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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왕이 오신다 (마태복음 21:1 ~ 11)

by 【고동엽】 2022.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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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왕이 오신다   (마태복음 21:1 ~ 1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마태복음 21:1-11

   부활절이 다가오자 뉴욕의 어느 유명한 미술가가 초콜릿으로 예수님의 형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밀크 초콜릿 200파운드로 십자가에 달린 키 180cm의 예수님 모습을 생체학적으로 자세히 만들어 4월 1일 밤12시에 공개한다고 합니다. ‘나의 달콤한 주님’(My sweet Lord)이라는 제목의 이 초콜릿 형상에 대해 ‘어떻게 예수님의 모습을 초콜릿으로 만들 수 있나?’라며 언론에서 떠들고 있습니다. 세계적 주목을 받기에 좋은 예술적 발상인 것 같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누구이시기에 이렇게 관심거리가 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군가?” 물었습니다. 그날은 유월절의 첫날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국가적 명절이기 때문에 누구나 예루살렘에 와야 됩니다.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큰 명절 때마다 공생애 3년 동안 1년에 한 번씩은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이번은 세 번째 방문으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날 밤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는 늘 나사로의 집에서 머무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셨지요. 나사로에게는 마리아와 마르다 두 누이가 있었는데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의 몸에 발라준 것을 보면 제법 부유한 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사로는 문둥병자 시몬과 함께 잔치를 열었습니다. 당시 문둥병자는 성 안에 살지 못하고 문둥병자만 사는 동네에서 살다가 죽게 되어있었는데 이 문등병자 시몬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그는 예전에 예수님을 만나 문둥병을 치유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문둥병자 열 명이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가 인간 취급을 못 받고 이렇게 살다가 죽게 되었는데, 부디 우리를 살려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보여 주라”고 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고 뒤돌아서자 손과 발이 다 나았습니다. 너무 좋은 나머지 모두들 뛰어서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한 명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절하며 “주님, 저를 고쳐 새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하고 인사했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시몬이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와 문둥병에서 나은 시몬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만찬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주무시고 아침에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셨습니다.

   유월절 명절을 시작하는 날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전국에서 오는 사람들로 꽉 찼습니다. 베다니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2km, 걸어서 30분 정도의 거리입니다. 언덕진 그 곳을 감람산(올리브동산)이라고 부르는데, 감람산을 거의 올라가면 건너편 오른쪽에 벳바게라는 자그마한 마을이 있습니다. 그 마을 앞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저 동네에 가면 입구에 당나귀 두 마리가 매여 있는데 하나는 어미고, 하나는 새끼다. 새끼 당나귀는 아무도 탄 일이 없으니 그것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누가 왜 남의 당나귀를 함부로 풀어 가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쓰시려 한다고 대답하면 아무 말 없이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가보니 정말 당나귀와 새끼가 있었습니다. 참 희한합니다. 모든 것이 그 분의 말 대로였습니다. 도대체 이런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이 중요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의 결과가 드러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예지력(豫知力)이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으나 예수님은 내일 일을 아십니다. 어느 동네에 나귀 두 마리가 있는데 하나는 어미고 하나는 새끼라는 것을 아무나 알 수 없습니다. 데려오려고 하면 누군가 나타나서 “왜 가져가느냐?”고 물을 것이라 하셨고 정말 그랬습니다. 세 가지 예언이 동시에 맞을 확률은 적습니다. “주님이 쓰시려고 한다”고 하자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예견한 다섯 가지 일들이 모두 맞아떨어지기란 확률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미래를 아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예지력을 나타내신 일은 전에도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세금을 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도 좋은 시민들인데 성전에 세금을 낸다”고 말씀하시고 베드로에게 “낚시를 던져서 첫 번째 잡은 고기의 입을 벌려보면 그 안에 동전 하나가 있을 것이다. 가져다가 너와 나를 위해서 세금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았더니 정말 동전이 들어있는 겁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이분은 사람인데 사람이 아니구나. 사람인데 하나님이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일은 자기가 누군지 제자들이 알도록 훈련시키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십자가 사건 몇 달 전부터, “내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가면 제자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 그들은 나를 잡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위대한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습니다. 그런데 정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팔았고, 예수님은 제사장들에게 잡혀갔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고, 사흘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십자가에 죽을 것과 부활할 것을 여섯 차례나 예언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미래를 알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요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실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다락방에 가서 기도하며 기다리라. 그러면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실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물로 세례를 받았지만 이제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텐데,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힘을 얻어서 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증인들이 될 것이다.” 정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10일 동안 기도하며 기다리자 그대로 되었습니다. 다락방이 흔들리며 성령이 임하셨고 모두가 전 세계에 위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오후에 감람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감람산에 오르면 예루살렘이 한 눈에 보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내가 너희를 품으려고 했는데 너희가 나를 거부하고 사흘 후에는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여자들이여, 네 자녀들을 위해 울라. 이 아름다운 도시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이 때가 대략 AD 30년인데 예루살렘은 과연 AD 70년에 그대로 망합니다. 예수님은 40년 후를 예언하신 것입니다. AD 70년에 로마군을 이끌고 온 타이터스(Titus) 장군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이고 예루살렘에 불을 질러 예수님 말씀 그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 때부터 유대인들은 나라 없는 민족이 되어 2천년 동안 전 세계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녔습니다. 남미로, 아프리카로, 유럽으로, 아시아로... 한국을 빼고 안 간 곳이 없습니다. 아프리카로 간 사람들은 2천년 동안 아프리카에 살다 보니 모두 까만 흑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각국에서 돌아온 이들이 1948년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웠고 지금은 5백만 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대로 이루어져 오늘까지 생존하고 있습니다. 이제 종말이, 세상 끝이 다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앞일을 보고 아십니다. 사람은 알 수 없으나 하나님만 알 수 있습니다.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믿음은 아무에게나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은 혈과 육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에게 나타내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수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고백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다!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몰라서 불안하고 두렵고 긴장되고 초조합니다. 저도 얼마 전 휴가 중에 혼자 있으니 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내가 80살이 되면 어떻게 될까? 그 때까지 건강할까? 여기저기 고장 나면 어떻게 하지?’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감사한 것은, 여러분과 제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은 우리의 미래를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우리의 내일을 다 아시는 그분이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을 믿고 날마다 그 분을 따라갑시다.

