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싹이라 불리는 사람 슥3:1-10 (2014/2/9) [주님께서 나에게 보여 주시는데, 내가 보니, 여호수아 대제사장이 주님의 천사 앞에 서 있고, 그의 오른쪽에는 그를 고소하는 사탄이 서 있었다.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나 주가 너를 책망한다.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선택한 나 주가 너를 책망한다. 이 사람은 불에서 꺼낸 타다 남은 나무토막이다." 그 때에 여호수아는 냄새 나는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었다. 천사가 자기 앞에 서 있는 다른 천사들에게, 그 사람이 입고 있는 냄새 나는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이르고 나서,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내가 너의 죄를 없애 준다. 이제, 너에게 거룩한 예식에 입는 옷을 입힌다." 그 때에 내가, 그의 머리에 깨끗한 관을 씌워 달라고 말하니, 천사들이 그의 머리에 깨끗한 관을 씌우며, 거룩한 예식에 입는 옷을 입혔다. 그 동안 주님의 천사가 줄곧 곁에 서 있었다. 주님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경고하였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여기에서 섬기는 사람들 사이를 자유로이 출입하게 할 것이다. 여호수아 대제사장은 들어라. 여기 여호수아 앞에 앉아 있는 여호수아의 동료들도 함께 잘 들어라. 너희는 모두 앞으로 나타날 일의 표가 되는 사람들이다. 내가 이제 새싹이라고 부르는 나의 종을 보내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내가 여호수아 앞에 돌 한 개를 놓는다. 그것은 일곱 눈을 가진 돌이다. 나는 그 돌에 내가 이 땅의 죄를 하루 만에 없애겠다는 글을 새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서로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이웃을 초대할 것이다.'"] • 비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이 시대를 살아가느라 얼마나 힘겨우십니까?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동안 우리 영혼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습니다. 가식 없이 천진한 웃음과 만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늘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라도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나날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교우들의 애환을 들으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기어코 기독교인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을 보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뭇 매를 맞고 있습니다. 며칠 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실시한 ‘2013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3대 종교 가운데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낮게 나왔습니다. 종교인들 가운데는 겨우 20%가 개신교를 신뢰한다고 말했고, 비신자들 가운데는 오직 8%만이 신뢰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게 우리의 현 주소지 하면서도 가슴이 쓰린 건 사실입니다. 개신교가 사회봉사에 제일 열심이라고 대답하면서도 신뢰도가 그렇게 낮은 것은 전적으로 목사들 책임입니다. 책임을 통감합니다. 바르게 살고, 바르게 선포하고, 바르게 가르치고, 바른 실천의 길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한국 개신교회를 버리시려는 것일까요? 저는 이런 쓰린 마음을 안고 오늘의 본문을 읽었습니다. 스가랴는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공동체가 전쟁으로 인해 무너졌던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려던 시기에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 스가랴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바벨론에 잡혀갔던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 성전 재건이 시작되던 시기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성전 재건을 진두지휘하던 스룹바벨 총독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것 같습니다. 성전만 재건되면 세계 질서가 재편될 것이고, 페르시아의 세계 지배는 끝장이 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 비전들은 엄혹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고, 또 준엄하게 꾸짖으며 새로운 삶을 독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비전을 바르게 해석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우리 교회 한상익 장로님은 그 난해한 스가랴의 비전을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분석한 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스가랴가 보았던 네번째 비전입니다. 앞서의 세 비전은 실의에 빠져 있던 시온과 그 백성을 위로하고, 에스겔과 제2이사야를 통해 주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확신시키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첫번째 비전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무너졌던 당신의 집을 다시 세우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성전 건축은 사람들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비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괴롭혔던 주변의 교만한 나라의 뿔을 꺾으실 것임을 예고합니다. 세번째 비전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불성벽이 되어 그 백성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리라는 환상이었습니다. • 불에서 꺼낸 타다 남은 나무토막 네번째와 다섯번째 비전은 새로운 시대를 이끌 영적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와 관련된 것입니다. 