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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면 보인다 -계22:12-17

by 【고동엽】 2022. 7. 5.
눈을 뜨면 보인다
계22:12-17
(2013/12/15, 대림절3주)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간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시작이며 끝이다. 생명 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차지하려고, 그리고 성문으로 해서 도성에 들어가려고, 자기 겉옷을 깨끗이 빠는 사람은 복이 있다. 개들과 마술쟁이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을 사랑하고 행하는 자는 다 바깥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나 예수는 나의 천사를 너희에게 보내어, 교회들에 주는 이 모든 증언을 전하게 하였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그의 자손이요, 빛나는 샛별이다." 성령과 신부가 "오십시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도 또한 "오십시오!" 하고 외치십시오. 목이 마른 사람도 오십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받으십시오.]

• 시간이 촉박하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동지를 향하여 나아가면서 밤이 점점 길어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놀람의 연속입니다. 공권력의 선거개입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그것을 방어하기 위한 이들의 음성 또한 높아지고 있습니다. 코레일의 민영화를 반대하는 이들의 파업과 그에 맞선 대량 직위해제로 세상이 온통 시끄럽습니다. 저 북녘에서는 정상적인 국가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사람이 한 순간에 반란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습니다. 불안한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젊은 독재자가 선택한 공포의 정치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부드러운 것은 생명에 가깝지만 굳은 것은 죽음에 가깝다지 않습니까? 한 대학생이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를 학교 게시판에 붙였고, 그에 대한 응답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치 갑작스런 재난을 만난 이들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를 호명하고 응답하는 것 같습니다.

세월이 수상한지라 거리를 걸을 때마다 저절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 자주 떠오르는 것이 시편 144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 아들들은 어릴 때부터 나무처럼 튼튼하게 자라고, 딸들은 궁전 모퉁이를 장식한 우아한 돌기둥처럼 잘 다듬어지고, 곳간에는 먹을거리가 가득하고, 살진 짐승들이 들판을 가득 채우는 세상.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가 자주 읊조리는 구절은 "우리의 거리에는 울부짖는 소리가 전혀 없을 것"(14b)이라는 대목입니다. 울부짖는 소리, 조롱하는 소리, 탓하는 소리, 서로를 악으로 규정하는 새된 소리가 아니라 축제의 함성이 들려오는 세상은 정녕 올 수 없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내가 곧 갈 것이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강력합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던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역사에 개입하셔서 무너진 질서를 회복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심판의 날은 기다리던 이들에게는 복된 날이고, 회피하던 이들에게는 두려움의 날입니다. 그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러운 채로 있어라. 의로운 사람은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채로 있어라."(22:11) 본문 직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추수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빛은 빛으로, 어둠은 어둠으로, 불의는 불의로, 의로움은 의로움으로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숨겨졌던 우리의 본 모습이 드러날 것입니다. 주님은 행위대로 갚아주기 위해 오고 계십니다.

오시는 주님은 자신을 "나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이며 끝"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말이지만 이 말씀은 심오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역사의 기원과 목표라고 말씀하십니다. 역사는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주님을 알파와 오메가로 믿는다는 말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빌1:6) 우리는 함정에 빠지기도 하고, 장애물을 만나 넘어지기도 하고, 지쳐 쓰러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기어코 우리를 완성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패배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패배하지 않으십니다. 희망의 뿌리는 우리의 지성이나 감정이나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 복 있는 사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성경은 누가 복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생명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차지하려고, 성문으로 해서 도성에 들어가려고, 자기 겉옷을 깨끗이 빠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계시록 7장 14절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린 양의 피에 자기의 겉옷을 빤다는 말은 그 피와 무관한 자가 되어 살지 않는다는 말일 겁니다. 폭력과 탐욕의 고리를 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시던 주님의 길을 자기 길로 삼았다는 말일 겁니다.

