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의 행복! (눅 19:1-10)
▶어느 여대생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쪽 다리가 다른 쪽 다리보다 좀 짧았습니다. 그래서 먼 거리를 걸어가기 위해서는 목발을 짚어야하는 장애자입니다. 그가 다니는 학교는 산중턱에 위치해 있었는데, 가파른 계단이 유난히도 많았습니다. 그러니 한 계단 한 계단 목발을 짚고 올라가기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언제나 밝았습니다. 늘 행복한 표정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어느 날 그와 함께 계단을 올라가던 같은 과 친구가 그를 바라보면서 안쓰러운 듯이 말하기를 '얘, 하나님이 너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셔서 너의 그 짧은 한쪽 다리를 길게 늘려주셨으면 좋겠다.'고 하자 그 여대생은 미소를 지으면서 '아멘!'이라고 화답을 했습니다.
친구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 어떻게 하다가 그런 장애를 가지게 되었니?' 그 여대생은 서슴없이 대답했습니다. '응, 어릴 때 소아마비를 심하게 앓았어'
그 말을 들은 친구는 궁금한 점이 있다는 듯이 또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데도 너는 어떻게 그렇게 늘 행복해 보일 수가 있니?' 그러자 그 여대생은 대답하기를 '그야 내 마음이 건강하니까 그렇지. 내 몸에 장애가 있다고 해서 내 마음마저 병드는 것은 아니지 않니?'
여러분! 행복은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려있습니다. 행복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기쁘고 즐거우면 우리는 언제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믿/ 그렇습니다. 행복은 전적으로 마음가짐의 문제입니다. /아멘!/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천사를 시켜서 사람에게 필요한 행복을 갖다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천사의 마음 속에 질투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 천사는 '사람에게 행복을 갖다주기는 하되, 좀 찾기 힘든 곳에 감추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사는 다른 동료들과 상의를 했습니다.
한 천사가 이러한 제안을 했습니다. '사람의 손이 쉽게 미치지 않는 깊은 바다 속에 행복을 감추어 놓으면 어떨까?' 그러자 다른 천사가 고개를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야, 사람은 재주가 많아서 그 정도는 쉽게 찾아내고야 말걸'
또 한 천사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면 높은 산꼭대기에 사람이 원하는 행복을 올려놓으면 어떨까?' 그러자 다른 천사가 '그것도 좋지 않아. 사람은 모험심이 많아서 오히려 쉽게 찾아낼 거야'
천사들은 이 궁리 저 궁리하던 끝에 드디어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람은 그저 자기의 머리와 재주만 믿고 설치기를 좋아한다. 그러니 그에게서 가장 가까운 자신의 마음 속에 행복을 묻어두자. 그러면 오히려 쉽게 찾아내지를 못할 것이다.'
그래서 천사는 행복을 '사람의 마음 속에 묻어 두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가 주변의 여건에 따라서 행복이 좌우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환경을 더 낫게 개선하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은 전적으로 마음가짐의 문제입니다. /할/
더 쉽게 비유해서 말씀드리면 이런 겁니다. '온도계'와 '온도조절장치'의 차이와 같습니다. 온도계는 주위 환경 조건에 따라 변화됩니다. 기온이 내려가면 함께 내려가고, 기온이 올라가면 함께 올라갑니다. 반면에 온도조절장치는 어떤 일을 합니까? 주위 환경 조건을 극복합니다. 기온이 내려가면 올려주고, 기온이 올라가면 내려줍니다. /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온도계와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형통할 때는 교만해지고, 고난의 때에는 낙심합니다. 그래서 불행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온도 조절장치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형통할 때는 스스로 낮아지고 겸손히 감사했습니다. 고난의 때에는 하나님을 앙망하며 소망 가운데 인내하고 감사했습니다. /할/
이런 감사가 어떤 감사인가? 전천후감사입니다. 날씨가 흐리든 개든 항상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할/
▶발명왕 에디슨의 일화입니다. 그가 67세 되던 해인 1914년 실험실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평생의 연구 자료가 잿더미가 되어버렸습니다. 손해 액은 2백만 달러가 넘었지만, 보상금은 겨우 23만 8천 달러에 불과했답니다.
