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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눅13:22-30

by 【고동엽】 2022. 7. 5.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눅13:22-30
(2014/2/23)

[예수께서 여러 성읍과 마을에 들르셔서, 가르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물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할 터이나, 주인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물러가거라' 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는 바깥으로 쫓겨난 것을 너희가 보게 될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 것이다.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

• 예루살렘 가는 길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경주에서는 채 피어보지도 못한 젊은 생명들이 예기치 않은 시간에 죽음을 맞았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품에 안아주시기를 빕니다. 성지순례에 나섰던 이들이 폭탄 테러를 당했습니다. 설렘과 감동이 순식간에 악몽으로 변했습니다. 생명은 고귀한 것이지만 이렇게 속절없이 스러지기도 합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삶입니다. 지금 금강산에서는 이산가족들이 재회의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만남 이후에 남을 허전함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인생을 가리켜 '도상途上의 실존'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길 위의 존재라는 말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들여 놓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물이 늘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뿐인가요? 사실은 우리도 늘 변화 가운데 있습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사람인 동시에 다른 사람입니다. 변화는 누구에게나 다가오지만 문제는 각자가 지향하는 방향입니다. 우리는 모두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향은 조금씩 다릅니다. 삶이 다양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삶을 갈릴리와 예루살렘이라는 두 장소를 통해 설명했습니다. 갈릴리는 주님이 활동하시던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진력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수난의 공간입니다. 그 거룩한 도시에서 주님은 적대자들과 맞서다가 죽임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갈릴리와 예루살렘 사이의 여정을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길 위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어떻게 소외된 이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주어진 물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 예루살렘 여정은 한마디로 참 삶에 대해 가르치는 학교였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에 오르시던 순간을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9:51)

하늘에 올라가실 날은 물론 죽음의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 죽음을 회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향해 나아가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죽음은 공생애 초기부터 예수님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고향인 나사렛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은 격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눅4:28-30)

나중에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도 주님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헤롯을 '그 여우'라고 지칭하면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13:32) 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은 우리 가슴을 뛰게 만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13:33) 예수의 길은 살리는 길입니다.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거는 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것이 참 삶의 길임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으셨습니다.

• 어리석은 질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주님은 여러 성읍과 마을에 들르셔서 가르치셨습니다. 가르침의 내용은 나오지 않지만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참 사람의 길'이라고 요약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먹고 사는 일에 바빠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 서로 공감하고 또 북돋으며 사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 그런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13:23) 이것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그는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정말 궁금한 것을 물은 것입니다. 그는 이미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구원을 보증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구원에 대한 갈망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도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답하기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구원'이 무얼 뜻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일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천당'이라고 해야 그들의 숨은 욕망을 더 잘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사용되는 구원(soteria)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치유'라는 의미로 쓰일 때가 가장 많습니다. 병자의 치유, 귀신들린 자의 회복이 구원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회복은 그런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을 영접한 삭개오가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고, 남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했을 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눅19:9)고 선언하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주로 사람의 사람됨이 회복된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거듭난 사람이라야 구원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은, 구원을 남과는 구별되는 특권이라고 이해한 것 같습니다. 구원조차 남과의 경쟁에서 승리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인가요? 정작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고 있는가?" 오지랖 넓게 남이 구원받았나 받지 못했나를 곁눈질할 게 아니라 자기 삶을 살필 일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인생길의 어디쯤 걷고 계십니까?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삶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존경했다는 아베 피에르 신부에게 한 방송 진행자가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삶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피에르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영원한 사랑과의 영원한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 주어진 약간의 시간일 뿐입니다. 인생이 내게 그 사실을 가르쳐주었지요. 나는 이 말을 후세에 물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확신이 내 인생과 행동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아베 피에르, <피에르 신부의 유언>, 웅진 지식하우스, p. 16)

• 우리가 힘써야 할 것
우리에게 주어진 약간의 시간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은 많습니까, 적습니까?'라는 질문에 동문서답으로 응대하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24) 힘쓴다는 말은 '아고니제스테agonizesthe'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에서 심한 고통을 뜻하는 영어 단어 'agony'가 나온 것을 보면, 이 단어는 고심하고 고투하는 것 즉 진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급적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아니라, 최선의 노력을 다해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들어갈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문' 하면 먼저 떠오는 게 뭔가요? 책 좀 읽으신 분들은 앙드레 지드가 먼저 떠오를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대학 입시, 취업, 승진 등이 떠오를 겁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이들이 소위 말하는 일류 대학에 들어가고,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자기를 성찰할 여유조차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좁은 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많은 이들이 통과하기를 갈망하는 넓은 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좁은 문은 '자기'와 '욕망'을 향하여 나 있지 않습니다. 그 문은 '이웃'을 향해 열려 있고, 이웃을 넘어 하나님께로 향하는 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소비사회는 끊임없이 우리의 욕망을 부추깁니다. 소비주의에 깊이 중독된 이들의 눈에는 이웃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소비주의는 우리를 실질적 무신론자로 만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광고에 더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너희가 신처럼 되리라'고 말하며 하와를 유혹하던 뱀은 오늘 광고의 의상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정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있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의 자리에서 벗어나 사서 고생하는 길에 접어든 이들 말입니다. 이 덧거친 세상에 살면서 마음이 상하고 찢긴 이들의 이웃이 되어 주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상호부조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그런 이들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 제게는 교우들 몇몇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참 고맙습니다. 좋은 세상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인기 없는 좁은 문으로 한사코 들어가려는 이들을 통해 옵니다. 부천에서 목회하고 있는 제 후배 목사님의 기도문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무임승차하지 않게 하소서/버스든 전철이든/제 값 치르게 하소서/다른 이의 수고나 공로에/덩달아 승차하지 않게 하소서/당신의 은총을 부를 공덕이/따로 있을 수 없으나/그렇다고 은총을/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게 하소서/내 삶의 어떤 순간이든/나를 향한 그 무엇이든/무임승차하지 않게 하소서" (한희철, <어느 날의 기도29>)

이 기도에 한 마디만 덧붙이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무임승차하지 않게 하소서." 우리는 머리로는 예수의 길을 압니다. 아주 가끔 가슴도 예수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는 여전히 완악합니다. 습관의 무게를 덜어내지 못한 채 옛 삶을 지속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 닫힌 문 앞에 선 사람들
본문 말씀은 구원의 현실 속에 들어가려고 애를 써도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을 보여줍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은 후에,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그들의 부르짖음은 애절하지만 주인의 응답은 싸늘합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문 밖의 사람들은 주인의 기억을 상기시켜 드리기 위해 자기소개를 합니다.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태도는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라 칭하시며 모두 물러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왠지 가슴이 저릿해지는 느낌입니다. 주님과의 인연을 강조하며 친교의 식탁에도 함께 앉아 어울렸고, 길거리에서 가르침도 받았다고 해도 '나는 모른다' 하십니다. 문제는 삶입니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는 지식, 따름이 생략된 신앙고백은 허망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도 문밖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문은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진력할 때 저절로 열릴 것입니다.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지 않는 세상, 전쟁고아들이 사막을 유랑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가난하거나 병약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하여 삶의 기회조차 박탈당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쓸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이런 질문은 더 이상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나는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고 있는가?"를 물으십시오. 주현절기의 막바지입니다. 우리 삶이 한꺼번에 변화되지는 않는다 해도 아주 조금씩이라도 예수의 길을 향해 방향을 돌이키십시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꼭 붙들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4년 02월 23일 11시 57분 0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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