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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온전한 사람(야고보서 3:1-6)

by 【고동엽】 2024.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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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온전한 사람(야고보서 3:1-6)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오늘의 본문에서 야고보는 다시금 ''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 책들 중에서 야고보서 만큼 ''에 대하여 몇차례없이 거듭해 말씀하고 있는 책도 없는 줄 압니다. ''에 대해서는 잠언에도 언급되었고 예수님께서도 교훈을 주신 바 있습니다마는 그다지 길지도 않은 이 야고보서에서 이같이 거듭 강조되어 있는 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30여 년을 목회 일선에서 살아온 야고보이기에 그가 경험을 토대로 교훈하고 있는 여러 가지 실제적인 문제는 더욱 절실하고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잘못되었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교회에 문제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해결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자신의 문제든 교회의 문제든 혹은 교인들 서로간의 문제든, 문제가 있다면 어떤 문제이며, 어떻게 잘못되어 일어났으며, 해결의 길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야고보는 오래 생각하고 깊이 모색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얻게 된 결론이 주로 입술의 말에서 그 많은 문제가 비롯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야고보가 말에 대해서 다시금 교훈하고 있는 것은 그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앞서 119절에서도 이미 "말하기는 더디하라"라고 교훈한 바 있는데, 오늘의 본문에서 이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먼저 통론적으로 두 가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선생이란 본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는 저도 그렇습니다. 강의를 많이 하는 날은 새벽기도 인도한 것 말고도 선 채로 이야기한 시간이 줄잡아 일곱 시간이 넘은 때가 있어요. 이만하면 말을 많이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줄창 떠들고나면 나중에는 턱뼈도 욱신욱신하고 혀도 굳어지고 혀뿌리가 아파서 더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저 혼자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강의를 마치고 나오다보면 학생들이 붙들고 서서 이것저것 물어보겠다고 덤빕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나 좀 살려다오'하고 사양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도 그렇겠습니다마는 이처럼 말을 많이 하고 사는 사람이 집에 들어가면 말이 없어집니다. 말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아무튼 '선생'이라는 것은 말을 많이 합니다. 말로 살지 않습니까? 하루종일 말을 하는 게 직업이란 말입니다. 무릇 말을 많이 하다보면 실수가 있게 마련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올시다마는 그때도 제가 신학대학에 교수로 나가고 있어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A교수가 막 강의실을 나와 사무실로 들어섭니다. 분필가루가 잔뜩 묻어 있는 손으로 출석부에 참고서까지 한아름 들고 있습니다. 마침 사무실에는 농담 잘하는 교수 한 분이 앉아 있었습니다. 방금 들어서는 A교수를 보자 이 농담 잘하는 B교수가 넌지시 말을 겁니다. "A교수님!" 그 목소리가 꽤나 진지하므로 A교수는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나 싶었던 모양입니다. ""하고 그 역시 점잖게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늘은 또 무슨 거짓말을 얼마나 많이 하셨소?" B교수는 A교수에게 이런 조크를 툭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A교수는 일순 당황해서 어쩔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건 잠깐이요 마침내는 모두들 파악하여 박장대소하고 말았습니다. 실제가 그러한 것입니다. 모르고도 아는 척, 알고도 모르는 척, 남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인 양 거짓말하기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가-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자연히 실덕도 많아집니다. 실언이나 식언도 많아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는 야고보의 말씀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1)."

