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7:10-13
본문은 이스라엘의 중요한 역사적 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마치고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의 인솔 하에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또 여리고를 정복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을 위해서 첫 전투로 아이성 전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요단강을 건너는 것도 준비단계입니다. 여리고를 건너는 것도 준비단계입니다.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는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합니다. 가나안 입성의 첫 성이 여리고이기 때문에 여리고를 정복하지 않으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단강과 여리고를 정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격적으로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전투를 해야 되는데 그 전투가 아이성 전투인 것입니다.
숨은 장애물
그런데 중대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용감하던 이스라엘 군대들이 용기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 아이성 군대 앞에 겁을 집어먹고는 손도 못 대고 도망가다가 무참하게 실패를 합니다. 여호수아가 탄식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부짖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라고 지적을 해 줍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전투는 적이 강해서 패배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내부의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였다는 이스라엘 내부의 문제로 인하여 아이성 전투가 실패하였다는 것을 하나님이 지적을 해 줍니다.
그 죄가 “너희 가운데 여호와가 금한 그 전리품을 도적질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엄격하게 말했습니다. 여호수아 2장에서 “그 땅에서 얻은 물건은 하나도 사적으로 가지지 말고 여호와께 드리라” 여호와 하나님께 공적으로 그 전리품을 다 바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리품을 아간이라는 사람이 훔친 것입니다. 이 일을 여호수아도 모르고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참패를 당하게 됩니다. 아간의 범죄가 이런 큰 결과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아간의 범죄에 대해 성경에 상당히 실감 있게 나오는데 7장 21절에서 그 표현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세겔과 오십세겔 중에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여기에 하나님이 얼마나 치밀하신가? 또 죄를 짓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싸움이 나옵니다.
결국 이 죄를 추궁하고 제비를 뽑는 중에 아간이 걸렸습니다.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호통을 칩니다. “네가 어떻게 해서 이런 짓을 했느냐?” 그러자 다 고백을 합니다. “시날산의 외투 한 벌, 은 이백세겔, 오십세겔의 금덩어리 이것을 보고 내가 탐을 내었습니다.” 탐심이 무서운 것입니다. 전쟁 중에도 인간이 탐심은 발동을 하는 것입니다. 좋은 전리품을 탐내어 취했다고 했는데 이것이 극단적인 이기심입니다. 나라와 민족이 망하는 일인데 자기를 위해서 이런 도적질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을 지켜가야 될 신앙공동체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망하든 말든 내 욕심을 채운다고 범죄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깊숙이 숨겼다고 했습니다. “숨긴다”는 여기에는 양심을 숨기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을 감추는 것이고, 나아가 여호와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내 양심의 가책도 억압해 버리고, 사람의 눈도 가리워 버리고, 하나님도 이 일만은 모른다고 완전범죄로 생각하고 아간이 그런 짓을 한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엄중하게 그 문제를 다루고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 범죄한데 대해서 이렇게 처방을 주셨습니다. 12절에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중에 바칠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의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나의 것을 도적질한 자가 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스스로 기다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 현실을 몇 가지 조명하고 함께 은혜를 나누기 바랍니다.
