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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사 53:1-9)

by 【고동엽】 2022. 2. 11.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사 53:1-9)

 

마21장에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주님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가까이 왔을 때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 두 제자에게 '맞은 편 마을로 가서 매여 있는 나귀와 함께 있는 것을 보거든 풀어 나에게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는 나귀새끼를 드린 무명인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성은 죽음을 위한 입성이요, 십자가를 지기 위한 입성이요, 그분이 인류의 메시아요, 왕임을 선포하는 입성입니다. /할/
그러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것은 개선장군이 된 것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맞이하러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마20:18절에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유를 설명해 주신 말씀입니다. 지금까지의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한마디로 말하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말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기 위해 십자가를 향해 간다는 의미입니다. /할/
요12: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유월절 엿새 전에 예루살렘 근방에 있는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이곳 시몬의 집에서 마리아를 통해 옥합을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가장 소중한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립니다.
이 사건은 목격한 가롯유다가 마리아를 책망했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이 비싼 향유를 낭비하느냐? 그 돈으로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고 책망을 합니다.
굉장히 신앙이 좋은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만 두어라,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그가 준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향유를 부은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엄청난 예배입니다.
이 여자가 향유를 부은 사건은 예배의 본질을 설명하는 제일 중요한 본문이 되었습니다. 예배는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믿/ 예수님은 많은 사람에 의해서 예배를 받으시지 아니하시고 신앙이 깊은 영적으로 깨끗한 한 여인으로부터 진정한 '죽음의 예배, 십자가의 예배'를 받으신 것입니다. /할/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기념해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려주일이 끝나면 바로 예수님의 고난이 시작되어서 내일부터 일주일은 고난주간으로 연결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고난주간을 신성시했습니다. 종려나무를 흔드는 것은 승리자에게 보내는 경이의 표시입니다. 시92편에 '의인은 종려나무와 같이 번성하며'라는 말이 있고, 솔로몬 성전의 모든 벽화는 모두 종려나무를 그렸다고 합니다.
계7:9-10절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찬양을 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고대에는 왕이 지나갈 때면 으레 백성들은 환영의 뜻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예루살렘에 오시는 것을 유대인들은 종려나무로 환영했습니다. 이것은 아마 로마 황제보다도 더 화려하고 규모가 큰 '왕적 환영'이라고 학자들은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호산나 만세'를 부르던 군중들을 돌변해서 멸시와 조롱을 퍼부어 대면서 차라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루살렘 거리를 가득 매웠던 호산나의 군중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골고다의 길로 옮겨와서 호산나가 변해서 십자가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본래의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이는 사형도구였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포와 증오의 대상인 이 십자가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랑과 평화의 상징으로 바뀌었습니다. /할/
어느 나라를 가보아도 푸른 색깔의 십자가는 병원을 상징하는데 질병에서의 구원의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어느 나라를 가도 붉은 색깔의 십자가는 이 사회 모든 고난 문제 해결의 상징으로 적십자사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무덤 앞에 있는 십자가는 부활의 약속의 의미로 꽂아놓고, 교회 건물에 달린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상징하고, 우리 목걸이 십자가는 주님의 제자 됨의 거룩한 상징으로 변했습니다. /할/
십자가는 기독교의 자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2: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갈6:14절에서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외쳤습니다.
이처럼 십자가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되는 것은 거기에 '속죄와 구원, 부활과 하늘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입니다. /할/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 성찬에 참여한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왜 우리는 때마다 이 떡과 잔을 마시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예수여! 내게 어떤 십자가가 와도 내가 피하지 않고 주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겠나이다. 될 수 있는 대로 내가 큰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가장 어려운 일을 저에게 주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그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믿/

 

