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초기 기독교인들의 모임에서 드려지던 예배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들은 무엇이었는가? 우리가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를 살펴보고자 하는 이유는 거기에 예배의 기초가 있고, 그 이후의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보존하려고 했던 예배의 원형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가 드린 예배를 살펴보고자 할 때 문제는 그 예배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가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실 신약성경에는 완전히 단일화한 예배의 상(像)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당시의 예배의 외적인 모습과 그 발전에 대하여 분명한 상을 가지기가 힘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약성경의 여러 가지 파편적인 기록들과 초대교회의 문서들을 통하여 원시 기독교의 예배가 어떤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II. 몸 말
초기 기독교인들의 모임에서 드려지던 예배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들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을 물을 때 무엇보다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 구성 요소들이 상당히 다양하였다는 사실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오늘날의 우리의 예배는 그 반대로 초대교회 예배의 다양성을 많이 상실하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성경과 초대 교회의 몇 가지 기록들에 의하여 찾아볼 수 있는 초대교회의 예배의 요소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1. 초대교회 예배의 요소들
1) 설교(행 2:42, 46; 20:7)
제일 먼저 설교이다. 그 당시의 설교가 어떠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행전에 나타난 몇 가지의 예를 근거로 대답할 수 있다. 이 설교들은 무엇보다 구약성서에서부터 현재의 그리스도의 사건에 이르기까지의 구속사를 추적하려는 관심을 볼 수 있다. 특별히 사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설교하였다. 때때로 설교는 예배와 상관없이 건물 밖이나 성전의 바깥 뜰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회당에서의 예배와 관련하여 행해지기도 하였다. 바나바와 바울은 함께 안디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행 15:35), 행전 20:7-11을 보면 바울은 “떡을 뗄 때” 아주 긴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설교를 신약성경 시대에 교회에서 매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설교 없이는 예배가 성립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2) 기도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역시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데, 그들은 다락방에 모여서 “모두 하나가 되어 열심히 기도하였다” 오순절 사건 후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행 2:42). 초대교회 교인들은 아마도 다양한 기도를 하고 있었던 듯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할 때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딤전 2:1)고 하였다.
그런데 예배에서의 기도와 관련하여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그들은 의식에서 나온 예식기도가 아니라, 진정 마음 속에서 나오는 자발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고전 14:15-16에서 “네가 영으로만 축복하고 마음으로 하지 않는다면,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모든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하리요?”라는 말을 한다. 여기서 바울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구분하면서, 유대의식에서 나온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기도를 할 것을 지적한다. 즉 초대교인들이 드린 기도는 영으로 드린 것이었으며, 기도문의 헛된 암송과 같은 기도가 아니었다.
후에 기도는 그 때 마다의 상황에 맞추어 자유로운 형식으로 드려졌는데, 주로 예언자가 맡아서 했다. “예언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다”(디다케 10장 6절). 그리고 그들은 벌써 이른 시기에 주기도문을 예배드릴 때 외웠던 것 같다. 이것은 얼마 후에 주기도문 뒤에 송영(Doxology)가 첨가된 점에서도 암시되고 있다(디다케 8). Doxology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에 대한 예배 회중의 응답을 나타내는 것이다. 갈라디아 4:6(“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의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과 롬 8: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에 모든 기도가 “아바를 말하는 것”으로 지칭되어 있는 사실도 역시 주기도문(“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을 예배드릴 때 사용했던 사실과 관련이 있다. [클레멘트 첫째 편지] 59-61장에서도 96년경에 사용되던 공중 기도문의 예를 볼 수 있다.(속사도 교부들, J.B. 라이트 푸트 편집, 이은선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85-88을 참조할 것)
그러나 가장 오랜 기도문을 보려면, 마라나타(Maranatha)라는 아람어로 보존된 기도문으로 소급할 수 있다. 계시록 마지막에 있는 이 아람어의 헬라어 번역은 마라나타가 “우리 주는 오신다”라는 직설법이 아니라, 명령형의 기도문임을 보여준다. (“이것들을 증거 하신 아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기도문은 고전 16:22절에서도 아람어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디다케](10:6)에도 보면, 이것은 특별히 성찬식과 관련된 식사예식의 마지막에 드려지던 기도문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기도문이 바울의 의하여 헬라어로 번역이 되지 않고, 아람어로 그대로 전수되었다는 사실과 [디다케]가 기록되던 시기에 이르기까지 원형 그대로 지속되었다는 사실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가장 오래된 이 기도문이 예배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아무튼 이 기도문은 원시 기독교 예배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형태의 기도문이기도 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기도가 기독교회의 예배일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날 제자들 앞에 나타나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 그리고 그는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을 것”(마 18:20)을 약속하셨다. 그래서 이 약속에 따라 초대 기독교인들은 성찬식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며, 그의 다시 오심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즉 마라나타라는 이 기도문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제자들 앞에 현현했던 과거의 사실을 지시함과 동시에, 공동체의 식사 예식에 그리스도가 임재하는 현재의 사실을 지시하며, 더 나아가서는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난 미래의 사실도 지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마라나타]는 무엇보다 먼저 성찬식의 기도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초대교회의 예배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였던 성만찬을 살펴보자.
