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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과 새 사람 (엡 4:17-24)

by 【고동엽】 2022. 8. 16.

옛 사람과 새 사람  (엡 4:17-24)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목욕탕에 가서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보고 오너라." 아들은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런데 목욕탕 앞 땅바닥에 끝이 뾰족한 돌멩이 하나가 박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오면서 모두 그 돌에 걸려 넘어질 뻔하고, 어떤 사람은 넘어져 무릎이 깨지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돌에 대고 욕을 하면서도 누구 하나 그 돌을 치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후로도 스무 명이 넘게 지나갔고 계속해서 사람들이 넘어져 다치면서 욕을 하고는 가버립니다. 얼마 후 누군가 다시 지나갔고 그 사람도 역시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일어나더니“웬 돌이 이런 곳에 박혀 있나. 사람들이 다치겠구나.”하면서 그 사람은 그 돌을 빼냈습니다. 그 아들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지금 목욕탕에는 한 사람밖에 없던데요.” "잘됐구나, 지금 목욕이나 가자." 아들과 아버지는 함께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런데 목욕탕 안에는 사람들로 북적대어 발 디딜 틈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야, 이 녀석아! 이게 한 명이냐?" 아버지가 화를 내자 아들이 돌을 치우고 들어 간 그 사람을 가리키면서 대답을 합니다. “아니에요, 아버지, 사람다운 사람은 오직 저 한 사람뿐입니다.”했답니다.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싫어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쉽게 고치거나 바꾸려고 하지 않는 묘한 심리들이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 용어 중에 <고착상태>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종래의 유치한 습관, 혹은 부정적인 습관을 버리지 않고 계속 유지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고 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착상태에 빠진 사람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변화되지 않은 낡은 것에 매여서 거기서 안정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세상은 모든 것이 변하고 있습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정지상태란 없는 겁니다. 계속 변화하고 있는 속에 나만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나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매한 인격으로 착각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내가 안 변하고 있는 겁니까? 착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안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퇴보라고 하는 거꾸로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겁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왕 변할 바에야 퇴보로의 변화보다는 생명으로의 변화가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200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2004년이라는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변화하기를 요구합니다.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변화하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옛사람, 이것은 육체 주도적 인간으로 타락된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속성이 영 주도적 인간에서 떠나서 육체본위로 살아가는 사람을 옛사람이라고 하면서 이 습성에서 버릴 것을 여섯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허망하다 그랬습니다. 이 말은 목적을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의미를 잃어버린 삶입니다. 아주 허무하고 허망한 세상, 허우적거리기만 했지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를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긴 하는데 목적이 없습니다. 결혼을 했는데도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삶이라는 것이 온통 허망함에 빠져듭니다.


그 다음에는 어두움이라 그랬습니다. 이 말은 본문 말씀대로 총명이 흐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즉, 판단하는 능력, 이성의 능력이 어두워진 채로 살아가는 것을 옛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지함이라 그랬습니다. 무지하다는 것은 도덕적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선악의 구별이 모호해 지는 것을 이릅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분간하질 못하는 그런 상태에 빠져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버려야 할 옛사람의 습성이고,


그 다음에 네 번째는 마음이 굳어진다 그랬습니다. 이 말은 강퍅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고집만 남아서 자기 집착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불쌍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 번째는 무감각해진다 그랬습니다. 한 마디로 감각능력 상실입니다. 어떤 자극에도 감각이 없습니다. 반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마저도 무뎌진 채로 살아가는 것이 옛사람의 모습이고요,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는 방임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영어로 말하면 Give up, 즉 포기상태입니다. 이건 시쳇말로 막가자는 것입니다. 더 이상 기대를 걸 수가 없을 만큼 인간됨을 포기한 최악의 상태입니다.


이 모든 행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버리기를 요구하는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2003년을 지내오면서 우리에게 이런 삶의 모습들이 있었다면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004년도에는 새로워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23절 말씀을 잘 보면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라고 합니다. <심령>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헌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듯이 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탕자가 집에 돌아올 때 자기 자신을 생각합니다. ‘나는 아들 자격이 없다.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 상하게 했고 너무 많이 타락돼서 나는 아들자격이 없다.’그래서 "머슴꾼의 하나로 대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굶지 않고 살게 해주세요." 이런 초라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를 만나는 아버지는 다릅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하고 만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새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영광된 잔치에 참여케 합니다. 그 입힌 옷을 통하여 자신의 아들임을 밝히고자합니다. 옷은 때로는 그 신분을 나타내기도합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낡은 옷은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으라."아버지와 만나는 관계에서 새 옷을 갈아입고 새사람이 된 탕자처럼 지나간 과거를 헌옷 벗듯이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물질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물질로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환경으로 사람을 바꾸지 못합니다. 우리는 구조조정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그것만이 살 길이라고 몸부림쳐왔습니다 마는 구조조정을 하는 그 사람이 구조조정이 안됐어요. 사람이 달라지기 전에는 구조를 100번 바꿔도 안 됩니다. 또한 제도를 바꾸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사람의 가치관이 바뀌기 전에는 안 됩니다. 구조를 바꾸고 사회제도를 바꾸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던 사람이 [칼 마르크스]입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습니다. 그런 고로 외적문제로는 내적문제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내적인 것은 내적으로, 영적인 것은 영으로만 가능합니다. 내적인 변화가 있을 때 비로소 사회도 인간도 변하는 것이요. 우리가 말하는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즉, 심령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에 사람이 사람 됩니다. 근본은 영적 문제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문제요, 하나님과의 만남의 문제입니다.


오늘 새로워지고자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먼저 여러분의 <심령>이 새로워지는 복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셔서 힘찬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철현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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