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출21:1-11 (2013/12/8, 인권주일) ["네가 백성 앞에서 공포하여야 할 법규는 다음과 같다. 너희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종살이를 해야 하고, 일곱 해가 되면, 아무런 몸값을 내지 않고서도 자유의 몸이 된다. 그가, 혼자 종이 되어 들어왔으면 혼자 나가고, 아내를 데리고 종으로 들어왔으면 아내를 데리고 나간다. 그러나 그의 주인이 그에게 아내를 주어서, 그 아내가 아들이나 딸을 낳았으면, 그 아내와 아이들은 주인의 것이므로, 그는 혼자 나간다. 그러나 그 종이 ‘나는 나의 주인과 나의 처자를 사랑하므로, 혼자 자유를 얻어 나가지 않겠다’ 하고 선언하면, 주인을 그를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의 귀를 문이나 문설주에 대고 송곳으로 뚫는다. 그러면 그는 영원히 주인의 종이 된다. 남의 딸을 종으로 샀을 경우에는, 남종을 내보내듯이 그렇게 내보내지는 못한다. 주인이 아내로 삼으려고 그 여자를 샀으나, 그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는 그 여자에게 몸값을 얹어서 그 여자의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내야 한다. 그가 그 여자를 속인 것이므로, 그 여자를 외국 사람에게 팔아서는 안 된다. 그가 그 여종을 자기의 아들에게 주려고 샀으면, 그는 그 여자를 딸처럼 대접하여야 한다. 한 남자가 아내를 두고 또 다른 아내를 맞아들였을 때에, 그는 그의 첫 아내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줄여서 주거나 그 아내와 부부 관계를 끊어서는 안 된다. 그가 그의 첫 여자에게 이 세 가지 의무를 다 하지 않으려거든, 그 여자를 자유롭게 풀어 주고, 아무런 몸값도 받지 않아야 한다."] • 유정有情한 하나님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대림절 초 두 개에 불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지난 한 주간 동안 작은 등불 하나를 밝히는 마음으로 살았던 우리 마음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시인 윤동주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를 노래했습니다(<쉽게 쓰여진 시>). 희망이란 그런 것입니다. 우두커니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등불 하나를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모는 것입니다. 12월 둘째 주일은 우리가 성서주일 혹은 인권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사실 이 둘은 깊이 연결된 것입니다. 인권이야말로 성서를 관통하고 있는 메시지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출애굽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더 나은 세상이 어떻게 도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히브리인들은 압제과 착취의 땅 애굽을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한 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출애굽사건은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계층 사회의 토대를 허무는 사건이었습니다. 피라미드 식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 계층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분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실제로 오랫동안 억압과 천대를 받아온 사람들은 자기들의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그런 숙명의 주술에서 사람들을 해방한 사건입니다. 출애굽은 억압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최고 실세였던 최충헌의 사노비 만적은 난(1198년)을 일으키며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외쳤습니다. 어느 시대든 권력을 가진 이들은 자기에게 부여된 자리를 벗어나려는 이들을 가혹하게 탄압했습니다. 가두고, 때리고,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낮은 계층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는 공포가 문신처럼 새겨집니다. 그렇기에 주인의 말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출애굽 사건이 증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던 이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땅의 현실에 개입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상관하지 않는 무정한 초월자가 아닙니다.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그들 때문에 애태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기에 사람들을 억압하고 노예로 만들고 죽음으로 내모는 바로와 싸우셨습니다. • 자유에 이르는 먼 길 하지만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멀고도 먼 길입니다. 바다를 건너야 할 때도 있고, 광야를 통과해야 할 때도 있고, 호시탐탐 배후를 노리는 적들과 싸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마땅히 가야 할 길이기에 난관이 있다 하여 멈출 수 없습니다. 지난 금요일(2013/12/6) 우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1918-2013)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유와 민권을 위해 싸우던 그는 27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석방된 지 몇 년이 지난 1994년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27년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활짝 열린 문을 향해 걸으며 나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받은 고통과 분노, 원한과 미움을 이곳에 다 묻어놓고 떠나지 않으면 나는 또 다시 과거의 고통스런 감옥에 갇혀 헤어날 수 없다.’ 