3) 성만찬
우선 초대교회에서 행하여지던 가장 오래된 형태의 주의 만찬은 실제적인 식사의 상황에서 행하여졌다. (“네가 배부른 후에” 디다케 10.1) 이 점에 있어서는 모두가 다 일치한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주의 만찬을 말할 때에 일상적인 식사를 뜻하는 “떡을 먹는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떡을 뗀다”고 표현한 사실은 그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일상적 식사를 함과 동시에 특별한 의미의 의식을 거행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가장 오래된 주의 만찬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든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관련은 없었던 것 같다. 이 식사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식사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충만한 기쁨”이 넘쳤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주의 만찬은 최후의 만찬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연유되었다기 보다는, 예수님이 부활한 후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 함께 식사했던 일들에 대한 기억에 의하여 시작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24:36에 의하면 부활주일에 열 한 제자는 부활한 그리스도와 함께 식사하였으며, 그 바로 전에도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도상에서 두 제자와 함께 떡을 뗀 일이 있다. 그런데 누가 24:36에 보면 요한 21:12 하반 절에서와 같이, 부활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위하여 차린 식사는 물고기로 차린 식사였다. 이것은 후대에 와서 성찬식에 물고기의 상징이 관련된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아무튼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초대 기독교의 주의 만찬의 의식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부활주일에 제자들의 식사에 나타났던 일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부활한 그리스도의 처음 몇 번의 현현이 제자들의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것이라면, 초대 공동체의 성찬의식은 이러한 부활 이후에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의 공동식사를 회상했던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공동식사에서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가 약속했던 메시야적 식사(Messianic Meal, Banquet)가 부분적으로나마 이미 앞당겨 거행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부활한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의 공동식사에 대한 기억과 부활사상이 얼마나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행전 10:40-41에서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결국 이 말은 이런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리스도를 사흘만에 다시 살리시고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다. 그 분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증인으로 미리 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그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성찬식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기쁨”을 가졌던 이유는, 이 의식이 한편으로는 부활사상과 연결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 예수가 현재 영으로 임재하고 있는 공동체의 성찬의식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식사와, 앞으로 기대되는 종말론적 식사 사이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식사 자리에 모인 공동체 가운데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메시야적 식사에서 있을 그리스도의 도래를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부활 이후에 있었던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의 공동식사를 회고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시 기독교인들이 부활한 그리스도가 성찬식에 임재한다는 사상을 강조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일을 예배일로 정한 사실과 일치하며, 또한 마라나타 기도의 핵심적인 의미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찬식을 가리켜 “주님의 성찬”(고전 11:20)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맥락에서 연유한 것이다.