▶사53장은 메시아 장으로써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600-700년 전부터 이사야를 통하여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져야할 사건을 예언한 그 유명한 메시야 예언의 장입니다.
신학자 '켐벨 몰간'은 오늘 본문을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라고 했고, '델리취'는 '골고다 십자가의 현장'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력서'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 고난의 종교이며, 또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구속의 종교이며 또 죄인을 구원하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믿/
마호메트는 나이 60세에 한 여인의 무릎에 머리를 묻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도 7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도 나이 80세에 음식을 잘못 먹고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플라톤도 80세까지 살다가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3세에 요절하셨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면서 죽으셨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철저한 사랑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사53장에 예언된 것과 같이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질고를 당하셨고 채찍에 맞으셨으며, 12가지의 형벌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케리그마요 메시지입니다. /믿/할/
본문 말씀 중에 '멸시, 질고, 슬픔, 고난, 찔림, 채찍에 맞음' 등의 예수께서 겪었던 단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장차 구원자로 오실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이 많으리라는 것과 그 메시아는 모양도, 풍채도, 아름다움도 없기 때문에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게 될 것이라도 1-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4-6절에서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게 된 것은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겪어야 할 질고와 슬픔과 징벌 때문이며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 때문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7-9절은 그러한 고통과 징벌을 대신 받으시면 서도 침묵하시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으며, 특히 우리는 본문 4-6절을 통해 '왜 주님이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셨는가?' 이 질문의 해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주님이 당하신 온갖 고통과 수단과 죽으심이 '나 때문이었구나!'하는 사실입니다. /믿/ 오늘 본문 속에서 나 때문에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①예수님의 십자가는 '거룩한 희생재물'로 우리의 죄 값을 담당하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구약 시대의 두 가지 모습을 생각할 때에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⑴구약 시대에는 죄지은 사람이 용서받기 위해서는 짐승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야 했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신의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시켜 자기를 대신하여 짐승이 희생됩니다. 그 희생 제물을 드려서 그 짐승이 불에 태워짐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가 불살라 태워지고, 없어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할/
⑵구약 시대에는 1년에 한 번씩 속죄의 절기가 있었습니다. 속죄 일에 제사장은 모든 백성들 앞에서 수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어 백성들의 죄를 염소에게 전가시킨 다음 광야로 내쫓습니다. 결국 염소는 광야에서 맹수의 먹이가 되어 죽습니다. 이로써 백성들의 죄가 사해진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종교 행위의 모습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미리 보여준 예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던 것은 이것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에 인간의 역사는 온통 죄로 물들게 되었습니다. 죄는 사망을 낳습니다. 사망은 곧 인간을 지옥으로 이끄는 도구이며 결국은 영원한 멸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처럼 죄로 말미암아 지옥으로 가게 된 온 인류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악을 한 몸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것입니다. /아멘!/

 

②예수님이 이 세상에 메시아로 오셨을 때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여기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 분은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⑴연한 순과 같이 오셨습니다.
바람에 꺾이고 발에 짓밟히면 으깨지는 연한 순과도 같이 나약하고 애처로운 존재이셨습니다. 태어나실 때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고,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자마자 헤롯의 칼에 위협을 받아 애굽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연한 순은 마른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싹이었고 줄기였습니다. /할/
바위는 땅을 뚫고 자라지 못하지만 연한 순은 땅을 뚫고 자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그의 몸인 교회는 연한 순같이 보여서 시대마다 핍박을 받았지만 교회는 날마다 왕성해갔습니다.
로마제국이 교회는 핍박할 때 교회는 지상에서 없어지는 줄 알았는데 그러나 역사를 보면 오히려 로마제국은 멸망했고, 교회는 더욱 왕성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연한 순같이 연약해 보이나 실상은 여호와의 팔이기 때문에 강합니다. 1절에 '여호와의 팔'은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합니다. /아멘!/
⑵그분은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았습니다.
여러분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가 무슨 힘을 쓰겠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은 권세를 가진 영광의 정치적인 메시아를 대망 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에서 정치적으로 해방할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세리의 친구로 오셨고, 병든 자에게 오셨고, 소외된 자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의 외치는 진리는 약한 것 같았습니다.
'누가 오른 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십리를 동행해 주고,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 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외모는 아주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대부분 그 시대의 인물들을 보면 잘 생겼거나 풍채가 있고, 위엄이 있고, 정기가 서려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흠모하고 사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줄기가 대단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 최고 종교지도자들이, 그리고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약하게 보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그는 결국 3일 만에 죽음에서 이기시고 부활 승리하셨습니다. /믿/
주님의 몸된 교회는 마른 땅에 줄기처럼 약하게 보이나 결국 어떤 환경에서도 이기고 승리하게 됩니다. /할/ 이 줄기는 쭉쭉 뻗어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싹은 여호와의 팔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1절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이새의 줄기에서 다윗의 혈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할/

