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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지혜와 오늘의 영성이해

by 【고동엽】 2022.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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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지혜와 오늘의 영성이해

들어가는 말

오늘날에 있어서 '영성신학'이란 마치 신학적 유행어처럼 사용되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영성이라는 어휘정의는 종말론적인 전통적 개인수도영성에서 부터 과격한 정치.사회.경제사적 집단적 해방이라는 영성에 이르기까지 너무 다양하고 복잡해서 그 이해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고 있는 느낌이다.
따라서 본 필자는 기독교 영성을 먼저 이렇게 정의하며 시작해 보고자 한다. 즉 기독교 신앙이 지닌 통전성에도 불구하고 로고스적인 측면이 신학적 학문성이라면, 그 파토스적인 측면은 실천적 영성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이 매일 경험하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역사', 그리고 '이웃과의 만남'을 신-인(神-人)의 관계적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실체화하는 삶의 역동적 방향성 자체를 기독교 영성이라 정의하고자 한다. 이러한 영성의 구체적 장이란 곧 신앙의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자리인 인간 존재의 전 영역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은 기독교 영성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의 대비적 관계들의 위치설정을 어떻게 행해 나갈 것인가이다. 즉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 계시와 역사의 지평,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의 상관성이다. 특히 접근하는 방식에 따라 그 방향성과 결과도 상이하게 나타난다. 한 예로 현상적인 자기초월의 능력(정신개발)이나 역사지평적인 역사변혁정신의 자리에서 부터 영성을 접근할 것인지, 아니면 성서가 말하는 바 하나님의 계시적 의도와 목표의 중심자리인 예수 그리스도에 기독교적 영성의 근거를 두고 영성의 문제를 접근할 것인지에 따라 그 방향성은 전혀 다른 길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생각컨대 기독교 영성이 실천되는 자리란,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사건인 예수 그리스도가 인격(말씀과 삶)으로 증거한 하나님 나라의 구원(개인적이며 공동체적인)과 해방을 필요로 하는 오늘의 인간의 모든 삶과 역사 지평의 자리라 할 수 있다. 이는 초월적이고, 고백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이기도 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통한 하나님의 사건의 자리이다. 곧 예수의 죄 용서와 치유행위, 그리고 기적행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종말론적이며 공동체적인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신앙의 모든 자리를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성의 내용이란 오늘에 있어서도 우리가 지닌 문제에 대한 해결과 새로운 방향제시를 해주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이를 위해 바울의 십자가 신학(고린도 전서와 갈라디아서)을 통해 그 답을 찿아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의 내용으로서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터 위에서 교회의 삶의 문제성을 향하여 가장 격렬하게 그의 대적자들과 논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제 2 차 전도여행 중에 친히 세운 교회였다. 그러나 바울이 교회를 떠난 후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제기된 신학적 문제로 시달리고 있었다. 두 교회가 지닌 신학적 문제란 헬라철학적 영성과 유대율법주의적 영성으로 야기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실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였다. 그들은 기독교 영성의 바른 자리를 그들의 교회적 삶에서 정초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적절한 방향성조차 찿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바울은 문제 해결의 열쇠로 십자가의 지혜를 '하나님의 지혜'로 제시함으로 그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학의 중심성 곧 기독교 영성의 자기 자리를 보여주게 된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의 십자가 신학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로 선언함으로써 기독교 영성신학의 역사적 자리매김과 실천적 자리매김을 위한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 자리매김이란 나사렛 예수의 영적 실천의 마지막 자리를 로마의 반문화적이며 반인간적인 죽음의 형틀이었던 십자가의 자리를 의미하는 것이며, 실천적 자리매김이란 그의 십자가의 죽음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한 삶의 결정적 실천의 장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런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기독교 영성의 출발점은 결코 인간의 개인적이며 신비적인 자기 경험도 아니며, 또한 정치 사회적 해방을 추구하는 역사변혁정신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바울이 선언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고전 1,23-25; 1,30)라는 데 그 역사적 출발점과 동시에 실천적 자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바울의 십자가 신학에 나타난 지혜란 인간의 거짓 영성을 비판하는 동시에 기독교 영성의 참다운 자기 정체성의 자리를 제시하는 신학적 지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단순히 예수의 죽음이라는 일상적 어휘를 사용치 않고 반문화적이고 비인간적 표상인 로마제국의 죽음의 형틀이었던 십자가를 언급함으로 예수의 죽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엔 적어도 세 가지 뜻이 담겨진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기독교 영성이란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 기초한 역사적 자리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신화론적인 신비적이고 비역사적인 자리를 기독교 영성의 자리로 내세우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며, 둘째는 기독교 영성을 너무 빨리 문화적이고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사상성과 접목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경고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인간이 쌓아온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가치체계를 완전히 역전시키기 때문이다. 셋째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하나님 지혜'로 선언함으로써 기독교 영성이 문화적인 새 가치 창조의 역할을 해야함을 강조하고자 함인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범주 안에서 우리는 영성에 관한 주제를 몇 가지의 명제를 통해 좀 더 가까이 접근해 보도록 하자.