한편 고린도 전서 11장에서 바울은 성찬식의 기원이 예수의 지상 생애 마지막에 있었던 최후의 만찬에로 소급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 교회의 그릇된 성찬식 습관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강조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가 부활한 후에 제자들이 다시 식사 자리에 모였던 것은 바로 그 최후의 만찬을 기억하기 위해서였고, 또한 그곳에 부활한 그리스도가 나타났던 것이므로, 지상의 예수가 제자들과 가졌던 최후의 만찬이 기독교 공동체의 성찬식을 출발시킨 원래적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마지막 만찬 때의 예수의 말씀 가운데도 메시야적 성찬사상("내가 그것을 새로이 먹을 때까지")과 새로운 공동체의 계약 사상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공동체의 계약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성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성찬식에 있어서의 이 모든 요소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성립되었다는 생각은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성찬식에 있어서 부활의 요소가 너무 강조되는 바람에 완전히 뒤로 밀려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예수의 마지막 만찬이 성찬식의 기원임을 고린도서에서 그렇게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원시 공동체의 성찬식이 지니고 있던 나머지 두 요소, 즉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도래라는 요소와 현재에 이미 그리스도가 성찬식에 임재한다는 요소를 간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1장 26절에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성찬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선포해야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고린도 전서 10장 16절에서는 교회와 동일시된 그리스도의 부활한 몸과의 연합이 현재 성찬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말하였다. “우리가 그 떡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떡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성찬식에 임재함으로써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하나가 된다고 하는 사상은 오늘날의 성찬식에 있어서 너무 소홀히 되고 있지만(교제로서의 성만찬), 디다케의 기도문에 보면 이 사상이 유대교의 기도문의 예를 따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이 부서진 빵이 산 위에 흩어졌으되 다시 모아지고 하나가 된 것 같이, 당신의 교회도 세계 각처로부터 모여서 당신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소서”(9:4)
그 밖에 디다케는 성찬식을 아직 예수의 마지막 만찬과 죽음에 연결시키지 않았던 바울 이전 원시 공동체의 성찬식 유형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요소가 성찬식에 들어와 영속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바울이 초대 기독교의 성찬식을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로 소급시킨 결과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성찬식이 발전해 가는 가운데 오히려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제는 성찬식과 예수의 죽음과의 관련성이 일방적으로 강조되었고, 원시 공동체의 성찬식이 지니고 있었던 부활과, 부활한 그리스도의 식사와, 부활한 그리스도의 미래적 도래와의 관련성은 상실된 것이다.(이 문제는 오늘 한국교회에서 있어서 아주 심각한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현재 BEM 문서에서 지적하는 바,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만찬,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만찬의 의미 등을 잃어버리고 있다.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혹은 기억)으로서의 성만찬의 의미만이 강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성만찬의 분위기가 마치 장례식 분위기 같이 너무나 엄숙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의 개념은 전혀 보이지를 않고 있다. 기쁨과 감사로서의 성만찬의 의미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오로지 엄숙과 수난, 죽음 등만을 기억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만을 기억하고 있지, 부활하신 주님은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디다케에 의하면 우리는 가장 오랜 성찬식의 여러 구성 요소들 가운데 성찬식 기도 외에 다른 요소들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중에 디다케 9장 5절에 보면, 마라나타로 끝맺는 기도를 드리기 전에 먼저 이런 요구를 말하도록 되어 있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사람들 이외에 어느 누구도 성찬식의 빵과 잔을 들도록 해서는 안된다. 이에 관하여 주님이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4) 죄의 고백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 서 있는 예배하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용서와 임재를 간구하는 고백의 기도는 구약에서부터 발견하게 되는 소중한 순서이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전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장면(사 6:5)은 바로 고백의 기도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베드로가 주님을 뵈었을 때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는 고백과 주님의 용서, 그리고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는 모습은 다 죄의 고백의 중요성을 말해 준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예물을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는 말씀도 죄의 고백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다. 초대 교회의 문헌 중에서는 디다케 14장 1절에 보면 초대 교인들은 성찬을 먹기 전에 죄의 고백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5) 평화의 (거룩한) 입맞춤(Kiss of Peace)
또한 초대 교인들은 성찬을 들기 전에 형제와 다툰 사람은 화해를 한 후에야 성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마지막 절에서 가장 오랜 성찬식 제의의 단편을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제물을 드리기 전에 화해해야 한다는 마태복음 5장 23절과 관련된 디다케의 이런 요구가 실제로 실행되던 관례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의 마지막 부분에도 이와 비슷한 요구가 마라나타 기도 앞에 놓여 있다. 즉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 앞에 20절에 언급되어 있는 “거룩한 입맞춤”이라는 제의적 관습은 신약성서의 다른 곳(롬 16:16, 고전 16:20, 살전 5:26, 고후 13:12, 벧전 5:14)에도 나타나는 하나의 확립된 제의적 관습으로서, 이것도 역시 원시 공동체의 성찬식 제의에서 연유된 것이 확실하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성찬식의 기도에 따라 그리스도가 실제로 그들 가운데 나타나도록 하기 위하여 성찬식을 베풀기 전에 먼저 완전한 형제애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6) 계시
