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예배/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행 7:1-60)
행7장은 온통 스데반 집사에 대한 기록입니다. 1-60절까지인데 굉장히 긴 절입니다. 지금 스데반은 공회에 끌려 왔습니다. 공회 앞에서 스데반은 마지막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죽음을 무릎 쓰고 유대인들의 잘못되어진 신앙 관을 깨뜨리기 위하여 구약의 역사를 통하여 설교하고 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에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제자들에게 모세와 아브라함을 모독하고 성전과 모세 율법을 훼방한다는 비방에 대하여 구약의 인물들 하나하나를 예로 들면서 이스라엘의 구속 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아브라함을 모독하고 성전과 모세의 율법을 훼방하는 무리들'이라고 몰아 세웠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스데반은 자신들이 '구약 성경'의 전통에 충실함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믿는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의 땅을 제시하신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심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문장보다는 율법의 본정신을 철저하게 강조하고 있고, 유대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성전의 개념에 대하여 설명해 주는데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 제사 드리는 장소로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지 결코 건물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성전에 대한 미신적 숭배의식을 타파'하라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라는 건물에 대하여 집착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성전이나 의식 없이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2절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즉 성전 밖에서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애굽의 요셉과 광야의 모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시는 한 걸음, 한 걸음씩 점진적으로 나타나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절정을 이룬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의 요점은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 계시하시고, 그 후에는 그의 가족을 통해서, 그 후에는 선민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통하여, 그 후에는 율법의 의식을 통하여, 계시하였다가 마침내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모든 역사는 이 목표를 행하여 움직였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들을 어떤 성산(시온산, 그리심산)이나 성전에서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어디서나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온 요셉을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요셉은 10명의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아 애굽에 팔려 갔으나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그의 가족들을 구원했을 때에 비로소 그가 그 가족의 구원자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게 버린바 되어 십자가 위에서 죽었으나 삼일만에 부활하여 '사망권세를 깨뜨리신 그 예수'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메시아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구약사론적인 설교입니다. 설교는 1-53까지 이어지고 54절부터는 스데반의 순교사입니다. /할/
▶왜 스데반이 이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까?
6:14절에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법정에 고소했는데 그가 하나님의 성전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과 또 모세의 율법을 뜯어 고쳐야 된다고 주장했다고 해서 공회에 끌려가 재판을 받는 도중 변호의 시간을 얻어 설교한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스데반의 긴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유대교의 그릇된 신앙을 역사적 교훈을 통해 질책'하는데 있습니다.
유대교의 신앙의 주축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창12:1-3)이고, 그 다음은 '율법'이고(출16:28), 또 하나는 '성전'(사6:1)입니다. 스데반은 이 세 가지 사안을 중심으로 유대교의 잘못된 불 신앙을 꼬집어 주고 있습니다. /할/
▶그의 설교의 특징 몇 가지를 상고해 보면,
①스데반은 구약의 족장시대의 구속사를 개괄함으로서 자신은 구약을 충실히 믿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믿는 하나님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믿는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으며,
②유대교에서 그렇게 감싸고 있는 율법은 그 의문<법조문>보다는 율법의 정신을 철저히 강조하고 있습니다(갈3:10-14).
③성전은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 제사하는 장소로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지 결코 건물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할/
▶또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유대교의 근본 3가지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①'선민 사상'의 부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또 '아브라함의 후예'라고 하는 엄청난 자부심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선택받았다'고 하는 표시가 바로 '할례'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담대히 말하기를 "할례를 자랑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잘나서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에 대한 고백이 할례이기 때문에, 할례란 감사의 조건이 될 뿐, 자랑의 조건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②유대교의 핵심은 '율법'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에게 훈련 과정으로 주어진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 율법을 오해했습니다. '이 율법이 우리에게만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민족에게는 없는 율법을 가지고 얼마큼 지켰느냐에 따라서 의를 평가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율법을 지켰다고 교만하고, 율법이 없는 백성을 무시하고 저주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스데반은 이것을 부정했습니다.
율법을 재해석하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이 어떠했느냐?'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광야 40년의 생활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광야 40년의 생활을 불순종의 세월이라고, 이스라엘 역사를 실패의 역사로 단정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은 율법을 지키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③'성전'입니다. 성전은 율법의 대안으로 주신 것입니다.