그때의 그 현명한 결단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줄 이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적의와 미움으로는 새 나라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데스몬드 투투 주교와 함께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어 인종차별의 가해자들이 역사 앞에 자기들의 죄와 과오를 참회할 기회를 부여했고, 피해자들도 과거의 원한 감정에 사로잡힌 채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가야 할 길이 여전히 멀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모든 이들의 인권이 존중되는 나라를 향한 여정 가운데 있습니다. 한 위대한 영혼이 밝혀놓은 그 빛은 자유를 향한 여정에 나선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불빛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계약법전의 한 대목입니다. 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가나안 정착생활을 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법규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에게 품부된 삶의 몫을 온전히 누리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평등공동체의 이상은 현실의 벽 앞에서 자꾸만 좌절되곤 했습니다. 히브리인 가운데는 약속의 땅에서도 종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대개 빚에 몰려 종으로 전락한 이들이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파는(암2:6) 현실을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현실의 자리에서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여정을 출발하도록 가르칩니다. 본문은 히브리 종을 샀을 때의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남자 종과 여자 종의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남자 종의 경우 주인을 위해 6년을 일하면 몸값을 내지 않더라도 자유의 몸이 됩니다. 물론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 집에 머물 수 있습니다. 생계 대책이 막연한 이들은 자유를 포기하더라도 배고픔을 면하고 싶어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는 이 법전을 조금 더 확장해서 적용할 것을 요구합니다. 즉 종살이를 한 이를 내보낼 때에는 빈손으로 보내지 말고 넉넉히 주어서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신15:13-14). 그들도 애굽에서 종살이 한 경험이 있으니 가난한 이들의 절박한 사정을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 어렸을 때만 해도 동네에 새경(=사경私耕)을 받고 머슴살이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새경이라야 겨우 벼 몇 섬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노동에 비하면 참 보잘 것 없는 보상이었습니다. 시인 고은 선생의 19권짜리 시집 <<만인보>>에는 시인이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머슴 대길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상머슴으로/누룩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그야말로 도야지 멱 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밥때 늦어도 투덜댈 줄 통 모르고/이른 아침 동네길 이슬도 털고 잘도 치워 훤히 가리마 났지요". 시인은 대길이 아저씨가 더욱 빛나는 때는 밤이었다고 회상합니다. 어린 그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고, 인생사는 이치도 가르쳐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그 가르침은 꺼지지 않는 불빛이 되어 시인을 비춰주었습니다. 머슴이라고 해서 생각이 없는 것 아니고, 인권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그들이 자유인으로 살아가도록 사회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 인간은 수단이 아니다 남의 딸을 종으로 샀을 경우는 좀 복잡합니다. 그 여인을 종으로 산 동기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주인이 아내로 삼으려고 그 여자를 샀지만 금방 싫증이 나서 여자를 내보내려 한다면 몸값을 얹어서 친정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그를 다른 이에게 파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자기 아들에게 주려고 여종을 샀으면, 그는 그 여자를 딸처럼 대접하여야 합니다. 또 주인이 아내를 두고 다른 아내를 맞아들인 경우, 첫 아내에게 세 가지를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먹을 것을 제공하고, 입을 것을 제공하고, 부부 관계를 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의무를 할 생각이 없으면 아무런 몸값을 받지 않고 여인을 자유롭게 해야 했습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법규는 폐기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람을 사고판다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법규는 종을 사고파는 일이 용인되던 시절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법규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런 현실을 철저히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평등 사회를 이루기 위해 그 사회가 지켜가야 할 룰을 제정했다는 사실입니다. 욥기에 나오는 욥의 긴 탄식 가운데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내 남종이나 여종이 내게 탄원을 하여 올 때마다 나는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평하게 처리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무슨 낯으로 하나님을 뵈며,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러 오실 때에, 내가 무슨 말로 변명하겠는가? 나를 창조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 내 종들도 창조하셨다."