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 (디모데후서 1장 7절~14절)

by 【고동엽】 2024. 11. 17.
목차로 돌아가기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 (디모데후서 1714)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에 별로 좋은 말은 아닙니다만 철면피(鐵面皮)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살갗이 아니고 철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의 유래를 보면, 중국에 왕광원이라는 출세주의자가 있었는데, 그는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윗사람들에게 아첨을 하는 데는 너무 낯간지럽게 행동해서 보는 사람들이 오히려 얼굴을 붉힐 정도였습니다. 가령 높은 사람이 시를 읊든가 하면 그 시가 아무리 졸작이라도 높이 칭찬하여 이태백이도 따를 수 없는 시라고 아첨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광원의 얼굴에는 열 겹이나 되는 철갑을 깔았다고 말을 하게 된 것이 오늘날 철면피라는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무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무서운 줄 모르는 사람, 심판이 무서운 줄 모르는 사람, 양심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진리도 의도 그리고 민중도 무서운 줄을 모르는 사람은 정말 끝난 사람들입니다. 또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거룩한 수치감이 있어야 합니다. 군자의 덕 중에 하나가 수오지심(羞惡之心)입니다. 악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 즉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이 군자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잘못되었으면 부끄러워하고,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회개할 줄 아는 자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죄송함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두려움도 모른다면 그는 죽은 시체나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문제는 무엇을 부끄러워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가난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게으른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물론 부자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얼마나 이기적이었느냐 하는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가난 자체나 진실한 가난은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정직한 평민은 자랑스럽습니다. 때로 우리는 문벌이나 학벌이 좋지 못하다고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학벌의 부족함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진실하지 못하고 비굴한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때로는 용모가 초췌하다고 부끄러워합니다. 그것은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마음이 더러운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또한 체구가 왜소하다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체구가 왜소한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마음이 작은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부끄러워하며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부정한 출세, 부정한 재물이 부끄러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격에 맞지 않는 칭찬을 들을 때에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비굴함과 불신과 불충성과 게으름에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그의 자랑과 부끄러움이 무엇이냐에 의해서 구별될 수 있습니다. 부끄러워할 일에 부끄러움이 없고, 아무 일도 아닌 것에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타인의 허위에 의해 좌우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정말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은 다음,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워 무화과 잎으로 하체를 가리웠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부끄러움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복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지. 벌거벗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일에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심리 현상입니다. 여기서부터 죄가 시작되었고 인간의 이상 심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부끄러움이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복된 사람입니다. 아이들의 깨끗한 음성을 들으면서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는 어른들은 훌륭한 어른입니다.

여러분, 지난 일 년 간 무엇을 자랑으로 여겨 왔고 무엇을 부끄럽게 여기며 살아왔습니까? 일 년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어떤 부끄러움과 자랑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당연히 되어야 할 존재로 되지 못했을 때에 부끄러움을 가지게 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어이없게도 하지 못했을 때에 부끄러운 것은 당연합니다. 에스라 9:6에 보면 에스라 선지자가 하나님께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다고 참회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죄를 범해서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70년간 했는데 여기서 살아 나온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포로에서 풀려나 조국으로 돌아와서 감격과 감사로 살아야 했었는데 그 감격과 감사는 잠시 뿐, 제사장을 위시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방 여자를 취해 살고 불륜의 관계를 맺어 문란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들은 에스라는 은혜를 저버린 그 백성들을 대신하여 그럴 수 없다고 성전에 엎드려 울며 참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9:6).

