따라서 초청 받아 가는 사람 역시 교만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교만한 사람의 집에 가기를 꺼려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주인과 손님은 어딘가에 비슷한 데가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바리새인의 집에 가신 것은 완전히 예외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성서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정말 초청을 받아서 가신 것인지 조차도 의심스럽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 가셨다가 이 바리새인 두령의 집에서 오픈 하우스를 하는 초청을 받아 거기에 들려 음식을 잡수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잔치는 예수님을 위해서 마련한 잔치가 아닌 것으로 보여 집니다.
본문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리새인 자신도 두령이어서 교만한 사람이지만 그 집에 지금 초청을 받아온 사람들도 대체로 교만한 사람들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안식일인지라 정장을 하고 들어서면서 각각 그 앉을 자리를 두고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이는 왜냐하면 앉는 곳에도 그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그 좌석의 높고 낮음도 배열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들어서기가 무섭게 제일 상좌에 앉을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누가 더 높은가를 두고 신경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아주 보기 흉한 장면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아무래도 좀 낮은 자리에 앉아야 할 사람이 먼저 와서는 윗자리에 버티고 앉았는데 그 뒤에 낮은 자리에 앉힐 수 없는 손님이 오자 주인은 어울리지 않게 윗자리에 앉아 있는 그 손님에게 부득불 "더 높은 분이 오셨기 때문에 죄송하지만 저쪽으로 좀 내려앉아 주십시오"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별수 없이 내려앉아야 하고 이런 식으로 자꾸 밀려 내려가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이제 이 장면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경우를 당하지 않는 간단한 요령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 첫째는 상좌에 앉지 마라, 즉 앉지 않으면 될 것이 아니냐는 것이고 둘째는 차라리 낮은 자리에 앉으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분명하신 말씀입니까? 서로 상좌를 택하면서 네가 크냐? 내가 크냐? 네가 양반이냐? 내가 양반이냐? 눈치 작전을 하며 시기하는 저들, 요즈음 우리로 말하면 돈이 더 많은가? 명예가 더 높은가아니면 나이가 더 많은가? 학벌이 더 높은가? 혹은 누가 터주대감인가하며 여러 가지로 신경을 쓰는 것을 보시고 그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께서이 장면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는 생생한 사건의 현장을 보시면서 그 현장을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사건의 현장을 비유로 볼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망신스러운 현장을 보게 되면 거기로부터 깨달음이 있고,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옮겨지는 것을 보면 그것을 하나의 비유로 깨달으며, 겸손한 사람이 많은 사람 앞에서 추대되는 것을 보면 그것을 비유로 새로운 진리를 깨닫는 그러한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 비유를 말씀 하심에 있어 예수님께서는 8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비유의 소재로 삼게된 안식일 잔치의 현장에서부터 혼인 잔치에로 그 장소를 옮겨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 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구체적이고도 간단명료한 말씀입니까? 말씀의 주제는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항상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숨겨진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말로도 겸손하고 행동으로도 겸손하며 한번 자리에 앉는 그것마저도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언제나 겸손하라는 것이요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에 빌립보서 2장(1-11)에 보면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높이셔서 만왕의 왕을 삼으시고 그 앞에 삼라만상이 무릎을 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또한 베드로 전서 5:5말씀에 보면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잠언 25:6-7 말씀에 보면 오늘 본문과 매우 비슷한 말씀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어떻게 하면 겸손할 수 있는가? 그리고 겸손한 행위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겸손이란 그 성격에 있어서 먼저 사실에 근거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상에 나타난 평가에 근거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나를 평가하는 평가와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그 평가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내가 나를 볼 때에는 80점짜리로 보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에는 50점 짜리로 밖에 보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렇게 평가하는 바가 다를 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잔치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면 나는 나를 어느 정도로 평가할 것이냐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앉을 사람인가 아니면 저기에 앉을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 때에 나를 얼마짜리로 평가하는 가에 따라서 그 시간에 존경을 받을 수도 있고 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간단하게 대답을 얻게 됩니다.