내면의 문제
신앙문제는 외부문제가 아닙니다. 내 안의 문제이고 우리 교회는 교회 밖의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 안에 문제가 있고 답이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해마다 재미있는 발표를 한다고 합니다. 국제투명성위원회가 있어서 지구촌의 국가청렴도를 조사해서 발표한다고 합니다. 그 발표에 보면 국가청렴도 1위가 뉴질랜드, 2위가 덴마크, 3위가 스웨덴이라고 합니다. 소위 말하는 OECD에 가입된 국가들로서 선진국이라고 하는 그룹들 가운데서 약 50개국을 조사하는데 우리나라의 순위가 27위로 발표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17위입니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보면 아직도 우리 내부가 얼마나 부정직하고 불투명한가? 국가신임도가 중간을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신임도는 상위그룹에 속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나라로 규정이 됩니다. 우리나라도 아직 믿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NHK에서 일본의 20대 청년들의 의식조사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 주기를 원한다고 생각하느냐?” 이것을 물었습니다. 1위가 정직한 사람으로 나왔습니다. 나를 정직한 사람으로 불러주는 그것이 내게 최고의 명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신념이 강한 사람, 세 번째가 친절한 사람, 일곱 번째가 유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저의 사견이니 양해하고 들으십시오. 우리나라 청년들한테 물으면 아마 일곱 번째의 유능한 사람이 1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직한 사람, 우리는 한참 멀리 있습니다. 우리는 유능한 사람을 원합니다. 우리는 유능한 사람이 되려고 모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부정직한 사람이 유능해지면 큰 문제가 일어납니다. 신념이 없는 사람, 소신이 없는 사람, 비전이 없는 사람이 유능해지면 큰일납니다. 친절하지 못한 사람, 사나운 사람, 무정한 사람이 유능해지면 그것 또한 큰일입니다. 유능한 게 다 좋은 것 같지만 유능보다 먼저 되어야 할 종목이 그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체코를 방문한 한 인사가 이런 말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1997년도에 프라하를 여행했는데 이상한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지하철을 타는데 검표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개찰구도 없고, 사람도 없고, 표를 사서 바로 타는 것입니다. 역무원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왜 검표를 안 하느냐?”고 하니까 “한 달에 한번쯤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슨 효과가 있느냐? 그렇게 해도 무임승차하는 사람이 발견되느냐?” “우리가 믿기로는 무임승차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무임승차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읽고 우리나라 지하철에도 이걸 도입하면 어떨까? 조금 심한 말로 해서 우리나라 지하철공사는 1년 만에 파산할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아직도 우리 내부는 정리가 안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지금 답이 안 만들어집니다. 답을 만들려고 합니다. 정부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다 답을 만들려고 하는데 답이 안 만들어집니다. 안에 지금 아간이 들어가 있는데 어떻게 지금 답이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안에 지금 문제가 일어난 게 아이성 군사가 강해서가 아니라고 하나님이 지적을 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결을 유지하라
여러분, 답이 있습니다. 내일을 기다릴 사람은 스스로 성결케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스스로 성결케 하지 않으면 내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아간을 이대로 두고는 내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내일을 기다릴 기대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일의 열매를 기다릴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여호수아서를 읽어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이 성결입니다. 너희들은 여호와 앞에 깨끗해야 된다, 치우치지 말아야 된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서 바로가야 된다, 이 성결을 요구하신 하나님, 그 성결을 유지했던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제사장을 앞세우고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성결을 유지하면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다음에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를 쳐야 될 그날 밤에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나타났습니다. 말씀으로 역사하던 하나님이 그날은 여호수아 앞에 군대장관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령관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칼을 빼어들고 나타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여호와여,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이까?”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여리고를 칠 것인데 하나님이 그날 밤에 나타나서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려고 나타난 것도 있지만, 여호수아가 무슨 말씀을 하실 지를 요청할 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서 내일 여리고를 칠 것이다, 너는 내 앞에서 성결하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다, 너희 가운데 죄가 있어서는 안 되느니라, 성결하라는 것입니다. 