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고난의 선교적 의미(빌1장 12절~14절)

by 【고동엽】 2024. 3. 17.

 

목차로 돌아가기

고난의 선교적 의미(빌11214)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되었느니라.

 

인간은 그가 세운 목적만큼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귀한 목적을 가졌으면 그만큼 귀한 존재가 되고, 천한 목적을 가졌으면 그만큼 천한 존재가 됩니다. 다라서 만약 목적이 없다면 그는 아무 가치 없는 생을 사는 것이 되겠습니다. 비록 우리가 큰 일을 못한다. 하더라도, 이렇다할 위대한 역사는 남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목적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그 목적한 바대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또한 거기에 도달하는 기쁨과 영광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복음 전파를 생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115, 16절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시기 위해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셨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태어난 팔자다' 하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가 태어난 때와 장소로 보나, 자라난 문화와 받은 교육으로 보나, 피할 수 없이 복음을 위한 존재라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절실하게 인식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살 필요조차 없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한번 생의 목적을 정했으면 그것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궤도 수정을 자주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한번 목적을 정하고 이것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어떤 고난도 좋다, 무엇이든지 참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것만 이루어진다면 그대로 죽어도 좋다, 어떤 손해가 있어도 좋다는 마음의 소유자는 위대하고 강합니다.

마침내 그는 모든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승리할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그 목적에 비추어 자기 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이제까지 겪어 온 생의 사건들을 하나하나 복음의 빛에 조명해 봅니다. 복음전파라는 시금석(試金石)으로 그의 삶을 재평가합니다. 그래서 복음 전파에 플러스된 일이면 성공이요, 마이너스된 일이면 실패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내가 고난 당하느냐 당하지 않느냐 요즘 말로 돈을 버느냐 못 버느냐, 출세하느냐 못 하느냐는 아무 상관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복음 전하는 일만 성공적으로 된다면, 그 거룩한 일을 위해 내가 소중하게 쓰여질 수만 있다면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다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120절에서 말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여지기를 바라는 사도 바울의 뚜렷하고 고상한 목적이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또 본문 12절에서는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나의 당한 일'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신비로운 의미를 알 수만 있다면, 또한 이것을 귀중한 진리로 내 생애에 옮겨 나갈 수만 있다면 우리 삶에는 절대로 낙심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같은 세계관, 이같은 복음적 생활 철학을 확고하게 수립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항상 용기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나의 당한 일'이란 곧 바울 자신이 로마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지금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옥살이하는 것, 이 억울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고생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 빌립보 교인들도 알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당하는 '고난의 선교적 의미'를 알기 원하는 것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할 때 그가 말하는 '나의 당한 일'이란, 현재 감옥에 있는 것뿐 아니라 감옥까지 오게 된 경로에서 되어진 모든 일을 다 종합해서 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살이가 싫어서가 아니요 갇히게 되면 복음을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유로운 몸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야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광장에 나가 복음을 전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어쨌든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종 편지 속에 전도의 문이 크게 열리기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사도행전 24장에서 27장까지 한눈에 읽어보면 바울이 감옥에 가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썼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저들의 비위를 상하지 않게 타협을 보려 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감옥에 들어가는 일만은 면해 보려고 인간적인 수단도 써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서 재판도 없이 2년간 갇혀 있었습니다. 하루가 바쁘고 한 시간이 급한데 감옥에 2년씩 갇혀 있으려니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감옥에서 나오기는 해야겠는데, 나오려고 하니 또 밖에는 그를 죽이겠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나올 수도 없고, 그대로 있자니 아까운 세월만 흐르고할 수 없이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로마 황제에게 상소합니다. 내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니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고 자랑하고 싶어서도 아니요, 편법을 쓰고 싶어서도 아닙니다. 다만 복음 전파를 위하여 가이사랴 감옥에서 나와야 하겠기에 로마에 상소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결국사도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묶인 채 로마로 호송됩니다.