그 대답은 내가 나를 평가하는 그 평가가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것보다 낮고 못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지가 못합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자신이 내린 평가가 다른 사람에 의한 평가보다 훨씬 높습니다. 착각은 자유라는 젊은이들의 유행어가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뒤에는 망신이 올 것입니다. 그러자니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문제는 여기에 있고 모든 불평이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그 때문에 심리학에서 말하는 바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고민이 있는데 하나는 불만이라는 고민이요 다른 하나는 불안이라는 고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만이 무엇이냐 할 때 이것은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해주는 점수가 낮을 때에 일어나는 고민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옳은데 다른 사람은 옳지 않다하고, 나는 제법 유식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무식한 사람으로 보아주고, 나는 제법 인격이 높은 것으로 아는데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보아주니 불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나를 몰라주는가 하는 불만 때문에 고통스럽단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번에는 내가 나를 평가 하는 것 보다 다른 사람이 해 주는 평가가 너무 높게되면 불안해 지는 것입니다. 나는 별로 아는 것이 없는데도 많이 아는 것으로 알고 나는 가진 것이 없음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아무 능력도 없는데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아줄 때, 그렇게 되면 불안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만과 불안 중 어차피 어느 한 쪽을 택해야 한다면 여러분들께서는 어느 편을 택하시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차라리 불만스러운 것이 낫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만약 불안한 처지라면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요 잠 못 이루는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불만해 하는 편에서 그것을 참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쪽이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울리암 케리(William Carey)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사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윌리암 케리라고 하면 인도의 선교사로서 크게 성공한 분이며 그를 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는 분입니다. 특별히 선교사들에게 있어서는 교과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동시에 언어학자로서 자그만치 34개국어로 성경을 번역한 참으로 훌륭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나이 많아진 어느 날 인도를 방문하게 되었을 때 어느 못되고 교만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윌리암 케리에게 망신을 좀 주겠다는 심사에서 윌리암 케리가 본래는 수선공이였다는 것을 들추어 "선생님! 선생님은 선교사가 되기 전에는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었다면서요?"하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윌리암 케리는 아무런 불만도 없이 싱글 벙글 웃으면서 "아니예요, 선생님 잘 모르셨습니다.
나는 구두를 만드는 재주는 없었고 구두를 기웠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그렇게 질문한 사람은 몹시 부끄러워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남이 나를 낮게 평가한다고 하여 거기에 맞서 대답할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가 나를 평가한 것 보다 한 계단만 더 낮추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해서 바둥거리며 자기 인격을 자기가 세워 보겠다며 애를 씁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기의 인격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누구이든 자기를 향하여 사실 이상의 평가를 하게될 때 거기에는 무서운 부끄러움이 따르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평가를 기대 하기가 어려운 것은 사람마다 자기를 평가할 때에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높이려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든 깍아 내리려는 좋지 못한 마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해결은 자기 평가를 보다 낮추는 데에 있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 보다 한 계단만 더 낮추게 되면 아무런 문제도 없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니라 하고 나오게되니 여기에 끝없는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에서 생각할 것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것은 언제나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신경 쓸 것이 못되는 것은 그들이 나를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한창 국민 재건복을 입고 다닐 무렵 한번은 제가 그 옷차림으로 조선호텔을 들어가려는데 저만큼 서 있던 수위가 못 들어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왜 그러시요?"하고 한 마디 하였더니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은 입은 옷을 보아 평가하는 것이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게 옷을 입은 사람이 얻어 먹으러 오는 것이고 보면 그 수위에게만 잘못을 돌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잘못 평가해주는 것에 대하여 조급하게 성낼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평가란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거니와 더욱이 자신이 그렇지 않으면 그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꼭 변명을 하고 설득을 시켜서라도 정확한 평가를 받아야만 마음이 시원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인격이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닐진대 더러 업신여김을 당하면 어떻고 누명을 좀 쓴들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여기 이 잔치 자리에서도 먼저 와서 윗자리에 앉거나, 여기가 내 자리려니 하고 바로 앉을 것이 아니라 주인이 와서 차례를 쫓아 "선생님은 여기에 앉으십시오"하고 앉힐 때까지 저 말석에서 조금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평가를 받는 것이나 평가를 한다는 것이 쉽게 하루 아침에 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조급해 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참된 평가란 직장으로 말하자면 은퇴한 후에야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떠난 다음에야 알게 되고 보다 정확한 것은 미안하지만 죽은 다음에야 아는 것입니다. 저는 문득문득 생각 나는 장례식이 하나 있습니다. 