(욥31:13-15) 욥은 그동안 자신이 남종과 여종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였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 종들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임을 그는 직관적으로 깨닫고 있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현실 속에서 이 사실은 쉽게 잊혀집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명제를 무색하게 만듭니다. 차별이 일상화된 세상입니다. 도시인들의 편리를 위해 농촌 지역 사람들의 희생이 강요되고, 부유한 이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가난한 산동네 사람들은 도시 밖으로 밀려납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자기 삶의 터전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을 통분히 여겨 밀양의 한 70대 노인은 농약을 마시고 세상과 작별했습니다. 우리는 그 죽음을 더 이상 죽음을 강요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들에 두고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는 목자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버려도 좋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물며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안전한 곳에 있다 하여 길을 잃은 그 양을 탓하고, 눈을 흘기고, 무시할 때 세상은 냉혹한 곳으로 변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길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서경식 선생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것이 교양이라 말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이 냉랭한 것은 배운 사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진정한 교양인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교양인은 사람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다른 이들의 삶의 자리에 내려가는 사람입니다. 낮은 자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막지 않는 사람입니다. • 우리가 부름 받은 위대한 일 예능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의 한 장면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출연자들은 조선사회에서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 세계로 온 사람들의 역할을 연기했습니다. 미래 세계로 온 그들에게 세상은 낯설기 이를 데 없습니다. 거리에 즐비한 건물도, 자동차도…. 출연자 한 사람이 젊은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묻습니다. 몇 마디 말이 오가다가 댁은 무엇 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그는 ‘직장인’이라고 대답합니다. 직장인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던 그는 다시 묻습니다. "조선 시대로 이야기하자면 어느 계층 사람이오?" 그러자 그는 지체없이 대답합니다. "노비입니다." 웃자고 한 소리이겠지만, 직장인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반영된 말입니다. 생산성과 효율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세상은 일쑤 사람을 부품으로 취급하게 마련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은 ‘실적’을 쌓는 것과 무관한 일에 열심을 낼 때입니다. 사람들이 미국 교사들의 교사라고 부르는 파커 파머는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일, 불의에 대항하는 일, 슬픈 자를 위로하는 일, 전쟁을 끝내는 일과 같은 것"(파커 파머, <일과 창조의 영성>, 아바서원, p.140)이야말로 우리가 부름을 받은 위대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런 일에는 실적이 있을 수 없고 오직 헌신에의 열정만 있다면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얼마나 실적을 올렸나가 아니라 내가 신실한지 여부라고 말합니다. 이상적인 세상은 완성된 상태로 우리에게 도래하지 않습니다. 옥토를 만들기 위해 농부들은 날마다 돌을 걷어내고 또 걷어냅니다. 밭에 퇴비를 뿌려 지력을 높이려고 애씁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현실을 보고 혀만 차는 사람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열기 위해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위해 땀 흘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만큼의 자유와 여유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앞서 간 이들의 수고와 희생 때문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며 사는 세상, 억울함과 원통함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깊은 우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땀 흘리는 이들을 통해 이 땅에 오고 계십니다. 우리는 만삭의 여인이 머물만한 공간조차 제공하지 않았던 베들레헴 사람들의 무정함에 혀를 찹니다. 그런데 정작 지금 오고 계시는 주님은 머물 곳이 없습니다. 그분의 거처가 되어 드리는 것이 바로 우리의 소명입니다. 이 아름다운 기다림의 절기에 주님의 거처를 마련하는 기쁨을 누리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무도 건물도 형형색색의 불빛으로 휘황합니다. 이런 때 성숙한 사람들의 눈은 그 불빛이 미치지 않는 어둡고 후미진 곳을 향해야 합니다. 이웃의 눈에 맺힌 눈물을 통해 하늘을 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참 믿음의 사람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눈이 밝아지고, 뻣뻣하게 굳어있던 우리의 몸과 마음이 부드럽게 풀려 오시는 주님을 향해 달려 나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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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3년 12월 08일 11시 58분 50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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