죄의 성질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불가피한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어서 짓는 동정이 가는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그런 상황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을 때 갖게 되는 감정입니다.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바울의 편지를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착하고 신실한 사람으로 충성된 일꾼입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와 외조모 사이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란 탓인지 성격이 나약하고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지도력이나 담력이 약하여 당연히 고난받아야 할 시간에 고난받지 못하고 이리 저리 기피하여 비굴하게 굴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아버지인 바울이 지금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디모데는 바울이 번번히 감옥에 들어가고 매를 맞으며 고생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비해 디모데 자신은 너무 안일하게 지냈고 조그마한 고난과 수고도 피하려고 했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는 일에 소외된 자기를 생각하니 부끄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몹시 부끄러워하는 디모데를 편지로써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께서 고통 당하시는 가장 어려운 시간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으며 그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도망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지고 간 사실에 대해 제자들에게 유감이 많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하여 열두 제자들은 다 어딜 가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져야합니까? 아마도 뒤늦게 깨달은 베드로가 가슴을 치며 부끄러워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갈릴리로 되돌아가서 어부 생활을 시작하려 한 것은 분명히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지난날을 돌이켜볼 때, 어찌 더이상 예수님의 제자로 나설 수 있겠습니까? 철면피가 아니고서는 감히 예수님 앞에 나타날 수도 없고, 설혹 예수님께서 제자 되라 하셔도 될 수 없는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렇게 부끄러움과 후회를 가지고 있을 때에 주님은 친히 그를 찾아가시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가끔, 비교적 젊은 목사들은 70이 넘으신 원로 목사님들을 모시어 지나간 수십 년 동안 경험하셨던 목회 여담을 듣는 기회를 가집니다. 목회를 하시는 동안 가장 기뻤던 일은 무엇이며, 가장 유감된 일은 무엇이고, 또한 마음 아픈 일은 무엇이었나를 후배들에게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 중에 어느 목사님께서 진지하게 정말 후회하는 모습으로 술회하시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왜정 말년에 동료 목사들이 신사 참배 문제로 전부 끌려가서 순교할 때에 변절한 아픈 상처를 지니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변절한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그 당시 목사님은 상처를 하여 젊은 아내를 맞이했는데 이미 아이가 셋이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자기가 순교를 하고 나면 젊은 아내가 스스로 낳지도 않은 자녀들을 어떻게 키울까 하는 여러 가지 염려 때문에 그만 변절을 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너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순교해야 할 그 시간에 순교하지 못한 부끄러움 때문에 평생을 괴로움으로 살아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디모데는 그가 희생해야 할 그 희생을 치르지 않았고 그가 수고해야 할 시간에 수고하지 않아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는 동안에 뒷전에서 구경만 했으니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특히 그는 믿음의 아버지 바울을 생각하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지혜를 주며 디모데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첫째, 은혜에 속한 사람으로서 은혜로 해결하라고 권면합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위대로가 아니라 은혜대로 이니 다시 십자가를 쳐다보고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오직 은혜와 긍휼로 되어짐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 있는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여 부끄러움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나의 선행과 나의 의로 살았던 적이 있습니까? 오직 은혜만이 부끄러움을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둘째는 미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고난의 기회가 다시 있으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지난날에 부끄러웠으면 이제는 영광을 찾아야 하고, 지난날에 게을러서 부끄러웠으면 이제는 부지런하고, 지난날에 기피해서 부끄러웠으면 이제는 담대하게 선두에 서고, 지난날에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부끄러웠으면 이제는 적극적으로 나서고, 지난날에 안 된다는 것 때문에 비굴했으면 이제는 긍정적으로 창조적인 생을 살고, 지난날에 조그마한 고난과 어려움과 비방으로 뒷전에 물러서서 비굴해졌다면 이제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미래가 열리어 있어 다시 기회가 있으니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여기에는 기능적인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부끄러움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딛고 일어서서 절망에서 소망으로 새로운 용기를 얻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고난이 따로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순교했습니다. 그러면 로마 감옥에서 죽어야만 순교입니까? 네로 황제의 박해 앞에서 죽어야만 순교이더냐 말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도 불의와 부정과 피와 더불어 싸우며 죽어 가면 거기에 순교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순교해도 순교입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만 박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죄송한 말입니다만 시어머니의 어려운 말씀을 듣고 참는 것도 순교입니다. 내가 처한 어느 곳에서든지 순교적으로 살면 거기에 순교가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알아주고, 순교비를 세워야만 순교가 아니라, 주님을 생각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와 함께 고난 당하는 마음으로 고난과 핍박을 참고 견디는 거기에 순교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는 나를 부끄러워 말라. 네가 있는 목회 현장에도 있느니라. 그리고 네가 로마 감옥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부끄러워할 것 없다. 네 몫에 대한 십자가를 네가 지고 가면 바로 그것이 순교의 현장이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애국 시인 윤 동주의 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다시 한 번 이 시가 주는 의미를 깊이 음미했으면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고 싶은 것이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아름다운 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지난 일 년을 어떻게 결산하려 합니까? 수입과 지출을 맞추어 흑자와 적자를 계산해 보시렵니까? 양심을 팔아 돈을 벌었다고 무슨 영광이 있습니까? 믿음을 팔아 출세를 했다고 출세가 되었습니까? 승리도 패배도 영광될 것이 없습니다. 승리는 한 것 같은데 이제 보니 만신창이(滿身瘡痍)요 부끄러울 뿐입니다.

