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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의 은총(시편 32편 1절~7절)

by 【고동엽】 2024.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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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의 은총(시편 3217)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이렇게 시작되는 시편 32편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애송시(愛誦詩)였다고 합니다. 셀릭커라고 하는 분은 그가 쓴 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주 울적한 심경으로 이 시편을 읽었다. 그리고 죽기 얼마 전에는 그의 병상 맞은편 벽에 이 시편을 써 붙여 놓고 소리내어 읽으면서 회오(悔悟)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생전에 이 시편으로 자신을 수련했으며, 병석에서는 위안을 찾았던 것이다.' 한편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시편32편을 사도 바울의 시()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과 인내로 충만한 시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합니다. 이 시를 읽는 자마다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죄로부터 자유 하는 길을 알게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다윗의 참회록'이라고 하여 즐겨 읽던 이른바 '시편 7'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 중의 한 편이 이 32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최선의 지식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여러분, 모든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면 그는 무식한 사람이요, 무식하기에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아마도 지식 중에 가장 얻기 힘든 지식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일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알기란 지극히 어렵습니다. 하물며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지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유치원 선생님이 자모님들을 초청하여 종이 한 장씩을 나누어 주고 설문(設問)을 냈습니다. "지금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당신의 이 어린 자녀가 자라나서 장차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나누어 드린 종이에 그것을 써 주십시오." 그랬더니, 이를테면 기술자, 학자, 의사, 판검사 등등으로, 자모님들은 모두가 한 가지씩 바라는 인물상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어머니는 좀 색다른 대답을 했더라고 합니다. '미안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하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제 생각에는 이 어머니가 가장 큰 인물을 소원한 것 같습니다. 큰 사람이라야 그런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안하다든지 내 잘못이라고 말하기는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죽음의 문제요, 하나는 죄의 문제입니다. 죽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면 철이 난 것입니다. 비로소 인간이 돼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짐으로 도덕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다시 말하여 사죄(赦罪)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그것이 바로 종교인이 되는 길입니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보다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보다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 더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시편 저자인 다윗 왕은 성군(聖君)이라 일컬어집니다.

유대나라 역사상의 많은 왕들 중에서 으뜸으로 높임을 받는 왕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은 예수님의 족보 기사(1:1)에 아브라함과 나란히 등장할 만큼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어진 사실도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의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아무튼 다윗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그 이름이 팔백 번이나 나올 정도로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고 하나님께서 인하여 특별히 기뻐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의인은 아니었습니다. '내 종 다윗의 정직함같이'라는 말이 성경에는 수도 없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보신 인간 다윗은 과연 정직한 사람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다윗의 별명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인격과 존재를 한마디로 나타낸 표현입니다. 그의 정직은 행위의 온전함에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믿음에 정직하고 회개함에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입니다.

데이터 상실한 부분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게 됩니다. 밧세바가 임신을 하게되자 문제가 크게 대두됩니다.

 

그래서 일선에 있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에게 특별휴가를 줍니다. 우리아가 돌아오면 밧세바와 동침할 것이요, 그렇게 되면 잉태된 아기를 우리아의 아기로 위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나 집에 돌아온 우리아는 일선에서 고생하고 있는 전우들을 생각해서도 아내와 편안하게 잠자리를 같이할 수 없다고 하면서 동침을 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결국 우리아를 없애기로 마음먹고 계략을 씁니다. 그는 우리아의 상관에게 비밀 지령을 보내어서 우리아가 적의 손에 죽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다윗은 남편 잃은 밧세바를 거리낌없이 후궁으로 취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일은 감쪽같이 숨겨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일이 다 그럴듯하게 숨겨진 것처럼 생각한 것----이것이 다윗의 죄입니다. 그런데 그 일들이 그렇게 무사히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엄청난 고뇌에 빠집니다. 때마침 나단 선지가 찾아와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고 힐책할 때 두말없이 회개합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아무런 변명 없이 무릎을 꿇습니다. 다윗은 죄의 본질을 아는 사람입니다. 죄의 성질을 알고, 그리고 경험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죄라는 것은 유혹의 매력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다윗에게는 미갈이라고 하는 왕후가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궁녀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남의 여자가 예쁘게 보일 것이 뭡니까? 하고많은 여자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남의 유부녀가 그토록 예쁘게 보여서 죄를 짓게 만드느냐,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책망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삼하 12:8-9)." 네가 원한다면 여자를 천이라도 줄 텐데 하필이면 왜 남의 여자를 건드렸느냐고 하시는 책망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죄가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죄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금단의 열매는 아름다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 눈길을 끄는 것----이것이 사단의 유혹이요 죄의 매력입니다. 에덴 동산에도 많은 나무와 온갖 과실이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어째서 하필이면 금단의 나무 주위를 맴돕니까? 왜 그것만 자꾸 쳐다봅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임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3 : 6)." 그렇습니다. 이것이 시험입니다. 죄에는 인간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짓는 순간에는 아무 생각도 못합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식입니다. 눈앞의 유혹으로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다윗은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또한 그 죄를 정당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상대화하고 보편화합니다. '나만 죄인인가? 나보다 더 큰 죄인도 많은데 뭐' 하고 자기를 정당화시킵니다. 이것이 죄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본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죄의 원인을 외면하고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려고 합니다. 위선에 빠집니다. 그리고 숨깁니다. 이른바 완전범죄를 노립니다. 그러다 보니 죄는 점점 더 불어납니다.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섭니다. 회개 없는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고 합니다. 거짓말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것을 끝까지 참말이라고 우기느라 또다시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다가 필경은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모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거짓말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도 없고 멈추기는 멈추어야 하겠는데 어느 선에서 멈출지,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죄를 회개하지 아니할 때에 또 다른 죄를 거듭해서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처음에 범한 죄는 간음죄였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숨기겠다고 밧세바의 남편을 죽이는 살인죄까지 범하고 말지 않습니까? 처음의 죄를 숨기자고 거듭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수렁에 빠져들었습니다.

