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비결(1) 마5:1~3
▲오늘 광명 행복한 교회에 와서 “행복의 비결” 이라는 제목으로
오전과 오후 예배시간에, 두 번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원하고 있습니다. 모두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모두 행복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한 것 같은데, 불행한 사람도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불행한 것 같은데, 행복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겉으로 보기에는 불행한 사람 같은데, 실제로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고백했고
성도들의 사랑 안에서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기쁨과 행복의 비결
즉 자족과 행복의 비결을 인생학교에서 배웠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내가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1~12).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40일 동안 금식하신 다음 갈릴리에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7) 라고 선언하신 다음에
산에 올라가서 여덟 가지 축복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1-3).
공동번역과 현대인의 번역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덟 가지 삶의 자세를 지니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 즉 행복한 사람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팔복에서의 ‘복’은 원어적으로 ‘행복’에 가깝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그 여덟 가지 행복의 말씀들 중에서 첫 번째 말씀을 중심으로
“행복의 비결”(1)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주님의 입을 바라보아야 하고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어야 하고
그리고 그 말씀을 우리들의 마음과 몸에 받아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복 있는 사람”의 첫 번째 모습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여기 ‘가난한 자’란.. 마음을 비운 자를 말합니다.
마음을 비워서, 마음이 가난해지고 겸손해진 자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영적으로만> 해석합니다.
즉 물질은 얼마든지 소유해도, 마음만 가난하면 된다고 해석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마음뿐 아니라,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생활도 비워서
가난해진 사람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눅6:20에서 주님께서는 그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몸은 언제나 함께 갑니다.
마음과 몸에 무엇이 가득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마음과 몸이 비어서 가난하게 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행복론과는 정반대 되는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의 행복론은 무엇을 가득히 채운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지식과 재물과 부귀영화를 가득히 채운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난”이 행복한 삶의 열쇠요 관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는 것이 행복의 기초가 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고 주님을 좇으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할 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가난하게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만 하신 분이 아니라
친히 가난하게 되신 분이십니다.
고후8:9을 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주님께서는 영적으로만 가난하게 되시지 않고, 육체적으로도 가난하게 되시었습니다.
주님도 부를 모으실 수 있었고, 큰 부자가 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부자들도 주님을 많이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엇이 얼마가 들어오든지.. 자신을 다 ‘비우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거처하실 곳이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머리 둘 곳조차 없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8:20).
그분의 삶은 가난 자체였습니다.
결국 주님을 따르는 복 있는 사람이 되는 첫 걸음이
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상한 사상이 아니고, 지난 2천년 교회의 전통입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습니다. 많이 벌면 좋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활은 ‘비우는’것이 성경적입니다.)
▲또 한 곳을 읽습니다. 빌2:6-8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분은 친히 자신을 비어 가난하게 되신 분이십니다.
물질만 버리신 것이 아니라, 존귀와 영광까지도 다 비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시고, 자신을 비우시고 친히 가난해 지셨습니다.
그래서 영광의 자리에 이르는, 복 있는 자의 모델이 되시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그러면 무엇을 버리고 비워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비워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생각과 뜻이 옳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고집합니다.
자기의 습관과 전통과 가치관이 옳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고집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선하고 착하다고 생각합니다.
눅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자기가 의인이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18:11).
▲청년 사울도 처음에는 자기가 의인이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3:6) 라고 자신을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의인이라고 착각을 하며
자기의 의로운 생각을 나타내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결국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이 되는 첫째 걸림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는 첫 걸음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비우는 것입니다.
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비우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를 버리고 비우면 비울수록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비우셨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7).
하나님의 귀한 종들은 모두 이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모세도 다윗도 이사야도 모두 자기 자신을 비우고 버렸을 때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히 임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자기의 무능을 고백했습니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
다윗은 자기의 죄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3).
이사야는 자기의 자기의 절망스러운 모습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교회사에 나타난 신앙의 선배들도 모두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처절한 회개의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어거스틴).
“나는 작은 벌레입니다”(프랜시스).
“나는 버림 받을 죄인입니다”(루터).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칼빈).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길선주).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이기풍).
“나는 신사 참배한 죄인입니다”(한경직).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박윤선).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을 조금씩 변질시켜가는 설교자가 되고 있었습니다.”(옥한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내 뜻대로 하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하시며
자기의 뜻을 버리셨을 때,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이 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모든 지식과 전통과 종교적 의를 배설물로 여기며 던져 버리고
자기를 ‘죄인 중의 괴수’라고 불렀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충만이 임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본래의 성품이나 인격에
신뢰를 두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지위나 재능을 신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가 받은 교육이나 학위 따위를 조금도 자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고백한대로, 이와 같은 것들을 모두 분토로 여기고,
방해물로 생각하는 "낮아진 마음"의 태도를 말합니다.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만을 의뢰하는 겸손한 마음이 곧 가난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사람을 붙들어주시고 은혜와 복을 채워주십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는 첫 걸음은 자가 자신을 버리고 비우는 것입니다.
