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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덕 속을 걷는 사람들 -단3:19-25

by 【고동엽】 2022. 7. 4.
화덕 속을 걷는 사람들
단3:19-25
(2013/11/17)

[그러자 느부갓네살 왕은 잔뜩 화가 나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고 얼굴빛이 달라져, 화덕을 보통 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의 군대에서 힘센 군인 몇 사람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묶어서 불타는 화덕 속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들을, 바지와 속옷 등 옷을 입고 관을 쓴 채로 묶어서, 불타는 화덕 속에 던졌다. 왕의 명령이 그만큼 급하였다. 화덕은 매우 뜨거웠으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들도 그 불꽃에 타서 죽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세 사람은 묶인 채로, 맹렬히 타는 화덕 속으로 떨어졌다.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서 급히 일어나, 모사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묶어서 화덕 불 속에 던진 사람은, 셋이 아니더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그러합니다. 임금님." 왕이 말을 이었다. "보아라,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다. 모두 결박이 풀린 채로 화덕 안에서 걷고 있고, 그들에게 아무런 상처도 없다! 더욱이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과 같다!"]

• 좀비들의 거리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태풍 하이옌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필리핀의 형제자매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자연재해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빈도수도 늘어나는 것을 두려움으로 지켜보면서 ‘바람을 심어 광풍을 거둔다’(호8:7)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편리함을 위한 대량소비가 자연의 반란을 불러왔습니다. 사람다움이 무엇인지를 자꾸 묻지 않을 수 없는 나날입니다. 요즘은 얼이 죽어버린 이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우울합니다. 영혼없는 좀비들(zombies)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어느 전직대통령에 대한 신화화가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영남권의 어느 현직 시장은 그분을 일러 반인반신적 존재라고 말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그런 행태에 대해 논평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것이 우리 시대가 처한 위기의 징조인 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찬탄하는 거야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하지만 누군가를 우상으로 만드는 일은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게는 지금 우리 사회의 정신의 등뼈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때입니다.

