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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릴 것, 붙잡을 것 -요3:22-30

by 【고동엽】 2022. 7. 4.

버릴 것, 붙잡을 것
요3:22-30
(2013/10/27, 종교개혁기념주일)

[그 뒤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지방으로 가셔서, 거기서 그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세례를 주셨다. 살렘 근처에 있는 애논에는 물이 많아서, 요한도 거기서 세례를 주었다. 사람들이 나와서 세례를 받았다. 그 때는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대 사람 사이에 정결예법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보십시오. 요단 강 건너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분 곧 선생님께서 증언하신 그분이 세례를 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에게로 모여듭니다."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너희야말로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한 말을 증언할 사람들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 주님의 팔에 나를 던지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496주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에 자신이 신학교수로 섬기고 있던 대학 교회 겸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문에 가톨릭교회가 판매하고 있던 면죄부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95개조의 격문을 붙임으로 종교개혁의 불을 지폈습니다. 면죄부는 당시의 가톨릭 신학의 보속론補贖論과 연관된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순례를 하거나 고행을 함으로써 자기 죄 값을 치르거나,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 이들은 돈을 냄으로 보속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면죄부는 바로 그런 신학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인간이 공적을 통해 죄를 용서함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그런 신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이란 죄의 용서 혹은 구원의 문제를 둘러싼 신학적인 싸움으로 촉발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 갈등이나 위험이 없는 곳은 없지만, 제도로서의 교회 역시 논란의 대상입니다. 강남의 어느 교회에서는 34년 전에 세상을 떠난 전직 대통령의 대형 영정을 강대상에 걸어놓고 추모예배를 드린 것이 논란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분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그것은 권력에 자발적으로 굴복하는 개신교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 되고 있습니다. 부끄럽고 참담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썩으면 가장 흉한 법입니다. 외부 사람들이 오늘의 개신교회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는 까닭은 그 때문입니다.

교회사를 일별해보면 타락한 교회에 대한 저항은 거의 매 시대마다 있었습니다. 저는 특히 체코의 종교개혁자인 얀 후스(Jan Huss, 1372-1415)를 떠올립니다. 그는 영국의 개혁자인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4-1384)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체코 프라하의 베들레헴 교회를 섬기던 후스는 놀랍게도 라틴어가 아닌 체코의 일상어로 예배를 진행했습니다. 그것은 사제의 권위를 스스로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사제들의 부정축재, 성적인 난잡함, 알코올 중독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특히 성만찬을 온전하게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성만찬 석상에서 평신도들에게는 빵만 제공되었고 포도주는 오로지 사제 계급만 먹었습니다. 일종의 성례전적 권위주의인 셈입니다. 그는 십자군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교황이 발행하던 면죄부 판매가 비성서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교회나 공의회 혹은 교황보다 성경이 더 큰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교권에 도전했으니 그의 운명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일종의 체제 전복자였고, 요즘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말로 ‘항명자’, ‘배신자’였습니다. 양심을 지키기 위해 조직을 배신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것은 이제나 그제나 죽음입니다. 얀 후스는 1415년 독일 남부의 아름다운 호반 도시 콘스탄츠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위클리프 사상을 전파한다는 죄목으로 화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공의회는 마지막으로 그의 신학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지만 후스는 "나에게는 순간의 형벌을 피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좋은 일이며, 영원한 수치를 당하는 것보다 불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 더 유익하다. 그런 일들은 바로 나를 주님의 팔에 던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후 처형당했습니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서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신앙은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값진 유산입니다. 그들은 비록 죽었지만 인간이 얼마나 숭고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인류의 사표들로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기념일에 엉뚱하게도 얀 후스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그들 개혁자들은 교회의 본질을 지켜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늘 개혁되지 않으면 그 본질에서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회가 있지만 참 예수의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도 반성적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개혁은 그릇된 것을 꾸짖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본질적인 것을 꼭 붙드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저는 오늘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을 통해 오늘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해보고 싶습니다.

