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에 오셨습니다! (요 21:1-14)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하셨네! 세상 사람 찬양하니 천사 화답하도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사망권세 이겼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사망권세 이겼네!' 이 아침에 우리는 부할 하신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영웅호걸도 모두 무덤에 매장되었고, 죽음으로 모든 영화가 끝났으며, 한 줌의 재로 돌아갔습니다.
석가도 죽어 무덤을 남겼고, 공자도 죽어 무덤을 남겼습니다. '석가모니'는 인도 능수 해안에 묻혀 있습니다. '마호멧'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 묻혀 있습니다. '공자'는 중국의 장평양에 묻혀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오지 못하고 거기에서 썩었고 흙이 되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무덤을 남길 뿐 무덤에서 일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덤을 여시고 일어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믿/
▶기독교는 빈 무덤의 종교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⑴빈 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숨겨 놓고 부활했다고 거짓말한다면 그 거짓말을 위하여 제자들이 순교하였겠습니까?
진리를 위하여 죽을 수는 있어도 거짓을 위하여 죽은 이는 없습니다. 잠시 동안은 속일 수 있어도 2,000년 동안 속일 수는 없습니다. 몇 명을 속일 수는 있어도 전체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남은 속일 수가 있어도 자기는 속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할/
▶한 때 석가모니의 뼈가 발견되었다고 인도를 위시한 불교 국에서는 한동안 떠들썩했었습니다. 그 때 석가모니의 뼈들은 잘 진열하여 수백 만 인도사람들의 경의 속에 시가행진을 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뼈가 지나갈 때 땅에 엎드려 절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한 선교사가 그의 친구에게 말하기를 '만약 예수의 무덤에서 그리스도의 뼈 하나라도 발견했다면 기독교는 산산 조작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빈 무덤은 부활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주님의 빈 무덤을 자랑합니다. /할/
⑵빈 무덤은 승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군중들이 이기는 것 같았습니다. 로마가 승리하는 것 같았습니다. 가룟 유다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귀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질서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군중은 놀랐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마귀는 사망 권세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예수 이름 앞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할/
⑶빈 무덤의 보상은 부활의 새 생명입니다. 사망은 죽고 영생이 문을 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믿는 자는 그 다음 열매로서 사는 것입니다.
고전15:16-20절에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할/
⑷빈 무덤은 부활의 완성입니다. 기독교는 완성의 종교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구원의 완성이며 진리의 완성이요 승리의 완성입니다. 모든 것의 완성이 바로 부활입니다. /아멘!/
⑸빈 무덤은 이제 우리에게 부활의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을 기뻐하고 축하하고 감사하고 부활의 주님께 경배하는 이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에 부활의 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양심이 부활되어야 합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지성소입니다. 양심이 마비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윤리적, 도덕적인 부활이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이 온통 가치관의 상실로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심령의 부활이 일어나야 삽니다. 기도로! 찬양으로!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할/ ▶축복의 부활도 일어나야 합니다. 불통이 형통으로! 가난이 부자로! /할/ '신통하면 영통하고, 영통하면 인통하고, 인통하면 물통'합니다. /아멘!/
오늘 우리는 부활절 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입니다. 다른 종교에는 부활절이 없습니다. 오직 기독교에만 부활절이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보면 오히려 성탄절보다 부활절이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부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인간으로서 살다가 인간으로 죽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죽음으로 속죄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요11:25-26절에 예수께서 친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께서는 자신을 '부활'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할/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가 자랑하는 최대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너무 존귀하기 때문에 가짜 부활도 생겨났습니다. 이 땅위의 진품은 언제나 가짜가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이단들이 가짜 부활론을 주장하면서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세일교회 교주 이뢰자는 죽어도 살아난다고 유언을 하고 죽었습니다. 그를 추종하던 교인들이 부활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교인들이 패가 갈렸습니다. 살아나지 않으니까 장례를 치르자, 아니다 기어코 살아날 것이다 라는 의견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 분쟁하다 결국은 세일교가 깨어졌습니다.
