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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목회자(가나다순)

순교한 목사(牧師)아내로서의 고통

by 【고동엽】 2022. 2. 17.

순교한 목사(牧師)아내로서의 고통


순교(殉敎)는 주를 위하여 몸과 마음과 생명까지도 모두 바쳐 희생하는 것을 말하는데 죽은 자만이 순교자라고 하지 아니하고 살아있는 순교자라는 책자도 나왔는데 이는 루마니아에서 지하교회를 지도하던 범블랜드 목사의 활동사항을 그리며 그의 고통을 생각하고 쓴 책인데 그 내용은 정말 목숨이 붙어 있으니 살았지 그는 죽은 자나 다름없는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것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 공산치하에서 무신론주의(無神論主義)자들과 종교적인 전쟁은 목숨을 걸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런 줄을 알면서도 목사가 되어 복음의 사명을 가지고 순교를 각오하고 사지(死地)로 들어 간 것부터 사모에게는 고통이 예견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사모는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정도로 사명감이 투철하지 못할 경우도 있기에 사명에 의하여 받는 고통과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받는 고통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목사는 부름을 받는 순간부터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될 것을 주께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 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하였다(요21:18-23).


'진실로 진실로'라는 도입 문구는 현재 분위기의 엄숙함을 시사한다. 그리고 도입 문구의 엄숙함에 걸맞게 베드로의 순교(殉敎)가 예고되고 있는데 혹자는 본 절이 '어릴 적에는 가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갈 수 있었으나 성인이 되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의미의 속담을 배경에 두고 있다고 보는데(Bultmann) 분명한 근거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본 절이 베드로의 순교 외에 구체적인 그의 죽음 방식에 대해서도 예언하고 있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불트만(Bultmann)같은 학자는 본 절이 '그가 전에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택했으나, 그의 마지막 길은 마음대로 가지 못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다음절(19절)과 관련시켜 볼 때 베드로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닌 방식 즉 순교의 형태로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본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한 여기서의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고 양들을 돌보는 목회적(牧會的) 직무를 수행하다 강제적으로 부과된 죽음 곧 순교를 가리킨다.
이 순교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점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베드로는 이런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죽음으로 하나님을 영광되게 한 것과 같다. 그런데 성경에는 베드로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순교를 당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마지막 행적은 헤롯 아그립바I세의 박해를 받아 옥에 갇혔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탈출한 후(행12:1-19) 예루살렘 공의 회에 나타난 것으로 끝을 맺는다(행15:1-11). 성경 외의 초기 문헌들에는 베드로의 최후 행적에 대한 기록이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다. 로마의 감독 클레멘트(Clement, 88-97)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클레멘트1서)에는 베드로가 바울과 함께 로마에서 순교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베드로가 네로(Nero) 황제의 통치하에서 바울과 같은 십자가에 처형되어 순교했다고 말했으며 그는 베드로의 십자가 죽음에서 '남이 네게 띠 띠우고' 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보았다(15).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베드로의 십자가 처형과 관련하여 그가 자청하여 머리를 아래로 두는 형태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었다고 전한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진술의 배경에는 '주님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바른 자세로 처형되었는데 내가 어찌 주님처럼 바로 매달릴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에서 베드로의 겸손하고도 철저한 순종(順從)을 시사하는 뜻이 들어 있다.


또한 신약 외경인 '베드로행전'에는 비록 사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는데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그 분은 "네가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하니 내가 다시 십자가를 지려고 로마로 간다"라고 대답하셨다. 이 대답을 들은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로마로 되돌아가 사역을 계속하다 체포당한 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처형당하였다는 것이다.
독신(獨身)으로 목회 하는 분들의 경우에는 거침없이 자기의 사명감만 있으면 얼마든지 순교할 수 있지만 아내가 있는 목회자들은 자기들은 순교할 수 있다고 하지만 아내인 사모들은 그와 같은 사명이 없으면서도 목회자 부인이라는 단순한 이유하나만으로 남편과 같이 순교해야 한다는 논리는 무리가 따른다.


사모는 목회자가 아니고 평범한 여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 그도 여자이기 때문에 사치도 하고 싶고 백화점에 가서 구매욕구(購買要求)도 충족시키고 싶은 것이며 여자로서의 바램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는 여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목회자 사모가 되어 그와 같은 욕구를 억제하고 사모답게 살려고 애를 쓰는 것도 벅찬데 순교까지 강요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그런데 오늘의 사람들은 사모까지도 순교함이 마땅하다고 보는 거기에 고통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옛날에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 아내도 따라서 자살하는 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와 같은 면을 찾아보기 힘들고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없으며 필요가 있다고 해도 옛날처럼 남편 따라서 죽으려고 하는 부인들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목회자의 사모만 유독(惟獨)히 그렇게 하라고 강요할 때 그가 순순히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몰라도 그렇지 아니하면 함께 순교하자고 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그의 고통은 이만 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편과 같이 순교는 아니하여도 순교자 이상으로 고생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일제시대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로 인하여 목사님은 옥중에서 세월을 다 보내는데 집에 있는 날보다는 감옥에 있는 날이 더 많아 가정은 형편이 없이 어렵게 되니 옥중에서 고생하는 하는 이도 고생이지만 집에서 집안을 돌보는 사모님의 고통은 누가 알아주지도 아니하는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알 수 있는가 말이다.
특히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은 마산 문창 교회에서 시무 하시다가 오정모 사모님과 재혼하여 이북 산정현 교회로 가셔서 바로 투옥되어 순교하시는 그 날까지 목사님의 늙으신 모친을 모시고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사는 생활은 말로 다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고생이 심하였다.