다윗은 회개치 아니할 때에 오는 고통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양심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종일 신음하므로"----다윗은 그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 고통, 도덕적 타락으로 인한 이 양심의 고통이야말로 정말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사람들을 보기가 부끄러워집니다. 자신에게도 환멸을 느끼고 자학을 하게됩니다. 행동은 거칠어지고 격해집니다. 양심이 파산되었으니 그 행위가 점점 사나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바로 이 신음함의고통, 양심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의 고통도 있었습니다. "내 뼈가 쇠하였도다"----뼈마디가 쑤시더라는 것입니다. 현대 의학에서는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걸리는 모든 병의 75% 이상이 정신적인 것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병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으로 고칠 병이 아닙니다. 수술해서 고쳐질 병도 아닙니다. 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한 병입니다. 다윗의 병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마음속에 죄가 있으니 육체도 쇠약해진 것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뼈가 마디마디 쑤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뼈가 말라 버렸어요.

온몸이 아프고 괴롭고, 마르고 비틀어지는 고통을 겪습니다. 깊은 함정---무저갱(無底坑)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토설치 아니할 때에"----회개치 아니함으로 당하는 죄의 댓가를 다윗은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두루 겪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은 아픔의 크기를 영적으로 깊이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회개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회개의 은총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회개의 기회는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지 않으시고, 오래오래 인내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아남아 있겠습니까? 범죄 현장에서 당장에 벌이 내려진다고 한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돌아올 때까지, 뉘우칠 때까지 회개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이것은 큰 축복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회개하도록 지혜와 그 계기를 만들어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에 실패함으로, 또 어떤 사람은 자리에 몸져누움으로 회개의 계기를 만납니다. 여러 가지 사건에 부딪히면서 회개할 수밖에 없도록 내 마음이 움직여질 때,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우리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질 때에는 놓치지 말고 붙들어야 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고 또 놓치다보면 마침내는 회개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넘어지고 맙니다. 가룟유다가 그런 사람입니다. 바리새 사람들, 제사장 가야바, 빌라도 같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쳐버린 사람들입니다.

다윗에게 나단 선지를 보내 주신 것은 은총입니다. 혼자서는 회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뉘우치고 괴로워하면서도 문제의 해결을 얻지 못하고 있을 때에 나단 선지가 찾아왔습니다. 그로부터 책망을 받음으로 다윗은 비로소 용기를 얻습니다.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에,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부딪쳐 오면서 회개하라고 촉구할 때에, 이때야말로 종말론적인 은혜의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말고 명심해야합니다. 이 마지막 기회를 포착해야 합니다. 놓치면 안 됩니다.

이 말세에, 아직도 나의 귀에 그 말씀이 들려온다는 것은 크나큰 은총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에 회개의 용기가 넘쳐 오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무리 회개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으면 회개하지 못하고 맙니다. 용기가 없어서 우물쭈물하다가 세월 다 보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만나서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때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곧잘 회개를 하는데, 정작 하나님 앞에서는 이 회개를 청산하지 못합니다.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도와야, 말씀의 역사가 도와야 용기가 납니다. 하나님께서 회개의 용기를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회개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비겁한 사람들은 회개의 용기를 얻지 못하여 술이나 마시고 일부러 타락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회개의 용기란 크나큰 포기(抛棄)를 의미합니다. 위대한 자기부정(自己否定)을 의미합니다. 독일에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재물을 잃은 것은 아무 것도 잃지 않은 것이다. 생명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다. 명예를 잃은 것은 전부를 잃은 것이다'----그렇습니다. 재물을 잃고 보면 많은 것을 잃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재물을 잃은 대신 믿음도 얻고 진실도 얻고, 지혜도 얻고 사랑도 얻습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잃은 것은 아무 것도 잃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생명을 잃었다고 해서 다 잃은 것이 아닙니다. 육신만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부만 잃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명예를 잃은 것은 전부를 잃은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람이란 깨끗한 명예를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법입니다. 더럽게 살아 가지고는 더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명예롭지 못하게 사느니보다 명예롭게 죽는 것이 사람답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명예를 잃는 것은 다 잃는 것이 됩니다.