 

③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습니까?
⑴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1절에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믿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불신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제사장, 모두가 예수님을 부인했고 오직 갈릴리 해변의 어부들과 여인들과 어린아이들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할/
⑵유대인들은 예수를 멸시했습니다.
3절에 '멸시를 받았다.'는 말은 '얼굴에 침을 뱉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사람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는 것은 인격 모독이요, 자존심의 관계입니다. 사람들이 배고픔도 참을 수 있고, 고통도, 아픔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하면 못 참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살인도 나고, 자존심 때문에 볼 사람도 안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멸시를 받고도 참으셨습니다. 여기 '멸시'란 문둥병자 취급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3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구약의 문둥병자들은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서 살았습니다. 문둥병자들은 머리를 들고 다니지도 못하고 항상 얼굴에 보자기를 가리고 '나는 부정합니다.' 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문둥이의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고 외면해 버리고 침을 뱉습니다. 당시 호적법에도 문둥이는 호적에도 뺐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자로 취급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문둥이 취급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⑶유대인들은 예수를 싫어했습니다.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유대 군중들은 '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를 놓아주시오!' 소리쳤습니다.
⑷간고를 많이 겪었고, 질고를 아는 자였습니다.
간고는 병든 자의 슬픔, 실패자의 낙심될 때의 마음입니다. 질고는 아이를 낳는 고통의 괴로움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주님은 우리의 슬픔과 괴로움을 담당하시려고 그분이 몸소 그것을 체험하신 것입니다.
⑸그런데 무지한 인간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여기 '질고'란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말하는데, 육체적인 고통, 영적인 고통, 심리적인 질병을 다 포함한 말입니다. 또한 '슬픔'이라는 것은 인생의 고난으로 인한 슬픔과 비애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든 질병과 고통과 슬픔을 담당하시고 병든 자, 실패한 자, 슬픔 당한 자의 고통을 다 없앴습니다. /아멘!/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가는 곳마다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치유의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으시고 온갖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며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모든 질병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무한 영광이 됩니다. /할/
그런데 무지한 인간들은 주님이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자신이 저지른 어떤 죄 때문에 받는 보응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다'고 본문은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질고와 슬픔과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의 잘못과 죄 때문에 매를 맞고 멸시를 당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본문 4-6절을 보면 '우리'라는 말이 무려 아홉 차례나 거듭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 때문이요, '나' 때문입니다. /믿/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세례를 베풀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세례를 베풀기에 앞서서 모든 교인들 앞에서 '세례 문답'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주일은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할머니의 며느리는 그 전날 할머니에게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어머니, 만일 목사님이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까?'라고 물으시면 무조건 '내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라고 대답하세요. 아시겠어요?'
할머니는 잘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며느리는 그래도 안심이 안되어서 재차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역정을 내면서 말하기를 '알아들었다니까? 내가 맹구냐?'
드디어 세례 문답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목사님은 교인들 앞에서 며느리가 말했던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할머니, 제가 할머니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까?'
그러자 할머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얼른 대답했습니다. '예, 그것은 우리 며느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며느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의 죄 때문에, 그 사람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 때문에, 바로 나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믿/아멘!/

 

