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물 속에서 시130:1-8 (2013/12/1, 대림절 첫 주) [주님, 내가 깊은 물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님, 내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나의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주님, 주님께서 죄를 지켜 보고 계시면 주님 앞에 누가 감히 맞설 수 있겠습니까? 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주님만을 경외합니다. 내가 주님을 기다린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며 내가 주님의 말씀만을 바란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 진실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 이스라엘아,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주님께만 인자하심이 있고, 속량하시는 큰 능력은 그에게만 있다. 오직, 주님만이 이스라엘을 모든 죄에서 속량하신다.] • 신앙은 그리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초 하나를 밝혀놓고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나신 이봉배 권사님이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목사님, 신앙은 그리움인가 봐요. 하나님이 그립고 교우들이 그리워 못 견디겠어요." 적적함도 한 몫을 했겠지만, 권사님은 정말 신앙의 진수를 경험한 것이 아닐까요? 그리워하던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셨으니 권사님은 행복한 분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주님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가슴 절절한 그리움으로 그분을 맞아들이려 합니까?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기다리는 이의 마음을 참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설레는 일이 없다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온다던 이가 오지 않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이들이 행여 그인가 싶어 바라보지만 아닙니다. 기다림에 지친 시인은 마침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이여,/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에게 온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고, 그를 향하여 길 떠나는 것입니다. 시의 마지막 대목은 비장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로 가고 있다." 우리는 오시는 주님을 마음을 다해 기다립니다. 모두가 길을 잃고 방황하는 세상에 친히 길이 되어 주실 주님, 사람다운 삶이 무엇인지 잃어버린 채 욕망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늘빛을 보여주실 주님을 말입니다. 하지만 기다림은 멈추어 있음이 아닙니다. 그를 향해 나아감입니다. 가슴에 쿵쿵거리는 발자국을 따라 그분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가지 않고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영적 나태함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를 인용하여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줍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해야 할 것이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눅3:4-6) • 깊은 물 속 같은 현실 시편 130편은 51편과 더불어 대표적인 참회시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죄를 낱낱이 적시하고 있지만 않지만, 자기 삶을 송두리째 하나님 앞에 내놓고 용서를 청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시편 120편부터 134편에 이르는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전’, ‘오름’, ‘순례자’, ‘노래’라는 네 단어가 모두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특히 순례자라는 단어가 제게는 각별하게 다가옵니다. 순례자는 자기 일상을 내려놓고 영혼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순례에 나선 이들의 행장은 단출해야 합니다. 내려놓아야 할 것은 짐뿐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자아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아니, 어쩌면 자아를 내려놓고 싶어 순례에 나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순례자들이 남긴 기록들을 읽다보면 자주 만나게 되는 단어가 ‘눈물’입니다. 서러워서도, 아파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크심 앞에서 자기의 작음을 절감하기에 울고, 값없이 주어진 은총이 문득 떠올라 울고, 신적 장엄함과 마주쳐서 울고…. 순례의 모든 과정은 그래서 정화의 시간입니다. 시인의 순례가 지향하는 곳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하지만 순례는 그곳을 향하여 길 떠나는 순간에 시작됩니다. 시인은 "주님, 내가 깊은 물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라는 말로 시를 시작합니다. ‘깊은 물’이라는 표현은 굳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깊은 물은 우리가 간혹 직면하는 인생의 심연입니다. 전모를 파악할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일종의 한계상황입니다. 깊은 물 속에 있다는 말은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처지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무력감과 공포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돌발적인 일들, 예컨대 질병이나 천재지변, 실패나 배신의 경험은 우리를 참 무력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자기 존재의 심연과 마주칠 때입니다. 꽤 근사한 사람인척 하고 살았는데, 자기 속에 있는 어두운 욕망과 죄성(罪性)을 가감없이 보게 될 때 사람들은 ‘깊은 물’ 속에 빠진 듯한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그런 상황에서 시인은 주님을 부릅니다. "주님, 내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나의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2) 시인은 그런 영적 곤경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면서 주님께 애원합니다. 세상은 그를 경멸할 수도 있고 침을 뱉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의 말을 경청해 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신뢰입니다.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기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내놓습니다. 무엇 하나 숨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죄를 지켜보고 계시면, 주님 누가 감히 맞설 수 있겠습니까?"(3) 시인은 자기를 지켜보고 계신 주님의 시선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지켜보심은 잘못을 적발하고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위험에서 구원하고,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시선은 엄격하면서도 따뜻합니다. 하지만 그 눈길을 외면한 채 제멋대로 살았던 이들은 주님의 시선을 두려움으로 인식합니다. 주님이 감시자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시인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간절하게 용서를 청합니다. • 용서 용서를 받는다는 것, 그것은 부자유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 영혼은 위축되게 마련입니다. 갈등과 불화는 우리 영혼을 속박하는 사슬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평화를 빼앗아 갑니다. 평화란 아름다운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참회해야 합니다. 자기가 문제라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집을 떠났던 탕자가 아버지 발 앞에 엎드리기 위해 길을 떠났을 때 그의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토머스 키팅 신부는 회개를 아주 단순한 말로 설명합니다. "네가 행복을 찾고 있는 방향을 바꾸라"(토머스 키팅, <하느님과의 친밀>, 성바오로, p.69) 사람들은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매고 다닙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잊어버린 채 말입니다. 다른 이에게 해를 입히기도 하고, 스스로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세상의 좋은 것들을 채움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아니 경험해야만 하는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맛보기 어렵습니다. 진짜 행복은 채움 속에 있지 않습니다. 필요한 이들에게 주기 위해 자기 것을 비울 때 찾아옵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그래서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그리던 사람이 하나님 중심으로 그리고 이웃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회개한 사람이 맞습니까? 오늘의 시인은 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참회하는 이들을 품어 안으십니다. 용서는 받아들여짐의 체험입니다. 나의 존재를 하나님께서 전폭적으로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울음은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자기 자신과의 화해도 일어납니다. 용서받은 이들의 표정은 부드러워지고, 다른 이들에게는 관대해집니다. 용서함을 경험한 이들이 기다리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엊그제 있었던 기독교환경운동연대 후원의 밤 행사에 오신 조화순 목사님의 말씀이 큰 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팔순이 넘으신 목사님의 축하 메시지는 짧고도 강력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 한 마디는 그날 나누어진 어떤 말보다도 강력했습니다. 목사님 자신이 걸어온 그 당당한 삶,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 삶의 비밀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말씀이 삶을 바꾸어놓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말씀을 붙들고 삽니까? 요즘 많은 이들이 교황 프란체스코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안온한 성전에만 머물며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멍들고 상처받고 더러워진 교회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죽비가 되어 영적 침체에 빠진 우리를 내려치고 있습니다. 시인은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자신의 간절함을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마음에 빗대 말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6)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과 ‘한 말씀’을 사모하던 시인은 사람들에게 인자하신 주님만을 의지하라고 권면합니다. 깊은 물을 통과한 이의 말이기에 힘이 있습니다.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철저한 수동성 속에 갇힌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 결과를 맡기기에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진정한 기다림은 기다림의 대상을 향한 길 떠남을 내포합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영접하기 원한다면 주님이 오시는 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 순례자입니다. 이번 대림절을 지나는 동안 우리 믿음이 성숙해져서 자아라는 좁은 틀을 깨고 나와 주님의 큰 세계에 속한 이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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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3년 12월 01일 12시 02분 46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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