    둘째로, 예수님은 나귀를 탄 겸손한 왕으로 오셨습니다. 새끼 나귀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여행하신 분들은 지금도 덜커덩거리며 나귀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보셨을 것입니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타고 다니지요. 무섭지 않아요. 그럼 누가 무섭나요? 큰 말을 타고 칼이나 권총을 찬 사람입니다. 데모할 때 기마병들이 와서 데모대를 막 밀어 붙이면 겁이 나서 도망갑니다. 예수님은 말을 타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칼을 들고 오시지도 않았습니다.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오셔서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마호메트는 어떻게 왔습니까? 말을 타고 한 손에 칼을, 다른 손에는 코란을 들고 와서 “코란 받을래? 칼 받을래?”합니다. 코란을 받겠다고 하면 놔 주고 안 받겠다고 하면 칼로 목을 쳤습니다. 똑같은 종교지도자지만 이렇게 달랐습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하는 찬송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위협적이지 않고 편안합니다.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누구든지 다가갈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도 “호산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하고 소리쳤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친구요, 사업가들의 친구요, 평범한 사람들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만왕의 왕, 만주의 주십니다. 우주를 창조하셨고 다스리시는 그분이 말을 타고 군대를 이끌고 오지 않으시고 나귀를 타고 무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가까워지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언제나 환영하시고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인도해 주실 친구이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예수님을 환영하는 자들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하면 바로 구원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호산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여, 저 높은 곳에 호산나!”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산나, 무슨 뜻입니까? 호산나란 “지금 당장 나를 구원하여주옵소서”라는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호산나!”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오케이!" 하십니다. 당장 구원해달라는데 “아니야, 오늘은 아니야. 나 요즘 바빠”하실 분이 아닙니다. “지금 구원하여 주옵소서. 지금 당장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옵소서. 아멘!”하면 바로 “됐다! 너는 구원 받았다”하시고 구원해주십니다. 우리 “호산나” 찬양을 같이 불러볼까요?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높은 곳에서~ 주의 이름 높여~ 다 찬양하라~ 귀하신 주 나의 하나님~ 호산나 높이 외치세.”

   호산나 찬송을 부른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 받았습니다. 지금이 구원 받을 때요, 은혜 받을 때입니다. 인간에게는 구원받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려우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가난한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야 했고 십자가에 매달아야 했고, 피 흘리며 몸을 찢어야 했으니까요. 그분이 우리를 위해 몸을 찢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구원이 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인간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지금 구원하여 주옵소서. 호산나!” 이 한 마디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믿으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진심으로 호산나라 말해본 적이 없는 분이 있다면, 오늘 아침 함께 부른 호산나 찬송이 여러분의 진심이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진심이었다면 여러분은 오늘 즉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영접하는 자에게, 호산나 부르는 자에게 구원의 주가 되셨습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 분이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10-11절). 영혼의 눈이 뜨이지 않은 보통사람에게는 예수님은 그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선지자요, 좋은 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선지자 그 이상이셨습니다. 선지자는 구원의 길을 보여줄 수는 있어도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갈릴리 시골동네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로 끝나면 구원이 없습니다. 종교적 윤리나 종교학은 있을지 몰라도 구원은 없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주일 아침에 특별한 모임이 있다고 전교생을 나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서 “선생님, 저는 내일 못 옵니다”하고 말씀드렸어요. “왜 못 오느냐?” “저는 주일 그 시간에는 교회에 가야 됩니다.” “한 번 오라는 것인데 못 온다는 말이냐?” “한 번도 오지 말라고 해야 되는데 한 번 오라고 하시니까 안 된다는 겁니다.” 선생님은 저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셨어요. “상복아, 예수는 기독교의 창시자야. 나사렛에서 태어나서 목수생활을 하다가 기독교를 만드신 훌륭한 선생님일 뿐이야. 너는 어떻게 그렇게 이상하게 믿느냐? 너처럼 믿으면 안 돼.” 그 분은 똑똑한 분이셨습니다. 똑똑한 사람의 눈에 예수님이 그저 선지자일 뿐,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가 아닙니다. 오늘도 우주와 세계역사와 내 인생을 주관하는 분, 내가 따르고 의지할 그런 분이 아닙니다. 중학생인 나도 아는데 똑똑한 시인인 선생님이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 선생님이 불쌍하였습니다. 선지자, 훌륭한 사람, 위대한 종교사상가, 기독교 창설자, 그것이 끝이라면 거기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여러분의 미래를 아시고 영원히 이끌어 주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호산나”부르짖는 사람들에게 즉시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고난을 받으신 이 한 주간 동안, 새벽마다 모여 주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부활과 생명이 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묵상하고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참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사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그 분을 만나고 호산나를 부르며 구원의 은총이 있기를 원합니다.


출처/김상복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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