사도 바울 또한 고린도전서 1228절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사도, 선지자, 교사의 순()으로 잡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는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명하셨습니다. '사도'라고 하는 말에는 본디 '보냄 받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포스톨로스'불러서 강제로 보낸 것입니다. 다음으로, 선지자 역시 하나님께서 말씀을 그의 입에 주셔서 그 주신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프로페이테스'입니다. 이에 비하여 교사는 같은 은사임에도 자원성이 많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말씀한 바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함도 바로 이러한 성격과 함께, 그것으로 인하여 혹 허물을 면키 어렵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당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사도라 하였고,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사람을 선지자라 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교인들에게는 선생이 있어야 했습니다.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성경 지식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생활 속에서 많은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이 일은 어떻게 해결하여야 할까? 좋게 푸는 방법은 무엇일까? 믿는 사람으로서의 처신 방법을 물어옵니다. 이러한 많은 질문에 대하여 선생들이 구체적으로 가르쳐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동시에 생활 속에서 접하게 되는 사소한 문제에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하여 설명하고 해석하고 가르쳐야 했던 것입니다. 선생들의 역할이 그러했습니다.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성경이며 교리, 윤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 걸쳐 두루 가르쳐야 했던 것입니다. 야고보도 이 문제를 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탈무드에 나오는 말입니다. '만일에 홍수가 나서 너를 낳아준 부모와 너를 가르치는 랍비가 같이 떠내려가는데 한 사람밖에 구할 수가 없다면 너는 누구를 구하겠느냐?' 부모와 선생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살려달라고 손을 내젓습니다. 누구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탈무드는 말합니다. '랍비를 구해야 한다.' 정신적인 지도자가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옳고 그르고를 따지지 마십시다. '랍비를 구하라'-나의 정신을 지도하고 나의 영혼을 지도하는 분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를 낳아준 부모도 중요합니다마는, 나의 정신을 지도하는 선생이 나의 앞날을 보아서는 더욱 크다는 것입니다. 탈무드에서는 이와 같이 랍비의 중요성을 크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사람들의 정신문화는 온전히 랍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랍비의 교훈을 받고 랍비의 말씀에 의존합니다. 무시로 그에게 가서 묻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랍비는 이토록 존경을 받았습니다.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랍비가 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본문말씀도 그래서 하는 말씀입니다. 그 책임이 크므로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인간에게 선생이란 존재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제가 결혼주례를 할 때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세 가지의 복을 받아야 한다. 첫째는 부모를 잘 만나는 복이요, 둘째는 스승을 잘 만나는 복이요, 셋째는 배우자를 잘 만나는 복이다."이 세 가지가 나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 잘 만나는 것만큼 큰복도 없습니다. 본문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선생의 역할이 한 개인의 운명에 이토록 중대한 영향을 미칠진대 모름지기 좋은 선생이 되라, 그것이 어려우니 섣불리는 선생이 되려 하지 말라-그 책임의 중대성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전도하실 때에 예수님께 가장 크게 책망을 받고 급기야 저주까지 받은 사람들이 바로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선생들입니다. 이들이 남은 가르치려들면서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남들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높입니다. 위선자가 됩니다.

이러니 예수님께 큰 책망을 들을 수밖에요, 흔히 말하는 바리새주의가 당시 선생들의 이러한 잘못됨과 거짓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제 생각해보십시다. 왜 이들의 죄가 큰 것입니까? 선생의 죄가 왜 더 큰 것입니까? 무릇 죄에는 아는 죄와 모르는 죄가 있습니다. 알고 짖는 죄가 있고 모르고 짓는 죄가 있는데, 알고 짓는 죄가 큰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의 죄가 곧 알고 짓는 죄입니다. 또한, 자유한 가운데 짓는 죄가 있고 부득이하여 짓는 죄가 있습니다. 선생의 죄는 자유에서 짓는 죄입니다. 그래서 죄가 큽니다. 남은 가르치면서 나는 행하지 않을 때, 죄가 커집니다. 가르치다보면 모르는 것도 아는 체하기 일쑤입니다. 어느 교수건 간에 학생들의 질문에 혹 모르는 것에 대하여 "그것은 잘 모르겠다"라고 쉽게 자인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모르는 것을 솔직히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위대한 선생입니다. 안다 안다 하다보니 모두 안다고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다 혹 모르는 것이 나오면 엉뚱하게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실수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대학교수법에 대한 4학점짜리 강의를 부전공으로 선택해서 한 학기 동안 공부를 해보았습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시간마다 교수가 다릅니다. 심리학자니 사회학자니 교육학자니 하는 교수들이 시간마다 다르게 들어와서 가르치는데,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한마디 말이 있습니다. '교수는 학생들의 질문을 받을 때에 정답을 알면 좋거니와 혹 모른다면 그 모른다는 대답을 솔직하고 쉽게 말해야 하며, 또한 학생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교수로 성공할 수 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얼마든지 모른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른다는 그 한마디가 하기 싫어서 어물어물하다가보면 그만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버립니다. 그래서 인격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남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우월감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self-superiority'에 빠지는 것입니다. 엄청난 오류를 범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어머니가 되어 아이들의 질문을 받습니다. "엄마, 이것이 뭐예요?"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자상하게 가르쳐주지만, 간혹 모르는 것이 나오면 "엄마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럴 때에 아이가 뭐라고 합니까? "엄마는 그것도 몰라?" 엄마라고 다 압니까? 당연히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실수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는 고의로 짓는 죄가 있고 잘못해서 짓는 죄, 곧 부지중에 짓는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도 그렇습니다. 고의적으로 잘못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모르는 중에 이런저런 말을 잔뜩 늘어놓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 가르치는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합니다. 가르치는 일이 그토록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이기에 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은 아예 못박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6)"-남을 잘못 가르쳐서 실족케 하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남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동시에 위험한 일입니다. 잘못 가르쳤을 때에 남의 운명을 책임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남의 일생을 망치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어 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라고. 예수님은 정상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하십니다.

