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4:1-11
오늘 본문의 바로 앞에 있는 3:19-21과 이어지는 오늘 본문의 첫 문장을 함께 읽어봅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잠자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무엘을 통해 제사장이며 사사이면서도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된 엘리의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할 것임이 예고되었고, 반면에 사무엘은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도록 세우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블레셋은 주전 12세기 전반기에 그리스의 섬들로부터 이스라엘의 남서쪽 해안지대에 이주해 와서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에게 큰 위협과 골칫거리가 된 족속입니다. 그들은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군사적으로 잘 조직되었으며 힘이 넘쳤고 아주 호전적인 민족으로서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한지 반세기만에 이스라엘을 괴롭히며 억압할 수 있을 만큼 강성해졌던 것입니다. 이들과 싸우기 위해서 다시 이스라엘은 나가서 에벤에셀 곁에 진을 쳤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이란 곳에 진을 쳤습니다(본문 1절). 블레셋 사람들이 먼저 이스라엘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했고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스라엘이 사천 명 가량의 전사자를 내며 블레셋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본문 2절). 패전한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자 이스라엘 장로들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했습니다(본문 3절). 그래서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거기 있던 하나님의 궤를 에벤에셀 곁에 있는 진영으로 가져왔습니다(본문 4절).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 백성은 땅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환호했습니다(본문 5절). 그 환호성은 블레셋 진영에까지 들렸으며 블레셋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영문을 몰라 서로 묻기를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온 사실을 알고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말하기를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했습니다(본문 6-8절). 그런데 이렇게 두려움에 떨던 블레셋 사람들은 놀랍게도 이스라엘 침공을 포기하고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더 마음을 강하게 먹고 죽기 살기로 싸우기로 작정을 하고는 군사들을 독려했습니다: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본문 9절). 이스라엘을 자기들 밑에 굴복시키던 상황이 반전되어 자기들이 이스라엘에 굴복해야 하는 상황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나온 반작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다시 공격을 했고 이스라엘은 패하여 뿔뿔이 흩어져 도망했으며 삼만 명이 전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본문 10절). 그리고 무엇보다도 치욕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궤를 이방 블레셋 사람의 손에 빼앗기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본문 11절).
이 사실은 이스라엘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한 전쟁을 잃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한 시대가 그 막을 내리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예고하신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역사였습니다. 바로 엘리의 가문이 일시에 몰락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블레셋의 손에 넘어갈 때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두 악한 제사장 형제의 죽음은 줄줄이 온 가족의 죽음을 불러왔습니다. 이스라엘이 대패했으며 하나님의 궤를 지키던 두 아들 제사장들이 죽고 그 궤는 블레셋 사람의 손에 빼앗겼다는 소식은 그날로 엘리에게 전해졌습니다(삼상4:12-13). 엘리는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는 말을 듣는 순간 앉아있던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삼상4:18). 엘리 가문의 비극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죽은 아들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때가 가까웠었는데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들은 그녀는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아들을 낳고는 죽고 말았습니다(삼상4:19-20). 그녀가 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녀에게 "아들을 낳았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용기를 주려했으나 그녀는 그 사실에 대답도 하지 않고 관심을 보이지도 않은 채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는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부르게 하고는 숨을 거두었습니다(삼상4:20-21). 그녀가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 지은 것은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단지 자기 가문에서 더 이상 함께하지 않는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엘리의 가문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갔음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한 그녀 자신의 마지막 말을 통해서 분명한 것입니다(삼상4:22). 이렇게 엘리 가문의 몰락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잃은 이스라엘의 한 시대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역사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 앞에 서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가지고서도 전쟁에서 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승리나 성공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 족속이 하나님의 궤의 초자연적인 위력을 다 알면서도 인간적인 전의를 불태우고 맹렬히 싸워서 하나님의 궤를 가져다놓고는 승리를 확신하던 하나님의 백성을 이겼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믿음이 없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궤는 그저 하나의 나무상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어떤 마술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할 뿐이지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궤를 갖고 있다고 해서 곧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언약궤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임을 상기시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셔서 안전과 승리와 만사형통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나 그들이 언약에 불성실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실 것임을 알게 하는 증거의 궤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생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3-5절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먼저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한 말을 생각해봅니다. 