이제 다윗 왕은 전부를 잃어야 하는 순간에 왔습니다. 생명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그는 왕좌에 앉아 삼권(三權)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위풍당당하게 앉아 남의 잘잘못을 가려 주고 재판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유부녀와 간통을 했습니다. 비겁하게도 그 여자의 남편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다윗 왕이 이런 사람이라고, 마침내 만천하에 드러내야할 순간이 온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운 순간입니까? 명예고 체통이고 위신이고 권세고, 다 포기해야 할 순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담대하게 용기를 찾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다 맡겨 버립니다. 하나님께 깨끗이 위탁해 버립니다. 백성들이 돌을 던지든 말든, 어떤 망신을 당하든, 어떤 위기가 오든 상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다 맡기고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고백합니다. 그는 회개함으로써 찾아지는 진실이, 그 정직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귀한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과 명예와 위신을 과감하게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리해야만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해야만 회개의 용기를 얻고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해야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영혼을 다시 소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용서의 은혜, 사죄의 은총을 알고 감격하고 기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 중에도 그러한 고백이 있습니다.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이것은 율법적인 관계에서의 청산을 의미합니다. 법적으로 깨끗이 용서받았다는 것입니다. 빚을 갚듯이 죄의 삯이 말끔히 청산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가 주어집니다. 사죄의 은총입니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30:5)".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죄의 가리움을 받는 사람을 봅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옛켈트 족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천사가 한 영혼을 인도하여 하늘나라로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영혼은 천사를 따라가면서 못내 걱정을 합니다. "이렇게 함께 가자고 하시니 따라가기는 합니다만 나같이 죄 많은 영혼이 감히 그 거룩한 나라에 어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워낙 더럽고 죄가 많은 놈입니다." 그는 죄가 많은데, 죄가 많은데 하고 되뇌면서 어느덧 천국 문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천국 문으로 들어가기를 그토록 송구스러워하던 영혼이 자신을 보니 아주 깨끗해져 있는 것입니다. 아무 허물도 없더라는 말씀입니다. 그 영혼이 묻습니다. "내가 죄 많은 사람인데 어이 이처럼 깨끗하게 되었지요?" 천사가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로다 덮으셨기 때문에 당신의 죄가 가리어져서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혼은 마침내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실 때에는 그 모든 허물을 깨끗이 덮어 주십니다. 어느 짓궂은 사람이 익살스럽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건망증이 심하셔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에 용서하신 것은 깨끗이 잊어버리신다.' 다윗은 말합니다. "()이 서(西)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103:12)." 사실이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이 어떤 죄를 지었습니까? 밧세바도 큰 죄를 짓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눈물과 회개를 보시고 용서하십니다. 밧세바는 왕후가 될 뿐만 아니라 저 지혜의 왕 솔로몬의 어머니가 됩니다. 이렇게 화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조금 용서하시고 마는 분이 아닙니다. 다 용서했다가도 뒤에 가서 새삼스럽게"옛날에 어떻게 했더라? 네가 어떤 죄를 지었더라?" 하고 지난 일을 뒤적거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깨끗이 용서하시고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더 큰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다윗과 밧세바에게 솔로몬을 주신 분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회개할 때에 정죄 하시지 않는 분입니다. 이러쿵저러쿵 죄의 대가를 따지지 않으시고 당신의 자녀로 영접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회개입니다. 남은 것은 회개입니다. 그런데 회개가 무엇입니까? 죄를 인정하는 것이요, 인정하되 자기의 죄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결코 남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참회록에서 단 한번도 밧세바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밧세바, 그 여자 때문에 내가 그런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죄는 내가 지었습니다, 저 사람도 내가 죄짓게 만들었습니다 ---- 이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또한 그에게는 전혀 변명이 없었습니다.

변명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가끔 보면 사과하러 갔다가 싸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해놓고는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마는 당신도……" 이러다가 문제는 오히려 더 복잡해지곤 합니다. 여러분, 사과할 때에는 사과만 하면 됩니다. '미안합니다''미안합니다'로 끝나야지 '그러나'가 붙으면 헛일입니다. 백 가지로 말하든 열 가지로 말하든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딴소리는 따라붙을 까닭이 없습니다. 과장해도 소용없고 엄청난 값으로 보상하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잘못했습니다' ---- 이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진실하게 죄를 고백하는 것, 이것만이 최선의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 고백할 때에 사죄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회하는 것 자체도 하나의 은총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1863430일 목요일을 국가적인 금식의 날로 정하자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고 합니다. 그의 청원서 내용을 살펴봅시다. '그것(금식)은 하나님의 힘 안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온 국민의 국가적 의무입니다. 바야흐로 우리 국토를 황폐화하고 있는 이 남북전쟁의 무서운 재앙은 우리 선조들의 죄에 대한 심판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우리 전국민에게 필요한 개혁을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인지도 모릅니다. 끊일 줄 모르는 성공으로 자만하느라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한 죄 탓인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지금은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들 자신을 낮추고 국가적인 죄와 개인적인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빌어야 할 때인 줄로 압니다.'

여러분, 우리들 주위에서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는 이 많은 사건들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모든 흉악한 사건들이 여러분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할 때입니다. 참되게 회개하고 죄사함 받는 은총을 힘입을 때, 거기에 구원이 있고,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참회의 은총(시편 3217)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이렇게 시작되는 시편 32편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애송시(愛誦詩)였다고 합니다. 셀릭커라고 하는 분은 그가 쓴 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주 울적한 심경으로 이 시편을 읽었다. 그리고 죽기 얼마 전에는 그의 병상 맞은편 벽에 이 시편을 써 붙여 놓고 소리내어 읽으면서 회오(悔悟)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생전에 이 시편으로 자신을 수련했으며, 병석에서는 위안을 찾았던 것이다.' 한편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시편32편을 사도 바울의 시()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과 인내로 충만한 시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합니다. 이 시를 읽는 자마다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죄로부터 자유 하는 길을 알게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다윗의 참회록'이라고 하여 즐겨 읽던 이른바 '시편 7'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 중의 한 편이 이 32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최선의 지식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여러분, 모든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면 그는 무식한 사람이요, 무식하기에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아마도 지식 중에 가장 얻기 힘든 지식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일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알기란 지극히 어렵습니다. 하물며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지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유치원 선생님이 자모님들을 초청하여 종이 한 장씩을 나누어 주고 설문(設問)을 냈습니다. "지금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당신의 이 어린 자녀가 자라나서 장차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나누어 드린 종이에 그것을 써 주십시오." 그랬더니, 이를테면 기술자, 학자, 의사, 판검사 등등으로, 자모님들은 모두가 한 가지씩 바라는 인물상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어머니는 좀 색다른 대답을 했더라고 합니다. '미안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하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제 생각에는 이 어머니가 가장 큰 인물을 소원한 것 같습니다. 큰 사람이라야 그런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안하다든지 내 잘못이라고 말하기는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죽음의 문제요, 하나는 죄의 문제입니다. 죽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면 철이 난 것입니다. 비로소 인간이 돼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짐으로 도덕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다시 말하여 사죄(赦罪)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그것이 바로 종교인이 되는 길입니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보다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보다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 더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시편 저자인 다윗 왕은 성군(聖君)이라 일컬어집니다.