물론 말세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자기 사랑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했습니다.
자기 사랑을 버리고, 자기 집착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비우는 일이
복 있는 사람이 되는 첫 걸음입니다.
◑2.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비워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재물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돈을 사랑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눅16:14)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이 되는 또 하나의 걸림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도 없고
복을 받을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을 향해서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부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마음과 몸을 돈에서 비우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므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다음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3~24).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3).
▲성경은 많은 곳에서 돈과 재물에 대한 애착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경고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복 있는 사람이 되는 첫 걸음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비우되,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비우는 것입니다.
돈과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비우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말세에는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게 된다고.. 사도 바울이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돈과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비우면, 비울수록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성 프랜시스는 아버지로부터의 상속권도
자기가 물려 받은 유산과 재산도 모두 다 버리고
한 평생 가난과 청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가난이란 이름의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비애는 나의 자매이고 고통과 죽음도 나의 자매입니다.”
결국 프랜시스는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복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3세기(종교개혁 직전) 당시의, 부패한 유럽의 기독교 신앙을 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세상과 교계의 부귀 영화를 다 포기하고 버리면서
가난과 청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가난을 애처로 고난을 스승으로 삼으면서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작은 예수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장기려 박사님도
한 평생을 무소유자로 가난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분들이야말로 만인의 사랑과 칭송을 받는 복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축재하고, 많은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었다면,
과연 오늘날 만인의 존경을 받았을까요?
한경직 목사님도 모든 것을 비우고 버리면서 3무의 삶
즉 가난과, 청빈의 삶을 사시므로 만인의 존경을 받는 귀한 삶을 사셨습니다.
이와 같은 가난과 청빈의 사람들은
세상에서는 물론, 하늘에서는 더욱 더 큰 복을 받는 귀한 분들이 될 것입니다.
▲말세에는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말세 교회를 대표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자랑거리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계3:17).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엄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비우며,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일이, 복 있는 사람이 되는 첫 걸음입니다.
◑3. 자기의 유익과 행복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비워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의 유익과 행복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유익과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자기의 유익이나 행복을 포기하고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다른 사람들을 채우는 삶이, 복이 있는 사람의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기본 원리는, 자기의 유익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유익이나 행복을 포기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행복을 추구하는 삶이었습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자기 행복 포기의 삶을, 이렇게 강하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다"(롬9:3).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즉 피의 제사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니"(빌2:17).
▲어거스틴은 32년 동안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발견한 다음에는 진정한 행복을 발견했는데
그 후부터는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서 돌이켜
고향 북아프리카로 돌아가서, 그곳 주민들의 유익과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그는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 되었고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데이빗 리빙스턴과, 슈바이처 박사도 그 길을 걸었습니다.
자기의 행복과 유익을 포기하는 가난한 삶의 길을 걸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그 길을 걸었습니다. 자기의 유익과 행복을 포기하면서
나환자들의 유익과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복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선교사들이 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자기의 행복을 포기하는 가난하고 불편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방글라데시의 노재인 선교사는
방글라데시의 가난한 어린이들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자기 자신의 유익과 행복을 포기하며
지난 20여 년 이상 자기의 젊음을 모두 불사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헌신적인 선교사들이 세계 곳곳에 있습니다.
때로는 외롭고 힘들지만 이들의 걸음은 복 있는 자들의 걸음입니다.
이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
▲▲예수님의 말씀 선포와 팔복 선포의 초점은 천국에 있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5:10).
아니 성경의 초점은 천국에 있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삶은 그림자와도 같고, 아침에 돋는 풀과도 같고
날아가는 화살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의 복이 참된 복이고 천국에서의 행복이 참된 행복입니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을 소유하는 가장 큰 축복을 받게 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복 있는 사람의 첫 번째 모습이 어떠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가난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첫째로, 자기 자아/명예/신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비워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자기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비워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자기의 유익과 행복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비워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까?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또 바라볼 때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앞서가신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과 한경직 목사님 등을 바라보고 또 바라볼 때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길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앙망하는 길입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십시다.
친히 가난하게 되신 주님, 친히 자신을 비우신 주님만을 바라보십시다.
나의 믿음, 나의 봉사, 내가 이룬 일들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십시다.
예수님만을 바라보면 볼수록, 나 자신은 쓸모 없고 무능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우리들의 마음이 가난해 질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옵소서"(찬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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