주전 2세기 중엽, 이스라엘은 셀류쿠스 왕조의 임금 안토니우스 에피파네스 4세 치하에 큰 시련을 당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정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강력한 종교탄압정책을 펼쳤습니다. 율법 두루마리를 읽거나 소지하는 것을 금했고,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했으며, 할례도 금지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것들을 다 금지한 것입니다. 위반하는 이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성전의 제단 위에서 유대인들이 불결하게 여기는 돼지를 잡아 제우스신에게 바치기도 했습니다. 엄혹한 시절이었습니다. 바로 그 무렵에 등장한 것이 다니엘서입니다. 다니엘서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시대는 바벨론과 그 뒤를 이은 메대 페르시아이지만, 다니엘서의 잠정적 독자들은 위기를 겪고 있던 주전 2세기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니엘서의 저자는 포로로 잡혀가 제국의 관료로 살아가야 했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등장시켜 그들이 얼마나 굳건한 의지로 자기 신앙을 지켰는지를 감동적인 이야기로 들려줌으로써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신앙을 굳건히 지키라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 신상을 만드는 사람들
하나님이 보내신 꿈을 통해 제국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은 뭔가 안전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민족과 언어가 다른 이들이 뒤섞인 제국의 통합을 위해 백성들에게 국가숭배 의식을 강요하기로 작정하고는 거대한 금신상을 세웠습니다. 높이가 예순 자, 너비가 여섯 자였다고 합니다. 대략 높이 27미터에 너비 2.7미터의 신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왕은 신상 제막식에 제국의 관료들을 다 불러 모읍니다. 왕의 위엄을 과시하고 반역의 싹을 미리 자르려는 의도였을 겁니다. 그는 나팔과 피리를 비롯한 각종 악기 소리가 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신상 앞에 절을 하라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엎드려 절하지 않는 자는 즉시 불타는 화덕 속에 던져 넣겠다는 위협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독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일사불란一絲不亂이 아닐까요? 독재자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홀로 독獨’ 자가 가리키듯 그는 자기 뜻을 거스르는 이들을 견디지 못합니다. 독재자 곁에 아첨꾼들만 남게 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국가주의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개인의 자유나 양심은 고려 사항이 되지 못합니다. 집단의 논리는 맹목적일 때가 많습니다.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불온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조직의 쓴 맛(?)을 안겨줍니다. 집단주의의 광풍이 불어올 때 뜻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 은둔하거나, 그 시대와 맞서다가 희생을 당하기도 합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을 영화화한 동명의 영화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오스카는 음란하고 광기에 찬 세상의 실상을 엿보고는 더 이상 자라고 싶지 않아 3살에 성장이 멈춘 아이입니다. 오스카의 유일한 기쁨은 양철북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는 어느 날 자기의 분신과도 같은 양철북을 메고 아버지가 참여하고 있던 나치의 집회장에 숨어듭니다. 사람들은 군악대의 연주에 맞추어 그야말로 일사불란하게 열을 지어 행진합니다. 연단 밑에 숨어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오스카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자기 양철북을 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다른 북소리로 인해 박자를 놓치고 허둥거립니다. 발이 엇나가며 열이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음 순간 작가의 빛나는 상상력이 작동됩니다. 나치의 선동장은 갑자기 무도회장으로 변합니다. 사람들이 오스카의 북소리에 맞춰 왈츠를 추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비록 영화이기는 하지만 광기의 자리를 친교의 춤판으로 바꾼 오스카의 북소리를 저는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시대이든 기독교인의 책임은 하늘 북소리를 울려 광기에 사로잡힌 이들이 본래의 선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회복시키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해
오늘의 본문은 오스카의 북소리처럼 국가주의의 선전장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로 바꾼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빌론 제국에 포로로 잡혀와서 살고 있던 유대인 청년들입니다. 그들의 히브리식 이름은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였지만 우리는 그들의 바빌론식 이름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더 익숙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왕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지방 행정 관료로 일하고 있던 그들도 신상 낙성식에 참여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차마 그 신상 앞에 절할 수 없었습니다. 현실 권력가인 왕의 지배는 인정하지만 그를 신적 존재로 인정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신앙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국가주의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이들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출세가도를 달리는 그들이 눈에 들어간 가시처럼 불편했는데, 그들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점성가들이 나서서 그들을 고발합니다. 왕은 소환된 그 세 젊은이들을 친히 심문합니다. 왕의 신을 섬기지도 않고,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냐고 묻습니다.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그는 번민합니다. 없애버리기는 아깝고, 그냥 두자니 왕의 체통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설득해보려고 합니다. 지금이라도 악기 소리가 들리면 엎드려 절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거절한다면 죽음을 면할 수 없다면서 세상의 어떤 그들을 구해낼 수 없다는 말까지 덧붙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이제 양자택일을 해야 할 상황입니다. 신앙 양심에 반하는 선택을 하든지, 아니면 죽든지. 절체절명의 자리입니다. 왕은 그들이 자기 호의를 받아들여 신상 앞에 절을 할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는 전혀 뜻밖의 말을 듣습니다. 세 사람은 그 일을 두고는 왕 앞에 대답할 필요조차 없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 속에 던져져도, 임금님, 우리를 지키시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활활 타는 화덕 속에서 구해 주시고, 임금님의 손에서도 구해 주실 것입니다."(3:17)

‘우리’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단어는 마치 그들이 서로 어깨를 단단히 겯고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이 말 속에 담겨 있는 뜻은 무엇입니까? 세상에는 왕의 권세보다 더 높은 통치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리벙벙한 느부갓네살 왕에게 들려온 그 다음 말은 더욱 치명적입니다.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임금님의 신들은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굽어살펴 주십시오."(3:18)