명 제 I. 십자가의 지혜는 이스라엘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지혜전승에 뿌리박고 있다.

"하나님의 지혜안에서( )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전 1,21)는 바울의 선언은 1) 하나님의 지혜와 신성이 이 세상 피조물에 내재해 있음을 나타낸다. 인간에게 접근해 오는 하나님의 지혜는 세가지의 양태를 지닌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이며, 둘째는 이스라엘의 율법이고, 셋째는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의 경험이다. 2) 그러나 이에 대한 인간의 영성적 응답으로서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올바르게 인식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ad 1) 이 세상피조물은 선재하는 지혜에 의해서 창조되었다(지혜서 7,21; 9,9; 욥 28; 시 104,24.30; 136,5; 잠 3,19.20; 8,22-31; 렘 10,12; 51,15; 집회서 1,4-10; 24,3-5.9; 42,21; 참조. 고전 1,21; 8,6). 집회서 1,9에 의하면 하나님은 지혜를 그의 모든 피조물에 부어주셨다. 여기서 지혜는 창조의 매개자로 나타난다. 따라서 지혜는 인간에게 창조된 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도록 전달한다(지혜서 8,3.4; 9,1.2.9.10; 13,17 이하). 곧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시락 39,17)과 그의 뜻과(시락 39,18) 그의 위탁(시 39,31)을 제 때에 성취하기 위하여 모든 피조세계 속에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지혜자들은 피조된 세계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시 19,2-7; 욥 36,22-24; 사 40,12-14) 동시에 우상숭배의 위험성(사 40,18-26; 렘 10,12-16; 지혜서 13 장이하)을 지적하고 있다. 우상숭배란 곧 창조계시에 대한 인간의 왜곡된 영성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지혜서 13,1 이하; 롬 1,18이하). 피조된 세계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감지함에도 불구하고 창조주를 피조물의 형상으로 변질시킴으로 인간의 우상성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창조된 세계 속에 놓인 지혜의 감추임과 계시됨의 변증법적 관계가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라는 구조 속에 놓이게 된다.
즉 인간은 창조 이래로 하나님을 그의 피조물가운데서 깨닫을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인식에 있어서 인간은 실패하고 만 것이다(롬 1,19-23; 고전 1,21).
지혜전승에 의하면 지혜의 이러한 감추임의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으로 지혜와 율법의 동일화가 제시되며, 율법과 동일화된 지혜는 실천적인 의미에서 율법의 행위와 결부된다. 따라서 지혜자는 율법을 지키는 자이다. 여기서 지혜와 율법이 실천적 의미에서 일체가 됨으로 지혜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독점적 선물로 나타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창조의 질서들이라는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율법의 소유자체가 곧 구원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룩 3,9-4,4에서 율법을 맡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회개의 설교가 강하게 부각되고 있는 점이 그것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지혜가 주어졌으나, 근본적으로 감추어져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와 율법의 일치는 창조세계에 나타난 계시와 구속사에 나타난 계시를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혜는 그들의 삶의 자리, 곧 개인 또는 공동체의 역사 속에서 참여하시는 야훼하나님의 손길을 목격하고 고백하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 개인의 삶의 자리에서의 고백은 주로 잠언과 시편에 나타나며, 공동체의 삶의 자리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에서 절정을 이룬다. 따라서 참 지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역사적 행위와 참여를 깨닫는 데 있다(신 32,39; 호 14,9; 시 107,43; 111편). 그 반면에 지혜없는 자는 그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시 14,1: 신 32,6)라 할 수 있다.

