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우주의 윤리적 포물선 -말3:13-18

by 【고동엽】 2022. 7. 5.

우주의 윤리적 포물선
말3:13-18
(2014/1/26)

["너희가 불손한 말로 나를 거역하였다. 나, 주가 말한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였기에, 주님을 거역하였다고 하십니까?' 하고 너희는 묻는다.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의 명령을 지키고, 만군의 주 앞에서 그의 명령을 지키며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 이제 보니, 교만한 자가 오히려 복이 있고, 악한 일을 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재앙을 면한다!' 하는구나." 그 때에 주님께서는, 주님을 경외한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똑똑히 들으셨다. 그 가운데서도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사람들을 당신 앞에 있는 비망록에 기록하셨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내가 지정한 날에, 사람이 효도하는 자식을 아끼듯이, 내가 그들을 아끼겠다. 그 때에야 너희가 다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비로소 분별할 것이다."]

• 낙담과 냉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참 어수선한 세월입니다. 우리들의 금융정보가 새나가고, 그것이 악용될지 몰라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AI(조류 인플루엔자)가 퍼져 농가의 공포가 커지고 있습니다. 열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를 바라보며 저 곳 어딘가에 있을 마음의 고향을 그리워하던 것도 옛말입니다. 낙조를 배경으로 군무를 추는 가창오리를 반가워하던 것도 그렇습니다. 마치 묵시록의 풍경을 보는 것처럼 수없는 가금류들이 살(殺) 처분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말라기를 본문으로 선택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것 어떤 급박함 때문에 말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말라기서는 제1성서(구약)의 마지막 책입니다. 말라기(Malachi)는 '나의 사자' 혹은 '특사'라는 뜻입니다. 말라기서가 교회에서 인용되는 것은 대개 십일조를 강조할 때입니다.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여라. 이렇게 바치는 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서, 너희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3장 10절에 나오는 이 대목 말고는 사람들이 말라기서에 별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라기는 오늘 우리 시대를 비춰주는 거울 역할을 합니다.

말라기는 스가랴와 학개 예언자를 뒤이어 주전 460년경에 활동한 분입니다. 그때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귀환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박차를 가하던 시기입니다. 귀환 초기의 설렘과 기대는 어느새 잦아들고, 일상 속에서 감당해야 할 몫이 많아져 저마다 비틀거리던 때였습니다. 언제나 비전은 아름답지만 그 비전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고단한 법입니다. 근래 나타났던 여러 나라의 변혁 운동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시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광장에서 피워 올렸던 혁명의 열기는 피로와 일상의 권태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힘을 내자며 서로를 독려하기도 하고, 좋은 날이 꼭 올 거라고 용기를 북돋던 이들도 장벽 같은 현실 앞에서 지치게 마련입니다. 귀환한 공동체도 그러했습니다.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낙담과 냉소의 분위기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무너졌습니다. 말라기는 그 시대를 분위기를 이렇게 전해줍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하시면 사람들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1:2) 하고 대꾸합니다. 제사장들을 향해 "너희가 바로 내 이름을 멸시하는 자들이다" 하면 그들은 "우리가 언제 주님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1:6) 하고 대듭니다. 제단에 더러운 빵을 바쳤다고 꾸짖으면 "우리가 언제 제단을 더럽혔습니까?"(1:7) 하고 되묻습니다. "너희는 말로 나 주를 괴롭혔다" 하시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괴롭게 해 드렸습니까?"(2:17) 하고 벋댑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철저히 무너진 겁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서라도 누가 성전 문을 닫아 걸어서, 너희들이 내 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 나는 너희들이 싫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도 이제 나는 받지 않겠다"(1:10)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차라리 성전 문을 닫아걸었으면 좋겠다는 그 말씀이 제게는 범상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고도 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 저어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지자 현실은 더욱 암담하게 보입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이렇게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도 모두 좋게 보신다. 주님께서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더 사랑하신다." "공의롭게 재판하시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2:17) 하나님의 공의가 작동되지 않는 현실, 악한 자들이 더 큰소리치며 사는 세상에서 낙심한 사람들을 누가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 타락한 종교
이런 사회 분위기가 조성된 가장 큰 책임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말라기서는 유난히 제사장들의 죄에 대해 신랄합니다. 종교란 '으뜸 되는 가르침'을 뜻합니다. 종교는 삶의 방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이유 혹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를 가르칩니다. 종교의 어원인 're-ligare'는 '다시 묶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우리를 영원 혹은 하나님의 마음에 비끌어매는 역할을 합니다. 사회적 차원에서 보자면 저마다 제 좋을 대로 살던 이들을 연결해 공동체를 이루도록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속감을 제공해줍니다. 그것은 새로운 고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근본이 흔들리면 삶은 속절없이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냉소주의와 낙담의 분위기가 가득 찬 세상의 책임은 어느 정도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말라기가 말하는 타락한 종교인들의 특색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여 듣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2:2).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음으로 삼아 삶을 조율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기보다는 자기의 생각과 욕망에 집착합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과 맺은 언약은 '생명과 평화가 약속된 언약'입니다. 참된 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기에 그 말씀을 왜곡할 수 없습니다. 충성스런 일꾼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늘 참된 법을 가르치고 그릇된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 나에게 늘 정직하였다. 그는 또한 많은 사람들을 도와서, 악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였다."(2:6)

하지만 거짓 종교인들은 스스로 바른 길에서 떠나고,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고, 언약을 어김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합니다. 이것은 말라기 시대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우리 시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대중 동원력을 가진 이들, 권력의 단맛에 취한 이들은 더 이상 좁은 길로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상징으로만 존재할 뿐, 그것을 삶의 방식으로 혹은 자기 운명으로 삼으려 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당연합니다. 어리석어 보이는 복음의 본질을 꼭 붙들지 않는 한 교회는 쇠퇴할 것입니다.

