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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크리스마스 -눅1:46-56

by 【고동엽】 2022. 7. 5.
다시, 크리스마스
눅1:46-56
(2013/12/25, 성탄절)

[그리하여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함께 석 달쯤 있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 위대한 노래
오늘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가 부르는 기쁨의 노래가 지금도 세상 구석구석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도 울려 퍼지기를 빕니다. 오늘만큼은 서로 대립했던 모든 주체들이 날카로워진 마음을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대림절기를 고요하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첨예한 사회적 갈등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느끼는 수많은 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또 거기에 반대하는 이들도 거리로 달려 나왔습니다. 철도 노조 집행부를 체포한다는 명분하에 노조 본부에 공권력이 투입되기도 했습니다. 민주노총은 28일을 총 파업의 날로 정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대규모 공습을 자행했습니다. 거리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상의 꿈은 또 다시 유보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림절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 가사가 깊이 와 닿았습니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그 가락을 부를 때마다 역사의 그늘 아래 살면서 좋은 세상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했던 이들의 심정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습니다. 대림절 찬송 가운데 오시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가 그분의 오심을 왜 고대하는지가 잘 드러내는 것은 대개 한국인들이 만든 찬송입니다.

"높은 자 낮추고 비천한자 높였네/만민 위해 오셔서 사슬을 풀어주소서
주린 자 먹이며 병든 자를 고쳤네/천하 만민 돌보사 빛의 길 가게 하소서"(98장 2,3절 하반)
"분열분쟁 사라지는 평화세상 바라보며 평등 인간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다리세"(100장 하반절)

공평함이 없는 세상, 불의와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을 극복하고 생명과 평화가 넘실거리는 세상을 이루고픈 모든 이들의 염원이 대림절 찬송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리아의 찬가’도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자기 몸을 빌어 하실 일을 내다보며 기쁨의 찬가를 불렀습니다. 오시는 분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깊은 침묵에 잠겨 계신 분이 아닙니다. 고통은 본래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세상의 이치를 가르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는 분입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제 힘에 도취되었던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천대받던 이들을 높이는 분, 주린 사람은 먹이시고, 남의 배고픈 사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던 이들은 빈손으로 떠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맞이한 분의 참 모습입니다.

• 첫 번째 크리스마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시기를 ‘헤롯 왕 때’(마2:1)라고 말하고, 누가복음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눅2:1)라고 명토박아 말합니다. 이것은 2013년 혹은 2020년처럼 연도를 나타내기 위한 객관적인 진술이 아닙니다. 예수님 탄생의 의미는 그런 ‘때’와 연결시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권의 정통성을 의심받던 헤롯 대왕은 로마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황제의 이름으로 도시를 건설하기도 하고 막대한 세금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자기 지위에 불안을 느낀 그는 수많은 토목공사를 벌임으로써 입지를 다지려 했습니다. 물론 그 일에 필요한 비용은 가난한 백성들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중의 삶은 황폐하게 변했습니다. 헤롯에 대한 민중들의 원망은 극에 달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메시야가 태어났다는 말을 들은 헤롯이 몹시 당황했다고 말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헤롯은 군인들을 보내 베들레헴 인근에서 태어난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정통성이 없는 권력자의 두려움이 그런 폭력을 낳았습니다.

이처럼 첫 번째 성탄절은 고요하고 목가적이고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문득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성탄 찬송가마다 그런 현실이 깨끗하게 소거되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성탄 찬송에 주로 등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완전하고 흠이 없고 순결한 아기 예수, 고요한 밤, 구유, 목자, 동방박사, 죄 사함, 기쁨, 마귀 권세 이김, 천사들의 노래…. 성탄절이 갖는 사회적·정치적 의미는 사라지고 종교적인 의미와 행복의 이미지만 남은 것이 아닌가요? 오늘의 성탄절은 소비사회에 단단히 포획되어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는 날로 말입니다. 성탄절의 참 정신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은 <다시, 크리스마스>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마리아의 노래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 성탄절의 선물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병든 자, 귀신 들린 자,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치유하고 온전케 하고 북돋워주셨습니다. 땅에 붙들려 사는 이들에게 하늘을 가져오셨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현실을 하늘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 속에 하늘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탄절에 누군가로부터 받을 선물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성탄절의 유일한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에 오시면 우리는 새 사람이 됩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모순을 짊어진 채 거리에 나선 이들, 지하보도에서 잠을 청하거나, 냉골에서 긴 밤과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 절망의 심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 자포자기적인 심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공포에 질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 주님은 우리의 몸을 빌어 그런 이들 가운데 임하고 계십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칼 바르트의 <모든 이들을 위한 성탄절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고 싶습니다.

우리 시대에 임하는 모든 어두움과 고통을 생각해봅니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어 하고 있음을 기억합니다. 병든 사람들, 마음이 상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추방당한 사람들, 압제당하는 사람들, 불의로 고통 받는 사람들, 부모님이 없거나 부모님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판사와 공무원, 교사와 젊은이들의 지도자, 책이나 신문 기사를 쓰는 작가들,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 여러 교회와 회중들 앞에서 이전시대 혹은 지금시대에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그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며 간구하오니, 크리스마스의 광명을 그들과 우리 모두에게 이전보다 더욱 밝게 비춰주시옵소서. 그 빛으로 그들과 우리를 도와주소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오니,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이름 안에서 지금까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던 것처럼 이후로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옵소서. 아멘.
등 록 날 짜 2014년 01월 01일 00시 41분 4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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