스가랴가 보았던 금으로 만든 등잔대 양쪽에 서있던 두 그루 올리브나무가 바로 그 상징입니다(4:2-3). 천사는 그 올리브 나무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섬기도록, 주님께서 기름 부어서 거룩히 구별하신 두 사람"(4:14)이라고 일러줍니다. 외세에 의해 왕정이 무너진 후 대제사장의 역할이 더욱 커졌습니다. 고단한 유배생활 가운데서도 백성들이 소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하고 그들이 전통을 굳게 지키도록 독려한 것이 사제집단임을 생각해보면 납득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치 연극 무대를 보는 것처럼 입체적입니다. 무대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하늘궁전입니다. 스가랴는 관객이 되어 그 광경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마치 거울의 방에 들어간 것처럼 그 광경을 또 보고 있습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천사들이 줄지어 서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놀랍게도 사탄의 모습도 보입니다. 욥기의 산문 부분도 하늘 회의 장면에 사탄을 등장시킵니다. 하늘 회의에 참석하는 사탄은 우리를 위협하는 영적 실체로서의 악마나 귀신과는 좀 다릅니다. 그는 '참소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역할을 합니다.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는 그는 누구보다 세상 현실에 대해 잘 안다고 자처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자리에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에 대제사장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스가랴는 뜻밖의 말을 합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냄새 나는 더러운 옷을 입고 서있더라는 것입니다. 냄새나는 더러운 옷은 인분이 묻은 옷입니다. 그 말은 그의 행실이 그렇게 아름답지 못하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사탄은 아마도 여호수아 대제사장을 처벌해야 한다고 하나님께 아룃던 것 같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사탄의 참소는 근거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사탄아, 나 주가 너를 책망한다.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선택한 나 주가 너를 책망한다. 이 사람은 불에서 꺼낸 타다 남은 나무토막이다."(3:2) 여호수아의 부적절한 처신을 고발한 사탄은 칭찬이 아니라 책망을 받습니다. 조금 억울하겠습니다. 사탄은 인과응보의 논리에 따라 상과 벌을 주시는 하나님만 알지, 누군가를 사랑하여 애를 태우시는 하나님은 알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선택한' 주님은 여호수아 대제사장의 부족함을 모르지 않지만 그를 쉽게 버리지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를 일러 '불에서 꺼낸 타다 남은 나무토막'이라 이르십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로 새로운 세상의 모퉁이 돌을 삼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을 보면 흠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문제가 없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면서도 자신이 '불에서 꺼낸 타다 남은 나무토막'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 자신의 성취에 도취되어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존 웨슬리는 여섯 살 때 사제관에 불이 나서 죽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이웃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불구덩이를 빠져 나왔을 때 건물이 내려앉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불에서 꺼냄받은 그슬린 나무토막'이라고 말했습니다.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말이겠지요. • 옷을 갈아입다 의롭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렸기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분이 묻은 옷을 입고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다른 천사들에게 그가 입고 있는 냄새 나는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이릅니다. 그리고 마치 선포하듯이 말합니다. "보아라, 내가 너의 죄를 없애 준다. 이제, 너에게 거룩한 예식에 입는 옷을 입힌다."(3:4b)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은 죄가 씻음 받았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이런 상징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이 그것입니다(엡4:22-24). 로마서에서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으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늘 회의의 참관인으로 그 자리에 있던 스가랴가 불쑥 천사들의 일에 끼어듭니다. 그는 여호수아 대제사장의 머리에 깨끗한 관을 씌워 달라고 청했습니다. '관'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사실 머리를 감는 터번입니다. 이사야3:23절에서는 이것이 '머릿수건'으로 나옵니다. 그것은 부유하고 귀한 여성의 상징이었습니다. 제사장의 복장이라기보다는 그의 고귀함을 드러내기 위한 오브제였습니다. 천사는 요구받은 대로 여호수아 대제사장에게 관을 씌우고, 거룩한 예식에 입는 옷을 입혔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이렇게 값없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고귀한 관, 그리고 거룩한 예식에 입는 옷은 무거운 책임이지 특권이 아닙니다.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그에게 주어진 소명은 철회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그에게 엄중하게 이르십니다. "네가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여기에서 섬기는 사람들 사이를 자유로이 출입하게 할 것이다."