아직도 그루터기는 있지만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단들도 부활을 주장하지만 그 어떤 한 사람도 부활하지 못하고 무덤에서 썩고 말았습니다. /할/ ◀제목소개!▶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명도 팽개치고, 갈릴리 바다로 내려가 고기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심방하신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명에도 실패했고, 고기 잡는 것도 실패한 제자들에게 지금 주님이 그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 지상에 40일 동안 계셨는데,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이신 것이 아닙니다. 간헐적으로 보이셨는데 그것도 자신의 부활의 증인이 될 사람들에게만 집중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11번 제자들에게 오셨고, 후에 스데반 집사와 핍박자 사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명을 버리고 옛날 직업으로 되돌아간 베드로에게 오신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본문이 주시는 깊은 메시지를 받는 부활의 이 아침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①1절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 하니라'
여기서 '그 후가 언제인가?' 그 후를 알기 위해서는 그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전이란 요20장이요, 요20장은 부활 장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고, 그 날 저녁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의 다락방에 나타나셨으며, 그로부터 여드레 후 다시 다락방으로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요20:19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오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처럼,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역사 하시는 예수님은 우리들도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아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서는 자신의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20절에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그들은 더 이상 슬픔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기쁨의 사람들로 바뀌어졌습니다.
여러분! 살아가다 보면 이런저런 슬픔이 우리를 짓누를 때가 있습니다. 이 시간 슬픔을 안고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이름을 다정히 부르시면서 우리의 슬픔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마음에 평강을 심어주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두려움을 물리쳐 주신 후, 제자들이 담대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무장시키셨습니다. 22절에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제자들은 담대해졌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시기는 '그 후'가 됩니다.
여기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호수를 가리키는데, 그 호수가 워낙 광활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호수라는 말 대신에 바다로 즐겨 불렀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숫가에는 로마의 디베랴 황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붙인 도시가 세워져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를 '디베랴 바다'라고도 불렀습니다.
'예수께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본문 14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오늘 설교 제목이기에 두번이나 소개해 드리고 있습니다. /할/
②갈릴리바다에 몇 명의 제자들이 있었는가?(2)
2절에 보면 베드로를 포함한 7명의 제자들이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도마와 나다나엘과 세베데의 아들들은 요한과 야고보'입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 둘'은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와 빌립'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왜 제자들이 이때 갈릴리에 있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막16:7절에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셨습니까? 제자들에게 있어서 갈릴리란 삶의 터전이요 생존의 현장이었습니다. 바로 그 삶의 터전, 생존의 현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보낸 것입니다. 즉 그곳이 복음의 현장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삶의 현장이 전도의 현장입니다. /아멘!/
③그런데 갈릴리로 돌아간 제자들은 그곳에서 무엇을 했습니까?(3)
사명을 따라 그들이 복음을 증거 했습니까? 불행히도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왜 그 밤에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까? 이제 베드로는 물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마4:19). 그런데 엉뚱하게 그 사명을 팽개쳐 버렸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영적인 갈등 속에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두 번이나 만났지만 어떤 확신도 없었고,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옛 직업을 찾아 고기를 잡으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있는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인생에게는 누구나 디베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디베랴는 실패의 쓴잔을 마시고 서성거리는 자들의 삶의 현주소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베드로는 본전도 찾지 못한 밑진 인생입니다. 3년 전만 해도 여기서 한몫을 본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전과 달랐습니다. 자신의 어장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물은 다 상했고, 쇠붙이는 녹슬었고, 배는 다 날았습니다. 그나마 기술도 이전 같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수고했으나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안에 있어야 열매를 얻게 됩니다. /아멘!/
④그때 저쪽에서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전에 많이 들었던 음성입니다. 그분은 다름 아닌 '부활하신 주님'이셨습니다(4).
'날이 밝아올 무렵' 실패의 현장으로 우리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눅24;31절 이하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를 못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을 풀어주실 때 그들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⑴눈이 밝아졌습니다. ⑵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마음이 뜨겁다는 것은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고,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고, 마음에 결단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뜨거워지면 사람은 힘 안들이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음먹기 달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⑶행동했습니다.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서 그 밤을 그곳 엠마오에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이런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다시 4절에 실패의 현장으로 부활의 주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십니다. 상한 마음에 오시고, 실패한 현장에 오시고,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절망 속에 있는 자에게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곁에 주님이 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⑤실패한 제자들에게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십니다(5).