 

그러면 로마로 가는 길은 평탄했습니까? 그가 탄 배는 276명이 타고있었습니다. 2천 년 전에 그 정도라면 상당한 규모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제가 백령도에 가기 위해 정원 4백 명인 배를 탔는데 꽤 큰 배였습니다. 그런데 2천 년 전에 3백여 명이 타고, 게다가 짐까지 실었다고 하니 바울을 태운 배는 당시 수준으로 볼 때 굉장히 규모가 큰배였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엔진으로 가는 배도 아닌 돛단배로서 그렇게 큰배가 있었다니 저들의 조선(造船)기술도 대단하다 싶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이렇게 큰배를 타고 쇠사슬에 묶여 로마로 갑니다. 거기에는 죄수들을 총 관장하는 로마 백부장, 선주, 그리고 선장이 있습니다. 이렇게 세 사람의 인도 아래 로마로 향합니다. 그런데 미항이라는 곳에 머물렀다가 뵈닉스에서 겨울을 나기로 하고 계속 항해하는 중에 그만 큰 광풍을 만납니다. 배가 파선되려 하자 군인들도 죄수들도 짐을 다 버리고 가까운 섬으로 헤엄쳐 가 겨우 목숨만을 건집니다. 그 섬에서 3개월 동안 겨울을 나고 고생 끝에 로마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혀 아마도 2,3년은 지난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형편이고 보니 사도 바울은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벌써 전도 못한 지가 몇 년입니까? 예루살렘에 갇혀서 고생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2년이 지나갔습니다. 배가 파선됨으로 섬에서 고생을 했습니다. 또 이곳 로마에서 2,3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한 5년 동안 전도를 못한 셈이 됩니다. 하나님이 어째서 이 문을 열어 주시지 않는 것일까, 답답했을 것입니다. 죄수의 몸으로 감옥에 갇혀 많은 세월이 허무하게 흘러갑니다. 언제 감옥 문이 열릴는지, 아니면 여기서 죽을는지, 아무 기약도 없이 막연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이 흘러갑니다. 이러한 마당에 무슨 희망이고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깊이 생각했습니다. 문은 닫히고 부자유합니다.

 

내 뜻대로 안 된 지가 벌써 5년이 넘습니다. 내 행복을 찾아 살겠다는 것이 아니요 인생의 목표가 오직 복음을 전함에 있는데, 그 길이 꽉 막힌지 5년입니다. 그래서 안타까웠지만 이제 바울은 엄청난 말을 합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진보'라는 말을 프로코페 라는 찍어 가면서 전진한다는 뜻입니다.

군인들이 싸움터에 나가 싸울 때 나무가 빽빽한 밀림 지대를 지나게 되면 길을 만들기 위해 벌목을 합니다. 나무를 베어내고 찍어 버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을 진보라고 합니다. 장애물을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진보'란 결국 복음이 앞으로 나아감에 있어서 방해되는 장애물들을 전부 제거하고 전진한다는 내용입니다. 분명히 감옥 생활이라는 것은 선교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서는 그것이 어쩌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전하지 못하고 끝날 것 같은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은 도리어 이것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비로소 사도 바울은 놀라운 진리를 깨닫습니다.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문을 닫는 사건이 아니요, 오히려 그 문을 더욱 활짝 여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더 귀하고 더 크게, 더 신비롭고 더 놀랍게, 하나님의 역사가 이 사건 나의 당한 일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적 역사관이요, 여기에는 절대로 낙심이 없습니다. 이제 고난이 선교적 의미를 하나하나 정리해 봅시다.