④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왜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습니까?(5)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여기 '그'라는 3인칭 대명사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고초를 여러 가지 말로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⑴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찔리셨습니다. ⑵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상하셨습니다. ⑶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⑷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채찍에도 맞으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6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할/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한꺼번에 다 감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가 찔려야 하는데, 우리가 상해야 하는데, 우리가 징계를 받아야 하는데, 우리가 채찍에 맞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그 모든 아픔을 한꺼번에 품으시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비록 일순간이었지만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악의 결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고 외면을 당하는 고통을 십자가에서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처럼 고통스럽게 외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님의 이 절규가 결국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믿/아멘!/
⑴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찔리셨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려고 주께서 골고다 십자가 길을 가실 때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그 가시관의 가시가 주님의 머리를 온통 찔러 피가 흘렸습니다. 또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으로 찔림을 받아 피와 물을 다 쏟으셨습니다. 면류관은 왕관이요, 승리자가 쓰는 영광의 표시입니다. 이 지상의 왕들은 머리에 면류관을 썼습니다.
면류관은 '부귀, 영화, 존귀'를 홀로 누리는 상징입니다. 세상 임금이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릴 때 백성들은 가난과 고통과 아픔을 맛봐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고통과 아픔과 저주를 홀로 담당하신 왕으로 그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로마 병정들이 조롱으로 만든 가시면류관이지만 이 면류관은 이런 상징적인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시면류관에 찔림 때문에 우리의 허물이 용서된 것입니다.
허물은 모르고 범한 죄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모르고 짓는 죄가 많이 있습니다. 천국은 죄인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용서받은 자라야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천국 백성 삼으시려고 친히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그 찔림을 통하여 인간의 허물을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할/

⑵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상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은 용서해 주시려고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죄와 죄악은 비슷한 것 같지만 그 뜻이 다릅니다. 잘못인줄 알면서도 인간의 의지가 약해서 할 수 없이 팔려 가는 것은 죄라고 하고, 죄 인줄 알면서도 욕심을 채우려고 계획적으로 범하는 죄를 죄악이라고 합니다.
몰라서 범한 허물이 있고, 알고도 끌려가는 죄가 있습니다. 알고도 욕심을 채우려고 계획적으로 범하는 죄악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허물과 죄악은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중심적으로 살며 방탕하고 반항하려는 의지나 그 행위를 말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불순종의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허물도, 죄도, 죄악도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용서받는 길이 열렸습니다.
성경은 죄를 무섭게 다룹니다. 롬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건너갈 수 없는 수렁을 만들어 놓았고, 담을 쌓았습니다. 죄를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께 당당히 나갈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악을 친히 담당하실 때, 우리 사이에 가로막힌 죄악의 담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요한1서2:2절에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라고 했고 히브리 기자는 '그의 몸을 단번에 하나님께 드린 영원한 화목제물'이라고 했습니다. /아멘!/
⑶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할/ 여러분, 이 세상의 행복은 뭐니뭐니 해도 마음의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주는 평안이 있고, 남편이 주는 평안이 있고, 자식이 주는 평안이 있고, 돈이 주는 평안이 있고, 권력이 주는 평안이 있고, 이웃이 주는 평안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한 평안입니다. 요14: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평안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마음에 평안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그 마음에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환란 당할 때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멘!/
아무리 많은 고난을 당했어도 예수 그리스도만큼 고난을 당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라보는 그 순간 마음의 위로를 받게 됩니다. 마음에 평안이 임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죄 값으로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 고통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에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그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히12:2절에 '믿음의 주여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고난의 십자가를 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 심령 속에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할/
⑷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채찍에도 맞으셨습니다.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시려고 예수님은 로마 병정들에게 채찍으로 맞으셨습니다.
그 채찍 끝에는 조그마한 납덩어리가 달려 있는 채찍이랍니다. 한번 후려치면 그 납덩어리가 사정없이 주님 몸에 박혔습니다. 그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 아픔을 참으셨습니다. 왜 참았습니까? 인간의 모든 질병을 짊어지시려고 참으셨습니다.
벧전2:24절에서 베드로 사도의 당당한 외침을 보세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할/ 지금도 치료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로 신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

 