ad 2) 하나님은 그의 지혜(영)로 이 세계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신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이 세상 피조물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며 그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이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계 피조물 안에서(시 104.24.30; 136,5; 잠 3,19; 8,27; 렘 10,12; 51,15) 인간이 하나님 자신을 경험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제시 한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지혜전통이다. 본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지혜의 획득과 사용은 다른 고대 근동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에 맡겨진 인간의 일이었다. 즉 지혜란 인간에게 있어서 우주적으로 계몽된 정신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일상적인 삶의 경험에서 이러한 일반적 지혜를 전제하며 살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부터 시작되는 구체적인 삶의 모든 행태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미 전제된 이러한 지혜적 판단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지혜로 시간이 흘러가고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도 하고, 사물의 안전성 여부를 반복적으로 판단하며 삶을 살도록 하며 인간에게 삶의 자율성과 책임성의 폭을 넓혀준다. 이 지혜를 얻는 길은 따라서 인간의 의지와 판단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지혜전승에 나타난 지혜도 예외가 아니다. 그것 또한 인간의 정신적 자율성을 통해서 체득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혜는 고대 근동민족들과는 다른 하나의 독특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일상적인 세상경험을 하면서 동시에 그 속에서 야훼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야훼 하나님이 세상과 삶의 근본질서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치하고 있다는 데 연유한 것이다. 즉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아니라, 그분의 법칙에 따라 이를 보존하고 계심을 그들은 알고 세상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지혜를 보면 내재적 자율성이 동반된 그들의 세계경험이 야훼신앙과 전혀 충돌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폰 라드). 이스라엘의 지혜란 실천적이고 경험적인 대상인 직업/친구/언어/재물/결혼등 일상적 삶에 관한 모든 것들로서 그들은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종합된 세계경험으로 인식함으로 이성지식과 신앙지식을 서로 분리하지 않고도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세계경험과 야훼경험이 통합되는 점이다. 인간과 인간의 기본관계들에 대한 신뢰,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질서들에 대한 신뢰,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창조 보존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들이 이스라엘 지혜 속에 함께 들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에게는 야훼경험들이 곧 세계경험이었고 세계경험이 곧 야훼경험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야훼와 세계가 단순히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세계 피조물이란 야훼가 인간을 만나는 자리로서의 가치뿐이었다. 이 세계는 단지 피조물이며 야훼는 이 모든 피조물을 만드신 창조주로서 존재한다는게 그들의 인식이다. 따라서 야훼를 창조주로서 인식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세계와 삶 곧 피조된 모든 삶의 자리에서 창조주 하나님 경험을 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의 내용을 신학화하는 훈련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신앙'이 '인식'을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신앙이 모든 인식을 자유롭게하고 그것에 대해 바른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이 애굽이나 중동 부근 국가들의 지혜를 뛰어넘는 이스라엘지혜의 독특한 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지혜전통은 자연스럽게 "야훼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다"(잠 1,7; 9,10; 15,33; 시 111,10; 욥 28,28)라는 명제로 특징지워졌으며, "주님을 경외함이 생명의 원천이다"(잠 14,27)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곧 삶의 실천적인 자리에서 지혜가 생명의 절대적 요소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스라엘의 지혜는 다음의 계속적인 단계를 거쳐 비로서 확정되어지게 된다.
이스라엘의 지혜에 대한 이 낙관적인 사고는 그들이 경험한 위기속에서 중대한 변화를 갖게된다. 지혜의 인과응보적 도식의 한계성에 부딪치게 된것이다. 하나님의 근본적 질서로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행위에 따라 자연스런 결과를 맺게 된다는 인과응보적인 사고가 마침내 무너지는 현실을 목도하게 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이해한 하나님 경험이 파괴되는 아픔을 겪게된다. 그 예가 욥기와 전도서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세계경험과 야훼경험이 통합적으로 만나지 못하는 지혜의 위기적 상황이다. 세계질서의 감추어진 비밀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인간의 지혜는 마침내 그 한계를 느끼며 고뇌하게 되고, 하나님만이 지혜의 장소와 시기와 그 내용을 알수 있다는 선언이 나타나게 된다(전 9,1 이하). 선을 행하는 자에게 주는 복과 악을 행하는 자에게 내리는 형벌로서의 도식은 더 이상 현존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지 않는 당혹스러운 상황을 만나게 된 것이다(욥 4,7-9).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인간의 한계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오히려 감추어진 '계시적' 지혜 형태로 바뀌게 된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지혜상은 하나님을 경외할 때에만 지혜의 창시자요 근원자인 하나님께서 그 지혜를 보여주시고 허락하신다는 사상이 중심을 이루게 된다. 즉 지혜는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임이 드러나게 된다. 예레미야가 그것을 말해준다: "지혜자는 자기의 지혜를 자랑치 말라"(9,22). 따라서 미련함이란 단순한 지성의 결핍이 아니고 하나님을 없다고 하는 자가 곧 미련한 자의 표본인 것이다(시 14,1; 참조 시 53,2; 74,18; 욥 2,10). 말하자면 하나님을 떠난 자에게는 삶의 문제를 극복할 만한 진정한 지혜가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는 지혜가 단순히 삶의 경험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나, 고도로 발달된 지성의 자리를 넘어, 인간에게는 전적으로 감추어진 비밀로 나타나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 지혜와 그 지혜에 이르는 길을 안다는 것을 뜻한다. 즉 율법을 통해서 접근이 가능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지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에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탐구와 판단의 한계성과 죄악 그리고 하나님의 초월적 표상이다. 이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는 신학적 주제가 보다 강하게 부각되어진다. '하나님 경외'라는 인간의 삶의 모습이야말로 감추어진 비밀인 하나님의 지혜에 접근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도권이 우선할 때만이 하나님 지혜의 자리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의 도움없이는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지혜를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혜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혜를 멸시하고 무시하는 자들에게 지혜는 더 이상 그들과 함께 있기를 거부하고 사라져 가게 된다(잠 1,24-31).
이스라엘의 후기 지혜전승으로 내려갈수록 이러한 삶의 위기경험을 통한 지혜의 보다 강한 신학화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경향성은 1) 지혜가 율법과 동일화되는 과정을 걷거나(집 24,23; 바룩 4,1), 2) 지혜와 영이 동일화되는 경우로 나타난다(지 1,6; 7,7.22; 9,17등). 여기가 바로 이스라엘의 지혜가 경험적 측면에서 계시적 측면에로 변모되는 자리이다.
이 지혜전통을 우리는 예수의 지혜로기온에서 찿아 볼 수 있다. 예수 당대에 있어서 율법을 해석하고 이를 전달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란 당대의 지혜자이며 총명한 자들이라 할 수있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의 주요 적대자들이었다는 사실은 예수가 보여주신 진정한 지혜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고 있다.