그에게는 돈도 돈이지만 연구자료가 사라진 것은 엄청난 손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디슨은 잿더미가 된 실험실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답니다. '재난도 가치가 있지. 내 모든 실수가 다 타버렸으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제가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로부터 정확히 3주 후에 최초의 축음기가 탄생했답니다. 감사하는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적 같은 축복입니다. /아멘!/
우리는 주어진 것을 생각하고 먼저 감사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화상으로 눈썹을 잃어버린 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눈썹이 있을 때는 고마운 줄 몰랐는데 눈썹이 없고 보니 비가 오면 물이 눈으로 다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눈썹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그런 일에 감사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간증을 듣고 보니 눈썹이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할/
여러분,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돈에 가치를 두는 자들이 있습니다. 명예와 권세에 가치를 두는 자가 있습니다. 세상 쾌락에 가치를 두는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다 상대적인 것이고,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것이고 다 변하고 흘러가는 세월에 무너져 내리는 것들입니다.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돈은 돌고 도는 것이 돈입니다. 명예도 권세도 바닥날 때가 있습니다. 4선에 홍사덕의원이 이번에 낙선을 했습니다.
▶거부가 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찬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꿈속에서 신으로부터 계시 비슷한 말을 들었습니다. '네가 내일 길에서 늙은 수도승 한 사람을 만날 터인데 그에게 보화를 청하면 얻게 될 것이다.' 과연 그 이튿날 아주 초라해 보이는 수도승이 바랑을 메고 오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꿈 이야기를 한 뒤 자기에게 '뭔가 줄 것이 없느냐'고 했더니 '자기가 가진 것이라곤 큰 돌멩이 하나밖에 없다'고 하면서 '원하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돌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던 청년이 그 돌을 자세히 살펴보니 큰 다이아몬드였습니다.
청년은 너무 놀라워 다시 노승에게 뛰어갔습니다. '선생님이 이것을 돌로 여기고 주신 모양인데 이것은 다이아몬드입니다. 나는 선생님의 그런 정신을 배우고 그런 마음을 얻고 싶습니다.' 하면서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똑같은 다이아몬드였지만 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돌덩이에 지나지 않았고 또 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보석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람마다 가치의 대상이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대상에 가치를 두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품격이 달라지고 우리 인생의 행복도 달라집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진짜 행복은 시들지 않는 대상에 가치를 걸 때 주어집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금방 사라지고 마는 덧없는 대상에 가치를 둘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직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 없이 지속적인 대상을 찾을 때 행복해집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분입니다. /할/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의참회록에서 '우리 영혼이 주님 안에서 안식하기 전까지 참 평안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의 대상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멘!/
▶'가일스 플레처'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 잃은 자에게 그 분은 길입니다. 헐벗은 자에게 옷입니다. 굶주린 자에게 양식입니다. 묶인 자에게 자유입니다. 약한 자에게 그분은 힘입니다. 죽은 자에게 생명입니다. 병든 자에 건강입니다. 눈먼 자에게 광명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부요입니다. 절망한자의 희망입니다. 슬픈 자의 기쁨입니다' /할/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어른들보다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더 잘 알고 있는 삭개오입니다. 그는 돈도 권세도 한 손에 쥐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 한 쪽에서는 늘 공하고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생명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진정한 행복자가 된 것을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할/ ◀제목 소개!▶
본문을 차례대로 보면서 주의 음성을 듣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①본문은 예수님이 여리고로 지나가실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1).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길에 여리고에 들리셨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가시는 길입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주님은 한 영혼의 구원의 문제를 놓치지 않으시고 삭개오를 보기 위해 그 길을 가시고 계십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약 80리 정도 떨어진 요단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아주 오래되고 또 부강한 그런 도시입니다. 이 여리고는 종려나무가 많이 있다고 해서 옛날부터 종려나무의 도시 또는 작은 낙원이라고 불리던 도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헤롯 대왕이 그의 아들과 함께 이 여리고를 더욱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도시 계획을 세우고 정비를 하면서 그들의 겨울 궁전을 짓고 체육관과 또 극장을 건설하기도 했던 도시였습니다.
