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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로 산다는 것 -히10:19-25

by 【고동엽】 2022. 7. 5.
우리로 산다는 것
히10:19-25
(2014/2/2)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 매심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설날이 지나자 立春이 벌써 코앞입니다. 조류 인플루엔자 소동으로 모두가 긴장했지만 그래도 큰 명절에 다정한 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가족들 앞에 서는 순간 우리가 세상에서 부여받은 역할의 가면은 벗겨지고, 본래의 모습을 유쾌하게 상기하게 됩니다. 우리가 쓰고 사는 가면이 많아질수록 삶은 힘겨워집니다. 그 가면을 연기해야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수많은 금지와 금기를 익히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기 때부터 우리는 '어비', '지지' 등의 지시어를 통해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배웠습니다. 조금 커서도 '~ 하면 안 돼' 하는 금지어에 익숙해졌습니다. 거기에 제대로 반응하는 이들은 모범생으로 인정되었고, 그것을 위반하는 이들은 문제아로 낙인찍히기도 했습니다.

종교에는 특히 금지와 금기가 많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일상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가장 내밀한 부부간의 일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그러한 금기와 금지가 공간화된 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제사장과 일반인…. 그 금지선을 넘는 것은 중대한 범죄로 여겨졌습니다. 이로써 성소와 지성소에 출입할 수 있었던 제사장들이 특권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공간화된 위계는 지금도 있습니다. 강남의 무슨 무슨 동 혹은 특정한 주거공간에 사는 이들은 은근한 우월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간화된 위계질서를 고수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인도자, 기도자의 자리는 설교자의 자리보다 낮은 곳에 배치된다든지, 여성들이 그 자리에 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등의 일이 그러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교인들은 유대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금기를 과감하게 부정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자기 정체성이 마치 거기에 달린 듯 집착하는 안식일을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막2:27).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음식 규정상 먹어서는 안 되는 짐승들이 보자기에 싸인 채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회피하다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행10:15) 하는 꾸짖음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죽음의 시간을 전하는 복음서 기자들의 전언입니다. 공관복음서는 공히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순간 성소와 지성소를 갈라놓던 휘장이 찢어졌다고 전합니다.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의 구별이 철폐된 것입니다. 이 말은 어떤 뜻일까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 그것은 돌이켜 삼가는 삶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회개란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돌아서는 것이 죄라면,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 그래서 하나님과 마주 보는 것이 구원입니다. 회개悔改의 '회'는 뉘우친다는 뜻으로, 마음 心과 '매양, 늘, 언제나'라는 뜻의 每가 결합된 글자입니다. 매라는 글자는 어미 母와 마치 머리에 비녀를 꽂은 것 같은 모양의 획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머리장식을 한 여성은 옛날에 제사 일을 담당하던 특별한 여성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은 늘 자기를 돌이켜보며 삼가는 마음으로 지냈을 겁니다. 회는 그러한 마음가짐을 늘 유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둘째 형인 약전은 자기 서재에 '매심재每心齋'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정약전은 매심이란 뉘우침이라면서, 자신은 뉘우칠 것이 많은 사람이기에 그것을 늘 잊지 않고 항상 마음에 두기 위해 그런 이름을 지었다고 말했습니다(우석영, <낱말의 우주>, 궁리, p. 579ff).

• 피를 뿌리고, 물로 씻고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위대한 제사장이 계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좁게 말하면 교회일 것이고, 크게 말하면 온 세상일 것입니다. '다스리다'라는 단어는 강압하거나 강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돌보다'라는 뜻으로 새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남성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집안을 두루 보살피고 돌보는 '가장家長'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가장은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가족들을 지키고, 먹이고, 가르치고,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집에서 기르는 가축들도 잘 건사해야 합니다. 너무 덥지는 않은지, 너무 춥지는 않은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자꾸만 살펴야 합니다. 그게 좋은 다스림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그렇게 다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그렇게 다스리고 계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분은 분명히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은총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끔 홀로인 듯 외로울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숨어 계신 듯 암담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고, 아니 계신 때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확고한 믿음과 참된 마음으로 그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마음에다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10:22b)