바울은 초대 교회의 예배를 말하는 가운데 고전 14장 26절(“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에서 찬송, 계시, 방언 그리고 방언의 해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계시”라는 것은 29절(“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과 32절(“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에서 알 수 있듯이 “예언자들의 예언”을 의미한다. 이 예언은 “로고스 소피아스”(지혜의 말씀), “그노시오스”(지식, 고전 12:8)에 근거한 것, 즉 말씀에 관한 지적인 해설이 아니라, 아포칼루피스(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즉 특별한 영감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가르침이나 설교와는 구별된다. 이렇게 초대교회에는 설교 이외에도 성령에 의존하여 완전히 자유롭게 선포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물론 바울은 이러한 자유로운 선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도록 공동체에게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고전 14:29, 살전 5:19-21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디다케도 역시 참된 예언과 거짓 예언을 구별하도록 요구하고 있다(11-13장)
7) 방언
방언은 초대교회 당시 예배 참석자의 자발적인 활동 형태였고, 초대교회 안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한편 방언이란 것은 정상적인 이해력으로는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없고, 발음이 불분명하게 나오는 소리로서 예배드릴 때 이러한 방언을 말하는 것에 관하여 바울은 한층 더 주의를 기울일 것을 당부하였다(고전 14장 27-28절 “누가 방언으로 말할 때에는 둘 또는 많아야 셋이서 말하되, 차례로 말하고, 한 사람은 통역을 하십시오. 만일 통역할 사람이 없거든, 교회에서는 침묵하고, 자기에게와 하나님께 말하십시오”). 예배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방언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있거나, 순서를 지켜서 질서 있게 방언을 말하여 그것이 예배 모임의 목적, 즉 교회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경우, 바울은 예배 모임에서 이러한 자유로운 성령의 활동을 일종의 특수한 기도형식으로서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방언을 말하지 말도록 금지시켰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본 대로 초대교회 예배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예배의식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형식에도 구속되지 않는 완전히 자유로운 영적 표현도 이와 함께 병립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8) 성시와 찬송가(Psalmen und Hymnen)
성시와 찬송가를 예배에서 사용하는 것은 유대교로부터 전해 받은 의식으로서, 경우에 따라서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만들어지기도 하고 또는 일정한 형식으로 고정되어 예배 때마다 반복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전 14장 26절 이외에도 골 3장 16절(“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며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과 엡 5장 19절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등을 들 수 있다.
시편 133편이 불려진 사실을 우리는 터툴리안의 글[De jejunio, 13]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일부는 유대교의 노래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고,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이 가장 오래된 기독교의 찬송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계 5:9; 5:12-13; 12:10-12; 19:1-2; 19:6) 특히 요한 계시록에 보존되어 있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원시 기독교 예배 찬송가들의 [바 솔로몬의 노래](Oden Salomos)라는 것도 이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플리니의 편지에 보면, 기독교인들이 해뜨기 전에 “마치 하나님에게 하듯이 그리스도에게 불러 드리는 노래”를 서로 번갈아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예배에 관계된 플리니의 서신의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조사한 그리스도인들의 위법과 잘못이란 정해진 날 해뜨기 전에 정규적으로 모여 신이신 그리스도에게 노래를 번 갈아서 부른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저러한 죄를 짓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둑질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약속을 꼭 지키며, 그들에게 맡겨진 것들의 위임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언약으로서 그들 스스로를 결속한 사실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습관이란 공동 식사를 함께 나누기 위해 모이고 헤어지는 일뿐이며 평범하고 순결한 사건들뿐이다.”)
아무튼 초대교회는 예배 때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여기서 “시”는 회당예배에서 사용하였던 구약의 시편을 가리킨다. “찬미”(hymns) 역시 “시”와 비슷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찬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신령한 노래들로서(spiritual songs) 성령의 감화에 의해 불리워졌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노래하는 것”과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는 것”이라는 표현에는 어떤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전자는 찬양의 외적인 표현을 의미하며, 후자는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내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결국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찬양이란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성령님의 감화 감동 안에서 자발적으로 드리는 노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9) 신앙고백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 6:12)라고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9:13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고백”이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으며, 히브리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에 관한 말을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원시 기독교 예배에서는 신앙고백이 낭송되었으리라는 것이 어느 정도 확실하게 가정할 수 있다. 호모로게인(고백하다)나 엑소모로게이스타이(고백하다,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느니라”)라는 동사는 마라나타가 주님의 재림을 간구하듯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내용의 고백과 관련된 동사이다.