명 제 II. 십자가의 지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관련된 역설적인 지혜전승에 기초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론적 로고스 기독론으로 설명(요 1,1 이하)하고 있으나, 결정적인 의미에서 예수의 지혜사상을 찿아 볼 수 있는 곳은 예수 자신의 지혜 로기온이라 할 수 있다. 예수의 지혜사상은 보다 극단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혜자와 총명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감추어졌고 오히려 어린아이들에게 계시되었다'는 말씀(마 11,25)은 당시의 율법학자들, 소위 지혜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예로서 복음서는 예수와 바리새인들과의 신학적인 충돌을 자주 언급한다. 예수의 말씀과 행위는 이러한 지혜 전승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마 23,3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행하지 않고 있다. 이는 지혜전승에 나타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지혜를 배격했다는 말과 상응하는 것으로서(참조 바룩 3,13.20.21; 4,5.6; 렘 2,13) 당시의 율법사들이 진정한 지혜자가 아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 인식에 대한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삶의 순종이 동반되는 지혜여야 하기 때문이다(참조 렘 8,,8.9). 그러나 율법의 관리자이자 지혜자들인 제사장들은 율법을 자의적으로 곡해함으로 야훼하나님에 의해서 미련한 자로 낙인찍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참조 사 19,11-15; 29,14; 31,25; 44,24-26). 결국 겉모양의 지혜자와 진정한 지혜자의 구별이 종말론적으로 예수의 출현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의 말씀과 행위가 거짓된 지혜와 진정한 지혜를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구약의 지혜전승에서 지혜의 서고 넘어짐은 올바른 하나님 경외에 달려 있다는 진술은 예수가 인격(말씀과 사역)으로 증거한 하나님 나라의 수용여부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예수는 자기의 계시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지혜전승을 보다 극단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소위 지혜자요 총명한 자들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지혜를 수용치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를 거절함으로 어린아이들과 가난한 자들이 진정한 지혜의 수용자가 되었다고 말씀한다(마 11,25-27 병행).
이러한 예수의 지혜적 사고는 한편으로는 지혜문학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과감하게 이에서 부터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혜문학에서 어리석은 자/단순한 자들은 지혜전달의 대상이긴 하나 지혜에 이르는 길을 훈련받아야 할 자들이었다(잠 1,22; 8,5; 지혜서 10,21; 집회서 3,19; 시 116,6; 119,130). 그러나 오히려 이들에게만 지혜가 독점적으로 계시가 제공된다는 예수의 주장은 구약의 이러한 지혜전승을 극단화하고 있는 것임을 명백히 해주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모습은 '이시대의 사람'에 대한 비유에서도 나타난다(눅 7,31-35; 마 11,16-19).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자들, 애곡을 해도 울지앟는 자들에 대한 예수의 탄식이다. 결국 지혜자들이라고 자처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민중들(눅 3,21)과 세리들(눅 3,12-14)과는 대조적으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구원사건을 거절하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그들은 참 지혜인 예수의 말씀에 동의를 표하지 않고, 스스로 완악해져서 도리어 세례요한은 이 시대의 미친 사람으로 , 예수는 '먹기를 탐하는 자와 술 좋와하는 자'로, 더 나아가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동류'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적대자들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아주 명백하다. 지혜는 그 자녀로 인하여 정당화된다는 사실이다(눅 11,35). 곧 지혜의 자녀란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이해하고 이를 옳은 것으로 인식하며 순종하는 자들로서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자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눅 7,35 에 의하면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한 세리들이 곧 '지혜의 자녀'이며 참 지혜자라고 인정받게 된다. 곧 예수는 인격화된 지혜자체이며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이 지혜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지혜사상을 바울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언함으로 더 극단화시키고 있다.