이 대목은 제1성서를 배경으로 하여 보아야 합니다. 레위기는 속죄일에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을 명기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목욕재계한 후 정결한 옷을 입고 성소에 들어가 수소를 바침으로 먼저 자기와 자기 집안의 죄를 속하여야 합니다. 그런 후에 숫염소 두 마리를 놓고 제비를 뽑아 하나는 주님께 바치고 다른 하나는 아사셀에게 바칩니다. 제사장은 백성이 속죄제물로 바친 숫염소를 잡아 그 피를 휘장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덮개 너머와 덮개 앞에 뿌림으로 성소를 성결하게 하고, 이어서 회막과 제단도 같은 방법으로 성결하게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한 의례를 옛 시대의 관습이라 하여 간단히 부정해버리기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그 마음에 예수의 피를 뿌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피'에 방점을 찍습니다. 마치 그 피 속에 신비한 효력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피는 그의 생명을 뜻하는 은유입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 속에 흐를 때 예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나타납니다. 일전에도 소개해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이용도 목사님의 시 <눈물을 주소서>는 신자들 속에 예수의 피가 없어 맥없고, 힘없고, 담력 없고, 의분 없고, 화기 없고, 생기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죄와 더불어 싸울만한 피, 악마가 인간을 유린하는 것을 분히 여기는 피를 달라고 주님께 청합니다. 이런 피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성도는 또한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맑은 물은 욕심으로 인해 흐려지지 않은 마음입니다. 거짓과 위선과 시기심과 교만함으로 인해 더러워지지 않은 삶입니다. 자꾸만 씻고 또 씻지 않으면 더러움에 익숙해지게 마련입니다. 적당히 믿는 척하고, 적당히 바른 척하는 이들처럼 하나님의 속을 태우는 이들이 또 있을까요?

• 가끔은 흔들려도
믿음의 길을 걷는 것이 늘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옛 삶의 인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마음은 천사와 악마의 투기장이라 말했습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접속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천사가 우리 마음을 들어 올려주지만, 그 접속이 끊어질 때면 악마가 우리 마음을 아래로 잡아당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그것이 내림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악마가 행복의 환상을 우리 속에 주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은 삶이 이미 황폐해졌을 때입니다.

삶은 일직선으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장애물을 만나 길을 우회해야 할 때도 있고, 그 길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늘 유동하며 삽니다. '변함 없음', '한결같음'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여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향을 잃지 않았다면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기어코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가 신뢰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10:23)

흔들리되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나침반은 흔들리면서 북쪽을 가리킵니다. 흔들리지 않고 정북正北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고장난 것일 겁니다. 일단 믿음의 길에 접어든 이들은 길이 보이지 않아도 가던 방향으로 계속 걸어야 합니다. 산에 올라가 본 이들은 잘 압니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확연하게 드러나던 산봉우리가 계곡에 들어서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봉우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낙심할 이유는 없습니다. 잠시 다른 봉우리에 가려 보이지 않아도 봉우리는 그곳에 있으니 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이 척박한 세상 한복판에서 시작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또 그 나라에 동참하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운 사람들입니다. 그 소망을 굳게 붙들 때 우리 삶은 든든해집니다.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은 뒤를 돌아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린 롯의 아내 이야기를 잘 압니다. 광야생활이 어려워지자 애굽을 그리워했던 탈출 공동체 사람들 이야기도 잘 압니다. 우리는 예수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삶이 막막하다 하여 돌아설 수도 없고, 가야 할 길이 아득하다 하여 주저앉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빌3:13)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 하겠지만 그러라지요. 가끔은 외로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동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 반얀나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삶의 길로 부르실 때 동지도 함께 보내주십니다. 어떤 신학자(게하르트 로핑크)는 새로운 인류인 교회의 특색을 '서로 함께'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서로 지체'가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에베소서는 교회의 신비를 이렇게 말합니다.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엡4:16)

서로 연결되고 결합될 때 우리들을 지배하던 이기심과 탐욕의 영역은 줄어듭니다. 행복의 환상으로 우리를 제멋대로 지배하던 사탄의 권세는 맥을 추지 못합니다. '나' 아닌 '우리'로 산다는 것처럼 고마운 일이 또 있을까요?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10:24)할 때 주님의 몸은 튼튼히 서 갑니다.

지금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위로와 기쁨과 새 힘을 얻기보다는 상처를 입고 정신의 피폐해지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 원인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다 압니다. 떠나는 이들을 만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지어져 가는 기쁨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다시금 좋은 공동체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꿈을 잃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더욱 커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군가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겸손하게 배우려는 마음과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반얀나무(Ficus benghalensis)를 떠올립니다. 뿌리가 약한 이 나무는 비바람을 견디기 위해 가지에서 다시 땅으로 뿌리를 내리는 습성이 있다 합니다. 땅에 닿은 뿌리는 기둥뿌리(支柱根)가 되어 나뭇가지를 받쳐줍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한 그루 반얀나무가 숲을 이루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교회도 이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로를 든든히 지탱해주면서 숲을 이루어 뭇 생명들을 품어 안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교회됨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팔레스타인이 아닌 인도에서 태어나셨다면 겨자풀의 비유 대신 반얀나무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이틀 후면 입춘입니다. 겨울 한복판에 봄이 들어서는 것이지요. 놀라운 순간입니다. 믿는 이들은 바로 입춘과 같은 존재여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긴 겨울에 지친 이들에게 봄 소식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4년 02월 02일 12시 06분 1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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