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닥 사랑 엡1:15-23 (2014/1/5, 신년) [그러므로 나도, 주 예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듣고서, 여러분을 두고 끊임없이 감사를 드리고 있으며, 내 기도 중에 여러분을 기억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발휘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 우리의 목표 새해 첫 주일 아침,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넘치시기를 빕니다. 요즘 제 입에 뱅뱅 도는 노래가 있습니다. "새 시대는 새 사명을 우리에게 주나니 진리 따라 사는 자는 전진하리 언제나"(찬송가586장 3절 중). 새해는 새로운 삶을 향해 길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부탁이자 명령입니다. 금년 첫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저는 우리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꿈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청파교회의 표어는 아주 오래 전부터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앙이 우리가 언제든 갈아입을 수 있는 겉옷이 아니라면, 우리를 근사하게 치장하기 위한 가면이 아니라면,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존재라면, 우리는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 늘 그리스도인다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편지 혹은 생명의 향기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일상의 자리에서 기독교인답게 산다면 세상이 지금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가끔 길거리나 버스 혹은 지하철에서, 음식점에서 서로를 ‘집사님’ 혹은 ‘권사님’으로 호칭하는 이들을 보며 낯을 찌푸릴 때가 있습니다. 마치 그 공간에 자기들만 있는 것처럼 처신하는 이들을 보면 속상합니다. 믿음은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상식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신자이기 이전에 좋은 시민이어야 하고 좋은 이웃이어야 합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신앙은 자기 만족거리일 뿐입니다. 옛 선비들은 신독愼獨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홀로 있을 때도 스스로 삼간다는 말입니다. 저는 목사이지만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는 <임제록>의 한 구절을 수첩에 적어놓고 지낸 적이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제 안의 중심을 잃지 말고, 선 자리가 어디이든 늘 진실하라는 말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뜻이 바로 이겁니다. 오래 전부터 저는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사는 이들의 삶이 어떻게 표현되어야 할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묵상을 통해 생명과 평화야말로 우리가 삶으로 구현해야 할 신앙적 목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첫 사람을 축복하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생명을 지키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런데 죄가 세상에 유입된 후 죽임의 문화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할 마땅한 관계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불화 세상, 불통 세상이 시작된 겁니다. 샬롬이 사라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기본적 정서는 불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믿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생명’과 ‘평화’의 세상을 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매년 교회가 지향해야 할 그해의 목표를 정할 때마다 많이 고심했습니다. 몇 해 동안은 ‘세상의 선물로 사는 우리’를 목표로 했었고, 지난해까지는 ‘생명의 바람, 평화의 물결 되어’를 우리 목표로 정했었습니다. 그 목표를 조금은 이루었지만 그것은 다만 부끄러운 정도의 성취일 뿐입니다. 올해는 교회의 목표를 새롭게 정했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삼으소서’. 이전까지는 행위의 주체인 우리의 의지가 강조되었다면, 올해는 주님이 주체가 되시어 우리를 이끌어 달라고 청하고 싶습니다. 해가 갈수록 저는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런 우리 목표의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 교회의 형성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난 후 철저히 변화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박해하는 자’로 살던 그가 기꺼이 ‘박해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바울의 회심 이야기마다 등장하는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는 말은 일종의 각체험覺體驗을 구상적으로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이전에 실상이라 여겼던 삶이 허상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육체의 욕망, 눈의 욕망,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요일2:16)이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눈에서 비늘이 벗겨져 나가자 그는 자유로워졌습니다. 고난도 죽음도 그의 내면에 깃든 자유를 뒤흔들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대신 그 복음에 매인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지중해 세계의 많은 도시를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에베소도 그중의 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많은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복음은 옛 세계를 흔드는 태풍이었습니다.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 지배자와 피지배자, 부자와 가난한 이들로 갈린 세상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질서의 세상이 혼돈으로 바뀌는 것 같았습니다. 남과의 구별됨 혹은 차이를 통해 권력을 누렸던 이들에게 복음은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위험한 사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회적 차별이 무의미해집니다. 골로새서는 그것을 인상깊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도,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않은 자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골3:11) 초대교회의 최대 매력은 이런 경계의 철폐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 곳에서 사람들은 깊은 일치를 체험했습니다. 너와 내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감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 시련과 위험을 함께 겪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경쟁이나 지배가 아니라 우정에 근거한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감격적으로 인식했습니다. 