물론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모든 이들에게 값없이 베푸십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 누리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 선물은 투박하고 초라한 포장지에 싸인 채 주어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풍요로움과 편리함, 높아짐을 좋아하는 이들은 소박한 삶과 불편한 삶, 낮아짐과 비움을 가르치는 이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가 포장지를 바꾸었습니다. 잘 믿으면 세상 사람들이 소망하는 풍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포장지가 바뀌는 순간 내용물도 바뀌고 말았습니다. 내용물이 바뀌자 향기는 악취로 변했습니다. 모두가 그 악취에 코를 감싸 쥐고 있는 데 정작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비극입니다. 어느 교회가 화려하게 지어진 예배당을 봉헌하며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라는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거기에 ‘이응’ 하나를 더 보태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당 하셨습니다.’ 절묘한 패러디입니다. 종교가 본질을 잃어버리면 악취가 납니다.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다시 오실 주님은 "나는 다윗의 뿌리요, 그의 자손이요, 빛나는 샛별"이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뿌리’라는 단어와 ‘샛별’이라는 단어가 묘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뿌리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샛별은 새벽에 눈을 뜬 사람들에게 또렷하게 보입니다. ‘눈을 뜬 사람’이라 자처했던 발람은 광야를 유랑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며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당장 나타날 모습은 아니다. 나는 그 모습을 환히 본다. 그러나 가까이에 있는 모습은 아니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올 것이다. 한 통치 지팡이가 이스라엘에서 일어설 것이다. 그가 모압의 이마를 칠 것이다. 셋 자손의 영토를 칠 것이다."(민24:17)

야곱에게서 나올 한 별, 그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분입니다. 그가 곧 예수님을 뜻한다고 꼭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발람의 예언에 등장하는 그 별을 가슴에 품었고, 예수에게서 그 별을 보았습니다.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아기 예수 앞에 이르렀다는 것도 같은 뜻일 겁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요8:1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빛 안에서 걷는 사람들은 이미 생명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얻은 사람입니다. 성문으로 해서 도성에 들어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 들어가지 못할 사람들
그 생명나무나 도성은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누구나 그곳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그곳에 접근할 수 없는 이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개들, 마술쟁이들, 음행하는 자들, 살인자들, 우상 숭배자들, 거짓을 사랑하고 행하는 자들이 그들입니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안심할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저 예일 뿐입니다. 그런데 개들이 언급된 것이 재미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는 네 발로 기는 동물을 일컫는 게 아니라 개같은 자들을 지칭하는 말임을 우리는 압니다. 개를 사랑하는 이들은 좀 기분이 나쁠 겁니다. 우리교회에도 유기견들을 데려다가 돌보는 분이 계십니다. 유대인들에게 개는 불길한 짐승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니 개들은 집에서 쫓겨나 거리를 떠돌았습니다. 쓰레기를 뒤지고, 이곳저곳 어슬렁거리고, 먹이를 두고 사납게 싸우기도 했을 테니 개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을 게 뻔합니다. 개들은 그러니까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말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이웃을 위해 자기 욕망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 다른 이를 돕기 위해 희생이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일 겁니다. 그렇지 못한 이들, 그러니까 제 욕심만 차리는 사람들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술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술사들은 지나치게 긴장한 채 살아가는 우리의 지친 심신을 풀어주는 엔터테이너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남이 갖지 못한 재주를 가지고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그들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지배하는 이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러 도시에서 마술사들과 갈등을 빚곤 했습니다. 마술사들의 주술에서 사람들을 해방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해방하지만 마술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듭니다. 오늘도 많은 이들이 마술적 신앙에 사로잡힌 채 살아갑니다.