그 성결을 지킨 이스라엘 백성들이 7일 동안 여리고를 돌면서 성결을 지켰기 때문에 여리고가 무너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싸워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성결의 요구는 생각보다 강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서 여리고를 치려고 길갈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이 “너희 가운데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할례를 다 받았지만 광야에서 태어난 이스라엘은 할례를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여리고를 정복하기 전에 먼저 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5장 2절 이하에 그 대목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기를 원하고 그 성결의식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별시킨 하나님이 여리고를 쳐 부시는데 영적무장으로 첫 번째 요구했던 게 성결함입니다. 그래서 여리고가 무너졌는데 여리고를 무너뜨리고 나서 그만 이 성결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아간이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사적으로 가져가지 말고 여호와께 바치라 하느냐? 목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님이 여리고를 향하여 여리고 전투를 앞두고는 너희들이 그 가운데 물건을 하나도 취하지 말고 하나님께 바치라, 만약 그것을 취할 때는 하나님의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를 했습니다. 그랬는데도 아간이 그만 탐심을 이기지 못하여 죄를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간은 엄중한 벌을 받았습니다. 자신과 가족과 그 훔친 물건과 그리고 죄 없는 그 집의 짐승들까지 전부 돌에 맞아 죽는 끔찍한 형벌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아간의 죄에 대하여 그와 같은 엄중한 처벌을 하고 너희 가운데 성결을 회복하라, 스스로 성결케 되라, 그런 다음에 “내일을 기다리라” 이런 음성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내일을 기다린다는 말에 크게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어떤 실패에도 내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의 아이성 전투 실패가 종결이 아니고 내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소망스러운 약속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지경에 처해도 내일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보장합니다. ‘아, 여기가 끝이구나’가 아닙니다. 절망의 그 자리에서 내일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60대의 내일
“60대도 내일이 있는가?” 저는 60대의 내일을 생각해보니까 의미가 상당히 있습니다. 우리는 20대들을 앉혀놓고 너희에게 내일이 있다, 30대들을 앉혀놓고 너희에게 내일이 있다고 말하면 어울리는 이야기 같지만, 60대를 앉혀놓고 내일이 있다고 말하는 여기에는 전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 60여년 동안 수고도 많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죄만 짓고 산 것입니다. 우리가 미래를 향하여 큰소리치는 20대를 살았지만 30대, 40대, 50대 우리가 무엇을 했습니까? 좋은 일도 하고 보람 있는 일도 했겠지만 영적인 면에서 보면 죄만 짓고 살아왔습니다. 20대 보고 너희들은 미래가 있다 하면 죄지을 미래가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앞으로 너희들이 얼마나 끔찍한 죄를 지으면서 미래를 살 것이냐? 그 말도 해당이 됩니다. 얼마든지 젊은이들이 더 타락할 수도 있고 더 잘못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간이 말하는 미래는 불안한 미래입니다. 20대를 향하여 미래가 있다는 말이 꼭 듣기 좋은 말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60대의 미래는 전혀 의미가 다릅니다. 60대의 미래는 지난 60년간의 철들은 것을 20으로 계산하면 지난 40년 동안에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았던 것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의 미래입니다. 나이 60에 접어들었다고 ‘아, 나는 이제 석양이구나’가 아닙니다. 지난날 죄만 짓고 살아온 우리들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 앞에 부족하게 살았던 것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세대가 60대입니다. 70대로 넘어가면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상황이 달라집니다.
저 자신도 그렇습니다. 목사 안수받고부터 그야말로 물에도, 불에도, 아골 골짝 빈들에도, 어디든지 주님이 부르는 곳에 가겠다고 결심하고 시작을 했습니다. 지난 날 뛰어왔던 걸음을 돌이켜 보면 너무 비겁하고 소극적이고 또 불의하고 교만했고 목회의 허물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60이라는 이 고개에 서서 보면 지난날의 실수는 반복하지 않습니다. 30, 40대의 실수를 60대에 한다면 두말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60대는 지난 40년 동안 철부지로 살아왔던 것을 다 회복할 수 있는 철든 세대입니다. 진정한 내일이 있는 세대입니다. 60대를 바로 살면 지난날 잃어버렸던 것, 놓쳐 버렸던 것을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는 소망의 세월이 60대 세월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결이 있어야 내일이 있습니다. 지난 40년간 살아온 불신앙의 걸음, 불충성의 걸음을 계속하면 60대의 내일은 없습니다. 지난 날 살아온 거기에서 한 걸음 업그레이드해야 내일이 있습니다. 성결은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못다한 일을 60대에 하셔야 합니다. 60대의 내일은 두 가지 면에서 기회입니다. 60대는 완숙된 힘이 있습니다. 60대의 힘은 40, 50대의 힘과 다릅니다. 저가 나이 60이 되고 보니까 철드는 게 하나 있습니다. 겁나는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상한 용기가 납니다. 60을 지났는데도 아직도 머뭇거리게 되고 아직도 주저스럽고 아직도 부끄럽습니까? 아닙니다. 60은 완숙된 힘이 있습니다. 경험이 있고 아는 것도 무르익어 있습니다. 그리고 은퇴 전에는 기회가 있습니다. 은퇴 후가 명예로우려면 60대를 바로 살아야 합니다. 60대 마무리를 잘못하면 은퇴 후의 우리의 삶은 불명예스러운 것입니다.