세상에 남을 실족케 하고 실망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잘하려고 하지만 나도모르게 잘못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들에게도 실망을 안기고 이웃도 실망시킵니다. 말 한마디가 잘못되어 남에게 큰 실망을 안기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에 이러한 일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이 실족케 하는 것에 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가 선생이 되지 말라 합니다. 웃사람이 된다는 것이 이토록 어렵습니다. 남을 가르치는 위치에 선다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대학에서 앞으로 목사가 될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말합니다. "웬만하면 목사 되지 말라." 그렇다고 목사 되겠다고 신학대학에 들어온 사람들이니 "너는 나가라"하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마는 "잘 생각해보라" "깊이 생각해보고 웬만하면 하지 말아라"라고 말하기는 합니다. 제가 목사된 것을 후회해서가 아닙니다. 많이 기도해보고 선택하여야 후회가 없습니다. 인기 직업으로 생각하고 괜찮은데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목사 되려 해서는 안됩니다. 목사란 그런 식으로 선택하는 직업이 아닙니다. 책임이 너무 중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귀중한 일이기에 참으로 힘듭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웬만하면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두 가지의 철학을 기초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라는 것입니다.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 둘은, 죄를 극소화해야 한다---될수있는대로 죄를 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죄지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도 죄를 지을 것입니다. 그러니 가능한 한 죄를 극소화해야 합니다. 본디가 죄인이며, 죄를 지을 수밖에 없음을 전제하고 죄를 줄여야 합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합니다.

'인간은 어차피 죄인이다. 많이 지으나 조금 지으나 죄인이기는 같다.

되는대로 살자.' 이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같은 죄인이요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죄를 극소화해야 합니다. 되도록 줄여야 합니다.

이어서 하는 말씀을 보십시다. 가장 쉽게 짓는 죄, 그러면서도 가장 큰 죄가 말로 짓는 죄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말하는 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입만 열면 말이 됩니다. 말함을 가볍게 여기는데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납니다.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이를테면 보십시오. 내가 남의 물건을 도둑질했습니다. 그러나 물건을 잃었다고 그 사람이 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결정적인 말을 한마디했다고 해보십시오. 그 말이 마음에 박혀서 마침내 그 사람은 죽고 맙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무서운 죄는 말로 짓는 죄입니다. 그런데도 가장 많이 범하는 죄가 말로 짓는 죄요, 가장 쉽게 생각하는 죄가 또한 말로 짓는 죄인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2)." 고의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이라면 차한(此限)에 부재(不在)입니다마는, 이것은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에 알고 지속 고의적으로 짓는 죄를 논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실수로 죄를 짓는다고 할 때에 가장 큰 죄는 무엇인가, 가장 많이 범하는 죄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죄는 단연코 나를 다스리지 못하는 데서 오는 죄입니다. 내 욕심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내 몸을 다스리지 못하고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self-control, 자기 절제를 못해서 생기는 일입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믿는 사람이 범하기 쉬운 죄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한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사회는 문제도 안됩니다.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내 인격을, 내 마음을, 내 몸을 다스려야 되겠는데 그 자기 다스림에 실패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에 가슴아픈 것입니다. 이 죄가 가장 큽니다. 나도 모르는 죄로 가장 많이 짓는 죄가 말로 짓는 죄인 것입니다. 말로 짓는 죄는 너무 쉽사리요 너무 많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말씀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이 말씀을 의역하여 좀더 설명을 붙이자면, 말을 내 마음대로 다스려서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능히 온 인격, 온 운명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니 그러한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내가 해야 될 말을 골라서, 해야 될 적절한 시기에 하는 사람이라면 능히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고, 내 행위를 다스릴 수 있고,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본문말씀의 골자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말에 대하여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앞서 119절에서 본 바 말하기는 더디 하라는 것입니다. 너무 많이 말하지 말라, 깊이 오래 생각해보고 말하라, 듣자마자 바로 말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입니다. 어느 성자는 늘 스스로에게 세 가지를 질문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이것은 사실인가? 내 입을 통해서 나가는 말은 사실이어야 합니다. 누구한테 들은 말이다, 이것으로는 안됩니다. 진정 사실로 확인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엄청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사실인가? 첫 번째로 물을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이 말을 해서 저 사람에게 덕이 되는가 해가 되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내가 반드시 해야 할 말인가? 때로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말씀을 내가 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다른 사람이 해야 될 말을 내가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실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앞서 좀더 생각하고 천천히 해야 하겠습니다.

둘째가, 126절에서 본 바 자기 혀를 재갈먹이라는 말씀입니다. '군자는 행동으로 말하고 소인은 혀로 말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것은 소인배나 하는 짓입니다. 일찍이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평생 선()을 행하여도 잘못된 말 한마디로 그 모든 것이 깨어진다'하였습니다. 평생 쌓아온 선이 말 한마디 잘못한 것으로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 선행이 아무 소용이 없어집니다.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하였습니다. '둘라고게오'-마치 노예를 길들이듯이 쳐서 복종케 한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자신의 혀를 제어해야 하겠습니다. 강하게 묶어야 하겠습니다.

