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살면 안 되나? 막10:13-16 (2014/2/16)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다.] • 낙인 찍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지금 주현절기의 한 복판을 지나고 있습니다. 세상에 머무시는 동안 주님은 하늘을 잊은 채 땅의 현실에만 골몰하는 이들에게 하늘을 일깨워주시곤 하셨습니다. 주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내려 하기보다는 당신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치유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치유를 베푸셨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넸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고, 꾸지람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꾸지람을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물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양을 바꾸지만, 물이라는 본질은 잃지 않는 존재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하셨습니다. 새로움은 언제나 옛 세계 혹은 질서의 부정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힘 있는 이들이 힘없는 이들을 무시하고 박해하고 착취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살면서도 예수님은 억압과 착취가 사라진 새로운 세상, 모두가 형제자매의 우애를 나누며 사는 세상을 꿈꾸셨습니다.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온한 일입니다. 옛 세계는 언제나 요셉의 형들이 했던 말을 반복합니다. “그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형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는 동생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편애도 문제이지만, 동생을 그냥 너그럽게 받아주지 못하는 그들의 편협함도 문제입니다. 아직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들에서 짐승을 돌보던 그들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자기들을 찾아오는 요셉이 눈에 띠자 불의한 공모를 합니다. "자,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놓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창37:20) 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형제가 이름이 아니라 '저 녀석'으로 지칭되고 있습니다. 폭력은 이처럼 어떤 사람을 '대상화' 하고 '추상화' 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나쁜 의도를 갖고 있는 이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에게 낙인을 찍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편 가르기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좌파니 우파니, 수구꼴통이니 빨갱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낙인을 찍는 순간 상대는 존중받아야 할 존엄한 인격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악이 됩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런 예를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지쳤습니다. 고향 상실, 안식 없음, 뿌리 뽑힘, 불안, 우울…. 이것이 우리 삶의 기본 정조입니다. 극복하려고 애써보지만 불안과 우울은 헤라클레스가 입었던 옷처럼 벗어던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열두 가지 시련을 모두 극복한 헤라클레스가 포로로 잡혀온 이올레 공주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그의 아내는 괴물인 네소스(nessos)의 피에 담갔던 옷을 보냅니다. 헤라클레스는 그 옷을 입고는 고통에 못 이겨 죽고 맙니다. 벗어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우리도 이런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새롭게 열리는 세상 예수님은 그 낡은 옷을 벗는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니,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그 옷을 벗겨주셨습니다. 낡은 옷을 벗은 이들의 홀가분함은 축제로 이어집니다. 축제는 사람들 사이를 가르는 장벽이 철폐될 때 시작됩니다. 대만의 신학자인 C. S. Song은 예수님의 삶을 '경계선 가로지르기'(crossing the border)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거룩함과 속됨의 경계는 주님 안에서 무너졌습니다. 경계선이 무너진 자리에 밥상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밥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식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한솥밥'이라는 신영복 선생의 글씨를 기억할 것입니다. '한솥밥'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 속에는 알 수 없는 그리움과 친밀감이 떠오릅니다. 밥을 매개로 한 기억처럼 원초적인 게 또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와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너'를 내 삶 속에 받아들이고, '너'와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게 되고, 나의 몫으로 여퉈두었던 것을 '너'를 위해 내놓고, '너'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기꺼이 안락한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다는 것. 그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우리 교회는 지난 주중에 신촌 세브란스 병원과 <선한 사마리아인 SOS 프로젝트> 협정을 맺었습니다. 응급실에 실려 오는 환자들 가운데 도저히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는 이들, 가족들에게조차 외면당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치료비도 지원하고, 필요하다면 정신적 돌봄까지도 수행하려는 것입니다. 열두 교회가 그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나그네,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일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과 더불어 열리고 있는 새로운 세상에 들떠 있었습니다. 금방 세상이 바뀔 거라는 착각에 빠졌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확산시키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마음이 바빴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만약 요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다면 같은 일이 벌어질까요? 어쩌면 사람들이 몰려와 사인을 해달라고 하거나, 인증 사진을 함께 찍자고 부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은 함께 오지 못할 겁니다. 학원에 가야 하니까요. 농담입니다만 해놓고 보니 씁쓸하네요. '쓰다듬다'의 사전적 의미는 '손으로 가볍게 쓸어 어루만지다'입니다. '마음을 달래어 가라앉히다'는 뜻도 있습니다. '쓰다듬음'이든 '어루만짐'이든 그것은 참 살가운 행동입니다. 쓰다듬음은 상대에게 나의 사랑을 전달하거나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의 등을 토닥여준다든지 어루만지는 행위는 얼마나 숭고합니까? 그것은 일종의 치유이고, 보살핌이고, 연대의 몸짓입니다. 부모들은 예수의 삶에 감동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이 자기 아이들을 쓰다듬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예수와의 접촉을 통해 아이들의 삶도 아름다워지기를 바랐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뜻밖의 장벽에 부딪혔습니다. 