첫째, 고난은 복음을 순수하게 합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복음에도 때로는 여러 가지 잡스러운 것이 섞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 당할 때에 전하는 복음은 늘 순수합니다. 우리가 평안할 때에 무엇이라 전도합니까? "교회에 좀 나갑시다" "교양 강좌 듣는 셈치고 나갑시다" 이런 식으로 아주 흐리멍텅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장사도 잘되고, 출세도 하고, 국회의원 당선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하고 마치 복권 팔듯 복음을 팝니다. 그러나 환란과 핍박을 당할 때에 이런 이야기는 통하지 않습니다. 어떤 권사님이 병으로 무척 고생을 했는데 3일 동안 호흡까지 끊겼다가 겨우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후 그 권사님이 심방 간 제게 간증하기를 그 전에 전도할 때에는"교회 갑시다. 믿어서 손해날 것 없습니다"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소극적이고 흐리멍텅한 이야기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마당에 손해 없다는 정도 가지고 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만나는 이마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읍시다" 이렇게 전도한다고 합니다. 고난 중에 전하는 복음은 이처럼 순수한 것입니다. 저는 자주 국내외에서 편지를 받아 보는데 대개 그 첫머리가 주님의 은혜가 목사님의 교회와 가정에 풍성하기를 바란다고 복 비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중공이나 북한에서 오는 편지는 그 서두에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 이 때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고난 속에 있는 사람들은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릴 뿐입니다. 잘살고 못살고, 건강하고 병들고,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오직 구원 이것뿐입니다. 이처럼 순수한 복음이라야 다이내믹 파워(dynamic power)가 있습니다.

둘째, 고난은 복음의 길을 인도하고 선교사의 길을 인도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핍박이 있으면 저 마을로 도망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쪽 문이 닫히면 저쪽 문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정말예루살렘에 핍박이 일어나자 한 곳에만 모여 있었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사마리아로, 가이사랴 빌립보로, 다메섹으로 도망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왕에 집도 떠났고 할 일도 없겠다, 홀가분한 몸으로 다니면서 흩어진 사람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고난으로 인하여 비로소 복음의 문이 만민에게로 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셋째, 고난은 협소한 마음을 열어 줍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무시하고, 이방인이라고 업신여기며, 로마 사람들을 원수같이 대하던 그들입니다. 그러나 도망 다니다 보니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숨어야겠기에 사마리아 사람의 신세도 졌으니 어떡하겠습니까? 고난을 통해 협소한민족주의, 좁은 마음, 오해, 편견들이 다 없어집니다. 지방색, 인종 차별도 넘어섭니다. 얼마 전에흑과 백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흑인과 백인이 한 수갑을 찬 채로 탈옥을 합니다. 도망 다니며 백인이 흑인을 무시할 때도 있고 서로 다투기도 하지만 그들은 떼어놓을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두 사람이 화해한다는 내용의 가슴 뿌듯한 영화였습니다. 고난을 함께 겪으며 우리는 이 지방 저 지방으로서가 아니요 황인종 백인종으로서가 아니라, 똑같은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평안하면 게을러지고 약해집니다. 반대로 자꾸 얻어맞으면 강해집니다. 공은 세게 때릴수록 높이 튀듯 말입니다. 제가 중고등학교를 이북에서 다녔는데 주일날 교회를 갔다는 이유로 그 다음날 학교에 가면 하루종일 기합을 받고 공부를 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고도 그 다음 주일이면 또 교회가 갑니다. 이렇게 교회 갔다가 매맞고, 매맞고 교회에 가고 하니까 나중에는 재미가 납니다. 신앙으로 하는지 오기로 하는지 모를 형편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강하게 하고 전도를 가능하게 합니다. 어려움 속에서 전해야만 상대방이 마음 문을 열어 줍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전도하기 어렵고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전도하기 힘듭니다. 어려운 고생을 많이 한 사람만이 누구에게나 복음 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는 자가 때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여기에 선교적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처한 환란 속에서 이것이 복음의 진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그도 처음에는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로마 감옥에서 몇 년 지나는 동안 '여기에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빌립보 교인들도 알기를 원했습니다.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슬퍼 말아라, 하나님의 사업에는 실패가 없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828절을 봅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복음의 역사를 위해서 하나님은 한가지도 헛되이 버리시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또 디모데후서 29절에서는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나는 감옥에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없이 전파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바울이 묶인 채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는 감옥에 있기 때문에 시위대 안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시위대 프라이토리온 은 왕궁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의 왕은 삼권을 한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적도 많고 그를 죽이려 하는 자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가장 신임할 만한 사람들과 한 마을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귀족들이 한 마을을 이루고 사는데 왕 한 명이 1만 명의 친위대를 두었다고 합니다. 