근래 가톨릭의 변화에 주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등장한 후에 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가 내놓은 <복음의 기쁨>이라는 교서는 비종교인들까지도 찾아 읽는 문헌이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해방에 하나님의 도구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또 다른 '히브리'로 구별될 수 있는 고통받는 이들과 무관한 신앙은 이미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새삼스러울 게 없는 말씀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짐짓 신앙의 본질을 외면해왔을 뿐입니다. 로마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이후 교회는 권력과 밀월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종교적 권력과 세속적 권력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힘이 커질수록 복음의 정수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말라기는 자기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제사장들의 타락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보다는 기득권자들을 기쁘게 하는 일에 골몰했습니다. 말씀을 왜곡하거나 축소시켰습니다.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보다는 그들의 욕망을 추인해주는 역할에 만족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다양한 사회적 경계선을 뛰어넘어 일치와 연대의 기쁨을 누리도록 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사람들을 갈라놓고 있었습니다. 말라기 시대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 하나님의 시간은 온다
하나님은 불의한 세상에 당신의 특사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날의 급박함을 마치 도끼가 나뭇뿌리에 놓인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마3:10). 그 날은 또한 추수 때 농부가 그러하듯이 알곡은 거두어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는 날입니다. 말라기는 그런 심판의 날을 드러내기 위해 훨씬 더 강력한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사가 오면 "그는 금과 은을 연단하는 불과 같을 것이며, 표백하는 잿물과 같을 것"(3:2)이라는 것입니다. 특사는 불순물은 걸러내고, 더러운 것은 깨끗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문제는 언제나 그 시간이 지연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더 사랑하신다고 투덜거리고, 하나님의 공의가 대체 어디 있냐고 불퉁거립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진득하게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함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우주의 윤리적 포물선은 길지만, 그 방향은 정의 쪽으로 굽어 있다"고 말했습니다.(게리 하우겐, <정의를 위한 용기>, p. 60에서 재인용) 이제야 오늘의 이상한 설교 제목이 여기서 왔다는 사실을 아시겠지요?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일을 한 눈에 가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온 우주가 정의 쪽으로 굽어 있다고 믿었기에 용기있게 불의에 맞설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길이고, 부활의 믿음일 겁니다.

말라기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 즉 '점치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으로 증언하는 자와, 일꾼의 품삯을 떼어먹는 자와,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3:5)의 잘못에 대한 엄중한 추궁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점치는 것과 간음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철회하고, 거짓 신들 앞에 무릎을 꿇은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 증언에 대해서도 엄중하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거짓 증언은 한 사회의 신뢰의 토대를 허무는 일일뿐만 아니라, 거짓 증언의 피해자가 대개 사회적 약자들이기에 하나님이 특히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일꾼의 품삯을 떼먹는 일, 의지할 데 없이 외롭고 힘겨운 이들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입니다.

• 하나님이 아끼시는 사람들
반면 그들을 돌보고, 그들 편에 서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이들입니다.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압박받는 자들을 도우려는 이들이 없는 것을 보시고 기가 막혀 하셨다(사59:16, 공동번역 참조)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말라기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당신 앞에 있는 비망록에 기록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더 나아가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 한 마디 들을 수 있다면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헛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진 한비야는 그의 책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에서 마지막 날 하나님께 듣고 싶은 말 한 마디가 있다고 했습니다. '애썼다'. 삶이 아무리 곤고했어도,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수밖에 없었다 해도 '애썼다'는 말 한 마디면 족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라기가 전하듯이 너는 '나의 특별한 소유'라는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은 "사람이 효도하는 자식을 아끼듯이, 내가 그들을 아끼겠다"(3:17)고 확언하십니다. 누군가가 나를 아낀다는 사실만 알아도 삶은 살만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낌을 받는 사람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한번이라도 하나님의 아끼심을 경험한 사람들의 가슴에는 거룩함의 씨가 발아하게 마련입니다.

반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들의 운명은 가혹합니다. "모든 교만한 자와 악한 일을 하는 자가 지푸라기같이 타 버릴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불이 그들을 살라서, 그 뿌리와 가지를 남김없이 태울 것이다."(4:1) 사람들은 자기가 뿌린 것을 거두게 마련입니다. 지금 악인들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상해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노여움에 사로잡히지도 말고 불평하지도 마십시오. 그들을 시새우지도 마십시오. 악인은 뿌리째 뽑히거나 남김없이 태워질 날이 반드시 옵니다. 우주의 윤리적 포물선은 정의 쪽으로 굽어 있다고 했지요? 이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제가 현실이 답답해서 무력감을 느낄 때면 마치 습관처럼 떠올리는 시편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시37:23-24). 이 시구를 읊조리다 보면 어느새 새 힘이 솟아오릅니다. 가끔은 비틀거려도 괜찮습니다. 주님이 그 손을 잡아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꼭 붙드는 것입니다(4:4). 그러기 위해서는 늘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서 수직의 중심을 잡아줄 때, 여전히 어둠이 득세하고 있는 것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정의와 생명의 길, 사랑과 평화의 길을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이김입니다. 압박받는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이 없고, 중재자가 없음을 보시고 주님은 기가 막혀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삼아 새 하늘과 새 땅을 열려 하십니다. 이 거룩한 소명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4년 01월 26일 12시 01분 28초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