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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는가? -마16:1-4

by 【고동엽】 2022. 7. 5.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는가?
마16:1-4
(2014/1/19)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을 자기들에게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녁 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요나의 표징 밖에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나가셨다.]

• 용산 참사 5주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는 오늘, 1월 19일은 어떤 이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벌써 5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용산참사 희생자 유족들의 아픔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어쩌면 그 아픔은 해가 갈수록 더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흉포한 진압을 지시했던 당시 서울 경찰청장 김석기 씨는 지금 공항공사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유가족들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분들의 품이 되어주시기를 빕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서 본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님의 인터뷰 기사가 떠오릅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흥국탄광을 운영하면서 어려움에 처한 많은 이들을 도왔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탄광을 처분하여 광원들에게 다 나눠주고 재야로 물러났습니다. 인터뷰 요청이 많았지만 쭉 응하지 않다가 처음으로 언론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인터뷰어가 왜 그렇게 인터뷰를 마다하셨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탄광을 한 사람인데…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죽었다. 난 칭찬받는 일이나 이름나는 일에 끼면 안 된다." 도움 받은 사람들이 있는 데 왜 도운 사실을 숨기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난 도운 적 없다. 도움이란, 남의 일을 할 때 쓰는 말이지. 난 내 몫의, 내 일을 한 거다. 누가 내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지는 몰라도 나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일이다." 그는 그것을 자기가 썩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참 단호한 자기 응시입니다. 모처럼 염치 있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아 설렜습니다.(한겨레신문, 2014/1/4일, 이진순의 인터뷰)

참과 거짓, 빛과 어둠이 마구 뒤섞이고 있는 세상입니다.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고, 사탄의 일꾼들도 의의 일꾼으로 가장합니다(고후11:14-15). 그렇기에 성도는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악한 영에게 미혹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면서 "정의와 불의가 어떻게 짝하며,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떻게 화합"하겠느냐(고후6:14-15)고 묻습니다. 사람들이 미혹을 당하는 까닭은 무지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단맛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기에 우리는 사탄의 올무에 걸려들곤 합니다.

• 가면 쓴 믿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종결부에 해당합니다. 병자들을 고치고, 전통주의자들과 맞서고, 굶주린 무리를 먹이신 주님은 이제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떠나십니다. 그것은 영광이 길이 아니라 고난이 예기되는 길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때서야 당신이 누구신지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려고 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베드로의 명시적인 신앙고백이 나오기 전 주님이 누구신지를 독자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 위한 장치입니다. 이 본문 뒤에 베드로의 고백이 나오고,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가 나오고, 예수님의 변모 사건에 대한 보도가 이어집니다.

어느 날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함께 주님께 왔습니다. 무심히 보아 넘길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 두 집단이 서로에 대한 호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쑤 대립하기도 하는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새로운 경건운동의 중심을 자처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전통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은 견원지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손을 잡았습니다. 공공의 적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자기들이 의지하고 있던 유대교 세계를 기초부터 뒤흔드는 위험인물이었습니다. 마태는 그들이 예수께 나온 것은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 동기가 순수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함정 속으로 유인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실 때도 표징을 요구하는 사탄의 요구를 물리치셨습니다. 표징을 보인다고 하여 그가 곧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고 믿을 이유는 없습니다. 신명기서는 표징을 보여주는 예언자나 점치는 자들은 백성을 미혹하는 자들(신13:5)이라고 단호히 말합니다.

표징을 보여주면서 자기 말을 따르게 하려는 이들은 위험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능력을 자신들에게만 귀속시키면서 다른 이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려 합니다. 지배는 곧장 욕망 채우기와 연결됩니다. 표징을 보이면서 순진한 사람들에게 재산이나 몸을 요구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인들의 표징 요구는 정말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알고 싶다는 절실함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사람들에게 표징을 보이면서 자신을 입증하려 하는 사이비 종교인, 다시 말해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가 계신 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았습니다. 병든 사람들이 나음을 입고, 귀신이 쫓겨나고, 사람들이 친교의 식탁에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그것 말고 다른 표징이 더 필요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보려는 마음이지 표징이 아닙니다.

