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고전15:31-34
(2013/10/13)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그 일로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내가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다고 하더라도, 인간적인 동기에서 한 것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만일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나쁜 동무가 좋은 습성을 망칩니다.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죄를 짓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내가 이 말을 합니다만, 여러분 가운데서 더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 나무늘보처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10월의 한복판입니다. 벌써 단풍이 곱게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늘공원에는 억새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계절이 그렇게 무르익어 가는 데도 우리는 시간에 쫓겨 그것을 충실히 누리지 못하고 지냅니다. 분주함이야말로 도시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만성질환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며 사는 동안 우리 영혼은 자꾸 메말라 갑니다.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문득 허무감이 찾아오기도 하고, 외로움에 목이 메기도 합니다. 모두가 즐거워 보이는 세상에서 홀로 외톨이가 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런 상황을 일러 ‘내던져짐’(Geworfenheit)이라 표현했습니다. 낯선 곳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느낌, 어쩌면 여러분도 한 번쯤은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똑같은 상황을 ‘구토’ 혹은 ‘현기증’으로 설명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머리를 드는 순간 찾아오는 현기증처럼 문득 우리 삶이 속절없이 흔들림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생명을 받아 살고는 있지만 삶은 늘 안개 속을 더듬어 가는 것처럼 모호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답이 없는 문제인데, 괜히 골머리 썩을 이유가 없다고들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가벼운 읽을거리를 찾거나 TV에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에 빠져듭니다. 얼마 전 영남대학교의 박홍규 박사의 칼럼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핀란드 TV에서 청소년들의 최고 인기 프로그램은 ‘시사 토론, 뉴스, 다큐멘타리’ 순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능과 드라마가 대세인 우리와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우리는 공적인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뒤에서 욕은 하지만 그 문제가 우리의 문제라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공적인 문제는 나 아닌 누군가가 처리할 거라고 생각하며 수수방관합니다. 그 때문에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 가운데 하나가 ‘태만’ 혹은 ‘나태’입니다. 태만이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태를 뜻하는 영어 단어는 ‘sloth’입니다. 이 단어는 ‘나무늘보’라는 뜻도 있습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이 동물을 사람들은 게으름, 나태의 표상으로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 전통이 말하는 태만 혹은 나태는 영혼이 병들어서 의욕과 활기를 잃은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불안과 염려가 많고, 잔뜩 주눅이 들어 의기소침해 진 상태 말입니다. 헬라어로는 ‘아케디아akedia’라고 하는 데, ‘관심’을 뜻하는 케도스kedos와 ‘없다’는 뜻의 아a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아케디아는 그러니까 자기에 관련된 것을 빼고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다른 일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속물적인 삶의 특색 가운데 하나로 천박한 호기심을 들고 있습니다.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될 것에는 관심을 가지면서,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연예인이나 공직자들의 사생활에 관련된 문제에는 깊은 관심을 보이지만, 오늘 고통 받고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모른 체 합니다. 교회 전통이 말하는 아케디아, 곧 나태함은 이런 걸 가리키는 말입니다.
• 의도적 눈 감기
기독교가 가르치는 죄는 단순히 도덕적, 법률적 죄를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도둑질, 폭력, 살인, 거짓말 등을 ‘악kakos’ 혹은 ‘악행kakia’이라고 말합니다. 죄란 그런 악행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등지는 것이야말로 죄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의 유한한 것들에 정신이 팔린 상태가 죄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정신을 빼앗아가는 그 대상을 일러 우상이라 말합니다. 우상에게 팔린 영혼은 죄 가운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죄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앞에서 말한 악행이고, 다른 하나는 나태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나태라고 말했지요?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에 지금 당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사람다움은 누군가의 요구에 응답할 줄 아는 데 있습니다. 물론 도움을 청하는 이들 모두에게 응답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응답해야 합니다. 기왕이면 친절하게, 유쾌하게 말입니다. 서울역의 노숙인들을 돕기 위해 헌신하는 목사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돈이 있어서, 능력이 있어서, 한가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연민의 마음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그 일을 지속할 뿐입니다.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늘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돈 몇 푼, 필요한 옷가지 몇 점 나눠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분들이 자기 생을 소중히 여길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인내하며 다가섭니다. 저는 그렇게 헌신하는 이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수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영적인 메마름에 빠져 있는 것을 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 까닭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자기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을 고통 받는 이들 속에 숨겨두셨습니다. 우리가 그분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 때 우리 속에 기쁨이 유입됩니다. 하늘의 숨이 우리 속에 차오르게 됩니다.