얻은 자나 잃은 자나 내어놓을 것이 없어 다같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부끄러운 일이 너무 많아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습니다. 진리를 떠나 영광을 구한다고 영광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외면한 채 명예와 자존심을 살려 보겠다고 해서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잿더미와 같은 부끄러움, 부끄러움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은혜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새로운 존재로서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기회는 다시 있습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 고난 뒤에는 반드시 영광이 있습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지는 새해에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새로운 기회를 가져서 영광이 함께 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 (디모데후서 1714)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에 별로 좋은 말은 아닙니다만 철면피(鐵面皮)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살갗이 아니고 철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의 유래를 보면, 중국에 왕광원이라는 출세주의자가 있었는데, 그는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윗사람들에게 아첨을 하는 데는 너무 낯간지럽게 행동해서 보는 사람들이 오히려 얼굴을 붉힐 정도였습니다. 가령 높은 사람이 시를 읊든가 하면 그 시가 아무리 졸작이라도 높이 칭찬하여 이태백이도 따를 수 없는 시라고 아첨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광원의 얼굴에는 열 겹이나 되는 철갑을 깔았다고 말을 하게 된 것이 오늘날 철면피라는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무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무서운 줄 모르는 사람, 심판이 무서운 줄 모르는 사람, 양심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진리도 의도 그리고 민중도 무서운 줄을 모르는 사람은 정말 끝난 사람들입니다. 또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거룩한 수치감이 있어야 합니다. 군자의 덕 중에 하나가 수오지심(羞惡之心)입니다. 악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 즉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이 군자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잘못되었으면 부끄러워하고,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회개할 줄 아는 자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죄송함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두려움도 모른다면 그는 죽은 시체나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문제는 무엇을 부끄러워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가난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게으른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물론 부자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얼마나 이기적이었느냐 하는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가난 자체나 진실한 가난은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정직한 평민은 자랑스럽습니다. 때로 우리는 문벌이나 학벌이 좋지 못하다고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학벌의 부족함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진실하지 못하고 비굴한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때로는 용모가 초췌하다고 부끄러워합니다. 그것은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마음이 더러운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또한 체구가 왜소하다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체구가 왜소한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마음이 작은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부끄러워하며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부정한 출세, 부정한 재물이 부끄러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격에 맞지 않는 칭찬을 들을 때에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비굴함과 불신과 불충성과 게으름에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그의 자랑과 부끄러움이 무엇이냐에 의해서 구별될 수 있습니다. 부끄러워할 일에 부끄러움이 없고, 아무 일도 아닌 것에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타인의 허위에 의해 좌우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정말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은 다음,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워 무화과 잎으로 하체를 가리웠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부끄러움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복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지. 벌거벗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일에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심리 현상입니다. 여기서부터 죄가 시작되었고 인간의 이상 심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부끄러움이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복된 사람입니다. 아이들의 깨끗한 음성을 들으면서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는 어른들은 훌륭한 어른입니다.

여러분, 지난 일 년 간 무엇을 자랑으로 여겨 왔고 무엇을 부끄럽게 여기며 살아왔습니까? 일 년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어떤 부끄러움과 자랑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당연히 되어야 할 존재로 되지 못했을 때에 부끄러움을 가지게 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어이없게도 하지 못했을 때에 부끄러운 것은 당연합니다. 에스라 9:6에 보면 에스라 선지자가 하나님께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다고 참회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죄를 범해서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70년간 했는데 여기서 살아 나온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포로에서 풀려나 조국으로 돌아와서 감격과 감사로 살아야 했었는데 그 감격과 감사는 잠시 뿐, 제사장을 위시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방 여자를 취해 살고 불륜의 관계를 맺어 문란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들은 에스라는 은혜를 저버린 그 백성들을 대신하여 그럴 수 없다고 성전에 엎드려 울며 참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9:6).