명 제 III. 십자가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거부한 인간의 거짓 영성을 비판하는 예언자적 영성이다.

1) 바울은 유대지혜전승의 맥락과 예수의 지혜전승을 이어받으면서 동시에 이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고전 1,18-3,23에서 그는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를 극단적으로 대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대비도식은 유대 지혜전승에서도 나타난다(예: 잠 10-15; 하나님경외자와 율법위반자/의인과 악인/지혜자와 미련하자의 대비등; 잠 2,9-15; 21이하; 3,25; 8,35.36등). 따라서 진정한 지혜란 지혜와 미련함을 구분할 줄 아는 것으로 참예언과 거짓예언을 구분한 예언적 전통을 그는 이어받고 있다(이러한 대비적 도식은 구약 이사야에서부터 고린도서까지 지속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에게 결단을 요청한다. 이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초청이었으며, 또한 바울의 믿음에로의 초청이었던 것이다. 바울의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통한 초청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종말론적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은 이 지혜를 통해 지혜자를 미련한 자로(고전 1,20) 만들고, 없는 자를 택해서 있는 자를 부끄럽게하셨다(고전 ,128).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진정한 지혜와 거짓 지혜를 구별할 줄 아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단기준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지혜란 십자가 신학의 대상이 아니라 그 주체가 된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의해 세상, 교회, 인간, 그리고 사도바울마져도 비판되고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십자가 지혜를 통해 주어진 기독교 영성이란 모든 피조물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영성인 것이다.

2) 거짓 영성이란 구체적으로 고린도 교회의 지혜자랑과 갈라디아교회의 율법주의적 영성에 의해 드러나고 있다. 십자가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거절하고 자기(인간)의 지혜를 자랑하며 분쟁하는 영성을 비판하고, 하나님의 영을 문란케하며 영의 역사적 자리를 거절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신비적 영성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고린도 교회). 즉 십자가의 지혜는 하나님의 의를 파기하고 인간의 의를 내 세우는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인간의 자기 의를 만족시키는 율법주의적 영성을 비판한다(갈라디아 교회).