유대나라 역사상의 많은 왕들 중에서 으뜸으로 높임을 받는 왕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은 예수님의 족보 기사(1:1)에 아브라함과 나란히 등장할 만큼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어진 사실도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의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아무튼 다윗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그 이름이 팔백 번이나 나올 정도로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고 하나님께서 인하여 특별히 기뻐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의인은 아니었습니다. '내 종 다윗의 정직함같이'라는 말이 성경에는 수도 없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보신 인간 다윗은 과연 정직한 사람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다윗의 별명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인격과 존재를 한마디로 나타낸 표현입니다. 그의 정직은 행위의 온전함에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믿음에 정직하고 회개함에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입니다.

데이터 상실한 부분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게 됩니다. 밧세바가 임신을 하게되자 문제가 크게 대두됩니다.

 

그래서 일선에 있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에게 특별휴가를 줍니다. 우리아가 돌아오면 밧세바와 동침할 것이요, 그렇게 되면 잉태된 아기를 우리아의 아기로 위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나 집에 돌아온 우리아는 일선에서 고생하고 있는 전우들을 생각해서도 아내와 편안하게 잠자리를 같이할 수 없다고 하면서 동침을 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결국 우리아를 없애기로 마음먹고 계략을 씁니다. 그는 우리아의 상관에게 비밀 지령을 보내어서 우리아가 적의 손에 죽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다윗은 남편 잃은 밧세바를 거리낌없이 후궁으로 취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일은 감쪽같이 숨겨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일이 다 그럴듯하게 숨겨진 것처럼 생각한 것----이것이 다윗의 죄입니다. 그런데 그 일들이 그렇게 무사히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엄청난 고뇌에 빠집니다. 때마침 나단 선지가 찾아와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고 힐책할 때 두말없이 회개합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아무런 변명 없이 무릎을 꿇습니다. 다윗은 죄의 본질을 아는 사람입니다. 죄의 성질을 알고, 그리고 경험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죄라는 것은 유혹의 매력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다윗에게는 미갈이라고 하는 왕후가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궁녀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남의 여자가 예쁘게 보일 것이 뭡니까? 하고많은 여자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남의 유부녀가 그토록 예쁘게 보여서 죄를 짓게 만드느냐,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책망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삼하 12:8-9)." 네가 원한다면 여자를 천이라도 줄 텐데 하필이면 왜 남의 여자를 건드렸느냐고 하시는 책망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죄가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죄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금단의 열매는 아름다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 눈길을 끄는 것----이것이 사단의 유혹이요 죄의 매력입니다. 에덴 동산에도 많은 나무와 온갖 과실이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어째서 하필이면 금단의 나무 주위를 맴돕니까? 왜 그것만 자꾸 쳐다봅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임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3 : 6)." 그렇습니다. 이것이 시험입니다. 죄에는 인간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짓는 순간에는 아무 생각도 못합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식입니다. 눈앞의 유혹으로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다윗은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또한 그 죄를 정당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상대화하고 보편화합니다. '나만 죄인인가? 나보다 더 큰 죄인도 많은데 뭐' 하고 자기를 정당화시킵니다. 이것이 죄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본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죄의 원인을 외면하고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려고 합니다. 위선에 빠집니다. 그리고 숨깁니다. 이른바 완전범죄를 노립니다. 그러다 보니 죄는 점점 더 불어납니다.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섭니다. 회개 없는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고 합니다. 거짓말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것을 끝까지 참말이라고 우기느라 또다시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다가 필경은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모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거짓말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도 없고 멈추기는 멈추어야 하겠는데 어느 선에서 멈출지,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죄를 회개하지 아니할 때에 또 다른 죄를 거듭해서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처음에 범한 죄는 간음죄였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숨기겠다고 밧세바의 남편을 죽이는 살인죄까지 범하고 말지 않습니까? 처음의 죄를 숨기자고 거듭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수렁에 빠져들었습니다.

다윗은 회개치 아니할 때에 오는 고통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양심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종일 신음하므로"----다윗은 그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 고통, 도덕적 타락으로 인한 이 양심의 고통이야말로 정말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사람들을 보기가 부끄러워집니다. 자신에게도 환멸을 느끼고 자학을 하게됩니다. 행동은 거칠어지고 격해집니다. 양심이 파산되었으니 그 행위가 점점 사나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바로 이 신음함의고통, 양심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의 고통도 있었습니다. "내 뼈가 쇠하였도다"----뼈마디가 쑤시더라는 것입니다. 현대 의학에서는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걸리는 모든 병의 75% 이상이 정신적인 것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병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으로 고칠 병이 아닙니다. 수술해서 고쳐질 병도 아닙니다. 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한 병입니다. 다윗의 병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마음속에 죄가 있으니 육체도 쇠약해진 것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뼈가 마디마디 쑤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뼈가 말라 버렸어요.

온몸이 아프고 괴롭고, 마르고 비틀어지는 고통을 겪습니다. 깊은 함정---무저갱(無底坑)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토설치 아니할 때에"----회개치 아니함으로 당하는 죄의 댓가를 다윗은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두루 겪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은 아픔의 크기를 영적으로 깊이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회개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회개의 은총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회개의 기회는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지 않으시고, 오래오래 인내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아남아 있겠습니까? 범죄 현장에서 당장에 벌이 내려진다고 한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돌아올 때까지, 뉘우칠 때까지 회개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이것은 큰 축복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회개하도록 지혜와 그 계기를 만들어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에 실패함으로, 또 어떤 사람은 자리에 몸져누움으로 회개의 계기를 만납니다. 여러 가지 사건에 부딪히면서 회개할 수밖에 없도록 내 마음이 움직여질 때,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우리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질 때에는 놓치지 말고 붙들어야 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고 또 놓치다보면 마침내는 회개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넘어지고 맙니다. 가룟유다가 그런 사람입니다. 바리새 사람들, 제사장 가야바, 빌라도 같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쳐버린 사람들입니다.