로마 역사에 나오는 안토니우스가 자기 애인인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로 주기도 한 도시가 바로 이 여리고라는 도시입니다. 이 여리고는 다른 도시와는 달라서 교통의 요지였고 또 교역의 중심지였습니다. 특별히 요단 동편 지방을 통하는 하나의 관문으로서의 도시역할을 감당했고 북으로는 다메섹 두로와 시돈이 연결되는 길이 나 있었고, 서편으로는 가이사랴와 욥바로 향하는 길이 있었고, 남편으로는 이집트를 연결하는 그런 중요한 길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부터 이 도시는 많은 전쟁의 중심지가 되어졌고 또 이런 교통의 중심지와 또 교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 강남 땅과 같은 곳입니다. 이곳에 세리장이 바로 삭개오입니다. /할/
②삭개오는 누구인가?(2-4)
⑴삭개오는 그 이름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삭개오는 '순결하다, 의롭다'는 뜻입니다. 유대나라에서는 자녀가 태어나서 8일이 지나면 할례 식을 하면서 이름을 지어 주는데 이때에 주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구약에 나오는 위대한 선조들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붙이는 방법입니다. 이 경우는 어린아이가 자라면서 그 이름의 인물을 사모하고 본을 받도록 하려는 교육적인 배려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예는 약간의 미신적인 색채를 풍기는 방법입니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가 촛불을 여러 개 밝히고 거기에다 원하는 이름들을 쓴 꼬리표를 각각 달아놓고 기다립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꺼지지 않고 남는 촛불의 이름을 자녀들에게 붙여준다고 합니다.
삭개오는 구약에 없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촛불을 밝혀 놓고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마 그 부모는 그에게 만인이 존경하는 깨끗한 인물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삭개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인이 된 삭개오는 그 이름과 정 반대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삭개오라는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얼마나 속으로 빈정거렸을까요? '순결해, 뭐 의롭다고, 웃기네. 그 이름가지고 세리가 되다니...'
요즈음 믿음의 가정에서 성인들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어 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별한 뜻이 있는 만큼 자녀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고 잘 양육해서 훌륭한 지도자로 키우시기 바랍니다. 잘못하면 이름 값도 못한다고 비웃음을 살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할/
⑵세리장이요 또한 부자였습니다.
여기 '세리장'은 자기 밑에 다른 세금 징수원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세리를 가리키는 말로 지금 말로 표현하면 세무서장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어떤 지역의 세리를 '경쟁 입찰' 형식으로 임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여리고 성'에 세리를 임명한다면, 각 세리 지원자들은 자기가 여리고 성의 세리가 되면 얼마만큼의 세금을 로마 정부에 내겠다고 그 액수를 적어내었습니다. 그러면 로마 정부는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액수로 입찰한 사람을 여리고 성의 세리로 임명해 주면서 동시에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거두는 '세율'을 정할 수 있는 권리까지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리는 자기가 로마 정부에 약속한 납세액을 채울 뿐 아니라 자신의 '충분한 수수료'까지 남길 수 있을 만큼 높은 세율을 자기 마음대로 정해서 세금을 징수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여리고는 예루살렘과 인접 지역을 연결하는 교역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활발한 '물 좋은 지역'의 '세리장'이었으니 한마디로 돈방석에 앉은 사람입니다.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부자'라도 정말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삭개오는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느 시대나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은 다 실세입니다. 돈 하나만 있어도 굉장합니다. 권력 하나만 있어도 굉장합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 두 가지를 가졌습니다.