여행작가인 박진희 씨의 책 <<다시 아프리카>>(워커북스, 12월 말 간행 예정)에 나오는 에피소드가 생각납니다. 그는 한국인 선교사가 케냐에 세운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을 돌봤습니다. 어느 날 한국에서 단기 선교팀이 도착했고, 그 가운데는 마술을 할 줄 아는 이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신나할까 생각하며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소문을 듣고 먼 마을에 사는 아이들까지 몰려들어 성황을 이뤘습니다. 마술사는 모자에서 새를 꺼내기도 하고, 지팡이를 사라지게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그런 퍼포먼스를 보며 탄성을 지르는 것은 자기들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무표정하던 아이들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더니 급기야 공포에 질린 표정이 되었습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아이들은 자기들에게 익숙한 자연 질서를 깨뜨리는 일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를 일으킴으로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 그것이 고대 세계의 마술사들이 노리는 바였습니다. 그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음행하는 자들, 살인자들, 우상 숭배자들, 거짓을 사랑하고 행하는 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사람들입니다.

• 오십시오
17절은 성경의 난해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십시오’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지만 초대의 대상이 분명치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초대의 주체는 분명합니다. ‘성령과 신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부는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는 공동체를 이르는 말일 겁니다. 그들이 "오십시오" 하고 부르짖으면 그 소리를 듣는 이들도 "오십시오" 하고 외쳐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초대의 대상은 누구일까요? 후반부는 초대받는 이가 누구인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목이 마른 사람,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 허위단심으로 살아가지만 목마름만 더해가는 사람들,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이 그들입니다. 이 대목은 이사야를 연상시킵니다. 그는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55:1) 하고 외칩니다. 은혜의 세계입니다. 값을 지불하지 않고도 필요한 것을 얻는 세계니 말입니다. 한 잔의 물로도 목마름은 해소되게 마련이지만, 또 다른 목마름이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경험입니다. 목마름이 해소되기 위해서는 자기 속에서 생수의 강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물 근원과 접속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 물 근원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17절의 전반부가 말하는 초대의 대상이 누구인가 입니다. 학자들의 생각이 좀 갈리기는 하지만 그 대상은 ‘오고 계신 주님’이라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지금 우리의 신산스런 삶 가운데 돌입해 오시는 주님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기다릴 뿐만 아니라 그분을 향해 "오십시오" 하고 부르짖습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갈망하지만 그 세계를 열어주실 분은 주님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십시오". 이것은 초대교회 신앙의 핵심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고린도전서를 마치면서 "마라나타, 우리 주님, 오십시오"(고전16:22)라고 기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척박한 세상에서 생명의 씨, 평화의 씨를 뿌리는 이들은 이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초대는 이중적입니다. 먼저는 오실 주님을 향해 속히 오십사고 부르짖는 것이고, 다음은 지금 세상에서 목마른 사람들을 영생의 물이 있는 곳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열기 위해 고투해야 합니다. 희망의 신학자라고 일컬어지는 위르겐 몰트만이 지난 가을 우리나라에 와서 강연을 했습니다. 그는 강연 중에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현실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선취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오시는 하나님’에 대해 망각하지 않아야 절망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고난과 실망, 그리고 고통과 염려 속에서 기독교적 희망은 그 위로하고 저항하게 하는 힘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저기 무언가가 오고 있다는, 그래서 고통과 걱정 속에서도 위로가 됩니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것 앞에서도 항복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희망의 힘을 우리는 단념하지 않으며, 불의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세계에 침묵하지 않고, 불만족합니다. 악한 것과 화해하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운 상황들 속에서 자포자기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시험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의 강연문 <희망의 하나님과 우리의 미래> 중에서)

주님이 오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믿기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자유와 평등의 세상이 멀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일시적일 것임을 믿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잠시 동안은 어둠이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 어둠은 빛 앞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등불을 밝혀드는 이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아직 어둡습니다. 하지만 어섯눈이라도 뜨면 보입니다. 샛별로 떠오르신 주님 말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진심으로 기다리는 사람은 불의에 저항하고,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오고 싶어 하십니다. 이제 결단은 우리의 몫입니다. 기다림의 절기에 우리 마음속에 샛별이신 주님이 오롯이 떠오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3년 12월 15일 11시 58분 4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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