다윗에게 나단 선지를 보내 주신 것은 은총입니다. 혼자서는 회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뉘우치고 괴로워하면서도 문제의 해결을 얻지 못하고 있을 때에 나단 선지가 찾아왔습니다. 그로부터 책망을 받음으로 다윗은 비로소 용기를 얻습니다.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에,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부딪쳐 오면서 회개하라고 촉구할 때에, 이때야말로 종말론적인 은혜의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말고 명심해야합니다. 이 마지막 기회를 포착해야 합니다. 놓치면 안 됩니다.

이 말세에, 아직도 나의 귀에 그 말씀이 들려온다는 것은 크나큰 은총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에 회개의 용기가 넘쳐 오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무리 회개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으면 회개하지 못하고 맙니다. 용기가 없어서 우물쭈물하다가 세월 다 보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만나서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때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곧잘 회개를 하는데, 정작 하나님 앞에서는 이 회개를 청산하지 못합니다.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도와야, 말씀의 역사가 도와야 용기가 납니다. 하나님께서 회개의 용기를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회개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비겁한 사람들은 회개의 용기를 얻지 못하여 술이나 마시고 일부러 타락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회개의 용기란 크나큰 포기(抛棄)를 의미합니다. 위대한 자기부정(自己否定)을 의미합니다. 독일에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재물을 잃은 것은 아무 것도 잃지 않은 것이다. 생명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다. 명예를 잃은 것은 전부를 잃은 것이다'----그렇습니다. 재물을 잃고 보면 많은 것을 잃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재물을 잃은 대신 믿음도 얻고 진실도 얻고, 지혜도 얻고 사랑도 얻습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잃은 것은 아무 것도 잃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생명을 잃었다고 해서 다 잃은 것이 아닙니다. 육신만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부만 잃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명예를 잃은 것은 전부를 잃은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람이란 깨끗한 명예를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법입니다. 더럽게 살아 가지고는 더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명예롭지 못하게 사느니보다 명예롭게 죽는 것이 사람답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명예를 잃는 것은 다 잃는 것이 됩니다.

이제 다윗 왕은 전부를 잃어야 하는 순간에 왔습니다. 생명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그는 왕좌에 앉아 삼권(三權)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위풍당당하게 앉아 남의 잘잘못을 가려 주고 재판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유부녀와 간통을 했습니다. 비겁하게도 그 여자의 남편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다윗 왕이 이런 사람이라고, 마침내 만천하에 드러내야할 순간이 온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운 순간입니까? 명예고 체통이고 위신이고 권세고, 다 포기해야 할 순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담대하게 용기를 찾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다 맡겨 버립니다. 하나님께 깨끗이 위탁해 버립니다. 백성들이 돌을 던지든 말든, 어떤 망신을 당하든, 어떤 위기가 오든 상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다 맡기고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고백합니다. 그는 회개함으로써 찾아지는 진실이, 그 정직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귀한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과 명예와 위신을 과감하게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리해야만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해야만 회개의 용기를 얻고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해야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영혼을 다시 소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용서의 은혜, 사죄의 은총을 알고 감격하고 기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 중에도 그러한 고백이 있습니다.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이것은 율법적인 관계에서의 청산을 의미합니다. 법적으로 깨끗이 용서받았다는 것입니다. 빚을 갚듯이 죄의 삯이 말끔히 청산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가 주어집니다. 사죄의 은총입니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30:5)".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죄의 가리움을 받는 사람을 봅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옛켈트 족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천사가 한 영혼을 인도하여 하늘나라로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영혼은 천사를 따라가면서 못내 걱정을 합니다. "이렇게 함께 가자고 하시니 따라가기는 합니다만 나같이 죄 많은 영혼이 감히 그 거룩한 나라에 어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워낙 더럽고 죄가 많은 놈입니다." 그는 죄가 많은데, 죄가 많은데 하고 되뇌면서 어느덧 천국 문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천국 문으로 들어가기를 그토록 송구스러워하던 영혼이 자신을 보니 아주 깨끗해져 있는 것입니다. 아무 허물도 없더라는 말씀입니다. 그 영혼이 묻습니다. "내가 죄 많은 사람인데 어이 이처럼 깨끗하게 되었지요?" 천사가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로다 덮으셨기 때문에 당신의 죄가 가리어져서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혼은 마침내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실 때에는 그 모든 허물을 깨끗이 덮어 주십니다. 어느 짓궂은 사람이 익살스럽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건망증이 심하셔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에 용서하신 것은 깨끗이 잊어버리신다.' 다윗은 말합니다. "()이 서(西)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103:12)." 사실이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이 어떤 죄를 지었습니까? 밧세바도 큰 죄를 짓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눈물과 회개를 보시고 용서하십니다. 밧세바는 왕후가 될 뿐만 아니라 저 지혜의 왕 솔로몬의 어머니가 됩니다. 이렇게 화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조금 용서하시고 마는 분이 아닙니다. 다 용서했다가도 뒤에 가서 새삼스럽게"옛날에 어떻게 했더라? 네가 어떤 죄를 지었더라?" 하고 지난 일을 뒤적거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깨끗이 용서하시고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더 큰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다윗과 밧세바에게 솔로몬을 주신 분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회개할 때에 정죄 하시지 않는 분입니다. 이러쿵저러쿵 죄의 대가를 따지지 않으시고 당신의 자녀로 영접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회개입니다. 남은 것은 회개입니다. 그런데 회개가 무엇입니까? 죄를 인정하는 것이요, 인정하되 자기의 죄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결코 남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참회록에서 단 한번도 밧세바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밧세바, 그 여자 때문에 내가 그런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죄는 내가 지었습니다, 저 사람도 내가 죄짓게 만들었습니다 ---- 이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또한 그에게는 전혀 변명이 없었습니다.