구약에는 율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도 있는데 그것이 성전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럼 이 죄인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성전에 나와서 제사 드리고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지은 백성이 성전에 나와서 은혜로 용서 받고, 말씀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성전에 나와서 회개하고, 겸손하게 무릎 꿇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을 생각은 안하고 성전 자체만 자랑했습니다.
'이 성전이 있는 한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하는 생각에 대하여 스데반은 말합니다. '그것은 성전 숭배이지 하나님 숭배가 아니다.' 이렇게 강하게 외치다 보니 성전을 모독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은 말합니다. '성전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 백성과 교통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고, 그 위에 성전이 있어야 되는 것이지, 반대로 되면 안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할/
▶1-7절의 아브라함의 교훈에서는 하나님의 구속 계시를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신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당신의 전적 은혜로 선택하여 부르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신 후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구원의 계시를 점차 구체적으로 확신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모세와 율법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계시의 점진 성을 깨닫지 못하고 모세의 율법이 하나님의 계시의 전부인 양 착각하고 있으므로 스데반은 그 점을 집중적으로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 요셉의 교훈을 통해서는 요셉의 형들이 그를 시기하여 애굽에 팔아버린 죄악의 씨앗이 이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그의 제자들을 핍박한 유대인들에게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형제들에 의해 팔린 요셉이 하나님의 보호아래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어진 사실을 유대인들의 간교한 음모에 의해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유대인들이 바로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인 죄인들임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8절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 두 조상을 낳으니"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두 번째 언약을 체결합니다. ①땅의 언약과 ②그 땅에서 살아갈 백성과의 언약인데 '할례 의식'입니다.
창17:8-10절에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이 언약은 피의 언약입니다.
레17: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생명은 피에 있으므로 할례로서 피의 언약을 맺게 된 것입니다.
할례는 '자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이삭을 주시고 그가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이 할례의식을 받아야 유대인들이 말하는 거룩한 선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신 보혈로 선민이 되었습니다. /아멘!/
▶왜 지금 스데반집사가 언약을 특별히 언급합니까?
①이스라엘은 할례를 통해 분명한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과 ②이 언약은 단순히 의식의 행위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할례문제를 거론한 것은 이스라엘이 모두 할례를 받았으나 의식적인 할례만 받고 마음의 할례는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51).
마음의 할례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들여 믿고 죄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할/
▶이제 스데반은 이삭과 야곱을 뛰어 넘어 요셉을 자세히 조명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다음에 다시 나옵니다(39절-). 왜 먼저 요셉을 증거하고 있는가? 요셉이 가장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잘 나타낸 자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배신을 받아 팔려 노예가 되어 보디발장군 집에서 종으로 충성하다가 일약 애굽의 국무총리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아버지와 식구들을 불러들여 고센 땅에 거하게 하고 가뭄의 굶주림에서 온 식구들을 건져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에서 사망에서 질병에서 실패에서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할/
▶모세의 생애를 언급한 스데반의 의도는 ①자신도 어느 유대인 못지 않게 모세에 대하여 존경하고 있음을 알게 한 것이고, ②모세를 통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행위보다 인간 모세를 숭배하는 유대인들을 질책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스데반은 애굽 인을 살해한 모세의 인간적 혈기와 동포에 의해 쫓겨난 모세의 좌절감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자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와 역사 하심에 기인한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더불어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과거에 집착하여 선민의 특권의식을 버리고 모세를 본받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신앙의 용사들이 되어야 할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채워져 있습니다.
▶모세의 기사는 20절부터 나옵니다. 20-29절까지는 모세의 탄생과 성장과 애국심과 살인자가 되어 미디안 광야 40년 동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의 요점은 '성전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요, 또 율법을 행하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구약의 아브라함과 모세와 야곱을 들어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은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들로 그들은 성전이 없을 때의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을 만난 자들이었다고 말합니다.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율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사실을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즉 믿음과 순종이 중요한 것이지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또 율법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도구이지 구원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롬3:20-22절에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성전도 율법도 다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그림자는 실체가 오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또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유인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반복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짓고 있다'고 책망했습니다.