그들은 그들의 패배의 원인을 자기들 자신에게서 찾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실수나 부주의로 여긴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궤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지 않은 것뿐이었습니다. 그것만 있다면 자기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이 말 속에서도 그들의 잘못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여쭙지 않고 스스로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 자체가 자기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해 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각 속에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도 그가 역사하실 자리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들에게서 시정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진정한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실이 4절에서 나타납니다: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여기서 우리는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한 데에 주목하게 됩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 신분이 제사장이었으면서도 온 백성이 다 아는 망나니들이었습니다. 언약궤를 갖다놓았으면 뭘 합니까? 거기에 함께하는 자들이 언약궤와 함께할 자격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언약궤를 가져다 놓는 변화는 있었지만 언약궤와 함께하는 자들에게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시정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반적으로 쇠락한 이스라엘의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 없이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변화로만 승리를 기대한 것이 그들의 잘못이었던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며 행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궤는 하나의 궤짝에 불과한 것임을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몰락하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물건들은 많이 있습니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제일 놀라는 것 중의 하나가 그 많은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불교의 나라이고 유교의 나라인 줄로 알고 온 외국인들의 눈에 교회의 십자가 말고 다른 종교의 상징물들은 거의 보이질 않습니다. 어디에나 있고 즐비하게 세워진 교회건물 위에 걸린 십자가는 우리나라를 강력한 기독교국가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징물들도 많습니다. 신학교가 그렇게 많은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신학지망생이 그렇게 많으며 신학교입시경쟁률이 그렇게 센 나라도 지구상에 없습니다. 신학교 들어가기 위한 준비학원이 있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열 교회 중 적어도 대여섯 교회는 한국에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 제2의 선교대국이고 가장 활발한 성서공회가 있는 나라입니다. 국토의 면적이나 인구의 수나 경제력을 고려해볼 때에 우리나라는 사실상 제1의 선교대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이 어디냐고 말한다면 단연 한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많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들을 갖고 있는 이 나라의 요즘 형편이 어떻습니까? 교회가 사회로부터 얼마나 신뢰와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 오히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땅에 서있는 그 많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들이 힘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반기독교적인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교회를 옥죄려는 여러 가지 시도들 앞에서 소리 높여 외치며 대항해보지만 반기독교세력들은 오히려 더욱 맹렬히 달려들고 있습니다.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된 개정 사학법을 위시해서 자유로운 신앙교육을 봉쇄하고 교회의 선교사역을 억압하는 조치들을 취하며 갈수록 교회에 대하여 적대감을 드러내는 권력 앞에서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많은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망하게 내버려두시겠느냐?"는 식의 안이한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몇 번씩 몰락하고 멸망하게 하신 바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언약궤를 갖고 있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때가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땅에 가득 찬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들이 우리에게도 아무 쓸모가 없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높이 단 교회는 많으나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온전히 응답하는 믿음이 함께하고 있는지를 냉정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비느하스의 아내가 죽으며 낳은 아들에게 붙여준 이름 [이가봇]의 뜻은 "영광이 없다" 또는 "영광이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외치기는 하지만 과연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와 함께하는지를 곰곰이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가봇]이 오늘날 우리에게 붙여지는 이름은 아닌지, 한국교회가 몰락하는 엘리의 가문과 같은 처지에 이른 것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할 것입니다. 엘리와 홉니와 비느하스는 바로 오늘날 우리들 자신을 가리키는 이름들이 아닌지를 냉철히 돌이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3 1절 기념주일입니다. 3 1절은 87년 전 우리에게서 나라의 주권과 국민의 자유를 강탈한 일본제국의 총칼에 맞서 분연히 일어났던 우리 선조들의 의거를 기념하고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권국가로 지켜나가려는 의지를 새롭게 하는 국경일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에 맞추어 3 1절 기념주일을 지키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단지 우리나라를 침탈했던 일본에 대한 경계심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왜 우리가 지난 한 때의 35년간 나라의 주권과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잃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신앙적으로 깊이 반성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의 그 어떤 나라와 민족도 비교할 수 없이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들을 지니게 되었으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는 나라가 되지 않도록 바른 믿음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이수영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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