물론 이런 말들이 초대교회가 처음부터 예배 시간에 어떤 명문화된 신조(creed)를 습관적으로 암송한 것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모여 예배드릴 때에 주님께 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한꺼번에 고백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신약성서와 그 밖의 초기 기독교 문서들에도 주님에 대한 이런 고백이 보다 상세한 진술로 표현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이 때만 해도 아직 고정된 신앙고백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대의 신앙고백 공식 문에서 공통되는 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10) 축복 공식문
신약성서에는 많은 축복 공식문들이 있다. 이들이 상투적인 형식과 엄숙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이유는 이들이 원시 공동체의 예배모임에서 사용된 것이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서신의 첫머리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구세주 우리 주님께서 은총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축복 공식문은 예배의식에 있어서 예배를 시작할 때 말하는 도입형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신의 끝부분에 있는 “우리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의 마음에 내리기를 빕니다”(갈 6:18; 빌 4:23) 또는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은총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고전 16:23) 또는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내리기를 빕니다”(계 22:21), 또는 예배의식 면에서 볼 때, 보다 완벽한 삼중적 형식을 갖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고후 13:13)라는 축복 공식문은 곧 이어서 실제로 떡을 떼는 순서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1) 송영(Doxology)
신약성서의 각 책의 끝이나 그 안에는 수많은 송영이 나타나 있는데, 이것도 예배의식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송영들은 유대교에서 전해 받은 것이다. 특히 바울의 서신에서 우리는 이러한 송영들을 대단히 많이 볼 수 있다. 이들은 “유로게토스”(축복받다)로 시작되거나[“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 9:5)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고후 11:31)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 1:3)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딤후 4:18)] 또는 “독사”(영광)으로 시작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갈 1:5),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빌 4:20)].
12) 성경봉독
우리는 특별히 바울의 서신들 안에서 예배의식과 관련된 구절들이 많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울이 그의 서신을 쓸 때 마음속으로 예배를 위하여 모인 공동체를 생각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바울은 그의 서신이 예배의 회중 앞에서 읽혀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서신 안에 예배의식의 공식문을 미리 적어 넣은 것이다.
바울의 서신들에 있어서 끝 부분의 결구 형식들은 고대의 성찬식 첫머리에서 사용되던 형식들과 일치된다.[참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고전 16:23)] 그 이유는 바울이 자신의 서신이 읽혀진 다음에 곧 이어서 성찬식이 거행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끝 부분에 그의 편지를 모든 형제들에게 읽어줄 것을 당부하면서(“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살전 5:27), 그 뒤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살전 5:28)라는 성찬식의 시작을 알리는 도입 부분을 첨가한 것이다. 바울은 골로새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그의 편지를 낭독하도록 부탁하였다.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골 4:16) 바울은 딤전 4:13에서도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디모데에게 가르치고 격려하는 일과 더불어 회중에게 그의 편지를 읽어주도록 권고하였다.
한편 원시 기독교의 예배에서는 이미 이른 시기부터 기독교 문헌뿐만 아니라, 구약성서도 읽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가장 분명한 증언은 순교자 저스틴의 변증론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저스틴은 예배에 관하여 서술하면서 “태양의 축일이라 불리는 날(일요일)에 여러 도시와 지방에 사는 이들이 일정한 곳에 모인다. 이 때 사도들의 서간이나 선지자들의 말씀을 시간이 허락하는 데까지 읽는다. 낭독자가 읽기를 마치면 그 집회의 인도자는 성경 말씀을 강론하고 그 말씀들을 실천하도록 권면한다”고 쓰고 있다. 그가 말하는 예언자들의 글이라는 것은 구약성서의 문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서의 낭독은 유대교 회당에서 행하던 예배의식의 한 순서이지만,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적어도 사도들의 편지를 읽는 일에 우선권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모였을 때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는 것도 예배의 중요한 순서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3) 회중의 아멘
예배의식에서 사용하는 아멘도 유대교의 예배의식에서 가져온 것으로서, 고린도 전서 14장 16절(“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에서 볼 수 있듯이 예배 회중이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원시기독교 공동체의 예배의식은 일반적으로 대단히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었고, 예배의식에 쓰이는 공식문들도 경직화된 흔적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모든 회중이 예배의식에 참여하였다. 요한 계시록에도 보면 네 마리의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멘”을 말하고 있고, 저스틴도 예배에 관한 서술에서 온 회중이 아멘을 말함으로써 인도자의 기도에 동참한다고 언급하였다.(“...강론하고 그 말씀들을 실천하도록 권면한다. 그 후에 우리는 모두 일어서서 함께 기도를 드리고, 기도가 끝난 후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떡과 포도주와 물을 가져온다. 이 때 집례자는 기도와 감사를 드리고 모든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한다”) 플리니의 편지에 기록되어 있는 기독교의 교송도 역시 예배의 회중이 모두 예배의식에 참여하였다는 증거이다.