그러나 오정모 사모님은 주를 위하여 끝까지 참고 견디어 신사참배에 강요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승리한 분인데 그렇게 살자니 고생인들 얼마나 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순교하시자 말자 그 사택을 신학교 관사로 쓰겠다고 목사들이 비우라고 하는데는 더욱 절망적이고 마음이 아픈 것은 같은 목회자가 어떻게 순교자 가족을 그렇게 괴롭힐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을 하면 그 서러움은 무엇으로 표현 할 수 없어 괴로워하고 있는데 더 가슴 아픈 것은 당장 순교자의 가족을 맞이하겠다고 집을 마련하고 기다리는 사람들도 없어 당장 이사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불신자들도 아니고 평신도도 아닌 그들이 와서 강제로 가재도구들을 밖으로 끌어내어 순교자 가족들의 마음을 한층 더 아프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록에 의하면 사모님께서 세상을 떠나 장례 일에 어떤 분이 기도하기를 사모님과 같이 많은 고생만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신 사모님을 어떤 표적이라도 나타나게 해달라고 하였는데 난데없이 비둘기가 날아와 상여(喪輿)위에 앉아서 장지까지 따라가고 그 날에 무지개가 떠서 그 앞에 있었다는 것이다.
순교자의 가족은 그 목사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부터 고생은 시작되어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은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핍박은 있기 마련인데 불신자들이 핍박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받을 수 있는데 같은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하면서 신사참배 반대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이단시하면서 괴롭히는 것은 참기가 힘들고 대하기가 더욱 어렵다는 것이다.
손양원 목사님께서는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까지 남기신 분이시지만 그는 아들들을 순교의 제물로 바치고 자신도 하나님께 순교의 제물로 바쳤다.


그런데 제일로 고통을 당하신 분이 사모님이 신데 그는 아들 둘을 순교 제물로 바치는 엄청난 일을 당했지 거기다가 얼마 있지 아니하여 사랑하는 남편까지 공산주의자들에게 순교를 당하시는 것을 목격을 했으니 그 정신적인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는 상상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모님께서 부산 전포동에 사실 때 필자가 찾아 뵙고 위로를 드렸지만 당시의 충격으로 인하여 아직도 그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신 점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목사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니 슬픔도 가시기 전에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는데 얼마나 많은 고생이 되겠는가 남편이 살아 있을 때도 고생스럽지만 돌아가시고 난 후의 사모님의 고생은 더욱 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모님이 순교자가 아니고 목회자인 남편이 순교자인데 그는 살아 있는 순교자가 되어 사는 것이 죽는 것 이상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사모님들이나 앞으로 사모님 되실 분들은 순교자의 길을 간다고 각오하고 목회자와 결혼하여 앞서간 선배들의 고통의 길을 뒤따라 걸어가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사모님들은 순교할 의무나 책임이 없다고 하지만 남편인 목사님들께서 순교하면 같이 순교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죽음의 길도 마다하지 아니하고 사모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믿지 아니하는 여인들도 남편 죽고 과부가 되어 산다는 것은 쉽지 아니하여 거의가 재혼을 하게되는데 목사의 부인이라고 예외는 아니라는 것인데 그러나 재혼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혼자 산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재혼하기가 더욱 어려운 것은 순교한 목사님의 자녀들이 있을 때인데 목사는 순교하였지만 사모도 순교하라는 원칙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순교해야 된다고 강요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 재혼을 하든지 아니하든지 전적으로 본인의 의사에 달려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녀들을 데리고 재혼한다는 것도 어렵고 그렇다고 그들을 데리고 산다는 것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모님은 생각하기를 남편과 같이 순교할 사명은 없지만 순교하는 것 이상으로 산 순교자가 되어 자녀들과 함께 일생을 주를 위하여 살겠다고 각오하고 어떤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아니하고 굳게 살아가는 것은 순교이상으로 고통스럽다고 표현하면 지나칠까?


사모도 여자라 때때로 외로울 때는 자녀고 무엇이고 순간적이지만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외로움에만 사로잡혀 자기의 본 정신이라고는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가 많아 그런 때는 별별 생각을 다하게 되는데 그래도 그와 같은 생각은 순간인지라 저 어린 자녀들 두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하고 잠시나마 해서는 안될 생각을 했다고 후회하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먹고 살 것을 걱정하지만 사람인지라 얼마 가지 아니하여 마음이 또 변하여 괴로워하는 반복적인 생활을 거듭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나이가 많아 늙고 자녀들이 장성하였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 있지만 나이도 젊고 한창 인생의 맛을 알고 삶을 즐길 나이에 남편이 순교를 했다면 아니 순교가 아니고 때가 되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도 혼자 산다는 것은 외로움과 전쟁을 선포하고 어떻게 이기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거기다가 아이들이나 어머니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따라준다면 한결 쉽겠는데 불행하게도 자식들이 아버지의 순교를 목격하고 충격으로 인하여 곁길로 나아가 순교자의 자식답게 살지 아니하고 정반대로 기독교를 떠나서 철학관(哲學館)을 차리고 엉뚱한 짓을 한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기막힐 일인가 아버지는 기독교 진리를 수호하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순교를 했는데 자식은 기독교를 떠나 순교자인 아버지를 부끄럽게 하는 도무지 해서는 안될 일을 할 때 그 어머니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지 아니하겠는가?


이럴 때는 남편이 주의 뜻을 따라 순교하였지만 인간적인 생각에 야속하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며 그 속상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의하여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뇌리에 스쳐가기 때문에 또 한번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마음으로 방황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라는 점에서 혼자 살면서 자녀들을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표현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 부부들은 주님의 종들이라는 것을 함께 생각하고 순교할 정신으로 평소에 생활해야지 어느 순간에 어떤 일을 당해도 당황하지 아니하고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여 현실을 받아들여 차분하게 대처하게 될 것이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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