사람들 위에 거들먹거리며 군림하던 이들에게 그런 세계는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아니, 그런 세계는 와서는 안 될 세계입니다.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간 바울은 관헌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던 아니니아는 변호사 더둘로를 앞세워 총독에게 바울을 심문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본 바로는,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우두머리입니다."(행24:5)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힌 사람은 불편부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불의한 세상을 폭로하고, 그 세계에서 짓눌렸던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들의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깨우는 이들입니다. 세상은 그런 길을 걷는 이들에게 십자가를 안겨줍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디딤돌입니다. 바울은 어려움 속에서도 ‘주 예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성도를 향한 사랑’을 확대해나가는 에베소 교인들을 기억하며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부르심의 소망이 얼마나 크고 풍성한지 그리고 성도들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신앙이란 이처럼 눈 떠감의 과정입니다. • 복음의 능력 성도들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의 삶을 통해 오롯이 드러났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절망의 심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서 사람들은 ‘함께 함’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를 통해 시작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였고, 맛보았고, 기꺼이 새로운 삶을 택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집을 열어 낯선 이들을 맞아들이고, 자기 곳간을 열어 배고픈 이들을 먹였습니다.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이들을 친교의 식탁으로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일으킨 변화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처럼 사건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에서 가장 힘차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 보좌에 앉히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상처 입은 어린양’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선언합니다. 누군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바치는 사랑이야말로 세계의 축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때 우리는 자기애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이웃들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이들의 모임인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강력합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몸을 빌어 이 세상을 ‘보시기에 참 좋았다’ 하셨던 그런 세상으로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믿는다는 것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삶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몸이 불편한 이를 위해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주는 일을 해보셨습니까? 그보다 더 좋은 경험이 또 있을까요? 하나님은 지금 당신의 몸이 되어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저는 우리 교회 교우들을 보며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뜻있는 삶을 위해 안락한 삶의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들이 참 많습니다. 공동체 정신이 사라진 도시에서 마을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이들도 있고, 학교 밖으로 내몰린 청소년들을 사랑으로 품기 위해 진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귀농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가는 이들도 있고, 협동조합을 만들어 시민들이 연대하고 협력하는 공생의 삶을 모색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생업을 제쳐놓고 적정기술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일에 헌신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쪽방촌 사람들을 돕는 일, 노숙인들의 자활을 지원하기 위한 협동조합 형성에도 우리 교회가 동참할 수 있어 참 기쁩니다. • 아래로 흘러가라 바울 사도는 참된 예배란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롬12:1)이라고 말했습니다. 개문류하開門流下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을 열고 아래로 흘러가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성육신의 신비이고, 신앙생활을 알차게 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머리와 마음으로만 믿지 말고 이제는 몸으로 우리 신앙을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박노해 시인은 사랑은 발바닥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발바닥이다 머리는 너무 빨리 돌아가고 생각은 너무 쉽게 뒤바뀌고 마음은 날씨보다 변덕스럽다 사람은 자신의 발이 그리로 가면 머리도 가슴도 함께 따라가지 않을 수 없으니 발바닥이 가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 발바닥이 이어주는 대로 만나게 되고 그 인연에 따라 삶 또한 달라지리니 현장에 딛고 선 나의 발바닥 대지와 입맞춤하는 나의 발바닥 내 두 발에 찍힌 사랑의 입맞춤 그 영혼의 낙인이 바로 나이니 그리하여 우리 최후의 날 하늘은 단 한 가지만을 요구하리니 어디 너의 발바닥 사랑을 좀 보자꾸나" --박노해, <발바닥 사랑> 전문 우리가 머리로 하는 사랑을 넘어 가슴으로 하는 사랑에 이르고, 또 그 사랑을 넘어 발바닥으로 하는 사랑에 당도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이 드러날 것입니다. 새해 첫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저는 죽음의 세력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교회 안에서 역동적으로 일렁이는 모습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 꿈이 몽상이 아닌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굳은 결의가 필요합니다. 교우 여러분, 올 한해 내내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드리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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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4년 01월 05일 11시 54분 49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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