변명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가끔 보면 사과하러 갔다가 싸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해놓고는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마는 당신도……" 이러다가 문제는 오히려 더 복잡해지곤 합니다. 여러분, 사과할 때에는 사과만 하면 됩니다. '미안합니다''미안합니다'로 끝나야지 '그러나'가 붙으면 헛일입니다. 백 가지로 말하든 열 가지로 말하든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딴소리는 따라붙을 까닭이 없습니다. 과장해도 소용없고 엄청난 값으로 보상하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잘못했습니다' ---- 이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진실하게 죄를 고백하는 것, 이것만이 최선의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 고백할 때에 사죄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회하는 것 자체도 하나의 은총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1863430일 목요일을 국가적인 금식의 날로 정하자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고 합니다. 그의 청원서 내용을 살펴봅시다. '그것(금식)은 하나님의 힘 안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온 국민의 국가적 의무입니다. 바야흐로 우리 국토를 황폐화하고 있는 이 남북전쟁의 무서운 재앙은 우리 선조들의 죄에 대한 심판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우리 전국민에게 필요한 개혁을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인지도 모릅니다. 끊일 줄 모르는 성공으로 자만하느라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한 죄 탓인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지금은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들 자신을 낮추고 국가적인 죄와 개인적인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빌어야 할 때인 줄로 압니다.'

여러분, 우리들 주위에서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는 이 많은 사건들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모든 흉악한 사건들이 여러분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할 때입니다. 참되게 회개하고 죄사함 받는 은총을 힘입을 때, 거기에 구원이 있고,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참회의 은총(시편 3217)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이렇게 시작되는 시편 32편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애송시(愛誦詩)였다고 합니다. 셀릭커라고 하는 분은 그가 쓴 책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주 울적한 심경으로 이 시편을 읽었다. 그리고 죽기 얼마 전에는 그의 병상 맞은편 벽에 이 시편을 써 붙여 놓고 소리내어 읽으면서 회오(悔悟)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생전에 이 시편으로 자신을 수련했으며, 병석에서는 위안을 찾았던 것이다.' 한편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시편32편을 사도 바울의 시()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과 인내로 충만한 시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합니다. 이 시를 읽는 자마다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죄로부터 자유 하는 길을 알게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다윗의 참회록'이라고 하여 즐겨 읽던 이른바 '시편 7'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 중의 한 편이 이 32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최선의 지식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여러분, 모든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면 그는 무식한 사람이요, 무식하기에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아마도 지식 중에 가장 얻기 힘든 지식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일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알기란 지극히 어렵습니다. 하물며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지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유치원 선생님이 자모님들을 초청하여 종이 한 장씩을 나누어 주고 설문(設問)을 냈습니다. "지금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당신의 이 어린 자녀가 자라나서 장차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나누어 드린 종이에 그것을 써 주십시오." 그랬더니, 이를테면 기술자, 학자, 의사, 판검사 등등으로, 자모님들은 모두가 한 가지씩 바라는 인물상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어머니는 좀 색다른 대답을 했더라고 합니다. '미안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하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제 생각에는 이 어머니가 가장 큰 인물을 소원한 것 같습니다. 큰 사람이라야 그런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안하다든지 내 잘못이라고 말하기는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죽음의 문제요, 하나는 죄의 문제입니다. 죽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면 철이 난 것입니다. 비로소 인간이 돼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짐으로 도덕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다시 말하여 사죄(赦罪)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그것이 바로 종교인이 되는 길입니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보다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보다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 더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시편 저자인 다윗 왕은 성군(聖君)이라 일컬어집니다.

유대나라 역사상의 많은 왕들 중에서 으뜸으로 높임을 받는 왕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은 예수님의 족보 기사(1:1)에 아브라함과 나란히 등장할 만큼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어진 사실도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의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아무튼 다윗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그 이름이 팔백 번이나 나올 정도로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특별히 받고 하나님께서 인하여 특별히 기뻐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의인은 아니었습니다. '내 종 다윗의 정직함같이'라는 말이 성경에는 수도 없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보신 인간 다윗은 과연 정직한 사람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다윗의 별명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인격과 존재를 한마디로 나타낸 표현입니다. 그의 정직은 행위의 온전함에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믿음에 정직하고 회개함에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입니다.

데이터 상실한 부분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게 됩니다. 밧세바가 임신을 하게되자 문제가 크게 대두됩니다.

 