IV. 십자가의 지혜란 '십자가에 달린 자'를 '영광의 주'( )로 선언했다(고전 2,8)는 데 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안에서 '십자가에 달린 자'와 '영광의 주'라는 역설적인 두 개념의 통전적인 만남에 진정한 기독교 영성의 자리가 있다.

1)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고전 1,30),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안에서 역설적으로 성육신화됐다. 그러나 이 지혜는 피조된 모든 세계를 다시 '영광의 주'에게 수렴시킴으로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근거가 된다.
십자가에 달린 자가 '영광의 주'였다는 것은 역사적 맥락인 십자가에 달린 자가 우주적 그리스도의 보편성과 포용성을 지닌다는 것이다(고전 3,21 이하; 8,5이하; 롬 11,36). 이는 하나님 계시의 역사적 자리를 파기시킴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영성을 신화론적인 신비계시 경험으로 축소시키는 것도 거절하며, 동시에 나사렛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우주적 그리스도론으로 확대하지 못하게 함으로 역사실증주의적 역사성에만 기독교 영성을 고착화하려는 경향성도 거절한다.

2) 십자가의 지혜는 지혜의 사제적 성격 곧 구원론적인 지혜의 측면을 보여준다. 즉 십자가 죽음의 형틀에 '영광의 주'가 달린 이유는 '우리를 위한'(고전 1,13; 15,3)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라고 선언한다. 지혜의 구원론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인격 안에서 하나님께로 온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된 '성육신된 지혜'(고전 1,30)라는 데서 분명해 진다. 이로써 하나님의 형상 자체인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의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케 되는 새 인간상, 곧 새 피조물(고후 5,17-21; 갈 6,15)의 가능성이 열린다. 십자가의 지혜는 구원론적인 창조신학적 영성이다.

3)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달린 자'( : 완료.분사.수동태)란 신앙의 대상이 역사적 실체임과 동시에 그 효력이 지금까지 지속됨을 나타낸다. 사건과 신학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자리가 바로 바울의 십자가 신학인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구체적 역사의 자리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신화적 자리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받는 현실적인 자리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의 밑바닥에서 만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예수의 낮아짐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찿아 오셨다는 것은 기독교 영성이란 바로 죄악과 고통받는 현장에 성육화하는 영성임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4) "영광의 주"인 나사렛 예수가 이 세상의 정치적이며 권력적 영성의 대표자인 세상 관원들에 의해서 정치적 반란과 노예의 죽음의 형틀인 반문화적이며 비인간적인 자리인 로마의 십자가 형틀에 못박혔다는 것은 이 세상 영성의 자기 자랑을 종결시키는 가장 저항적이고도 비판적인 거부라 할 수 있다.

5) 이 세상의 문화적 종교적 영성을 대표하는 자들인 지혜자와 선비와 변사들의 지혜적 영성을 하나님이 다 미련케 했다는 선언은(고전 1,19.20)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악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십자가란 하나님이 인간에 의해서 철저하게 거부당하고 멸시받는 자리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십자가의 자리를 하나님의 지혜의 자리로 세움으로 하나님의 미련함과 연약함이 인간의 지혜와 강함보다 더 크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6) 문화적 종교적 영성으로서 인간을 차별하는 모든 불평등의 자리를 타파하는 하나님의 지혜로서 십자가의 지혜는 나타난다. 기존적인 종교문화의 가치성에 대한 도전이며 역전이라 할 수 있다. 차별성의 극복과 새 공동체 안에서의 나눔의 영성을 준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안에서 새 창조는 인간의 거짓 영성으로 인하여 야기된 인간차별성을 극복하는 영성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지혜는 인간의 외모적인 종교적/문화적/사회적/성적 차별성을 타파하는 영성이며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되게 하는 공동체적 영성인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우리에게 지혜, 곧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이다.

7) 십자가의 지혜는 인간의 죄악을 하나님의 구원의 자리로/ 인간의 미련의 자리를 하나님의 지혜로 바꾸는 역설적인 새 창조의 영성이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든 가치기준을 역전시켰기 때문이다. 즉 십자가의 지혜는 이 세상의 영성의 대표자들인 지혜자와 선비와 변사들의 자기 자랑하는 지혜를 다 미련한 것으로 선언하고(고전 1,19 이하), 도리어 세상의 문화/종교적 소외자들 곧 미련하고 천한 자들, 아무 것도 아닌 자들( )을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창조적 영성인 것이다.

