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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고전1:18-25)
찬송가 136장은 미국 흑인들 사이에 널리 불려졌던 흑인 영가입니다. 이들이 노예제도 밑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에 불렀던 찬송으로 그들은 이 찬송을 부르면서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을 이겨 나갔다고 합니다. 바로 이 찬송의 주제가 오늘 설교 제목 말씀인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입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나무위에 달릴 때 (1-4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해가 그 밝은빛을 잃을 때 너 있었는가 그 때에)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무덤에서 뉘일 때 (5 오 때로 그 일로 주께 영광 영광 영광 거기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무덤에서 나올 때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지금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거기 너 있었느냐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실 때, 예수 님의 제자들은 아무도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애써 외면하려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너무도 비참하고 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헬라어로 스타우로스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불행한 나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형은 원래 베니게, 카르타고, 이집트, 그리고 로마에서 사용한 사형 도구였습니다. 죄수는 십자가의 형벌을 받기 전에 먼저 채찍질을 당하였습니다. 매질을 한 후에는 십자가에 죽을 때까지 매달아 놓는 사형 도구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예수 님이 지신 십자가는 무시당함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 가위에서 철저하게 무시당하셨습니다. 예수 님의 십자가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 패가 붙여 있었습니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예수 님은 십자가에서 철저히 무시당했고 철저히 멸시 당하셨습니다. 예수 님의 십자가는 수치 당함의 십자가였습니다. 사람은 누구 나가 발가벗기울 때 수치를 느낍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발가벗김을 당했습니다. 여인들 앞에서 옷을 벗김을 당하실 때 얼마나 수치를 느꼈겠습니까? 벗김 당한 예수님은 매질을 당하셨습니다. 온갖 조롱과 수치 속에서 예수 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 님의 십자가는 조소와 모욕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 님의 십자가는 고통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형은 결코 급소에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대못을 박아서 매달아 놓고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잔인하고도 고통스런 십자가였습니다. 낮과 밤, 더위와 추위, 해충의 공격, 하늘에는 독수리가 맴도는데 죽음은 공포와 함께 서서히 다가왔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1주일 정도, 보통 사람은 2-3일 정도 매달려 있는데 우리 예수 님은 여섯 시간 매달리셔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 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분명히 무시당함의 십자가, 수치 당함의 십자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십자가였습니다.
미국의 노예제도 속에서의 흑인들이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고 하면, 잔악한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영문 밖의 길] 이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영문밖에 비치 누나 연약 하온 두 어깨에 십자가를 생각하니 머리에는 가시관 몸에는 붉은 옷 힘없이 걸어가신 영문 밖의 길이라네>우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이 찬송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참으로 힘든 길이었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고 가시다가 힘에 부쳐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쓰러진 십자가 위로 로마 병정의 채찍은 사정없이 날아들었습니다. 쓰러지다가 다시 걸으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또 쓰러지는 십자가의 길은 걸음마다 자국마다 땀과 피로 적시며, 그렇게 걸어가셨습니다.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매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비통의 십자가이며 사실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실패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내세우고 또 강조하고 있습니다. 2:2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그는 작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갈6:14절에서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 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그의 신학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자신의 신학의 주제로 삼은 신학자가 독일 튀빙겐 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위르겐 몰트만 입니다. 그는 그의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책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을 받지 못하며 또 사랑을 받을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린 그분만이 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한다. 그 당시 십자가에 달린 그분은 거슬리는 것, 미련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고자 하며, 신학이 그리스도교의 신학이 되고자 한다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게 돌아와야 하며, 그리하여 이 세계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자유를 보여 주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22-23절에서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자신의 신학적인 관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듯이 무시당함의 십자가, 수치의 십자가, 고통의 십자가가 신앙의 출발점이 되고 신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이제 살펴보려고 합니다.
⑴,예수 님의 십자가는 능력의 십자가였습니다.
본문 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23-24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4-5절 말씀에도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였노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후13:4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님의 십자가는 능력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는 능력의 피였던 것입니다.
찬송가 202장은 바로 이 보혈의 능력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보혈의 능력, 눈 보다 더 희게 맑히는 것 보혈의 능력, 구주의 복음을 전할 제목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그렇습니다. 예수 님의 보혈은 무시와 수치와 고통의 십자가에서 처참하고 흘리셨지만 그 보혈의 피는 능력의 피인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는 능력을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외에서 결코 발견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죄 사함의 능력과 구원함의 능력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분명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⑵,예수 님의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였습니다.
앞서 소개한 독일의 몰트만 교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게서 소위 [희망의 신학]을 제창하고 있습니다. 그의 희망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라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2:15절에서도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죄와 죽음과 어두움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죄악을 이기셨고 죽음을 이기셨고 공중에 권세 잡은 자들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승리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⑶,예수 님의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였습니다.
무시당함과 수치 당함과 고통 당함의 십자가를 하나님께서 능력의 십자가로 승리의 십자가로 그리고 영광의 십자가로 바꾸셨습니다. 빌2장6절 이하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끊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6-1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분명 능력의 십자가요, 승리의 십자가요, 영광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그가 가는 십자가의 길에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울라" 예수 님께서는 장차 예루살렘에 닥칠 환난을 예견하셨습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늘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탄식하셨습니다. 푸른 나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인데 하나님의 아들에게도 이같은 고통을 주는데 마른나무인 너희들, 너희 자녀들, 하나님의 백성들, 그들에게 닥칠 여러 가지 고통과 환난을 예견하시면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땅에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 닥치는 환난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시당하기도 합니다. 멸시 당하고 조롱 당하기도 합니다. 견딜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님의 십자가는 능력의 십자가, 승리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을 당할 때에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였습니다. 고후12:10절 말씀에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약한 것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27절 이하에 보면은 우리의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실 뿐만이 아니라 폐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무시당함과 수치 당함, 고통의 십자가를 능력의 십자가, 승리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 천하고 약하고, 없는 우리들을 들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를 귀하게 하셨으며, 우리를 부하게 하셨고, 우리를 강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분명 십자가의 도가 멸망 받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대단히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우리들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시면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힘입어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저/이석권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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