삭개오는 남들이 하나도 못 가지는 것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그 당시의 실세입니다. 로마의 군인도 여리고에 부임하면 세리장인 삭개오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돈과 권력을 가진 반면에 더 소중한 두 가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돈은 가졌는데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삭개오는 유대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칠 줄 모릅니다. 그는 돈 때문에 하나님을 저버린 사람입니다.
또 권력은 얻었는데 민족을 잃어버렸습니다. 민족을 등치고, 동족을 등쳐서 돈을 긁어모은 사람입니다. 로마의 식민지 하에서 그는 권력을 얻었지만 자기 동족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민족을 잃어버린 삭개오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이 두 가지는 아주 소중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돈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세상 것 때문에 이웃을 잃어버리고, 사람을 잃어버리면 그건 망하는 길입니다. 돈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잃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돈을 쓸 줄 알아야 됩니다. 이웃의 유익과 인간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가 가진 은사를 쓸 줄 알아야 하는데 삭개오는 돈과 권력을 소유하는 동안에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할/
⑶삭개오의 귀한 점은 주님에 대한 호기심입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했습니다. 삭개오는 기관장이고 유지이기 때문에 그 날도 개인적으로 스케줄이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모든 스케줄을 다 포기하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나선 것입니다.
삭개오가 왜 예수님께 나왔습니까? 돈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사업을 위해, 병 고치기 위해, 결혼을 목적으로 나온 것도 아닙니다. 더더욱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의 동기는 매우 순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려는 동기였습니다.
그는 소문을 들어 예수님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요,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으며, 38년된 중풍병자를 걷게 하신 분이셨습니다. 삭개오는 이것이 궁금하여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기 '보고자 하되'라는 말은 '보기를 열망하되', '간절히 사모하되'라는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간절히 보기를 원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모한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고전12:13절에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또 딤전3:1절에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함은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시편에서도 '주의 성전을 사모하나이다. 내가 여호와를 앙망하나이다. 주의 은혜를 갈망하나이다. 내가 주의 은혜를 사모하나이다.' 이런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사모한다는 이 말의 뜻은 참 흥미롭게도 '욕심을 품는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한 여자를 사모한다는 것은 그 여자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삭개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했습니다. 그를 만나고자 했습니다. 그의 모든 공무를 제쳐놓고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그 예수가 여리고에 왔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만나고자 한 것입니다. /할/
⑷그에게 핸디캡이 있습니다. 키가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키 작은 사람들이 큰 일을 합니다. 나폴레옹,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가나안농민학교를 세우신 김용기 장로님, 다 키가 작은 분들이십니다.
또 한국의 성자 손양원 목사님을 보면 세 번 놀란다고 합니다. 너무 작아서 놀라고, 두 번째는 목소리가 얼마나 우렁차든지 놀라고 세 번째로는 심령을 울리는 그 설교에 감동해서 놀란다고 합니다. 키 작은 열등감, 이것이 삶의 추진력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또 반대로 말하면 그래서 키 큰 사람은 싱겁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생의 그 열등감이 추진력이 되어서 인생을 건강하고 복되게 사는 경우를 참 많이 봅니다. 그런고로 열등감은 어떤 의미로 보면 삶에 있어 놀라운 축복의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멘!/
⑸예수를 만나는데 또 장애물이 있습니다(4).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룬 사람들의 인파가 그를 막았습니다.
여러분, 행복으로 가는 길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장애물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삭개오를 보세요!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할/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은 코메디입니다. 그 지체 높은 사람이 체면 불구하고 뽕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나는 이걸 비유컨대 '서울시장이 약장수 구경하려고 전봇대 위에 올라간 것과 같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지금 삭개오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지위와 체면을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뽕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 받는 일이라면 체면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할/
그는 호기심의 사람입니다. 그 호기심이 예수에게 관심을 갖게 했고 그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는 결단했습니다. 그는 계속 노력합니다. 집념의 사람입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꼭 보고야 말리라. 누가 말하든지 상관없이, 누가 조롱하든지 상관없이...'