젊은 노년으로 살자
우리 교회 장로님들을 보면 50대 초반부터 계시는데 사회관점으로 보면 전부 찬밥세대입니다. 사회에서는 우리 세대들을 인정을 안 하는 풍조입니다. 요즘 정계도 386세대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50대 후반이후는 찬밥세대입니다. 그런데 세상변화의 관점에서 보는 것과 교회영적 공동체는 다릅니다. 지금 386세대들이 온갖 큰소리를 치지만 우리 교회 현실에서 보면 그래도 기도하는 세대는 60대 전후세대들입니다. 그래도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서 물질과 시간을 바쳐서 헌신하는 사람의 비율은 60대가 많지 후세대가 아닙니다.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영적 주도권은 나이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찬밥세대지만 하나님의 영적 공동체 안에서는 그런 의식을 그대로 지우시기 바랍니다. 아무 해당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60대만큼 50, 40대가 비중 있게 일해주지 못하는게 교회공동체 모습인데 이것이 훗날에는 보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우리 교단도, 우리 사회도 그렇습니다. 제가 교단 일도 보지만 젊은 사람들이 떠들고 있지만 아직도 교단 일을 젊은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60대 성도님들은 지금부터 시작하십시오. 밑의 세대들이 오늘날 교회에서 60대가 하고 있는 이 영적인 사명을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사회 일각에서 맡기니까 지금 착오가 있습니다.
우리의 세대가 나이 관점에서 보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도 믿음의 깊이와 앞으로 후대를 향한 진정한 사랑의 관심은 아직은 한국교회 안에 60대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선배어른들의 그 믿음의 관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60대 이후 세대가 희망이 없는 세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보면 더 큰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왜 강하냐? 미국은 은퇴 후가 더 힘이 있는 나라입니다. 목사님들도, 선교사들도 은퇴 후에 아주 힘 있게 일을 합니다. 빌리 그래함도 은퇴했지만 더 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은퇴했다고 뒷방 노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은퇴라 하면 근본사명을 놓쳐버립니다. 우리 교회에서 장로, 집사, 권사 은퇴한 후에 기도하는 일은 은퇴하지 마십시오. 교회 섬기는 일은 은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이와 하나님 섬기는게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이와 교회 사랑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은퇴 후가 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권위와 덕망과 명예가 뒷받침될 때 은퇴 후가 더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중대한 시점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도 사회가 이상한 풍조가 있어서 나이든 사람의 자존심을 많이 건드렸지만 자존심을 건드린 그걸 탓하지 마십시오. 건드려도 상처를 안 받는 면역성을 우리가 가지고 살면 됩니다. 60대 성도들의 당당한 모습, 그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당당하십시오. 60대 사명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교회공동체도, 교단공동체도 그렇습니다. 그만큼 우리들에게는 나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맺는 말
지금 우리 교회는 성전건축을 하면서 큰일을 지고 가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의 몫입니다. 당회원 세대들의 몫입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할 일을 다 해놓고 우리를 따라오라고 후대들한테 말하면 우리의 후대는 바로 따라올 것이고 우리의 후세대가 더욱 명예로울 것입니다. 내일이 있을 것입니다. 성전건축의 짐은 우리를 불리하게 하고 우리를 잘못되게 하는게 아닙니다. 이 짐을 지고 나면 우리의 내일은 명예로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성령의 뜻입니다. 예배당을 짓기 전에는 목사님이 여러분 앞에 무엇을 요구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예배당을 짓고 나면 목사는 여러분들 앞에 강력하게 요구할 근거가 됩니다. 우리의 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지고가야 할 짐입니다. 이 짐을 지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스스로 성결함입니다. 우리 내부문제이지 밖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모두가 자기 짐을 져야 됩니다. 이것은 더 큰 힘입니다. 한 두 사람이 건축헌금을 2분의 1을 하고, 4분의 1을 하는 게 힘이 있는 것 같아도 안 그렇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 짐을 바로 질 때 교회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 힘을 하나님 앞에서 한번 쏟고 가야 할 기회가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일은 일거리도 있고, 우리의 내일은 기대도 있고, 우리의 내일은 명예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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