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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것, 황제의 것 -마22:15-22

by 【고동엽】 2022. 7. 4.
하나님의 것, 황제의 것
마22:15-22
(2013/10/20)

[그 때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면 말로 트집을 잡아서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할까 의논하였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자기네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지 말씀하여 주십시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의 간악한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 달라." 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예수께 가져다 드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황제의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탄복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남겨 두고 떠나갔다.]

• 종교가 바로 서야 할 까닭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날이 많이 차가워졌습니다. 지난 주에 자전거를 타고 남한강변을 달리면서 맡았던 깨 향기가 자꾸 떠오릅니다. 베어 넘겨졌으면서도 향을 발하는 깻단은 삶이 힘들다고 엄살부터 하고보는 우리 삶을 말없이 꾸짖고 있었습니다. 한강에 얼비친 해넘이를 보며 어린왕자를 생각했습니다. 어린왕자는 어느 쓸쓸한 날 작은 별에서 의자를 조금씩 옮겨놓으며 해지는 광경을 마흔 네 번이나 보았다지요? 저물녘이 되면 낮 시간 동안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열정이 눅어지면서 조금 차분해집니다. 삶이 건강해지려면 해 뜰 무렵의 활기도 필요하지만 해질 무렵의 고요함도 필요한 법입니다. 가을이 되면 나무들은 초록의 열기 속에 감춰두었던 자기의 본 모습을 다양하게 드러냅니다. 이래저래 자기를 돌아보게 되는 계절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생길의 어디쯤 걷고 계십니까? 이제 막 여정을 시작한 이도 있고 종착역이 머지않은 이들도 있습니다. 어느 때를 살고 있든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중심을 향한 순례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은 미로와 같아서 길을 찾았다 싶은 순간 길을 잃기도 하고, 길을 잃었다 싶은 순간 문득 길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를 길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그 말은 예수처럼 생각하고, 예수처럼 느끼고, 예수처럼 행동하며 살기로 작정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참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꾸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바치는 까닭은 주님의 마음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 마음을 조율하기 위해서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연주에 앞서 악장의 리드에 따라 각자의 소리를 조율합니다. 그래야 조화로운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듬살이의 풍경이 조화롭지 못한 것은 저마다 자기중심의 소리를 내기 때문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어느 한 분야도 시끄럽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종교가 바로 서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종교는 우리를 삶의 근본 문제 앞에 세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도화된 종교는 늘 특권층을 낳게 마련이고, 그 특권층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말하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벌건 욕망을 추구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갈급한 마음을 이용하여 제 배만 불리는 종교 지도자들이 참 많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체제와 치열하게 싸우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주님은 가장 신성해야 할 성전이 강도의 굴혈로 변한 현실을 보며 분노하셨습니다. 기득권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치부를 폭로하는 예수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 양날 칼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불편하게 생각했던 이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구별된 삶을 산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던 이들인데, 예수님이 그들의 위선을 사정없이 폭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눈먼 인도자들’,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우는’ 사람이라고도 했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는 버렸다"(마23:23)고 꾸짖기도 하셨습니다. 거짓된 종교야말로 가장 큰 위험임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에둘러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습니다. 예수를 올무에 몰아넣기 위해 그들은 치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평상시라면 경멸해 마지않았을 헤롯 당원들과도 공모를 했습니다. 기득권에 위협이 되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한 불의한 연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예수님의 자문을 구하는 모양새를 갖춥니다. 보냄을 받은 이들은 질문에 앞서 예수를 한껏 추켜세웁니다. 선생님은 진실한 분이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실 뿐 아니라, 아무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분이기에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미더운 말은 아름답지 않고, 겉만 번지르르한 말은 미덥지 않다"(信言不美 美言不信-도덕경 81장)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부리며 사는 이들이 명심해야 할 말입니다. 지금 예수를 찾아온 바리새인들의 말에는 진정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미끼 언어일 따름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찾아온 것은 할라카(halakah)라는 전통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현실에서 발생한 어떤 사안을 두고 사람들 사이의 의견이 갈릴 때면 율법의 권위자들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내리는 판단을 권위 있게 받아들여 자기들의 행동에 반영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유대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권에도 있는 전통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내전에 시달리는 시리아에서 이슬람 전통이 식용을 금지한 개, 고양이, 당나귀 고기 식용을 허락한다는 파트와(Fatwa)가 내려졌다는 소식을 보았습니다. 파트와란 이슬람의 고위 성직자의 ‘율법 해석’을 뜻하는 단어인데, 굶주림이라는 극한적인 상황에서 최고 종교 지도자가 그런 해석을 내림으로써 사람들은 종교적 부담 없이 그런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짐승들에겐 안 된 일이지만 굶주린 이들에게는 다행인가요?