말은 정중하지만 그들은 마치 왕보다 큰 사람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신앙인의 본보기를 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정신이 이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득 산헤드린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던 베드로와 요한이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명령을 듣고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행4:19-20)

신앙은 이처럼 장엄합니다. 한 존재를 태산보다 크게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이런 신앙을 너무나 사소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마치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요술방망이처럼 여깁니다. 타락한 종교는 맛 잃은 소금처럼 밖에 버려져 오고가는 이들의 발에 짓밟힐 수밖에 없습니다. 며칠 전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교회 목사의 범과 혐의가 매스컴에 대서특필 되었습니다. 이게 다 신앙을 사적 욕망의 수단으로 삼은 결과입니다.

• 우리 곁을 걷는 이
화덕 속에 던져지는 한이 있더라도 신앙 양심을 버릴 수 없다고 말했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그들은 왕의 진노를 사서 더 뜨겁게 달궈진 화덕 속에 던져졌습니다. 그들을 화덕 속으로 밀어 넣던 이들이 타 죽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왕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멀찌감치 서서 화덕 속을 들여다봅니다. 그의 내면에 깃든 불안함이 엿보입니다. 어쩌면 그들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요? 어느 순간 왕은 깜짝 놀라 모사들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묶어서 화덕 불 속에 던진 사람은, 셋이 아니더냐?" 그들이 그렇다고 말하자 왕이 말을 잇습니다.

"보아라,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다. 모두 결박이 풀린 채로 화덕 안에서 걷고 있고, 그들에게 아무런 상처도 없다! 더욱이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과 같다."(3:25)

이 놀라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신 야훼 하나님을 떠올립니다. 화덕은 다니엘서가 기록되던 당시 민중들이 겪던 현실 상황을 나타내는 것일 겁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화덕 속에 던져지는 것 같은 희생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가시밭 위를 맨발로 걷는 것과 같은 경험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방인 압제자의 입을 통하여 놀라운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화덕 속을 걷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결박은 풀렸고 상처 하나 없더라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다른 존재의 모습이 신의 아들과 같았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명백합니다. 화덕 속을 걷는 것 같은 현실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기는커녕 그들 곁에서 함께 걸으며 당신의 백성들을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모세와 만나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떨기나무 한 그루와 같은 밑바닥 인생들 가운데 오셔서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환히 빛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다니엘서를 통해서 다시 한번 만나게 됩니다.

이 이야기의 종결부는 놀라운 반전을 보여줍니다.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은 신하들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돌보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명령합니다. 왕의 명령을 거역하면서까지 당신을 섬기려 한 이들을 보호하고 또 구원하시는 야훼 하나님에 대해 경솔히 말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명령도 내립니다. 마지막 대목이 압권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를 믿는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신은 다시 없을 것이다."(3:29c) 압제자들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목숨을 걸고 그를 믿는 이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형태는 다를지 몰라도 지금 우리 앞에도 금 신상이 놓여 있습니다. 그 신상은 숭배를 요구합니다. 그 신상은 어떤 때는 개인의 양심을 고려하지 않고 사람들을 몰아가는 국가주의로 나타나기도 하고, 욕망의 길로 우리를 몰아넣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로 나타나기도 하고, 개인에 대한 우상화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한국 기독교가 무력해진 것은 그 신상 앞에 지레 넙죽 엎드린 데 있습니다. 권력에 아부하고, 물질이 주는 단맛에 취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순간 기독교는 낡은 종교로 전락하게 됩니다.

우리는 평안함, 세속적인 성공, 건강을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몸으로 증언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화덕 속으로 기꺼이 던져질 각오가 없어 기독교는 힘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다만 귀신 들린 아이 아버지가 주님께 아뢴 것처럼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막9:24) 초겨울의 문턱을 넘고 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우리 믿음이 진실한지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믿음의 본을 보인 사람들을 자꾸만 묵상하며 우리 삶도 그들을 닮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믿음의 싹이 다시금 돋아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3년 11월 17일 12시 04분 0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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