이런 사람이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호기심, 은사에 대한 호기심, 영혼에 대한 호기심도 있어야 전도도 합니다. /할/
지금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 오는 행렬을 바라보고 있는데 우리 주께서 길을 지나가고 계십니다. 그 주님이 자기를 향해서 목마른 심령으로 쳐다보고 있는 한 사람의 눈망울을 쳐다보고 멈추셨습니다. 삭개오를 보신 것입니다. /할/
그 분은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지만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믿음으로 자기 옷깃을 만진 38년 혈루병의 여인을 아셨던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은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에도 있듯이 '우리의 신음마저도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향해서 나 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무엇보다도 목마른 심정을 향해서 깊은 사랑을 가지신 분입니다. 자기를 향해서 목마른 가슴으로 나무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멸시받은 한 사람, 그 심령을 주께서 보신 것입니다.
가시다가 주님은 멈추셨습니다. 주님이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이 다음 장면에서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다음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다가 며칠 후에 십자가에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죽음을 당하십니다. /아멘!/
이 일은 엄청난 큰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빛이 있으라' 명령하매 빛이 생겼던 그 일 보다 더 큰 일입니다. 온 세상에 가장 큰 일을 하러 오신 그 분께서 당신을 향해서 구원을 사모하여 열망을 가지고 나온 한 사람을 보시고 '스톱'하셨다는 말입니다. /할/
오늘 이 시간에도 어떤 연유로 여기 나왔는지 옆 사람은 모르지만 내 마음의 깊은 공허와 깊은 좌절을 채워줄 수 있는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주님 이외에는 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 없습니다. 전심으로 주님 앞에 나오는 마음을 주께서는 멸시치 아니하십니다.
시51:17절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 /아멘!/
③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내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7)
여기 '우러러 보시고'라고 했는데 거꾸로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내려다보고, 예수님이 삭개오가 있는 그 지점에서 와서 '우러러 보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주님이 삭개오의 얼굴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삭개오의 얼굴을 주목했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눈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오늘밤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여러분, 다른 말이 필요합니까? 이것은 삭개오의 마음을 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향하여 마음이 열려 있습니다. 우러러 보신 것은 삭개오의 마음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밤 내가 네 집에 가겠노라' 이것은 삭개오의 중심을 보시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할/
본문에서 설교자들이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조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삭개오가 뽕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 눈에 잘 띄는 장소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삭개오를 찾는데 쉬웠다는 논리로 설명을 합니다.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논리입니다. 비록 삭개오가 군중 속에 파묻혀 있어도 예수님은 정확하게 찾아가시는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삭개오의 열린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 수많은 무리 중에 주님은 자기를 향하여 마음을 열고 있는 삭개오를 뽕나무 위가 아니라 어디 있든 주님은 찾아가시는 주님이십니다. /할/
'오늘밤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여기 '하겠다'는 말은 요4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는 여러 루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마리아로 가야 하겠다'고 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가셨어요? 옆에 야곱의 우물이 있어도 목마른 여인, 그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사마리아로 가셔야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삭개오에게도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십니다. /할/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의 집이 어떤 집입니까? 세리의 집입니다. 예수님이 세리의 집에 가는 이것은 그 당시에 큰 사건이 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일입니다. 세리의 집은 그냥 아무나 가는 집이 아닙니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거지도 세리가 준 돈은 안 받는다' 그만큼 세리는 악질이요 완전히 시민들이 등을 돌린 사람입니다. 도무지 상종이 불가능한 이런 세리 집에 주께서 가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혼자 가셨습니까? 아닙니다. 추측해 보면 12제자와 함께 거기 따른 사람들을 합치면 30명 정도 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삭개오 집이 부잣집이니까 양식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만 그 많은 사람이 세리 집에 간다는 것은 보통사건이 아닙니다. 아무도 가고 싶어하지 않는 그 세리 집에 주님이 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자기 집에 유하시겠다는 말씀을 듣는 삭개오는 꿈인지 생시인지 너무 기뻐서 즉시 자기 집으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바리새인 보다 서기관보다 어떤 랍비보다 권세 있고 수만 명이 그를 메시야로 모시는 그분이 삭개오 집에서 하루 밤을 유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천하고 부정하고 짐승보다 못한 자기 집에 오셔서 하루 밤을 유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감격과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할/