• 성전 체제와의 대립
이제 본문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본문은 ‘그 뒤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특정한 시간을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장치라고 보면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대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 머물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셨습니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살렘 근처의 애논이라는 곳이었는데, 그곳에 물이 많았기 때문에 세례를 베풀기에 적합했던 것 같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좀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세례식은 있었습니다. 개종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의식 절차일 때도 있었고, 에세네파의 입문의식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라는 측면에서 조금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인 마가는 요한의 세례를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막1:4)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요한은 죄 사함의 상징으로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 속에 담겨 있는 뜻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사실 죄 용서의 문제를 독점하고 있던 것은 성전 체제였습니다.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제물을 준비하고, 그것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전에 나아가서 제사장들의 도움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는 제사장이라는 매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지위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특권이 문제입니다. 특권이 주어지는 순간 거룩함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벌건 욕망과 이해관계만이 도드라지게 마련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기에 성전체제를 향해 강도의 굴혈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그러니까 성전체제에 대한 부정이자 도전이었던 셈입니다. 예수님도 그 세례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살렘 근처의 애논은 조용하지만 일종의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불온한 땅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대 사람 사이에 정결예법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말하지만, 말이 좋아 논쟁이지 그것은 정말 심각한 해석학적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 그는 흥하여야 하고
그런데 정작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을 당혹케 한 것은 그런 논쟁이 아니라, 자기들을 추종하던 이들이 예수에게 몰려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뜻을 세우고 살아도 사람은 이렇게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은근한 경쟁심이 문제였습니다. 사람 수를 세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자들은 스승 요한에게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보고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대답은 의외로 차분합니다.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27)

장엄한 말입니다. 우리 어둔 눈이 탁 틔어지는 말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자기들의 성공을 자랑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경우를 더러 봅니다. 그들을 부러워하는 이들은 그분들을 하나님의 큰 종으로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렇게 큰 교회를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교회를 크게 해 본 적이 없는 이들은 그런 말 앞에서 한없이 작아집니다. 그런데 이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소위 말하는 성장을 추구하는 이들이 할 때와, 정신의 그릇이 큰 사람이 더 큰 정신의 등장을 기뻐하며 말할 때 그 의미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이 실망하거나 말거나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제자들도 그 일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까지 말합니다. ‘나는 아니다’. 이 말 한 마디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요한을 참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을 가리켜 여인이 낳은 자 가운데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역할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가끔 인용합니다만 정진규 선생의 시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모두 잊고 오늘은 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면 된다 알 수가 있다 바다도 몇천년을 그렇게 지워지고 있을 것이다 앞물결을 뒷물결이 싸악 지워내고 또다시 뒷물결이 앞물결을 싸악 지워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바다는 언제나 싱싱하게 싱싱하게 다시 채워지고 있을 것이다 지워지는 것은 이토록 아름답다 분명하게 지울 줄 아는 사람만이 가장 분명하게 다시 태어난다"(<밥詩·4> 부분)

잘 지워질 줄 아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세상을 푸르게 푸르게 바꾸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크게 기뻐한다. 나는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29)

그는 지금 스스로 지워지고 있음을 알지만 그 때문에 기쁘다고 말합니다. 종교란 이런 것입니다. 종교를 개혁한다는 것은 제도를 개혁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우리 속에서 자랄 때 개혁은 시작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마치 못이라도 박듯이 마지막 말을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30)

이 말 한 마디를 하지 못해 종교인들이 타락했고, 교회의 기둥이 기울어졌습니다.

• 오늘 우리는?
고집쟁이 농사꾼이었던 봉화의 전우익 선생님은 "모든 참된 삶은 부단히 버리는 것과 든든히 붙잡는 것의 통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개혁기념주일에 우리가 다짐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붙잡아야 할 것은 꼭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물질이 주는 안락함과 쾌적함에 중독된 교회는 쇠하여야 하고, 예수 정신만 굳게 붙드는 교회는 흥하여야 합니다.
-불의와 공모하면서 기득권의 이해에 복무하는 교회는 쇠하여야 하고, 공의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려는 교회는 흥하여야 합니다.
-부유하고 힘 있는 이들이 의사 결정권을 독점하는 교회는 쇠하여야 하고, 가장 작은이들의 신음소리가 경청되는 교회는 흥하여야 합니다.
-믿음을 빙자하여 사람들을 겁박하는 교회는 쇠하여야 하고, 마음 시린 이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으려는 교회는 흥하여야 합니다.
-영광의 신학에 사로잡힌 교회는 쇠하여야 하고, 십자가의 신학에 충실한 교회는 흥하여야 합니다.
-중산층의 사교장처럼 변한 교회는 쇠하여야 하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교회는 흥하여야 합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목사들은 쇠하여야 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김의 도리를 다하는 이들은 흥하여야 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섬김의 직책을 권위로 이해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은 쇠하여야 하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낮은 곳을 밝히는 이들은 흥하여야 합니다.
-믿음을 가장하여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쇠하여야 하고, 모든 이의 종이 되려는 이들은 흥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정말 영생을 원하십니까? 예수의 길을 걸을 생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버릴 것을 버리십시오. 아깝더라도 말입니다. 붙잡아야 할 것은 굳게 붙잡으십시오. 그것이 설사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해도 말입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와 우리 교회에,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3년 10월 27일 11시 55분 5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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