제자들이 그들을 가로막고 꾸짖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큰 일'을 하셔야 할 예수님에게 그런 사소하고 사적인 부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자들에게 아이들을 쓰다듬는 것은 시급한 일도 아니고 중요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보고 노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상황은 매우 당혹스러웠을 겁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예수님은 왜 화를 내실까?' • 어린이성 예수님은 정색을 하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린이'가 문자 그대로 어린이이든,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든, 예수님은 그들과의 접촉을 꺼리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보듬어 안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어린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어린이의 어떤 점이 그러하냐고 묻습니다. 몇 가지 단어가 떠오릅니다. 천진난만天眞爛漫, 경탄, 호기심…. 오늘 우리가 보는 현실 속의 아이들이 그러한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라는 기호를 꾸밈없이 순수하고 참된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아이들은 근엄하지 않습니다. 젠체하지 않습니다. 노동의 현장에서 사람들과 오랫동안 어울리며 살아온 선배 목사님을 보면 6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천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점잖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는 지켜야 할 자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늘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합니다. 우리는 지켜야 할 것이 많아 '어린이'를 잃어버린 채 삽니다. 그래서 삶이 무겁습니다. 지난 주중에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전시회의 제목은 <다른 길>이었습니다. 그가 10여 년 동안 평화가 무너진 분쟁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만난 풍경이나 멋진 순간이 사진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사진 속에 포착된 풍경도 감동적이었지만 시인의 감수성이 듬뿍 담긴 포토 에세이 역시 감동적이었습니다. 똑같은 풍경도 보는 눈길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천천히 사진을 보다가 한 작품에 오래 눈길이 갔습니다. 사진은 인도네시아 마두라 섬 마을 아이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브랜따 항구의 갯벌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갯벌에 넘어진 나무에 걸터앉아 있고, 그것을 어떻게든 움직여보려고 잡아끄는 아이들, 그러다가 미끄러졌는지 넘어진 아이들, 그리고 그 옆에는 수줍은 미소를 띤 채 동무들이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소녀들이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그 사진을 잊지 못하게 된 것은 사진 옆에 붙어있던 조각글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350년 동안이나 네덜란드와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식민 지배자들은 저항운동의 싹을 말리고자 초등학교부터 아예 운동장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시인은 그것을 '독립저항의 주체인 몸 자체에 전족을 해버린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잔인한 책략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제 가슴을 진하게 울렸던 것은 '몸 자체에 전족을 해버린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전족纏足이란 중국에서 자행되던 악습입니다. 중국인들은 어린 소녀들의 발가락을 안쪽으로 굽어지도록 단단하게 헝겊으로 감싸 묶고는 가죽신발을 신겨 발이 자라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니 성인이 되어서도 아장아장 걸어야 했고,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 살기보다는 남성에게 종속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몸 자체에 전족을 해버린다는 시인의 말이 제게 전율로 다가온 것은 우리의 현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 마음의 얼음이 녹고 보셨는지요? 요즘 신상품 하나가 날개 돋친 듯 팔린다고 합니다. 스터디 룸 박스입니다. 공중전화부스처럼 생긴 구조물인데, 한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공부하도록 고안된 것입니다. 그 구조물은 외부와 차단하고 공부에만 몰두하라는 지엄한 명령입니다. 어떤 엄마들은 아이들을 그곳에 들어가게 하고는 자물쇠로 잠그기도 한다 합니다. 일인용 감옥입니다. '몸 자체에 하는 전족'이란 말을 보는 순간 이것이 떠올랐습니다. 마음껏 뛰어놀고, 친구들과 더불어 악동 짓도 해야 할 아이들이 다 묶여 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주의력 결핍 장애, 틱 장애를 앓고 있다고 합니다. 협력할 줄 모르고, 외부의 자극에 폭력적으로 응대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런데 온 몸에 전족을 하는 것을 일부 의욕이 넘치는 부모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오늘 이 땅의 종교도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전족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고 크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잘 믿는다고 하는 이들 가운데 편협하고 독선적인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른 이들을 쉽게 정죄하고 판단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삶은 상식적이지도 못한 이들이 참 많습니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 했습니다. 니체는 종교를 '노예 도덕'을 가르치는 것으로 여겨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견해도 문제가 많지만 실제로 현실 종교 속에서 그런 요소가 없지 않습니다. 정신이 가장 웅숭깊고 유연하셨던 예수를 믿는다는 이들의 정신이 좁장하기 이를 데 없고, 또 경직되었다면 어디선가 잘못된 것임이 분명합니다. 천진함을 잃어버린 사람들, 어린이성을 잃어버린 이들이 교권을 잡고 거들먹거리기도 합니다. 제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제일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기록하면서도 일상 속에서 주님이 어떻게 사셨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밥은 어떻게 드셨는지, 쉬실 때는 무얼 하셨는지, 사람들과 만날 때 눈빛은 어떠하셨는지, 말씀을 나누실 때 음성은 어떠셨는지, 주무실 때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불경하게도 저는 이런 게 궁금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셨던 예수님은 분명 아이들을 사랑하는 분이었을 겁니다. 그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어쩌면 아이들의 놀이 속에 뛰어드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교리 속에 박제화된 예수님 말고, 이런 예수님과 만나고 싶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예수의 모습을 닮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입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사사건건 옳고 그름의 척도를 가지고 다른 이들의 마음에 지옥을 짓는 이들이 아니라, 만나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불의한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수 있습니다. 근엄하기만 한 종교는 구원의 능력을 잃기 십상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자유하게 합니다. 주어진 생의 현실이 아무리 힘겨워도 그 속에서도 축제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일이 몸에 배면 우리를 옥죄고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제 곧 우수 절기가 다가옵니다. 우리 마음속의 얼음이 녹고, 새로운 삶의 기운 속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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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4년 02월 16일 11시 57분 53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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