삭개오는 급히 뽕나무에서 내려와서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우리 집에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만 왕의 왕, 만주의 주, 하늘나라 왕을 우리 집에 모신 것은 내 집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삭개오의 모습을 보세요! 6절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이 모습이 축복입니다.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십시오! 주일을 기쁘게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영접하십시오! 우리는 영접기도문을 주일마다 합니다. 왜?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할/
구원의 믿음은 주님을 영접할 때 주어집니다. 주님을 보고 좋은 분이라고 바라만 보아서는 안 되고, 주님에 대해 열광을 하고 환호를 하는 것으로만 끝나서도 안 되고,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내 집과 내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주님은 진정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에게 성령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아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갈 때마다 항상 베다니의 삼남매, 즉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의 집에 머무셨습니다. 왜 좋은 집과 호텔에서 머물지 않고 그들 집에 머무셨을까요? 그들이 주님을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영적으로 그렇게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도 우리 안에 찾아오셔서 우리의 주인이 되어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할/
▶7절을 보세요!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사실 삭개오의 심정과 예수님의 심정은 서로 딱 맞아 떨어 졌습니다. '한 영혼에 대한 사랑, 한 영혼에 대한 애착, 한 영혼에 대한 측은함'을 가진 예수님의 마음과 주님을 통해서 '자기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되겠다. 주님을 통해서 자기의 과거를 청산해야 되겠다'는 간절한 심정을 삭개오와 주님의 마음이 맞아서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할/
그런데 그 길거리에 나와서 서 있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수군거리면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저런 거룩하신 귀한 예수님이 어떻게 저렇게 우리 유대인들이 가장 멸시하고 미워하는 죄인의 집에 들어갈 수가 있느냐' 하면서 비난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여러분, 그 길거리에 나와있던 많은 사람들의 관점은 예수님과 달랐습니다. 오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자신의 기준과 내 자신의 관점이 다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다른 사람의 선한 일을 문제삼고 시비 걸고 때로는 욕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판단보다도, 이웃의 판단보다도, 하나님의 판단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합니다. 초림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려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 구원하시려고 오셨고, 10절에 말씀처럼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④참 행복자의 고백을 들어보세요!(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가 서서' 원래 유대인들은 특히 잔치 자리에서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그 잔치석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혼자 일어서서 예수님께 어떤 '중대선언'을 발표한 것입니다.
그것은 곧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토색'이란 '남을 속여먹은 것' 혹은 '강탈한 것'이란 뜻입니다. 사실상 '세율을 가지고 사기 치고' '조폭들을 동원해서 빼앗는 것이야말로' 지금까지 삭개오가 초지일관 애용해 왔던 '부정축재의 수단'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만일'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내가 혹시 그런 일이 있었다면'이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토색했던 모든 경우들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없이'라는 의미입니다. /이해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레6:5절이나 민5:7절 등의 율법에 의하면 그런 경우에는 원래의 액수에 '오분지 일' 더해서 돌려주면 됩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것을 아예 '사배'로 갚겠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바로 삭개오로서는 '공개적 회개'인 동시에 '양심적 서약'입니다.
평생을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살아 왔던 그의 입에서 '내 것을 남에게 주겠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 기적입니다. 예수 만나면 이런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실 '하늘이 두 쪽이 나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삭개오에게는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 지금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예수 만나 자의 표적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이런 변화가 지금도 일어납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믿/할/
▶미국의 '찰스 피니'라는 갑부는 15년 동안 약 7,500억 원의 돈을 익명으로 사회단체에 기부했습니다. 그는 만 오천 원짜리 시계를 15년 동안이나 차고 있었고 두 켤레의 구두로 10년을 버텼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러한 거금을 기부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강철왕 카네기는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그는 카네기재단을 통해 2,500개의 도서관을 지어 사회에 기증했습니다.