⑤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두 가지 진리입니다.
⑴우린 철없이 양처럼 그릇 행하셨고 제멋대로 살았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멋대로 죄짓고, 멋대로 놀고, 멋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인사 12명에게 똑같은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드러났다. 빨리 도망가라' 다음날 열두 사람의 집을 찾아가 보았더니 모두 집을 떠나 어디론가 도망갔다고 합니다. /할/
⑵우리 무리의 죄악은 우리에게 담당시키지 않으시고 온통 예수님께서 담당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대속의 절정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주님이 인간의 모든 짐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⑥주님의 고난은 세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⑴대속의 고난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죄나 허물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죄인된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것은 바로 나의 허물과 나의 죄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멘!/
⑵자청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자초하셨습니다.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는데 사람들은 힘이 없어서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요한 사도도 예수님의 고난은 스스로 당한 고난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요10:17-18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은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예수님은 고난을 자초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청하여 찔리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에 찔리셨습니다. 창에 찔리셨습니다. 채찍에 찔리셨습니다. 못에 찔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찔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자청하여 상하셨습니다. 온 몸이 고난으로 몹시 상하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으로 머리가 상하셨습니다.
채찍으로 온 몸이 상하셨습니다. 못이 박힘으로 손과 발이 상하셨습니다. 창으로 찌름으로 옆구리가 찢어져 가슴이 상하였습니다.
그가 상함은 바로 나의 죄악을 위함입니다. 죄악의 원어는 원죄입니다. 나의 자범 죄와 원죄 때문에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약 3시간동안 채찍에 맞으시고 약 9시간동안 피가 흘렀습니다. /할/
⑶인류 역사상 최대의 고난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은 시시한 고난이 아닙니다. 작은 고난도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최대의 고난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질고, 간고, 징벌, 고난, 찔림, 상함, 징계'라는 말들은 모두 극심한 고난을 의미하는 단어들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하여 당하신 고난은 최대의 고난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어떤 악인들이라 하더라도 40대 이상은 치지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칠 때에도 꼭 40에 하나 감한 매 즉 39대씩만 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만은 채찍으로 칠 때에 수도세지 않고 가혹하게 쳤습니다.
더구나 빌라도는 예수를 조사했을 때 죄가 없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도 정치가라 군중들의 인기를 얻으려고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래서 의인이 죄수가 되었고, 성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강도 짓 한번 하지 않으시고 강도와 함께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돈 한 푼도 없으신 분이 부자의 묘에 누우셨습니다. /할/
사람들은 평안을 좋아하는데 예수님은 고난을 자초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받으려고 하는 데 예수님은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위에 있기를 바라는데 예수님을 친히 낮아 지셨습니다. 사람들은 섬김을 받기를 원하는데 예수님은 친히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 우리가 짊어져야 할 고난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받아야 할 고난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을 기뻐 감당해야 합니다.
골1:24절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한마디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면서 당하는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요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어느 한 젊은이가 예리한 칼을 들고 동네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서 외쳤습니다. '나는 5분 이내로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수 있소' 그는 칼을 하늘을 향하여 휘두르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있다면 5분내 이 칼로 나를 죽여 보시오. 당신께 도전하는 이 나쁜 놈을 죽일 수 있다면 당신은 살아있는 분이요.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당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여 보시요'
그리고 5분을 세기 시작합니다. 1분, 2분, 5분이 지났습니다. 아무런 일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선언하였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없습니다. 예수쟁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나 같이 악한 사람을 벌할 수 없다면 그는 신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을 심판할 줄도 모르는 신이라면 혹시 있다 할지라도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 자리에게는 기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칼을 휘둘러 대는 그에게 아무도 다가가지 못 했습니다. 그 때 할머니 한 분이 그 젊은이 앞으로다가 가고 있었습니다. 모두 긴장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그에게 다가가더니 휘두르는 칼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젊은이는 자기 아들을 가리켰습니다. 할머니는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에게 칼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아들이 잘못 할 때 이 칼을 들고 와서 5분 내에 죽여 달라면 죽이겠습니까?' 젊은이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 소리가 어디 있어요? 할머니!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들을 어떻게 죽일 수 있어요'
그 때에 할머니가 젊은이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이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당신을 더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죄인, 어떤 악한 사람이라도 벌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당신 같은 악한 사람이라도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참고 계십니다' /할/ 그래서 '십자가는 무한 영광일세'입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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