군사만 1만 명이니 그 식구들까지 치면 얼마나 많은 숫자입니까? 어떤 왕은 16천 명까지 두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믿을 만한 많은 군사들과 고관들을 주위에 방어진으로 둘러놓고 그 속에서 삽니다. 이 귀족들을 모아 놓은 것이 바로 시위대입니다. 이들은 모두 영향력 있는 정치가들인데 바울이 이 사람들한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긴 여행 끝에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도착했을 때를 상상해 봅시다. 겨우내 죽을 고생을 하는 동안 같은 배에 탔던 백부장, 선주, 선장의 위신은 떨어지고, 바울의 권위만 높아졌습니다. 276명의 난민은 바울을 하나님처럼 높이고 위하며, 그의 말씀만 들었습니다. 죽지 않을 테니 염려 말라 하면 안심하고, 먹으라 하면 먹는 등 그의 영적 권위에 꼼짝없이 순종했습니다. 그러니 함께 온 백부장이 로마 황제에게 무슨 말을 했겠습니까? 반드시 기록을 뒤져보지 않더라도 짐작할 만하지 않습니까? "이번에 잡아온 바울은 키는 작아도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겨우내 지내보니까 위대한 능력과 권능의 사람입니다. 유의해서 무죄로 석방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추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왕 혼자서만 들은 것이 아니라 거기 앉은 문무 백관들도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죄수로서 앉아 있는 바울의 눈빛, 얼굴빛을 유심히 살피고 익혔을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다음에 한사람씩 로마 감옥으로 바울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은 니고데모처럼 로마의 고관들이 바울을 찾아와 당신이 그 능력의 사람이냐고 물을 때, 이것이 얼마나 좋은 전도의 기회였겠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16:30)"고 능력과 지혜를 다하여 외쳤을 것입니다. 그 복음을 들은 고관들이 가정에 가서 이야기하고, 친구에게 전하고…… 이렇게 해서 시위대 속에 전파된 복음이 온 나라 전체로 퍼져 나가는 귀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바울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감옥에서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고관에게 복음을 전한 결과, 네로 황제의 박해 때에 네로 측근에서는 이미 그의 삼촌과 친척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에는 그 어머니와 딸들이 예수님을 믿고 많은 고관들도 믿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죽일 때인데도 그 안에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후 불과 300년도 안 되어 대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로 선포됩니다. 당시 로마의 그리스도인은 전체 인구의 겨우 7%(현재 우리 나라가 20%)에 지나지 않았지만 최고 고관들이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A.D. 60년경 사도 바울이 로마 고관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먼저입니다. 그 때문에 로마의 기독교화라는 놀라운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뿐입니까? 대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됨으로써 이로 말미암아 유럽 여러 나라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고 한국으로 와서,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해도 잘못된 말을 아닙니다.

1948531, 우리 나라에서 처음 국회가 개원(開院)할 때에 임시의장인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순서에 없던 제안을 했습니다. "대한민국 민주 국회 제 1차 회의를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을 떠나서 누구나 오늘 이 순간이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라고 자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나서 하나님께 우리의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와서 간단한 말씀으로 기도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윤영 목사가 단상에 올라가 일동 기립한 가운데 기도를 올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국회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처럼 국가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나라 전체가 그 영향을 받습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군대 장성, 그리고 역량 있는 경제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 나라의 복음화는 훨씬 더 빨리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교 작전은 먼저 로마 고관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그 깊은 의미를 깨달았다면 말입니다.

감옥 안에서는 바울이 고관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감옥 밖에서는 바울을 보며 감동 받은 빌립보 교인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의 당한 일' 내가 당하는 고난과 실패, 내가 당하는 질병, 여기에 하나님의 선교 전략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진보' 닫힌 문 같으나 열리고, 끝난 것 같으나 시작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내가 당한 사건 속에서 지금 이루어짐을 알고 그 선교적 의미를 알아 거룩한 뜻에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