(3:7)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몸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영적 지식은 교만이나 위선 혹은 독선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권위는 그러한 삶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인들이 자기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자신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택은 철회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사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네가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이라는 조건절입니다. 그것은 참 무거운 책임입니다. '내 뜰을 지킬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회의에 참여할 자격을 얻는다는 말일 겁니다. • 표징이 되어야 할 사람들 또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들은 앞으로 나타날 일의 표가 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나타날 일은 '새싹'이라 불리는 이의 도래입니다. '일곱 눈을 가진 돌'의 도래입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이 둘은 하나입니다. 물론 이것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일 겁니다. 그를 '새싹'이라 이르는 게 참 의미심장합니다. 새싹은 여립니다. 하지만 그 속에 생명의 기운이 가득 차 있습니다. 두터운 대지 혹은 두꺼운 나무껍질을 뚫고 솟아나오는 새싹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장엄합니다. 요즘 제가 '장엄하다'는 말을 자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비가 온 세상에 가득 차 있음을 자꾸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도 새싹이라는 은유를 통해 메시야적 존재를 드러낸 바 있습니다. 그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사11:1)고 말했습니다. '일곱 눈을 가진 돌'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입니다. 어떤 이는 그것이 제사장의 옷에 매단 보석의 일곱 면을 일컫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히브리어로 '돌'이라는 단어와 유사한 '샘'을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사실 13장에서 스가랴는 샘의 이미지를 통해 구원받은 삶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날이 오면, 샘 하나가 터져서,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의 죄와 더러움을 씻어 줄 것이다."(13:1) '돌'이든 '샘'이든 그 역할은 죄를 씻어주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죄 사함을 위해 매번 새롭게 제사를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실 그분은 땅의 죄를 하루 만에 없애실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그분을 가리키는 손가락 역할을 잘 할 때 세상은 평화롭게 됩니다. 주님은 확약을 하듯 말씀하십니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서로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이웃을 초대할 것이다."(3:10) 평범한 이 말씀이 저는 사무치게 좋습니다. 사람들이 사귐을 위해 서로를 초대하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사람들은 이제 다른 이들을 사적 공간에 초대하지 않습니다. 점점 장벽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외로움도 깊어집니다. 사귀어 두면 덕을 볼 것 같아서가 아니라,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사람이 좋아서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는 세상이 속히 왔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월요일 저는 양평에 머물고 있는 두 분 목사님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밥 한 끼 나눠 먹고, 차 한 잔 마시고, 항아리 박물관에 가서 구경하다가, 그 목사님이 머물고 계신 집에 가서 잠시 둘러보았을 뿐입니다.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아무런 목적 없는 사귐과 환대로 초대해준 그분들의 마음이 참 느껍게 여겨졌습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경계를 초월하여 다른 이들을 환대할 줄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철학자는 현대인을 가리키는 기호를 만들어냈습니다. 영어 S자 한복판에 빗금을 그은 것($)입니다. S는 주체를 뜻하는 subject라는 단어에서 온 것이고, 빗금은 사람들의 영혼에 새겨진 상처의 흔적을 상징합니다. 세상에 상처나 아픔의 기억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상처는 이유 없는 환대의 공간 속에서라야 치유됩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환대의 공간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포도나무 아래로, 무화과나무 아래로 초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성령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우리는 모두 새싹이라 불리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힘으로 사람들을 강압하고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서로가 벗이 되어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이 땅에서 새싹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외로운 사람들, 아픈 사람들, 내몰린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이 소명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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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4년 02월 09일 11시 59분 02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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