모세 때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반역했으며, 아모스 시대에는 몰록 신과 레판의 우상을 쫓았으며 예부터 선지자들을 계속 핍박해 왔다고 지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너희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책망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에 뿌리를 내렸고, 출발하고, 진행하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현주소입니다. 성경은 거룩한 성령 역사의 현장이고, 성경은 모든 설교자의 살아 있는 강단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예수님은 요5:39절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할/
▶51절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스데반은 지금까지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자극시키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⑴'목이 곧고'는 자기 고집으로 가득한 사람을 가리킴이요 아집과 교만으로 가득한 자를 가리킵니다. 자기 고집대로 사는 사람은 부모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길에 광야에서 뚝하면 모세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9:13절에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인간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최고 종교지도자들이라고 자처하는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같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책망을 받습니다. 한마디로 '교만하고 타락한 자임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연약함만을 깨닫는 자만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순종할 능력까지도 주십니다. /믿/
⑵'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는 바로 '목이 곧은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목이 곧은 것'은 곁으로 드러난 것인데, 그렇게 된 이유는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할례는 선민의 표식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 받은 백성이라고 얼마나 자부심이 강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생후 8일 만에 할례 받는 자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고,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짐승으로 취급했습니다.
결국에는 유대인들의 할례 관은 극도로 의식화되어서 교만해 지고 부패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2:28-29절에서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할례를 행하는 것은 성별하고 깨끗하게 살라는 표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하게 살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할례의 깊은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그 할례를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세 가지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⑴혀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말의 권위를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내 말을 믿어주지 아니하면, 신용하지 아니한다면 그 이상 비참하고 불행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의 말에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약고보 장로님은 '혀의 재갈을 물리라!'고 했습니다.
⑵귀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렘6:10절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 도다"
노아가 120년 동안이나 복음을 전했지만 단 한 사람도 그 말을 받아들인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들을 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성경을 통해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29/3:6/13:9)라고 하십니다.
⑶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레26:41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할례 받지 못한 마음을 낮추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만물 중에 가장 더러운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온유한 자, 마음이 깨끗한 자가 복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롬2:29절에서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할례는 마음에 해야 합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책망합니다.
▶52절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스데반은 유대인들을 노골적으로 책망하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도 선지자들을 핍박했고, 특히 메시야가 오신다고 예언한 선지자들을 잡아 죽였다고 책망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가리킨 말입니다. 이사야를 궤짝 속에 넣고 톱으로 켜 죽였습니다. 또 예레미야는 구덩이에 쳐 넣고는 고생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그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잡아죽임으로서 너희들의 조상들의 죄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자들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여기 '의인이 오시리라'의 그 의인은 누구를 가리킨 말입니까? 바로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가 광야교회의 성막과 솔로몬 성전을 통하여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입니다.
'그 의인'은 사도행전에 3번이 나옵니다. 한번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한번은 스데반의 입을 통해서, 또 한번은 바울의 입을 통해서입니다. 스데반은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라고 책망하므로 그들의 죄악의 정수리를 바로 내리치고 있습니다.
▶53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모세는 시내산에서 천사에게 받은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율법의 신성한 정신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지금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자를 그렇게 율법, 율법 하는데 사실은 그들이 그 율법을 진짜로 지키지 않았다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진짜로 지켜보았다면 벌써 하나님 앞에 두 손들고 엎드렸을 것인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 두 손드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진정으로 율법을 지키면 두 손을 들게 되어있습니다. 십계명 중 한 계명이라도 정해 놓고 전심으로 지켜보십시오, 이들이 진짜로 율법을 지켰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보면 도저히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음을 알게 되고 두 손을 들었을 텐데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킨다고 하나 그들이 율법을 진정으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인 것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54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①자신에게 주는 말씀으로 알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새로운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②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무관심의 사람이 있고, ③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강한 반발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행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림이 왔습니다. 오늘 본문과 똑같은 현상이 왔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무슨 말을 들었습니까? 베드로가 전하는 성경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 저들이 '어찌할꼬?' 하고 회개했습니다. 행2:22절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어라!" 말씀을 듣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루터'가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변화되었습니다. '웨슬리'가 이 말씀을 듣고 영적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슈바이처'가 이 말씀을 듣고 변화를 받아서 아프리카로 들어갔습니다. 말씀이 능력입니다.
그런데 본문 속에 종교지도자들에게도 마음에 똑같은 찔림이 왔는데도 도리어 더 강퍅해져서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고 분하게 여겼습니다.
'이를 갈았다'는 말은 복음에 대한 저항심이 증오로 나타난 극한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으나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고 사람의 말로 받은 것입니다.