그런데 여기 고기란 물고기를 의미합니다만, 원어의 더 깊은 뜻은 '식탁 위에 올려지는 진미, 즉 진귀한 음식'을 가리키는 단어랍니다. 따라서 이 단어의 참뜻을 살리면 주님의 질문은 이런 의미가 됩니다. '얘들아! 너희가 정말 귀한 것을 얻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주석 가들의 해석을 빌리면 더 깊은 의미로 '인간의 욕심에 사로잡혀, 생명이요 진리인 나를 너희가 등져서는 아무리 수고해도 결코 귀한 것을 얻을 수 없단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요15: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할/
⑴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고기의 또 다른 의미가 무엇인가?
물론 갈릴리 바다에서 잡은 고기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음성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질 때에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산업의 현장에 있는 자들에게 고기는 자본이요, 돈일 것입니다. 정치판에 들어선 자들에게 고기는 곧 표요, 권력일 것입니다. 학문하는 자들에게 고기는 학위요, 지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들의 그물과 배에는 한 마리의 고기도 없었습니다.
⑵그러면 왜 고기를 잡지 못했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고기 잡을 자들이 아닙니다. 고기를 잡아서는 안될 사람들이 고기를 잡으려 간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이 주님께 부름을 받았을 때, 이미 이 일은 청산하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막1:17).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등지고, 언약을 불신하고, 사명을 저버린 자들에게 하나님이 절대로 고기(축복)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나의 사건은 기억해야 합니다. 요나의 사건은 사명 자들에게 좋은 거울입니다(욘1:4). /할/
⑶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어가 또 하나 있습니다. '얘들아' 이것은 아주 작은 어린아이들을 지칭하는 단어로써 이미 성인이 된 제자들을 부르는데 사용되기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서 본문 이외에 이 단어가 성인에게 호격으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주님 역시 이제껏 제자들을 이런 식으로 부르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갈릴리 바다에서만은 제자들을 딱한 번 '어린아이들아!'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자신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고, 허망한 바다를 향해 헛수고만을, 그것도 밤을 새워 가며 열심히 헛수고하는 제자들이 주님 눈에는 어린아이, 즉 철없는 아이로 보신 것입니다. /할/
지금도 공허한 마음으로 실패의 그물을 헛되이 던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그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오늘 아침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이 질문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 철부지들아! 너희 손에 무슨 귀한 것이 있느냐?'
여러분! 그들은 주님 앞에서 3년 동안 철저하게 신앙의 훈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을 통하여 주님은 세계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 그들이 주님을 떠나 세상 옛 생활로 돌아가 지식을 살리고, 경험을 살려 고기를 잡아보았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실패자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눅5장에 보면 베드로는 오늘과 똑같은 실패의 밤을 맞이한 때가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여러분! 우리 모두 이 시간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고백하십시다. '없습니다. 주님! 우리 손안에 정작 귀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정말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재물입니까? 권력입니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다 변하고 없어지고 무너지는 것들입니다. 진정 귀한 것은 변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무너지지도 않은 것인데 그것이 영원한 생명인줄 믿습니다. 주님은 '온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이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떠나면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없나이다' 하며 솔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의 음성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는 성공으로 인도하는 말씀을 들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⑥주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6)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⑴이 말씀은 '당신의 삶의 방향을 오른쪽으로 바꾸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진 자들이 왼쪽에만 던졌겠는가? 오른쪽 왼쪽 동서남북 다 던졌을 것입니다. 자신의 이전의 경험과 기술을 총동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주님은 찾아가서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에 나오는 오른편에 의미는 단순한 방향과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41:10절에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말씀과 같이 이제부터는 인간의 이성적인 지각이나 판단에 사로잡혀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의 장 중에 붙들려 의롭게 살라는 명령입니다. /아멘!/
그러니까 여기서 오른편은 하나님의 품안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능력 속에, 보호 속에, 은혜 안에 있으라는 명령입니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너희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아무리 발버둥 쳐 바도 별 볼일 없을 것이다. 그러지 말고 나의 품으로 믿음 안으로, 은혜 안으로 다시 들어 오라'는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 이 말씀은 '인간의 방법으로 하지말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편은 주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우편강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오른편의 능력으로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롬8: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오늘도 이 말씀을 붙잡은 사람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탄식이 변하여 찬송이 되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원망이 변하여 감사가 되고, 실패는 성공으로 바꿔지는 역사가 지금 이 시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믿/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합력하여 잘 된다더니 안 되는가? 왜 하나님이 안 해 주실까? 