몇 주 전 외국의 한 강연을 듣다가 한 구절이 제 가슴을 툭 쳤습니다. ‘willful blindness’, 굳이 번역하자면 ‘의도적 눈 감기’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불의한 일들에 대해 모르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이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서 약자들의 희생이 강요되어도 우리는 모른 체 합니다. 물론 그것이 내 이익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습니다만 보다 심층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삶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일쑤 확실한 것을 붙잡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약자 편에 서기보다는 강자 편에 서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믿는 이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성경은 늘 억압받는 이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라고 가르칩니다. 토라의 가르침이 그러하고, 예언자들의 선포가 그러하고 예수님의 삶이 그 증거입니다. 교회가 힘 있는 이들 편에 서서 힘없는 이들을 서럽게 한다면 그 때부터 교회의 몰락이 시작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 유로지비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주는 충격이 참 큽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상징적인 죽음 즉 내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마음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욕망, 미움, 원망, 절망, 좌절을 떨쳐버린다는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구체적인 죽음의 위협 아래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해 그가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으며 살았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파선도 당하고, 바다 위를 표류하기도 하고, 사람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을 수도 없이 겪었습니다.
도대체 그는 왜 그런 온갖 위험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일까요? 좋은 배경에 좋은 학식을 지니고 있으니 평범하게 살기로 작정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서 고생을 했습니다. 재산을 모으거나 권세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자면 그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기꺼이 어리석어지기로 결심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삶의 신비를 엿보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1:18)
러시아에는 유로지비(yurodivy)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보 성자’라는 뜻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백치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남들이 듣지 못한 것을 듣는 참 지혜자들입니다. 그들은 악과 부정을 폭로하면서도 스스로는 바보처럼 처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유로지비의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왜 뻔히 보이는 고난을 피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요?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욕망이라는 불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들을 건져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미 안방까지 연기가 차올랐는데도 잠에서 깨어날 줄 모르는 이들을 살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바울도 그런 고민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눈 뜬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눈에 보이지 않던 세계, 그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보고나니 지난 날 그가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들이 덧없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마치 도깨비에 홀려 싸리 빗자루와 밤새 사투를 벌이는 사람처럼 그는 허망한 정열에 사로잡혀 살았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를 통해 사람다운 삶, 세상의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평안의 삶, 참 기쁨의 삶이 그에게 열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접속되고 나니 삶이 온통 고마움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빚진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갚을 길 없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삶을 다 바쳐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가 혼신의 힘으로 전하고 싶었던 말은 단순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고전6:20)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인생을 헛된 일에 바칠 수는 없습니다.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다운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그런 삶을 확장하는 일에 자기를 다 바쳤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죽기를 각오했기에 그는 힘 있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옛말에 대사일번사후소생大死一番 事後蘇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크게 한 번 죽은 후에야 비로소 살아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난 바로 그때 크게 죽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새로운 존재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 정신 차리기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죄를 짓지 마십시오."(34a). 바울 사도의 이 말은 바쁘게 살면서도 실상은 나태함에 빠진 우리 영혼을 내리치는 죽비입니다. 정신을 쏙 빼놓고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것 아닌가 싶습니다.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소비라는 쳇바퀴를 굴리도록 강제합니다. 숨은 차고, 땀은 나는 데 마음의 헛헛함은 가실 줄 모릅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정신을 차린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 방탕한 세월을 보내던 탕자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문득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귀향을 서둘렀습니다.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정신을 차린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멀리하는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 시인인 메난데르Menander의 말을 인용합니다. "나쁜 동무가 좋은 습성을 망친다." 바울이 말하는 ‘나쁜 동무’는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도록 유도하는 이를 일컫는 말일 겁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그는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안내하는 이입니까? 아니면 그 삶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이입니까? 우리는 지금 누군가의 벗이거나 동료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어느 길로 이끌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신 사람으로 인식했기에 그들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셨습니다. 귀히 여겼기에 그들 속에 잠들어 있던 가장 아름다운 삶의 가능성이 깨어났습니다. 예수를 길로 삼아 살아가는 이들 또한 세상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게 마련입니다.
누구에게나 삶은 힘겹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파종자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척박한 이 세상 구석구석에 기쁨과 감사, 사랑과 정의, 평화와 일치의 씨앗을 심기 위해 굼뜬 몸을 일으켜 세우십시오. 자기라는 감옥에 유폐된 채 우울하게 살지 말고, 이웃과 더불어 삶의 축제를 즐기기 위해 용기를 내십시오. 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세상을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이 거룩한 소명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3년 10월 13일 12시 03분 3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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