록펠러 재단은 장학 사업으로 1만 명의 장학생과 6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습니다. 13년 간을 세계 최대의 부자의 자리에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68억 달러(8조 7천억 원)를 기부하여 카네기가 지은 2,500개의 도서관에 있는 모든 자료들을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끝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공언하기를 나이가 들어 은퇴할 때 아들에게 줄 1백만 달러만 남기고, 나머지 전 재산을 사회에 내어놓겠다고 선언했답니다. /할/
⑤예수님의 구원의 선포를 들으십시오!(9-10)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도 자손임이로다' /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집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구원입니다. 예수가 삭개오 집에 오신 것이 구원이고, 예수가 삭개오 집에 오신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고, 예수가 삭개오 집에 오신 그 자체가 삭개오는 이미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말은 '비로소 네가 구원받은 자의 삶을 보여주었다, 네가 하나님 자손의 모습을 내 앞에 보여주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변화된 삶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할/
⑥오늘 삭개오가 무엇을 찾았습니까?
⑴믿음을 찾았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므로 물질을 잃어버리고 믿음을 얻었습니다. 믿음 없이, 하나님 없이, 예수님 없이 살아온 것이 허무한 것이요, 무의미한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도 믿음을 얻은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아멘!/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는다 해도 믿음을 잃어버리면 그 사람은 완전 실패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생명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축복과 은혜 속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믿/
어떤 사람들은 이 믿음을 과소평가 합니다. 불쌍한 사람이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시37:5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또 믿음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히11: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가정이 행복할 것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사업장이 하늘 보고가 열리는 것을 바라보세요!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 안에서 복을 받고 출세할 것을 바라보세요! 그리고 이 재단에 속해 있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복을 받아 재벌들이 쏟아져 나오고 우리 성도들의 자녀들이 유명한 재벌가, 정치가, 사업가 기타 여러 유명인들이 나올 것을 믿고 바라봅니다. /할/
⑵예수를 만나 참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노예 생활이란 자유가 없는 생활입니다. 삭개오는 지금까지 돈만 바라보고 돈의 노예가 되어 돈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그저 돈이면 다 인줄 알고 도도하게 돈만 모으고 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것도 모르고 동족들의 피를 빨아먹는 것도 모르고 돈만 모았는데 정작 그 안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만족이 없었습니다.
이런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 물질의 노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물질을 바르게 쓸 줄 아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주여!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나이다.' 이것이 곧 자유인의 선언이요, 행복자의 고백입니다. /할/
⑶예수의 참 사랑을 찾았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순간 삭개오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다 드러났습니다. 자신의 욕심이 무너지면서 탐욕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사랑의 대상을 보았습니다. '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를 지고 내 죄를 담당하셨구나!'
삭개오는 예수로부터 받은 은혜가 네 이웃으로 돌아가야 할 것을 알았고, 가난한 자에게 재산 절반을 주겠다고 양심선언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나 중심에서 이웃을 생각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할/
⑷가장 최고의 복인 구원의 복이 임했습니다.
삭개오가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물질이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질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도 생명처럼 여긴 재산을 절반을 가난한자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성실하게 사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 얻었느냐 잃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나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이고 이웃과의 바른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삭개오에게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자 주님이 드디어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가장 행복한 축복의 선언입니다. /할/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리고가 무너져야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수 6:8-21) (0) | 2022.02.11 |
---|---|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행 7:1-60) (0) | 2022.02.11 |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에 오셨습니다! (요 21:1-14) (0) | 2022.02.11 |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사 53:1-9) (0) | 2022.02.11 |
참된 헌신이 아름다운 성공입니다! (요12:1-8) (0) | 2022.02.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