예수님을 믿으면 잘된다더니 뭐가 잘돼?'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여기 '합력하여 선을 이루리라'는 말씀에는 두 가지의 영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선을 이루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아무나 선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에 중심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육신의 부모가 아무리 큰 부자라고 해도 그 부모의 관계가 불편하고 나약한 사람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약한 믿음, 빈곤한 믿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행여나 오늘 이 자리에 부족하고 연약한 믿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오늘 예배 중에 불같은 믿음을 붙잡고 일어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두 번째는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선'을 이루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역사 하십니다. /할/
그런데 문제는 선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선을 육체적인 편안함으로 생각합니다. 성공과 동일시합니다. 많은 이익과 동일시합니다. 쾌락을 선으로도 생각하고, 주머니의 돈을 선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사람들이 선을 생각할 때 가장 크게 보는 것은 축복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잠8:17-18절을 보세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더 깊은 진리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동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달려가는 것이 선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쉽지 않습니다.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16:24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 다음 성경에서의 선은 '하나님이 보시고 옳다고 인정하시는 것이 선'입니다. 이것이 참 중요한 교훈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인정받아야 할 삶에 책임이 여기에 있습니다. /믿/
⑵다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주님은 고기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지난밤까지 그곳에 고기가 없었으나 지금 그물을 내려 보라 '내가 그곳에 고기를 불러모으리라'는 약속입니다. /할/
바다와 고기를 창조하신 분도 주님이시고, 고기를 모으고, 흩어지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우리들의 삶의 그물 속에 고기를 몰아 넣을 분도 주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믿/
건강의 그물, 재물의 그물, 행복의 그물, 형통의 그물도 주님이 모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그 복이 임하게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⑶이 말씀은 '역사는 순종할 때에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얻으리라'는 말씀은 순종할 때 고기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할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고, 여호와 이레의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당신의 앞길에 칠흑같이 어두운 먹구름이 가로놓여 있어도 언약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나가면 주님이 역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할/
⑦그래도 베드로가 수석제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7-8).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누구입니까? '요한'입니다. 요한은 주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 사랑 받은 제자가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본문에 '주시라'는 외침이 요한의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베드로는 겉옷을 걸치고 바다 속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여기에서 '바다로 뛰어내리다'는 구절을 원문에서는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바다 속으로 던졌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초라도 더 빨리 주님에게 다다르고자 하는 베드로의 급한 심정을 잘 묘사한 표현입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그 급한 와중에도 벗어 두었던 겉옷을 걸쳐 입을 정도로 예의를 갖추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멘!/
⑧우리 주님은 그들에게 실물 신앙 교육을 시키십니다(9).
그들에게 죄를 생각나게 하고, 그들의 실패를 추적해서 다시는 그런 실패를 범하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십니다.
⑴숯불이 등장합니다. 주님이 왜 숯불을 등장시켰는가? 이 숯불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얽힌 추억이 초점입니다. '삼 복음서'에는 베드로가 불가에서 주님을 부인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냥 숯불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추적합니다.
요18:18을 보면 그곳은 가야바의 법정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예수님께서 드디어 이 제사장 앞에 끌려와 심문을 받는 장면에서 어떤 병정하나를 만납니다. 그 장면 속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이 장면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합니다.
숯불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피워 놓으신 이 숯불을 보통 숯불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실패할 때의 장면들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실패를 되돌아 봐야 그 문제를 뛰어 넘는 삶의 도약이 있습니다.
▶택시로 생활하는 운전사가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고를 냅니다. 사고가 나면 그 다음 어떻게 됩니까? 운전대를 잡고 싶지도 않고 특히 사고 현장 근처에는 지나가고 싶지 않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렇다고 운전대를 놓아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직업인으로써 완전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운전을 하셔야 합니다. 한번 운전에 실패했어도 다시 해야 합니다. 운전대를 쳐다보지 않는 것만이 해결의 방법은 아닙니다. 떨려도 운전대를 잡아야 하고 그리고 사고가 일어난 그 지긋지긋한 현장에도 다시 등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이 있습니다. /아멘!/
▶본문에서 숯불을 다시 등장시킨 이유가 뭡니까? 숯불 가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합니다, 배신합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했던 그 숯불 가에서 베드로는 다시 서서 주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붙들어주리라. 다시는 넘어지지 말라'는 사랑의 표현으로 숯불을 피워 놓고 생선을 굽고 떡을 구워 먹이고 있습니다.