14) 세례
초대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역시 초보적인 단계의 세례의식이 매우 이른 시기부터 행하여졌다는 증거가 있다. 행전 8장 36절(“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과 10장 47절(“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11장 17절(“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데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에 보면 “코류에인”(방해하다)이라는 동사가 상투적인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세례 받을 사람이 세례를 베푸는 사람 앞에 섰을 때 의례적으로 묻는 “티 코유에이”(세례를 주지 못하도록) 무엇이 방해하는가? 라는 예배 의식적 질문에 관한 확실한 증거로 보인다. 즉 이 질문의 내용은 “갑이라는 사람이 세례를 받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는가?”라는 뜻으로 세례를 베푸는 사람이 묻기도 하고, 또는 세례 받을 사람이 “내가 세례를 받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습니까?” 라고 스스로 묻기도 하였다. 행전 8장 37절에 의하면(서방사본에만 있고, 우리 성경에는 없음), 세례를 베푸는 사람이 “당신이 마음을 다하여 믿는다면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세례 받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그리스도에 대한 짤막한 신앙고백을 하였다. 그 이전에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세례를 받았었다.(갈 3:27; 고전 1:13; 행 2:38; 8:16; 10:48; 19:5)
한편 디다케에는 이런 의식 이외에 세례집행에 관한 외적인 절차가 규정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흐르는 물”에서 주도록 되어 있었고, 때에 따라서는 “다른 물”에서, 또 필요에 따라서는 따뜻한 물로, 그리고 불가피한 경우에는 머리에 물을 뿌리는 것만으로도 세례를 베풀었다.
15) 봉헌(Offering)
신약성경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자신들의 소중한 물질을 모아 성도들이 필요한 곳에 사용하도록 하는 순서를 주일에 이행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고전 16:1-2)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연보(collection)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교인들을 구제하는 데 쓰였는데, 이것은 로마서 15:26에 다시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고린도 후서 8장과 9장에서 물질을 바치는 문제의 소중한 원칙을 밝히고 있다. 바울은 연보의 순서에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않도록 부탁한다. 바울은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 9:7)는 해석과 함께 인간들의 단순한 구제행위로서 끝나는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위하여 바쳐져야 할 성도들의 당연한 봉헌적 행위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사상은 바로 초대 교회의 예전 가운데 봉헌의 순서로 빈궁한 성도들을 위하여 물질을 드리는 순서를 먼저 가졌고, 이어서 성례전을 위한 성물(빵과 포도주)을 바치는 예전을 이루었다. 아무튼 이 봉헌의 순서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초대교회의 봉헌은 어떤 법의 규정에 따라 세금이나 십일조를 내는 것과 같은 아니라, 받은바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진정 기꺼운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바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2. 신약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 예배의 모습 개괄
사실 초대교회가 위에서 언급한 15개의 항목을 모든 예배에서 전부 사용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며 또한 알 길도 없다. 그리고 어떤 원칙에 따라 그들이 예배순서에 위의 순서들을 넣었는지도 알 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위의 내용들이 어느 정도 들어간 예배의 순서라면 그 결과 예배는 결코 짧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신약성경 시대의 예배가 간단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신약성경 시대의 예배는 크게 두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데, 첫째로, 그 예배는 말씀을 중심으로 한 회당예배와 성만찬을 중심으로 한 다락방 예전이 연합된 모습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속에 포함되는 중요한 예배의 요소들은 설교를 포함한 성경봉독과 해석, 그리고 기도(문), 찬양, 성만찬 예식 등이다. 이것들은 신약성경 시대의 초대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불변하고” “영원하며” “지속적이고 중요한” 요소들로 불리워지며, 기독교 예배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그 예배는 예배드리는 자들의 자유로운 참여, 애찬, 그리고 방언과 같은 순서들로 이루어진 자발적인 특징이 있는 예배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요소들은 초대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불안정하고” “단명하며” “일시적이고 비영속적인” 예배의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윌리엄 멕스웰은 그의 책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에서 지금까지 본 신약성경과 그 밖의 초대교회 문서들을 종합하여 1세기 말의 기독교 예배를 다음과 같은 순서를 만들었다.
