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될까? 요일2:28-3:6 (2013/12/22) [그러므로 자녀된 이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그렇게 해야 그가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가 오실 때에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의로운 분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에게서 났음을 알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그때에 우리가 그를 참 모습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이런 소망을 둔 사람은 누구나, 그가 깨끗하신 것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마다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그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알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 그리스도 안에 머물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저는 요즘 어느 선배 목사님이 주신 명함 크기의 카드 한 장과 사귀고 있습니다. 그 카드의 한쪽 면에는 이집트 시내산 아래에 있는 성 캐터린 수도원(St. Catherine Monastery)에 소장된 이콘 이 새겨져 있습니다. 중세 초기에 그려진 그리스도상입니다. 장발의 예수님은 고요하게 입을 다물고 계십니다. 양쪽 눈은 비대칭적입니다. 크게 뜬 오른쪽 눈은 정면으로 우리를 응시하고 계십니다. 마치 나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 눈은 영혼의 나태함 속에 빠져 있는 저를 엄하게 꾸짖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왼쪽 눈은 아래를 향하고 있는데,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슬픔이 느껴집니다. 그 눈은 마치 나는 너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유약함을 다 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성화상과 매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카드의 뒷면에는 동방교회가 가르친 ‘예수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제인인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The Son of God, Lord Jesus Christ, have mercy on me the sinner."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마음을 집중하고 이 기도를 반복해서 드리다보면 어느새 호흡이 가지런해지고, 무겁던 마음이 가벼워지고,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번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주님 안에서 그런 따뜻함과 가벼움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형제자매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은 바울 신학의 핵심어인데 같은 표현을 요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요한복음 15장이 그것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15:4) 이르시고는 그것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설명하셨습니다. 가지와 포도나무는 둘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무에서 분리되는 순간부터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하는 까닭은 그들이 그리스도인다운 생의 열매를 맺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라고 바꾸어도 별 문제가 없을 겁다. 예수님의 세상 사역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모든 사람의 품이 되어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품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냉혹한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 고통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던 사람들은 그 품에 안겨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허물과 부족함이 드러나도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이의 허물을 보면 등을 돌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족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카를로 마르티니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는 참 부족하구나. 그러니 너에게는 내가 꼭 필요하고 나는 너를 특별히 사랑한단다."(카를로 마르티니·게오르크 슈포르실, <<예루살렘 밤의 대화>>, 분도출판사, 35쪽)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은 이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무는 이들은 주님이 오실 때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 백척간두진일보 요한은 하나님께서 의로운 분이심을 아는 이들은 의를 행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진술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의’와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일차적으로는 죄인인 우리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하지만, 그것은 또한 사회적 차원의 ‘정의’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불의한 세상을 미워하시는 분입니다.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비인간화시키는 일체의 세력에 맞서시는 분이십니다. 힘을 숭상하는 이들, 자신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 이들은 하나님의 지배를 거부하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마5:6),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5: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의 길을 걷다가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요한은 의를 행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평화로운 세상, 인권이 존중되는 세상을 열기 위해 고난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면 전율을 느낍니다. 그들도 소박한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꿈을 유보하고 고통 받는 이들 곁으로 달려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제가 무엇보다 마음 아파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너무 사적인 차원으로 축소되어 소비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려는 이들은 영혼의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그 근육은 나의 일을 함께 하자는 주님의 초대에 응할 때 생기기 시작합니다. 근육이 커지면 타인의 고통을 예민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들을 돕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영혼의 근육이 커지면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불의와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신앙은 모험입니다. 위험을 감수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신앙은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입니다. 