8) 십자가의 지혜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미련한 것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영성이다. 바울은 이에 대해 그리스도를 위한(4,10) 스스로의 미련함과 낮아짐과 천함에 대해 자랑한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지혜가 교회 공동체 안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9) 십자가의 지혜는 인간이 지닌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임을 감사하는 영성(고전 4,8)이다.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이 우리의 것이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전 3,22-23)는 바울의 선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한 영의 찬양으로서 오직 하나님이 보낸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찬양의 영성인(고전 1,31) 것이다


명제 V. 바울의 '오직 하나님의 지혜이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만을 알기로 작정했다'(고전 2,2; 갈 6,14)는 선언은 구약의 지혜영성의 주제인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주제를 기독론적으로 극단화한 것이다.

이는 바울의 배타적 정신성과 포용적 정신성을 함께 내포한다. 모든 것을 비판하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바울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배타적이라 함은 우주적 그리스도의 역사적 자리를 포기하는 것을 거절한다는 의미이며, 포용적이라 함은 그 역사적 자리에 오신 분이 곧 우주적 그리스도라는 점이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창조주되심과 역사의 주되심에 대한 구체적 표상임을 말한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주되심을 거절하는 모든 인간의 문화적 영성을 거절하는 한편, 모든 것을 우주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성안에서 융해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혜를 통해서 모든 것을 배타하고 또한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영성을 의미한다.

1) 구약의 지혜전승에서 나타난 경험지혜에서 계시지혜에로의 이전은 십자가의 지혜에서는 하나님의 영(성령)에 의한 계시를 통해서 그 최고 절정에 이른다. '십자가에 달린 자'를 '영광의 주'로 인식하는 힘은 오직 성령의 계시뿐이기 때문이다(고전 2,10이하; 지혜와 영의 밀접한 관련성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지혜서 7,7.22; 9,10.17). 인간의 눈으로도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한 전적인 새로움(Novum)의 사건(고전 2,9), 곧 십자가의 지혜가 하나님의 영의 계시로 주어졌다

2) 그러나 십자가의 지혜는 계시지혜의 자리자체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삶의 실천적 자리로 나아가는 경험지혜로의 이행을 촉구한다. 즉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바울의 신학적 삶과 사고의 중심축이며 핵심으로서 이를 통해서 세상/교회/인간/역사를 비판적으로 평가할 뿐만 아니라, 그이 몸으로 그속에서 실천적 삶을 살게 한다.
이를 제대로 수행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세 종류의 인간상(고전 2,13-3,1)이 나타난다.
1. 성령의 사람( ): 성령을 받고 십자가의 도의 비밀을 깨달아 이를 그의 사고의 중심적 축으로 삼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위하는 온전한 사람을 뜻한다(고전 2,6).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 자유자이다(고전 2,16).
2. 육에 속한 사람( ): 성령을 받지 않고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으로 거부하며 자기 자신의 영성으로 살아나가는 사람이다.
3. 육신에 속한 사람( ): 성령을 통해 십자가의 도를 받았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주적 구원드라마의 지나간 과거사건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는 자로 십자가를 하나님의 미련한 행위로 인정하고 문화적 종교적 영성으로 치장하려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왜곡된 영성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문화종교적 차별성만을 드높이게 만드는 자들이 되고 만다. 고린도 교회의 바울파/게바파/아볼로파의 교회분파는 다 이런 왜곡된 영성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3) 십자가의 지혜를 자기의 삶으로 보여주는 바울의 영성은 '두렵고 떨림'(고전 2,3)이었으며 그의 몸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갈 6,17)이었다. '두렵고 떨림'이란 하나님앞에서 선 경외로서(참조 시 2,11; 빌 2,12; 엡 6,5; 고후 7,15) 십자가에 달린 자를 선포하는 바울의 사도적 내적 영성이며, '예수의 흔적'이란 인간(이웃/교회)의 자유와 해방의 새창조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의 고난을 그의 몸으로 짊어지는 사도 바울(참조 고전 4,9 이하; 고후 4,8 이하; 11,23 이하)의 실천적 외적 영성의 결과이다. 이는 십자가의 지혜를 인간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드러내기 위함이고 동시에 인간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근거(고전 2,1-5)한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4) 십자가의 지혜는 따라서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인간의 지혜를 포기해야 십자가에서 참 지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런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미련한 것이 하나님께 지혜롭다(고전 3,18)고 말한다. 따라서 참 지혜의 근원이 아닌 피조물인 인간을 누구도 자랑하지 말라(고전 3,21)고 그는 말한다. 인간은 다만 피조물이고 죄인이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지혜란 인간 피조물의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혜있다고 여기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있다(고전 3,18). 따라서 십자가의 지혜는 철저한 경험적 지혜의 성격을 지니다.