셋째가, 212절에서 본 바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심판을 염두에 두고 말하라고 합니다. 헬라사람들은 말에 주술적이고 마술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히브리사람들은 축복과 저주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말조심해야 합니다. 간혹 남한테 동정 받을 마음에서 "나는 없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있으면서도 없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필경 가진 것도 없어지고 맙니다. 알고도 "모른다 모른다"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무식해지고 맙니다. 멀쩡히 잘살고 있으면서도 "죽겠다 죽겠다" 하는 사람, 지레 죽고 말아요. 그런 줄이나 아십시오. 말대로 됩니다. 그러니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결코 실망하는 소리는 하지 마십시다. 끝났다고 말하지 마십시다. 망했다고 말하지 마십시다. 제가 늘상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이가 가출을 했다고 초죽음이 되어 찾아오는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깊은 상처를 받아서 어떤 말로도 위로를 할 수 없습니다. 울고불고합니다. 그럴 때에 제가 물어봅니다. "혹시 아이가 말썽을 부릴 때에 집을 나가라고 소리친 적은 없습니까?" 그런 말하지 않았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했습니다." "그러면 소원성취 하셨는데 뭘 그러십니까?" 나가라고 하였으니 나간 것이 아닙니까? 그대로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아무리 속이 상하고 화가 치밀어도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다. 말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대로 시행하십니다. 축복이건 저주건 구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어느 집에 가든지 복을 빌라 하셨습니다. 누구에게든지 복을 빌어주라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복을 받을 사람이면 받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 복이 네게 돌아오리라 하셨습니다. 복받을 말 이외에는, 복을 빈다는 말 이외에는 절대로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이 씨가 됩니다. "나가라 나가라"하면 나갈 것이고, "망한다 망한다"하면 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신앙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해야 합니다.

민수기 1428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사람 가운데서 하는 말이지만 듣기는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래도 행하십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본문은 이것을 다시 세 가지로 비유하여 말씀합니다.

먼저, 재갈에 비유합니다. "그 입에 재갈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3)" -()이 제아무리 크다고 해도 입에 재갈을 물려놓고 잡아끌면 그 온 몸뚱이가 따라옵니다. 이와 같습니다. 내 입을 재갈먹여서 말만 바로 하면 내 온 인격이 거룩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몸이 더러워지고 운명까지 추잡해지는 것은 모두가 이 말 때문입니다. 말이 곧 인격이요 전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의 재갈과 같다 함입니다. 그 큰 몸집의 말이 재갈 하나에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또한, 배의 키와 같다고 합니다. 아무리 큰배도 작은 키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말하는 대로 운명이 가고, 말하는 대로 인격이 가고, 말하는 대로 모든 생활이 가는 것이라 함입니다. 말과 행동이 별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다. 말과 신앙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말이 곧 나 자신입니다. 그것 그대로 운명지어집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말함에 늘 깊이 생각해야 될 줄 압니다.

조선시대에 선조 임금이 그중 정치를 잘한 임금입니다. 하루는 임금이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공들은 나를 어떤 임금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아첨하기 좋아하는 한 신하가 중국에서 가장 어질다 하는 요()와 순() 임금과 같다고 하는데, 또 한 신하는 "전하께서는 방금 말씀한 요순이 될 수도 있고, 가장 포악하다 하는 걸주(傑紂)도 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순 임금의 안색이 변합니다. 그때 유성룡(柳成龍)이 나서서 태연하게 말합니다. "전하, 요순과 같다 함은 권하는 말씀이고, 걸주와 같다 함은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둘 다 좋은 말씀인줄로 압니다." 말 한마디가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말은 곧 배의 키와 같습니다. 말 한마디가 세계DTXT찃를 움직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리고, 불에 비유합니다. "혀는 곧 불이요(6)," 불을 생각해보십시다. 한번 불이 붙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성냥 한개비 그어대는 것은 간단하고 쉽습니다. 그러나 그 여파는 엄청납니다. 누구나 나중에서야 말합니다. "일이 그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당연히 몰랐겠지요. 알았으면 그랬겠습니까? 말 한마디가 그토록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줄은 몰랐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파급효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시편 1413절에 말씀합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잠언 1821절에 말씀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우리가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여 구원에 이릅니다. 온전한 사람, 능히 몸에 굴레씌울 수 있고 온몸을 선한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입을 다스려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말할 수 있을 때에 능히 온몸에 굴레를 씌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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