1부: 회당예배를 계승하여 발전하게 된 순서
성경낭독(딤전 4:13; 살전 5:27; 골 4:15)
시편과 찬송(고전 14:26; 엡 5:19; 골 3:16)
기도(행전 2:42; 딤전 2:1-2)와 회중의 아멘(고전 14:16)
설교 또는 강론(고전 14:26; 행 20:7)
신앙고백(고전 15:1-4; 딤전 6:12)
헌금(고전 16:1-2; 고후 9:10-13; 롬 15:26)
2부: 다락방 예배: 주님의만찬(고전 10:16; 11:23; 마 26:26-28; 막 14:22-24;
눅 22:19-20)
봉헌기도
*감사(눅 22:19; 고전 11:23; 14:16; 딤전 2:1)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회상(행 2:42; 눅 22:19; 고전 11:23, 25, 26)
*중보기도(요한 17장)
*주기도문 암송(마 6:9-13; 눅 11:2-4)
찬송
평화의 입맞춤(롬 16:16; 고전 16:20; 살전 5:26; 벧전 5:14)
아무튼 이러한 신약성경 시대의 예배는 애찬과 성만찬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떡을 뗀다고 부르는 예배형태가 그리스도인이 함께 모여 예배드린 유일한 예배형태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때 방언 등을 통한 예배참여자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예배학자들은 신약성경 시대의 초대교회 예배가 회당예배와 같이 비교적 안정되고 고정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모든 교인들이 참여하는 비교적 자유로운 예배형태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특별히 신약성경 시대의 예배는 성령님의 역사에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이를 통한 교인들의 열정주의는 찬양, 기도, 봉헌, 설교, 그리고 이와 관련된 다른 모든 순서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주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에는 “자발성”(spontaneity)이 그 특징을 이루고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었으며, 자신이 원하는 때와 장소에 자신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역사하는 성령님을 온전히 맞이한 영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신약성경 시대의 예배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경직된 예배와 반대되는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예배
(2) 제사예배와 반대되는 기도예배
(3) 제사장적 예배와 반대되는 예배자들이 참여하는 예배
(4) 의식적(예전적) 예배와 반대되는 설교예배
(5) 외형적, 형식적 예배와 반대되는 영적, 감동적, 내적인 예배
(6) 너무 신비적인 예배와 반대되는 단순하고 직접적인 예배
그러므로 오늘날의 예배도 신약성경적 의미에서 완전히 기독교적이고, 살아 움직이게 되기 위해서는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순서들에 자발성이 가미되어야 하며, 특별히 성령님의 역사에 활짝 열어 그 분이 주관적으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한다.
3. 초대교회의 예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초대교회의 문헌들(주후 약 2세기까지)
다음의 초대교회 문서들은 주후 2세기까지의 기독교 예배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헌들이다.
1)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가 A.D. 96년 경에 고린도에 보낸 첫 번째 편지
그의 서신은 예전에 관한 문서는 아니고 하나의 권면을 기록하고 있으나, 초대기독교 예전(1세기 말)에 관련된 내용들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기도에 대한 엄숙한 내용이 나타나고 있으며, 거룩송(the Sanctus “거룩, 거룩, 거룩, 만군의 주여,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영광으로 가득하나이다”)과, 봉헌(oblation)의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후에 주의 성만찬에서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를 일컫는 전문용어로 사용되지만, 당시 기독교 초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헌금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2) A.D. 112년경 소아시아 비디니아(Bithynia)의 총독이었던 플리니(Pliny)가 로마 황제 트라얀(Trajan)에게 보낸 편지
플리니는 기독교인 아니었으므로 외부에서 관망하는 입장에서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의식에 대해서 보고하고 있다. 이 서신은 초대교회의 두 가지 의식(rite)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러한 의식은 어떤 정해진 날, 즉 매주 일요일(Sunday)에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다. 첫째 의식은 “해뜨기 전에”(before daybreak) 있었는데, 이 때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응답형식 또는 교송으로 찬양을 드리고, 성만찬 예전을 통하여 죄악을 삼갈 것을 맹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공동으로 흠 없는 식사를 들었는데, 이것이 두 번째 의식이다. 이 서신에 의하면 초대교인들은 아침예배 때는 성만찬을 나누었음을 알 수 있으며, 저녁 예배 때에는 별로 특기할 만한 사항이 없다.