죄의 성질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불가피한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어서 짓는 동정이 가는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그런 상황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을 때 갖게 되는 감정입니다.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바울의 편지를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착하고 신실한 사람으로 충성된 일꾼입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와 외조모 사이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란 탓인지 성격이 나약하고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지도력이나 담력이 약하여 당연히 고난받아야 할 시간에 고난받지 못하고 이리 저리 기피하여 비굴하게 굴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아버지인 바울이 지금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디모데는 바울이 번번히 감옥에 들어가고 매를 맞으며 고생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비해 디모데 자신은 너무 안일하게 지냈고 조그마한 고난과 수고도 피하려고 했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는 일에 소외된 자기를 생각하니 부끄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몹시 부끄러워하는 디모데를 편지로써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께서 고통 당하시는 가장 어려운 시간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으며 그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도망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지고 간 사실에 대해 제자들에게 유감이 많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하여 열두 제자들은 다 어딜 가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져야합니까? 아마도 뒤늦게 깨달은 베드로가 가슴을 치며 부끄러워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갈릴리로 되돌아가서 어부 생활을 시작하려 한 것은 분명히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지난날을 돌이켜볼 때, 어찌 더이상 예수님의 제자로 나설 수 있겠습니까? 철면피가 아니고서는 감히 예수님 앞에 나타날 수도 없고, 설혹 예수님께서 제자 되라 하셔도 될 수 없는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렇게 부끄러움과 후회를 가지고 있을 때에 주님은 친히 그를 찾아가시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가끔, 비교적 젊은 목사들은 70이 넘으신 원로 목사님들을 모시어 지나간 수십 년 동안 경험하셨던 목회 여담을 듣는 기회를 가집니다. 목회를 하시는 동안 가장 기뻤던 일은 무엇이며, 가장 유감된 일은 무엇이고, 또한 마음 아픈 일은 무엇이었나를 후배들에게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 중에 어느 목사님께서 진지하게 정말 후회하는 모습으로 술회하시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왜정 말년에 동료 목사들이 신사 참배 문제로 전부 끌려가서 순교할 때에 변절한 아픈 상처를 지니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변절한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그 당시 목사님은 상처를 하여 젊은 아내를 맞이했는데 이미 아이가 셋이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자기가 순교를 하고 나면 젊은 아내가 스스로 낳지도 않은 자녀들을 어떻게 키울까 하는 여러 가지 염려 때문에 그만 변절을 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너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순교해야 할 그 시간에 순교하지 못한 부끄러움 때문에 평생을 괴로움으로 살아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디모데는 그가 희생해야 할 그 희생을 치르지 않았고 그가 수고해야 할 시간에 수고하지 않아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는 동안에 뒷전에서 구경만 했으니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특히 그는 믿음의 아버지 바울을 생각하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지혜를 주며 디모데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첫째, 은혜에 속한 사람으로서 은혜로 해결하라고 권면합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위대로가 아니라 은혜대로 이니 다시 십자가를 쳐다보고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오직 은혜와 긍휼로 되어짐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 있는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여 부끄러움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나의 선행과 나의 의로 살았던 적이 있습니까? 오직 은혜만이 부끄러움을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둘째는 미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고난의 기회가 다시 있으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지난날에 부끄러웠으면 이제는 영광을 찾아야 하고, 지난날에 게을러서 부끄러웠으면 이제는 부지런하고, 지난날에 기피해서 부끄러웠으면 이제는 담대하게 선두에 서고, 지난날에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부끄러웠으면 이제는 적극적으로 나서고, 지난날에 안 된다는 것 때문에 비굴했으면 이제는 긍정적으로 창조적인 생을 살고, 지난날에 조그마한 고난과 어려움과 비방으로 뒷전에 물러서서 비굴해졌다면 이제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미래가 열리어 있어 다시 기회가 있으니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여기에는 기능적인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부끄러움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딛고 일어서서 절망에서 소망으로 새로운 용기를 얻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속한 고난이 따로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순교했습니다. 그러면 로마 감옥에서 죽어야만 순교입니까? 네로 황제의 박해 앞에서 죽어야만 순교이더냐 말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도 불의와 부정과 피와 더불어 싸우며 죽어 가면 거기에 순교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순교해도 순교입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만 박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죄송한 말입니다만 시어머니의 어려운 말씀을 듣고 참는 것도 순교입니다. 내가 처한 어느 곳에서든지 순교적으로 살면 거기에 순교가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알아주고, 순교비를 세워야만 순교가 아니라, 주님을 생각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와 함께 고난 당하는 마음으로 고난과 핍박을 참고 견디는 거기에 순교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는 나를 부끄러워 말라. 네가 있는 목회 현장에도 있느니라. 그리고 네가 로마 감옥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부끄러워할 것 없다. 네 몫에 대한 십자가를 네가 지고 가면 바로 그것이 순교의 현장이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애국 시인 윤 동주의 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다시 한 번 이 시가 주는 의미를 깊이 음미했으면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고 싶은 것이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아름다운 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지난 일 년을 어떻게 결산하려 합니까? 수입과 지출을 맞추어 흑자와 적자를 계산해 보시렵니까? 양심을 팔아 돈을 벌었다고 무슨 영광이 있습니까? 믿음을 팔아 출세를 했다고 출세가 되었습니까? 승리도 패배도 영광될 것이 없습니다. 승리는 한 것 같은데 이제 보니 만신창이(滿身瘡痍)요 부끄러울 뿐입니다.

얻은 자나 잃은 자나 내어놓을 것이 없어 다같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부끄러운 일이 너무 많아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습니다. 진리를 떠나 영광을 구한다고 영광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외면한 채 명예와 자존심을 살려 보겠다고 해서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잿더미와 같은 부끄러움, 부끄러움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은혜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 있는 새로운 존재로서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기회는 다시 있습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 고난 뒤에는 반드시 영광이 있습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지는 새해에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새로운 기회를 가져서 영광이 함께 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