그래서 일선에 있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에게 특별휴가를 줍니다. 우리아가 돌아오면 밧세바와 동침할 것이요, 그렇게 되면 잉태된 아기를 우리아의 아기로 위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나 집에 돌아온 우리아는 일선에서 고생하고 있는 전우들을 생각해서도 아내와 편안하게 잠자리를 같이할 수 없다고 하면서 동침을 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결국 우리아를 없애기로 마음먹고 계략을 씁니다. 그는 우리아의 상관에게 비밀 지령을 보내어서 우리아가 적의 손에 죽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다윗은 남편 잃은 밧세바를 거리낌없이 후궁으로 취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일은 감쪽같이 숨겨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일이 다 그럴듯하게 숨겨진 것처럼 생각한 것----이것이 다윗의 죄입니다. 그런데 그 일들이 그렇게 무사히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엄청난 고뇌에 빠집니다. 때마침 나단 선지가 찾아와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고 힐책할 때 두말없이 회개합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아무런 변명 없이 무릎을 꿇습니다. 다윗은 죄의 본질을 아는 사람입니다. 죄의 성질을 알고, 그리고 경험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죄라는 것은 유혹의 매력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다윗에게는 미갈이라고 하는 왕후가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궁녀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남의 여자가 예쁘게 보일 것이 뭡니까? 하고많은 여자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남의 유부녀가 그토록 예쁘게 보여서 죄를 짓게 만드느냐,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책망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삼하 12:8-9)." 네가 원한다면 여자를 천이라도 줄 텐데 하필이면 왜 남의 여자를 건드렸느냐고 하시는 책망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죄가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죄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금단의 열매는 아름다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 눈길을 끄는 것----이것이 사단의 유혹이요 죄의 매력입니다. 에덴 동산에도 많은 나무와 온갖 과실이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어째서 하필이면 금단의 나무 주위를 맴돕니까? 왜 그것만 자꾸 쳐다봅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임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3 : 6)." 그렇습니다. 이것이 시험입니다. 죄에는 인간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짓는 순간에는 아무 생각도 못합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식입니다. 눈앞의 유혹으로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다윗은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또한 그 죄를 정당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상대화하고 보편화합니다. '나만 죄인인가? 나보다 더 큰 죄인도 많은데 뭐' 하고 자기를 정당화시킵니다. 이것이 죄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본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죄의 원인을 외면하고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려고 합니다. 위선에 빠집니다. 그리고 숨깁니다. 이른바 완전범죄를 노립니다. 그러다 보니 죄는 점점 더 불어납니다.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섭니다. 회개 없는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고 합니다. 거짓말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것을 끝까지 참말이라고 우기느라 또다시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다가 필경은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모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거짓말을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도 없고 멈추기는 멈추어야 하겠는데 어느 선에서 멈출지,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죄를 회개하지 아니할 때에 또 다른 죄를 거듭해서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처음에 범한 죄는 간음죄였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숨기겠다고 밧세바의 남편을 죽이는 살인죄까지 범하고 말지 않습니까? 처음의 죄를 숨기자고 거듭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수렁에 빠져들었습니다.

다윗은 회개치 아니할 때에 오는 고통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양심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종일 신음하므로"----다윗은 그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 고통, 도덕적 타락으로 인한 이 양심의 고통이야말로 정말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사람들을 보기가 부끄러워집니다. 자신에게도 환멸을 느끼고 자학을 하게됩니다. 행동은 거칠어지고 격해집니다. 양심이 파산되었으니 그 행위가 점점 사나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바로 이 신음함의고통, 양심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의 고통도 있었습니다. "내 뼈가 쇠하였도다"----뼈마디가 쑤시더라는 것입니다. 현대 의학에서는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걸리는 모든 병의 75% 이상이 정신적인 것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병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으로 고칠 병이 아닙니다. 수술해서 고쳐질 병도 아닙니다. 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한 병입니다. 다윗의 병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마음속에 죄가 있으니 육체도 쇠약해진 것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함으로 뼈가 마디마디 쑤시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뼈가 말라 버렸어요.

온몸이 아프고 괴롭고, 마르고 비틀어지는 고통을 겪습니다. 깊은 함정---무저갱(無底坑)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토설치 아니할 때에"----회개치 아니함으로 당하는 죄의 댓가를 다윗은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두루 겪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은 아픔의 크기를 영적으로 깊이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회개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회개의 은총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회개의 기회는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지 않으시고, 오래오래 인내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아남아 있겠습니까? 범죄 현장에서 당장에 벌이 내려진다고 한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돌아올 때까지, 뉘우칠 때까지 회개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이것은 큰 축복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회개하도록 지혜와 그 계기를 만들어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에 실패함으로, 또 어떤 사람은 자리에 몸져누움으로 회개의 계기를 만납니다. 여러 가지 사건에 부딪히면서 회개할 수밖에 없도록 내 마음이 움직여질 때,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큰 축복입니다. 우리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질 때에는 놓치지 말고 붙들어야 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고 또 놓치다보면 마침내는 회개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넘어지고 맙니다. 가룟유다가 그런 사람입니다. 바리새 사람들, 제사장 가야바, 빌라도 같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쳐버린 사람들입니다.

다윗에게 나단 선지를 보내 주신 것은 은총입니다. 혼자서는 회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뉘우치고 괴로워하면서도 문제의 해결을 얻지 못하고 있을 때에 나단 선지가 찾아왔습니다. 그로부터 책망을 받음으로 다윗은 비로소 용기를 얻습니다.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에,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부딪쳐 오면서 회개하라고 촉구할 때에, 이때야말로 종말론적인 은혜의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말고 명심해야합니다. 이 마지막 기회를 포착해야 합니다. 놓치면 안 됩니다.

이 말세에, 아직도 나의 귀에 그 말씀이 들려온다는 것은 크나큰 은총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에 회개의 용기가 넘쳐 오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무리 회개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으면 회개하지 못하고 맙니다. 용기가 없어서 우물쭈물하다가 세월 다 보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만나서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때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곧잘 회개를 하는데, 정작 하나님 앞에서는 이 회개를 청산하지 못합니다.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도와야, 말씀의 역사가 도와야 용기가 납니다. 하나님께서 회개의 용기를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회개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비겁한 사람들은 회개의 용기를 얻지 못하여 술이나 마시고 일부러 타락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회개의 용기란 크나큰 포기(抛棄)를 의미합니다. 위대한 자기부정(自己否定)을 의미합니다. 독일에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재물을 잃은 것은 아무 것도 잃지 않은 것이다. 생명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다. 명예를 잃은 것은 전부를 잃은 것이다'----그렇습니다. 재물을 잃고 보면 많은 것을 잃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재물을 잃은 대신 믿음도 얻고 진실도 얻고, 지혜도 얻고 사랑도 얻습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잃은 것은 아무 것도 잃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생명을 잃었다고 해서 다 잃은 것이 아닙니다. 육신만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부만 잃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명예를 잃은 것은 전부를 잃은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람이란 깨끗한 명예를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법입니다. 더럽게 살아 가지고는 더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명예롭지 못하게 사느니보다 명예롭게 죽는 것이 사람답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명예를 잃는 것은 다 잃는 것이 됩니다.