• 악하고 음란한 세대
진실은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때때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눈이 있다고 하여 다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귀가 있다 하여 다 듣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볼 마음이 있다면 눈이 없어도 볼 수 있고 귀가 없어도 들을 수 있습니다. 독일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열네 살 연상인 루 살로메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이런 사랑의 시를 썼습니다. 조금만 읽어보겠습니다.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난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보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떴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현존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둔감합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는 못합니다(사6:9). 우리 일상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께서 말을 건네 오시는 시간입니다. 세미한 중에 들려오는 그 말씀을 듣기에는 세상이 너무 소란스럽습니다. 우리 정신은 다른 데 팔려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둔감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이들이 좀 더 자극적이고 특별한 것을 찾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일상이 기적인 줄 모르는 사람들일수록 이단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표징을 보여 달라는 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너희는 하늘을 보면서 일기는 분별할 줄 알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인 줄은 알지 못하고 있구나.' 제법 똑똑한 척하고, 모르는 게 없는 척하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을 일러 윤똑똑이라고 합니다. 자기 시대의 징조를 읽고, 하늘의 뜻을 알아차려 사람들에게 고지하는 이를 일러 예언자라 합니다. 어떤 이는 예언자를 '하늘의 눈으로 자기 시대를 주석하는 이'라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봅니까? 남의 눈을 빌어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익이라는 렌즈를 끼고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하다는 것은 도덕적인 측면을 일컫는 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그 뜻을 거역하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대개 자신의 경험이나 알량한 지식을 의지하고, 우리의 뒤를 봐줄 수 있는 힘 있는 이들을 의지할 때가 많습니다. 쉽게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 역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악입니다.

음란하다는 것은 성적 타락을 말한다기보다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성스럽지 못한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주로 모셨으면, 어떤 일이 내게 손해처럼 보여도 주님의 뜻에 '아멘'하는 것이 믿음이고 신실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실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이들,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이들일수록 자꾸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물질의 복을 내려달라 하고, 진급하게 해달라고 하고, 합격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보여주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거래가 아닙니다. 신앙은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모험입니다. 자기를 비운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 요나의 표징
표징을 거절하신 주님은 뜻밖에도 한 가지 표징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징'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요나의 표징을 대개 주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보낸 요나의 사흘과 부활하시기까지 무덤에 계시던 주님의 사흘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요나가 그 죽음의 지대에서 벗어났던 것처럼 주님도 죽음의 세계를 뚫고 나오셨습니다. 본문의 맥락에서 보더라도 이런 해석은 그르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뿐일까요?

저는 요나의 표징이라는 말 속에 중첩된 다른 의미에도 주목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달아나던 요나는 물고기에게 삼켜집니다. 바다에 던져진 데다가 물고기 뱃속에까지 들어갔으니 그는 막장까지 도달한 셈입니다. "나는 땅 속 멧부리까지 내려갔습니다. 땅이 빗장을 질러 나를 영영 가두어 놓으려 했습니다만,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 그 구덩이 속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셨습니다."(욘2:6) 물고기 뱃속을 벗어난 요나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물고기 뱃속 이전과 이후의 요나는 다른 사람입니다.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요나의 표징이라는 말은 '삶의 변화'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양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기만 하던 피노키오도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 새 사람이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만난 이들은 다 변화되었습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만 집중하던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무기력하게 깔리곤 하던 이들이 일어나 역사를 새롭게 하는 능동적 주체가 되었습니다. 시몬이 베드로로 변했습니다. 무리가 제자가 되고, 제자가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조각난 세상에 사는 동안 깨진 사금파리처럼 날카롭던 그들의 마음이 원만해지고, 이웃들을 돌보는 빛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물론 주님이 세상에 계신 동안에는 그들의 믿음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시고 떠나신 후, 성령의 능력이 그들을 사로잡은 후 그들은 세상에 던져진 불꽃으로 살았습니다. 그런 것이 요나의 표징이 아닐까요? 물론 이것은 하나의 해석일 따름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요나의 표징입니까? 주변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로 인해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까? 우리의 마음 씀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까? 악하고 음란한 이 세대는 끊임없이 약자들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장막이 되어 그들을 보호해주기를 원하십니다. 이웃에게 다가서는 일이야말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을 남겨 두고 떠나가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선택 앞에 서 있습니다. 아니, 선택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고통 받는 이들에게 등을 돌리고 살 것인지, 그들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 잊지 마십시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추는 이들이야말로 하늘의 전령임을. 주께서 함께 하셔서 우리 모두가 참 사랑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4년 01월 19일 11시 56분 1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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