3) A.D. 90-13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디다케(Didache)라고 불리우는 [열 두 사도의 교훈집]
이것은 흔히 [열두 사도의 교훈집]으로 알려져 있는 문서인데, 속사도시대의 기독교인에 의해서 기록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여기에는 성만찬과 애찬(Agape)이 함께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으며, 떡보다 잔을 먼저 든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 또한 수요일과 금요일은 금식일(fast day: 유대인들의 금식일과 의도적으로 다른 요일 : 유다가 주님 판 수요일, 돌아가신 금요일)이요, 일요일에 정규적으로 모여 주님의 만찬을 거행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 이외에도 이 문서에는 초대교회가 행했던 여러 가지 목회에 관한 내용들도 기록되어 있다. 즉 종교적인 교훈과, 애찬을 집전하는 방법, 훈련에 대한 지침, 지도자들의 임무, 경계할 것에 대한 훈계 등을 16장으로 다루고 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세례를 베풀 때에 디다케는 세례水에 대해서 상세한 내용을 제공한다. 즉 흐르는 물이 좋으며, 차거운 물이 바람직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머리에 세 번 물을 부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예배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흥미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때까지 초대교인들은 애찬과 주의 만찬을 함께 지켰으며, 기독교인들은 “매주 주의 날”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였고, 짤막한 감사기도 몇 가지와 기도 후 “예언자”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감사”할 수 있었다는 등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4) A. D. 140년경에 순교자 저스틴(Justin)이 로마의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에게 보낸 [제 1 변증서](First Apology)
그의 변증서는 당시 로마에서 행해졌던 일요일 예배에 관하여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당시의 예배에 관한 개략적인 윤곽만을 언급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당시의 예배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많은 예배학자들은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예배순서가 사도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예배라고 생각한다. 그는 일요일에 거행되던 정규 예배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한다.
“태양의 축일이라 불리는 날(일요일)에 여러 도시와 지방에 사는 이들이 일정한 곳에 모인다. 이 때 사도들의 서간이나 선지자들의 말씀을 시간이 허락하는 데까지 읽는다. 낭독자가 읽기를 마치면 그 집회의 인도자는 성경 말씀을 강론하고 그 말씀들을 실천하도록 권면한다. 그 후에 우리는 모두 일어서서 함께 기도를 드리고, 기도가 끝난 후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떡과 포도주와 물을 가져온다.”
“기도가 있은 후 우리는 서로 형제의 입맞춤을 나누며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는 빵과 물과 섞은 포도주를 집례자에게 드린다. 그는 그것을 받아서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성부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 그가 기도와 감사를 마치면 모든 회중은 ‘아멘’으로 응답한다. ‘아멘’은 히브리어로 ‘그래도 되어지이다’는 뜻이다.” “집례자가 감사 기도를 드리고 온 회중이 아멘을 한 후에, 부제(deacon)라고 불리는 이들이 축복한 빵과 물을 섞은 포도주를 각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예배에 참석치 못한 사람들에게는 집으로 보내준다. 이 음식을 성체성사(eucharist)라고 부르는데, 진리의 가르침을 받고 믿는 사람과 죄의 사함과 중생을 얻은 사람, 그리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사는 사람만 참예할 수 있다.”
저스틴의 변증서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기독교의 예배드리는 날이 매 주의 첫째 날(일요일)이었음을 밝히는 것인데, 이는 창조와 주님의 부활을 기리는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한다.
“대중이 함께 모이는 날은 주일인데, 그 날이 주의 첫째 날이며, 그날 하나님이 세상과 빛을 지으셨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5) A.D. 200년경에 기록된 로마의 히폴리투스에 의해 편집된 [The Apostolic Tradition](사도전승)
이는 헬라어로 만들어진 문서인데, 원본은 찾을 수 없으며, 현재는 에디오피아 번역본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예배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문서에 대해서 몇 명의 예배학자들은 이것이 번역본이기 때문에 해석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특별히 이 문서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성만찬 시 감독이 봉헌을 하면서 드리는 성찬기도(Consecration Prayer)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성만찬 대감사기도(The Great Prayer of Thanksgiving)로 알려져 있으며(한국교회에서는 이 기도를 잃어버림)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오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하는 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나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사 구세주요, 구속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신(Messenger)이 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나이다. 하나님은 그를 하늘로부터 보내시사 동정녀로 잉태케 하시며, 성육신하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 주셨나이다. 성령을 통해 동정녀에게 잉태케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로 고난을 당하게 하시므로 고통 중에 있는 백성들을 구하셨나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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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쿨만, 원시기독교 예배. 이선희 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4)
윌리엄 멕스웰, 예배의 발전과 그 형태. 정장복 역 (서울: 쿰란출판사, 1998)
제임스 화이트, 예배의 역사, 정장복 역 (서울:쿰란출판사, 1997)
페르디난드 한, 원시 기독교 예배사, 진연섭 역 (서울:대한 기독교서회, 1988)
C.F.D. Moule, Worship in the New Testament (Richmond: John Knox Press, 1961)
Cyril D. Richardson, ed. Early Christian Fathers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 Inc., 1978)
Henry Bettenson, ed.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New York: Oxford Univ. Press, 1947)
Lucien Deiss, C.S.Sp. Springtime of the Liturgy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79)
Paul Bradshaw, Early Christian Worship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96)
Ralph P. Martin, Worship in the Early Church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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