이제 다윗 왕은 전부를 잃어야 하는 순간에 왔습니다. 생명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상을 해보십시오. 그는 왕좌에 앉아 삼권(三權)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위풍당당하게 앉아 남의 잘잘못을 가려 주고 재판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유부녀와 간통을 했습니다. 비겁하게도 그 여자의 남편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다윗 왕이 이런 사람이라고, 마침내 만천하에 드러내야할 순간이 온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운 순간입니까? 명예고 체통이고 위신이고 권세고, 다 포기해야 할 순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담대하게 용기를 찾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다 맡겨 버립니다. 하나님께 깨끗이 위탁해 버립니다. 백성들이 돌을 던지든 말든, 어떤 망신을 당하든, 어떤 위기가 오든 상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다 맡기고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고백합니다. 그는 회개함으로써 찾아지는 진실이, 그 정직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귀한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과 명예와 위신을 과감하게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리해야만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해야만 회개의 용기를 얻고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해야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영혼을 다시 소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용서의 은혜, 사죄의 은총을 알고 감격하고 기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 중에도 그러한 고백이 있습니다.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이것은 율법적인 관계에서의 청산을 의미합니다. 법적으로 깨끗이 용서받았다는 것입니다. 빚을 갚듯이 죄의 삯이 말끔히 청산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가 주어집니다. 사죄의 은총입니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30:5)".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죄의 가리움을 받는 사람을 봅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옛켈트 족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천사가 한 영혼을 인도하여 하늘나라로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영혼은 천사를 따라가면서 못내 걱정을 합니다. "이렇게 함께 가자고 하시니 따라가기는 합니다만 나같이 죄 많은 영혼이 감히 그 거룩한 나라에 어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워낙 더럽고 죄가 많은 놈입니다." 그는 죄가 많은데, 죄가 많은데 하고 되뇌면서 어느덧 천국 문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천국 문으로 들어가기를 그토록 송구스러워하던 영혼이 자신을 보니 아주 깨끗해져 있는 것입니다. 아무 허물도 없더라는 말씀입니다. 그 영혼이 묻습니다. "내가 죄 많은 사람인데 어이 이처럼 깨끗하게 되었지요?" 천사가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로다 덮으셨기 때문에 당신의 죄가 가리어져서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혼은 마침내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실 때에는 그 모든 허물을 깨끗이 덮어 주십니다. 어느 짓궂은 사람이 익살스럽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건망증이 심하셔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에 용서하신 것은 깨끗이 잊어버리신다.' 다윗은 말합니다. "()이 서(西)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103:12)." 사실이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이 어떤 죄를 지었습니까? 밧세바도 큰 죄를 짓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눈물과 회개를 보시고 용서하십니다. 밧세바는 왕후가 될 뿐만 아니라 저 지혜의 왕 솔로몬의 어머니가 됩니다. 이렇게 화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조금 용서하시고 마는 분이 아닙니다. 다 용서했다가도 뒤에 가서 새삼스럽게"옛날에 어떻게 했더라? 네가 어떤 죄를 지었더라?" 하고 지난 일을 뒤적거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깨끗이 용서하시고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더 큰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다윗과 밧세바에게 솔로몬을 주신 분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회개할 때에 정죄 하시지 않는 분입니다. 이러쿵저러쿵 죄의 대가를 따지지 않으시고 당신의 자녀로 영접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회개입니다. 남은 것은 회개입니다. 그런데 회개가 무엇입니까? 죄를 인정하는 것이요, 인정하되 자기의 죄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결코 남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참회록에서 단 한번도 밧세바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밧세바, 그 여자 때문에 내가 그런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죄는 내가 지었습니다, 저 사람도 내가 죄짓게 만들었습니다 ---- 이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또한 그에게는 전혀 변명이 없었습니다.

변명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가끔 보면 사과하러 갔다가 싸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해놓고는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마는 당신도……" 이러다가 문제는 오히려 더 복잡해지곤 합니다. 여러분, 사과할 때에는 사과만 하면 됩니다. '미안합니다''미안합니다'로 끝나야지 '그러나'가 붙으면 헛일입니다. 백 가지로 말하든 열 가지로 말하든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딴소리는 따라붙을 까닭이 없습니다. 과장해도 소용없고 엄청난 값으로 보상하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잘못했습니다' ---- 이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진실하게 죄를 고백하는 것, 이것만이 최선의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 고백할 때에 사죄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회하는 것 자체도 하나의 은총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1863430일 목요일을 국가적인 금식의 날로 정하자는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고 합니다. 그의 청원서 내용을 살펴봅시다. '그것(금식)은 하나님의 힘 안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온 국민의 국가적 의무입니다. 바야흐로 우리 국토를 황폐화하고 있는 이 남북전쟁의 무서운 재앙은 우리 선조들의 죄에 대한 심판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우리 전국민에게 필요한 개혁을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인지도 모릅니다. 끊일 줄 모르는 성공으로 자만하느라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한 죄 탓인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지금은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들 자신을 낮추고 국가적인 죄와 개인적인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빌어야 할 때인 줄로 압니다.'

여러분, 우리들 주위에서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는 이 많은 사건들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모든 흉악한 사건들이 여러분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할 때입니다. 참되게 회개하고 죄사함 받는 은총을 힘입을 때, 거기에 구원이 있고,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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