인천에서 목회를 할 때에 한 번은 국회의원을 하던 분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장례식을 인도하러 갔다가 조객이 둘뿐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마는 사람은 장례식날 보아야 합니다. 지금 가까이에 있다고 하여 쉽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 대한 바른 평가는 그 사람이 떠난 다음에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도 올바를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바른 평가는 오직 하나님 앞에 가서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평가에 대하여 높다, 낮다, 잘못되었다며 불만해 하지 마십시다. 더욱이 악인의 형통함을 보며 투기하지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악에 치우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오늘도 내일도 무던히 기다려서 주님 친히 평가해 주시고 높여 주시는 그 날, 그 시간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또한 생각할 것은 더 높은 자가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혼인 잔치에 초대되어 갔을 경우 그 많은 손님 중에는 나보다 더 높은 자가 있음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주빈이겠지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갖지 말고 언제나 나는 말석의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보다 높은 사람, 더 좋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어떻게 평가 하실런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 여기에 몇 사람이 모여 이 분은 지체가 높고 훌륭한 분이라고 했다 하여 그대로 높은 것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보기에는 시원치가 않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더 높은 자리에 앉히실 분이 얼마든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높은 손님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 항상 다른 사람을 나 보다 높이고, 낫게 여기는 겸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빌립보 2:3말씀을 보면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훌륭하게 여기는 그러한 마음이 없이는 절대로 겸손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주인이 평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에 의하면 손님들이 와서 서로 상좌에 앉기 위해 눈치작전을 하면서 분수에 맞지 않게 높은 자리에 앉았을 경우 주인이 보다 높은 사람을 데리고 와서는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되면 얼마나 부끄러워하면서 말석으로 가게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주인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판단은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언제나 진짜 주인은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완전에 기준을 두고 나를 평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저 사람보다 조금 낫다 못하다 하는 것은 문제될 바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앞에 서고 보면 조금 낫고 못하고는 그게 그것일 뿐 윗자리, 아랫자리가 별도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스스로 높일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평가하는 자가 아니라 평가받는 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계속 평가받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평가할 생각만 하니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벚꽃이 만발한 창경원을 다녀오신 분이 벚꽃은 못보고 사람만 보고 왔다기에 저가 있다가 다른 사람을 본 것이 아니라 나를 구경시킨 것입니다 하고 표현을 바꾸어 준 적이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 본 생각만 했지 그 중에 끼여 변변치 않은 자기 모습을 돌아다니며 구경시킨 생각을 않는단 말입니다. 여러분, 나는 항상 다른 사람으로부터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더욱이 기억할 것은 주인의 절대적인 평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또 하나 생각할 것은 그 잔치의 성격이 그날의 주빈을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잔치의 성격에 따라서 주빈이 결정되고 바뀔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결혼잔치에 있어서는 신랑 신부가 가장윗자리에 앉을 것이며, 회갑 잔치에서는 인격이야 어떻든 회갑을 맞는 사람이 윗자리에 앉고 그 곁에는 친척들이 앉는 것과 같이 그 잔치의 성격에 따라서 높임을 받아야 할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아무데서나 내가 윗자리에 앉아야 할 것으로 생각을 한다면 그것처럼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 잔칫집에서 높임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는가하면 초상집에서 높임을 받아야 할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부끄러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생각할 바를 생각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 할 때 점점 무서운 수렁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들 자신에게 한번 비추어 보십시다. 내가 왜 이렇게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여 이유를 찾는다면 이는 스스로 높였기 때문이요 평가를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 당장에 그 평가를 꺾어서 절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보면 아무 고민도 없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부부간에도 그런 것을 보게 되는데 어떤 부인들은 내가 저런 사람하고 어디 살 사람이야? 내가 실수를 해서 어쩌다 이런 사람에게 걸려서 사는 것이지 하며 자기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를 낮추어 놓고는 영 재수 없이 걸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고 일생을 산다니한 심한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한번 반대로 생각하여 나보다 아내가 낫지, 이 사람 덕분에 내가 살어! 또 아내는 나 같은 것이 아무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좋은 남편을 주어서 이렇게 복스럽게 살지 하고 생각한다면 오늘밤부터 참으로 기막히게 행복해질 것입니다.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잔치 집 이야기에까지 갈 것도 없이 안방에서 다 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자기 평가를 깍아 내려 남이 나를 평가하는 것보다 한 계단 더 낮추십시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내어놓으시고 사람의 형체를 입으셨으며 마침내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에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간도 매우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리고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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