VI. 십자가의 지혜는 새 창조신학적인 실천적 영성이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로 선언함으로 한편으로유대적 또는 헬라적 종교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지혜의 실천적 의미를 그대로 받아 새로운 세계관과 삶의 프락시스양식을 제시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혜를 통해 나타난 기독교 영성을 인간이 지닌 자기 지혜의 한계성을 확인하며 우리 밖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적 성격(extra nos)임을 보여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오직 하나님의 지혜만을 알게하는 새 영성의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나 이 지혜는 우리안에 계셔서(in nobis) 우리를 위해(pro nobis) 우리의 삶에 자기 성찰적이고 실천적인 프락시스를 요청하는 영성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계시 지혜인 하나님의 지혜는 구체적인 윤리적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경험지혜의 자리인 실천적 영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바울이 율법주의를 넘어서 그리스도의 법을 모세 율법의 성취적 한계를 넘어 새로운 차원인 사랑의 계명으로 바꾸어 놓는(갈 5,14; 6,2)이유이다. 또한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그리스도를 하늘과 땅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의 실체로 제시함으로 우리의 사유의 자리를 우주적 자리로 확장시키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 모든 실천적 자리의 자유하는 영성인 것이다(고전 2,16).
곧 십자가의 지혜는 새법과 새 지혜를 언급함으로 새 인간상/새 역사상/새 세계관을 향한 창조신학적 자연신학의 새 가능성을 제공한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십자가의 신학을 통하여 자연과 역사와 인간을 하나님의 새 창조의 대상으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지혜를 통해 주어진 새로운 영성이란 신앙과 인식의 배타적 상관성을 극복할 뿐 아니라, 구약에 나타난 세계경험을 통해 야훼하나님 경험을 했던 것을 오히려 거꾸러 십자가 지혜를 통한 하나님경험에서 삶의 경험적 지혜로의 이전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론과 실천의 이분법이 극복된다.


맺는 말

바울의 십자가 지혜는 구약 이스라엘의 지혜전승의 맥락과 예수의 지혜전승에 기초하고 있다. 구약에 나타난 지혜전승의 경험지혜에서 계시지혜로의 이전을 바울은 결정적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 계시지혜의 종국성, 곧 성육신된 지혜의 모습을 보고 있다. 따라서 바울의 영성이란 이 역사적 기초위에서 선 성육신된 지혜로 부터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영성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의 지혜라 할 수 있다. 인간이 경험하는 대상인 모든 삶의 문제(자연/역사/인간등)를 십자가의 지혜에 의해서 재 조명하고 재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기독교적 영성의 자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고린도 교회의 윤리적 분파문제를 윤리적 차원에서 해결하지 않고, 십자가의 도의 지혜를 가르침으로 해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지혜를 통한 기독교 영성이란 하나님을 창조주, 역사의 주, 그리고 구원의 주로 대하는 인간의 모든 삶의 태도와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독교 영성의 구원론적 새 창조의 영성과, 예언자적 비판적 영성,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의 공동체의 나눔의 영성을 확인하고, 창조의 주이며 역사의 주시고 구원의 주이신 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영성에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만을 알기로 작정했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린 나사렛 예수가 우주적 그리스도로 그에게 다가오고 있는 '영광의 주'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있어서 기독교적인 영성을 비판하고 수용하는 기준은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에 달린 역사적 자리에서 부터 우주적 '영광의 주'의 자리에로 나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지혜적 영성인 것이다.
이런 지혜적 영성만이 신앙과 인식, 계시와 역사, 그리고 이론과 실천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통전적으로 사고하며 행동하는 역동적 하나님 나라의 영성에로의 자리로 이끌게 될 것이다.

-김 지 철(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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