⑵생선이 등장합니다. 불 위에 올려져 있는 생선은 자기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또 자기가 생선처럼 죽어야 합니다. '베드로야 너 이제 그 엉뚱한 혈기 좀 부리지 말고, 이 생선처럼 온전히 자아를 죽여버려라! 그래야 내가 너를 마음대로 쓸 것 같다'는 무언의 의미입니다.
⑶떡은 말씀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떡도 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더 귀합니다. 이 말씀은 영혼의 떡입니다. 말씀으로 무장해야 믿음의 실패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할/
⑷다시 여기 '숯불'의 또 다른 영적인 의미는 곧 성령의 불을 의미하며 다시금 베드로에게 성령의 충만한 자가되어 다시는 실패하지 말라는 영적인 의미가 그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리라' 믿음은 능력입니다. 능력 받지 못하면 또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처럼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멘!/
⑨주님은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 오라!'고 하셨습니다(10).
고기를 잡은 제자들은 고기에 감격해서 정신을 잃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은 '지금 잡은 생선을 가져 오라'고 하셨습니다.
⑴지금 잡은 생선을 주님께 가져갑시다. 기독교는 지금 이 시간의 종교입니다. 지나간 어제를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다가올 미래만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오늘 현재 지금 내게 역사 하시는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⑵잡은 고기에 눈이 어두워지지 말고, 고기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을 주시면 받은 복에 눈이 가려져서 복을 주신 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물에 가득 찬 고기를 세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어리석음에 늘 빠져 있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⑶주님이 주신 축복은 어디로 새 나가지 않습니다(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할/
⑷우리도 지금 고기를 잡아야 합니다. 사명자는 바로 지금 사명의 현장에서 고기를 잡아야 합니다. 마25:16절에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을 남기고'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받고 사명을 깨달았으면 바로 가야 합니다. 서성거리면서 세월을 허송하지 맙시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것이면 족합니다. 모세의 지팡이나 다윗의 물멧돌이나 바울의 붓이면 족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바로 지금 영원히 남을 복음장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할/
⑩우리에게는 부활의 세 가지 축복이 있습니다.
⑴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이 있게 하십니다(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통해서 우리가 거듭나게 되고, 그 거듭남을 통해 살아 있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소망은 소망 중의 소망이요 산 소망이 됩니다.
산 소망은 이 땅에서 승리하도록 도우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인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 소망 때문에 활동을 하고 능력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도 성취됩니다. 고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항상 마음이 기쁘고 감사가 넘쳐나게 됩니다. 시146:5절에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또 렘29:11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아멘!/
⑵하늘의 기업을 잇게 하십니다(벧전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기업'이란 법률적으로는 부모나 조상으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을 말합니다. 신학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따라 순종하는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이나 재산'을 말합니다.
구약에서의 '기업'은 이스라엘 백성이 받았던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하늘나라가 곧 기업입니다. 즉 구원과 영생과 약속, 축복이 기업입니다.
세상의 기업은 시간이 지나면 썩습니다. 더럽혀집니다. 쇠합니다. 무너집니다. 우리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옛 페르시아 대국 이락크가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안방에서 TV로 보았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한때 흥왕 했던 많은 재벌들, 기업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망해서 건물도 없어지고 회사 이름마저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불과 10년, 20년, 30년이면 이렇게 사라지고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은 이 세상의 기업과 다릅니다. 이 땅에서 시작되고 저 하늘나라까지 계속되는 영원한 기업이요,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기업입니다. 그래서 완전하고 온전한 기업, 영생하는 기업입니다.
약2:5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할/
⑶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습니다(벧전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신32:10절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건강도, 재물도, 가정도, 사업장도, 명예도, 자식들도, 믿음까지도 지켜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눈동자처럼 지키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행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 부활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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