'저 주제에 우리를 보고 책망하다니!' 이런 마음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음에 찔리거든 고개를 숙입시다. 마음에 찔리거든 순종의 길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그 길이 복 받는 길이요 은혜의 길입니다. /아멘!/할/
▶55절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스데반은 이를 갈며 돌을 들고 자기를 치는 유대인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를 보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돌을 던지는 이 세상을 보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들어 위를, 하늘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며 위를 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그 순간을 지켜보았던 사도 바울이 뒤늦게 골3:1절에서 고백하기를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려울 때일수록 조건과 환경, 그리고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항상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늘을 우러러' 봤다고 했습니다. 조건과 환경, 그리고 사람을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시42:11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아멘!/
▶스데반 집사는 집사들의 모텔입니다. 그의 신앙 인격을 점검해 보겠습니다.
①믿음이 충만한 자입니다. 믿음은 담력입니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역사의 모든 신앙의 인물들은 모두 다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요셉, 바울, 루터, 칼뱅, 무디, 그들 모두 믿음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을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잃은 '돈, 명예, 인기'를 찾으려고 애를 쓰지만 잃은 믿음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②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데 있습니다. 스데반은 집사로써 선택될 때,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죽음 직전까지 성령이 충만한 자였습니다.
③그의 성령이 충만한 결과는 무엇인가?
⑴하늘을 우러러 주목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자는 세상 것 보지 않습니다. 땅 아래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과 교제하시기를 원합니다. 스데반이 바라보는 하늘이 어떤 하늘입니까? 우리가 가야할 인생의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입니다(요14:1-3). 그렇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은 언제나 마음과 눈이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⑵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여기 영광은 '광명, 광채, 위엄, 장관' 등의 뜻으로 바로 천국의 보좌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⑶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마26:64/막16:19).
그런데 본문에서 스데반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학자들은 스데반의 순교적 신앙을 격려하고 그의 순교를 열납하는 주님 앞에 오는 것을 환영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주님이 일어 나서셔 맞이하신다는 것입니다.
▶56절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성경에서 하늘 문이 열린 것을 다섯 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⑴겔1:1절에 보면 '하늘 문이 열린 것'을 에스겔이 보았습니다.
⑵주님에게 열렸습니다(마3:16/눅3:21/요1:51).
⑶행10:11절에서 베드로에게,
⑷계19:11절에서 사도요한에게,
⑸본문에서 스데반에게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58절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세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스데반 사형장에는 아주 귀한 인물 하나가 나오는데 누구입니까? 사울이라는 청년입니다.
여기서 보면 사울이 스데반을 죽이는데 모종의 큰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59절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육신의 호흡은 끊어지지만 영혼은 불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불멸의 영혼을 누구에게 부탁할 것입니까? 주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돌로 쳐죽이는 '사형'법입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아 맞아 죽었습니다. 돌에 맞아 개죽음 당했는데 무슨 영광이냐, 아니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스데반을 죽도록 내버려두느냐?' 이런 공격을 하는 무신론자들도 있습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어떤 사람이 이 사건을 두고 어떤 설교자에게 '못된 유대인들이 돌을 들고 스데반을 칠 때 왜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냐'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때 그 설교자는 "하나님은 그때 가만히 있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에게 돌로 치는 그 사람들을 용서하는 하늘의 능력을 주셨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날 예수 전한다고 우리를 죽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욕하는 사람, 조롱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요. 우리에게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스데반은 예수님의 십자가 기도를 그대로 본 받았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그 처절한 그 순간에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에 우리는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저녁에 잠들기 전에 기도할 때도 '잠 잘 자게 해 주시고 가족들 지켜주시고 건강하게 내일 아침 일어나게 해 주시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녁에 기도할 때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한답니다. 차원이 있는 기도입니다. /할/
▶60절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성경에서 가장 길게 그리고 자세하게 기록된 죽음의 장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스데반의 순교의 장면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죄를 제일 먼저 십자가상에서 용서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말씀하신 후, 마지막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런데 스데반은 반대로 했습니다. 이것은 스데반의 겸손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스데반은 감히 예수님처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혼 다음 죄 용서를 구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스데반의 기도가 아니었더라면 기독교가 바울을 소유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새로운 사명자가 하나 탄생하는 데 그가 바로 바울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4대 충만이 나타나는데 '성령 충만, 신앙 충만, 소망 충만, 사랑 충만'입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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