바리새파 사람들이 제기한 질문은 사실 심각합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이 질문은 양날의 칼입니다. 어느 쪽으로 답해도 예수는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면 로마의 조세 정책에 저항하도록 민중들을 선동한다는 혐의를 쓰게 될 것이고, 옳다고 한다면 예수는 졸지에 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히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런 함정 질문을 던져놓고 쾌재를 불렀겠지요.

• 그대의 '주'는 누구인가?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면서 세금으로 내는 돈을 보여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예수께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20)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황제의 것입니다." 로마가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하여 은으로 주조한 공식화폐인 데나리온 한 면에는 월계관을 쓴 황제의 흉상이 양각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아우구스투스의 존엄한 아들 디벨리우스 황제"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다른 면에는 황태후인 리비아가 신들의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양각하고는 "최고의 사제"라고 새겨놓았습니다.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그 돈은 황제에게 속한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이 제시됩니다.

"그렇다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21)

얼핏 보면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제기한 함정 질문을 교묘하게 빠져나가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씨름으로 이야기하자면 되치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황제의 것’과 ‘하나님의 것’은 구별된다고 답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첫째, 황제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함으로써 예수님이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황제는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로마를 통일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가장 귀한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평화의 왕’, ‘구원자’가 그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이들도 스스로를 신으로 여겼습니다. 이른바 황제숭배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황제가 신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반역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황제는 신이 아니라 황제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을 향한 무언의 질문이거나 책망입니다. ‘너희는 지금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며 사느냐?’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조차 황제에게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니냐?’ 어떤 이들은 그들이 데나리온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이중적 처신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로마의 지배를 거절하는 척하면서도 실상은 로마의 질서에 순응한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고 싶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사람됨은 자기 자신을 삶의 원주인이신 하나님께 바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돈과 권력에 온통 우리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갑니다. 충성의 대상이 바뀌어 있습니다. 우리 삶이 맥 빠진 까닭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의 서막에 등장하는 히브리의 두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기억합니다. 히브리인들의 수가 많아지자 불안을 느낀 애굽 왕 바로는 산파들을 불러 히브리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사내아이를 낳으면 엎어놓아 죽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산파들은 차마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양심에도 어긋나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법에도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생명 중심의 사고를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출애굽의 보이지 않는 영웅은 이 산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이가 권력자의 부당한 요구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은 하나님께 바친 사람들입니다.

• 어린 소나무의 꿈
70년대와 80년대에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하던 찬송가가 몇 장 있습니다. 336장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2절에 나오는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라는 대목을 부를 때는 비장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찬송가 586장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가사 하나하나가 가슴을 치지 않는 대목이 없습니다. ‘고상하고 아름답다 진리 편에 서는 일/진리 위해 억압 받고 명예 이익 잃어도/비겁한 자 물러서나 용감한 자 굳세게/낙심한 자 돌아오는 그 날까지 서리라’. 힘겨운 시절이었지만 우리는 꿈이 있었기에 비참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적어도 우리는 황제에게 바칠 것과 하나님께 바칠 것은 구별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지금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도 이 땅에 살고 있으니 이 땅의 질서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부득이 경쟁을 하기도 합니다. 법과 관습을 따르기도 합니다. 시민으로 살아간다면 시민의 의무를 감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바쳐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우상들에게 바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들을 봅니다.

인권 단체인 국제정의선교회(International Justice Mission)의 대표인 게리 하우겐은 하나님의 뜻이면서 위험한 일이 두 가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궁핍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게리 하우겐, <정의를 위한 용기>, p.116 참조) 그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데 위험하지 않다면, 내가 따르는 분이 과연 예수님인지 멈춰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도 말합니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돕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없다는 것이지요. 가끔 세상에서 하는 자신의 일과 신앙생활이 겉돌거나 부딪히는 일 때문에 고민하는 이들을 더러 만납니다. 단호히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자니 사람들과 사사건건 부딪쳐야 하고, 적당히 타협하며 살자니 꺼림칙합니다. 고민은 알겠지만 누구도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개인이 결단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흔들리면서도 그리스도의 법을 향해 몸을 기울여볼 필요는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에 반응하는 일이 더 쉽고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참 좋은 일입니다.

며칠 전 부산에서 올라온 어느 노래꾼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는 눈 덮인 산야에 홀로 선 어린 소나무의 꿈은 봄이 아니라, 언제라도 푸르른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믿음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이 가을날 우리 마음의 주인이신 주님께 자꾸만 우리 마음을 바치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3년 10월 20일 12시 00분 1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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