아스라한 허공에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넘실거리는 요단강물 위로 발을 내딛는 제사장들의 마음, ‘오라’는 주님의 초대를 받고는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로 발을 내딛는 베드로의 마음, 깊이 잠든 제자들을 깨우며 ‘일어나 가자’고 말씀하시고는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던 예수님의 마음, 바로 거기에 믿음이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믿음의 벗들과 함께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려는 이들은 모두 안전한 땅에 머물 수 없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의를 행하는 자라야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입니다. •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의를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녀됨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행적 사랑 덕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일컬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3장 1절을 읽어나가다가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이라는 대목에서 문득 눈을 거두었습니다. "~때문입니다"로 종결되는 이 문장을 스스로 완성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 ) 때문입니다." 괄호 속에 들어갈 말이 무엇일까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이냐는 물음입니다. 여러 가지 대답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빛과 소금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 ‘이기적이기’ 때문, ‘비겁하기’ 때문, ‘세속적이기’ 때문, ‘섬김, 나눔, 돌봄을 외면하기’ 때문…. 마음이 착잡합니다. 본문 말씀은 시련을 견디며 살고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제게 이 성경이 그렇게 읽혀지지 않는 까닭은 오늘의 우리 신앙이 변질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참 슬픕니다. 본과 말이 뒤집혀 있습니다. 본은 뿌리이고 말은 열매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열매에만 집착합니다. 뿌리가 썩고 있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작아도 예수 정신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교회가 참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커지면 예수님은 침묵을 강요당하기 일쑤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은 재림하신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오시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우리끼리 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지만 예수를 맞아들일 생각이 없는 교회, 그것은 신의 무덤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인정해주셨지만, 우리는 삶으로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름과 실제가 분열되지는 않았습니까? 기독교인은 기독교인다워야 합니다. 기독교인답다는 말은 십자가의 길을 자신의 길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죽지 않으려 하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만들었습니다. 부적처럼 말입니다. 성탄절기를 앞두고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만, 성탄절기야말로 십자가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절기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가치관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고, 행복의 신기루를 보여주며 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이끄는 세상은 극복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그런 세상을 향해 경종을 울려야 합니다. 비루한 욕망에 굴복하지 않는 영혼이 있다는 사실,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쉽지 않기에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삶을 살려 할 때, 주님은 친히 우리의 지팡이가 되어 주십니다. • 중력과 은총 요한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를 참모습대로 뵙게 될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참모습대로 뵙게 될 것이라는 말은 비교적 쉽습니다. 바울 사도도 지금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인 것이 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듯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는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이라고도 말했습니다(고전13:9-10, 12). 세상의 모든 것은 불확실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안을 느끼기도 하고,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앞을 비추는 빛을 따라 더듬더듬 진리의 길을 걸어갑니다. 마치 물기를 찾아 어두운 흙속을 더듬는 뿌리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 우리가 겪었던 모든 일의 의미가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품 안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이해를 뛰어넘는 신앙입니다. 신앙은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복잡한 신학적 논의를 생략한 채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그저 그분과 깊은 일치를 이룬다는 뜻일 겁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로 당신 삶의 비밀을 드러내셨습니다. 상호내주相互內住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느끼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귀로 듣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그와 같이 되었다 하겠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크리스마스입니다. 갈 길이 멉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는 까닭은 죄의 인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의 인력은 중력처럼 ‘은근하지만 지속적으로’ 우리를 잡아당깁니다. 은근하기에 의식하기 어렵고, 지속적이기에 저항하기 어렵습니다. 죄는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 파악하게 만듭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죄의 중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꾸만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독일의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했던 유명한 말을 아시지요? 기독교인은 타자를 위한 존재입니다. 죄의 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 앞으로 자꾸 나아가야 합니다. 젊어서 굶어죽은 프랑스의 천재 사상가 시몬느 베이유의 책 <<중력과 은총>>을 자주 뒤적입니다. 중력은 우리를 자꾸 아래로 잡아당기는 힘입니다. 은총은 우리를 위로 이끄는 힘입니다. 죄와 습관이라는 중력에 이끌려 살 것인가, 아니면 은총에 이끌려 살 것인가 우리는 이 선택 앞에 서 있습니다. 믿는 이들은 십자가를 자기 삶의 방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삶의 방식으로 삼는다는 말은 세상에 영합하거나 동화되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오직 진리 앞에서만 무릎을 꿇는다는 말입니다. 사사건건 딴지거는 사람이 되라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롭게 처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늘 하나님의 뜻에 접속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말씀으로부터 내가 필요한 부분만 취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말씀이 주主가 되고 내가 종從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에 전율을 일으키고, 그 전율은 우리를 새로운 삶의 길로 인도합니다.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마음을 열어 그분을 영접하십시오. 주님과의 깊은 일치를 갈망하십시오. 지금부터 주님의 손과 발이 되기로 작정하십시오. 그런 삶이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 될 때 우리는 하늘이 주는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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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3년 12월 22일 12시 06분 54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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