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헌신이 아름다운 성공입니다! (요12:1-8)
요즘 정치시즌입니다. 가는 곳마다 정치이야기가 대세입니다. 이정희 씨가 후보를 사퇴함으로 야권 연대가 다시 봉합이 된 것 같습니다. 정치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이제는 주부들이 더 난리입니다. 더 적극적입니다. 옛날에는 대통령 선거도 남편에 따라 온가족이 움직이더니 이제는 아내들의 요구에 따라 온가족이 움직일 정도가 되었답니다. 참 재미있는 시대입니다.
정치인들을 보면 또 재미있습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체면이나 자존심을 불문하고 이 사람에게 갔다 저 사람에게 갔다 합니다. 어제는 이쪽이 유리하니까 이쪽으로 왔다가 오늘은 저쪽이 유리하니까 저쪽으로 갑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그런 결단을 내렸다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보스 한사람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고 인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 정치인들 가운데 보면,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 목숨을 바쳐가며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유익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이치는 믿음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여인은 자기의 신앙의 절개를 따라 옥합을 깼는가 하면, 가롯 유다는 자신의 욕심에 따라 그 여인을 책망하는 그런 모습을 봅니다.
여인의 모습을 보세요!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할/ 이번에는 가롯 유다의 반응을 보세요! 5-6절에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여기서 성급하게 두 사람의 결론을 내린다면 세상 적인 사람들이 생각할 때 가롯 유다가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영적인 기준에서 볼 때 옥합을 깬 여인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의 판결을 보세요! 7-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 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할/ 주님의 죽음을 준비한 여인에 대한 칭찬입니다. /할/
오늘 본문은 사순절에 깊이 한 번 생각해 볼 아름다운 헌신에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 적인 성공과 영적인 성공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목 소개!▶
오늘 이 시대 가장 화려한 단어는 뭐니 뭐니 해도 성공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성공은 오늘 현대인들의 우상이고 삶의 목적이고 꿈입니다. 성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자신 있게 살아가고 소망 있게 살고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실패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병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실패는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실패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참담한 마음을 안겨줍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이 기대하고 바라고 꿈꾸는 성공개념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몇 가지를 생각해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1. 세속적인 성공과 영적인 성공의 차이는 무엇인가?
①오늘의 성공개념은 너무 보이는 것에 기준을 두고 있습니다.
너무 양으로 따지고 높이로 평가하고 길이로 재고 크기로 화려함으로 평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너무 양으로 크기로 재니까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실패자로 간주해 버립니다. 그래서 가지면 더 가지려 안달하고 적으면 실패자로 간주되어 스스로 낙오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러면 심한 상실감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②성경이 제시한 성공과 행복의 기준은 지극히 정신적인 것에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우리 인생에서 가치 있고 값지고 귀한 것은 모두 하늘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 인생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보다 깊고 값지고 소중한 것은 모두 위로부터 온다는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것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양적이 아니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할/
예를 들면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참 값이 있습니다. 이 소망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이고 근거이고 권위이고 목적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람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소망은 위로부터 오는 복입니다. 또 은사입니다. 은사도 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얻고 나서 나머지 조건들을 모두 포기했습니다. 그것을 얻고 보니 나머지는 전혀 가치를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또 사모함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람의 값은 존귀함에 있습니다. 이 존귀함은 어떤 외형적 자격으로는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외형적 자격이나 조건은 이를테면 좋을 뿐입니다. 높은 자리, 많은 돈은 가지고 있으면 이를테면 좋을 뿐이지 그것이 절대적인 행복의 기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이왕이면 좋은 것일 뿐 행복이나 만족함이나 존귀함에 절대적인 요소는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못생김의 아름다움이 더 행복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여인이 정말 못생겨서 늘 비관만 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왜 나를 이렇게 못생기게 만드셨습니까?'하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못생긴 대신 150세까지 살게 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안 되겠다 싶어 50세 때 성형수술을 했습니다. 얼굴을 예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다음 해 죽었습니다. 죽어서 그 천사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왜 150세까지 살게 해 주겠다고 하더니 벌써 오라고 하냐' 천사가 자세히 보더니 '당신이 그 여자냐? 얼굴이 예뻐져서 모르고 잘못 부른 것 같다'고 하더랍니다. /믿거나 말거나/할/
그렇습니다. 행복과 기쁨의 삶은 잘생김이나 넉넉함이나 젊음이나 화려함과는 상관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기왕이면 있으면 좋은 것일 뿐입니다. 진정 행복의 원천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내 마음에 채우고 내 영혼에 채우고 그렇게 채워진 나를 발견할 때 그때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값이 있고 멋이 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고 만족함이고 기쁨이고 성공한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헛수고로 나의 삶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게 됩니다. /아멘입니까?/할/
③우리는 성공 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답을 주셨습니다(고후6:9-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⑴세상에서 무명하나 하나님 나라에서 유명합니다. 세상에서의 유명은 화려함, 나타남, 올라감, 누림이나 군림에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이것을 이루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주님나라에서 유명한 것은 영적 성숙함과 영적 부요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당시 바울을 볼 때 참 한심하게 보였습니다. 세상 적으로 얼마든지 화려해질 수 있는 조건을 다 가지고 있던 바울이 어느 날 그것들을 다 버리고 초라하게 전도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바울은 바보 같은 사람으로, 한심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뒤에서 쑤군쑤군하는 소리를 듣고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세상에서 무명하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유명하다' 이것이 바울이 제시한 소중한 삶의 내용입니다. /아멘!/
⑵세상에서는 죽은 자 같으나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초라하게 살아가는 바울의 모습을 보고 살아있으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무지의 극치입니다.
우리의 현실도 그렇습니다. 가끔 동창회에 가 보면 모두 화려한 길을 걷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크게 사업을 하는 동창, 그에 비하면 현실적으로 나는 아주 초라하게 신앙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화려한 삶이 그렇게 감동적으로 느껴지거나 부럽게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 많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바울도 자신의 조건들을 다 포기하고 이 길을 걷는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듣자니까 사람들이 '이제 바울은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야'하고 말합니다. 너무 초라한 그의 행색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세상 적인 이 기준을 신앙적으로 재해석하고 재 규정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과감하게 그 규정이나 그 기준을 재해석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는 죽은 자 같으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살아 있는 자'라고 해석했습니다. /할/
그러니까 이 결단은 자기부정이 없으면 내릴 수 없는 결단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은 이 결단을 내리는데 주저하면 세상과 결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신앙 인들은 자기부정에 무서운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
▶일본의 내촌감삼은 일본이 자랑하는 지성인입니다. 그는 천황숭배시절에 일본 제일고보의 교사였습니다. 고보는 일본에서 일류 고입니다. 학교 경축식 날 천황숭배의식이 거행될 때 모두 그 참배에 참여해야 했지만 그는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그 거부는 상당한 용기입니다. 그 시대에 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부정해야만 하는 용기입니다.
그래서 이곳저곳에서 매국노라고 침을 뱉었고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언론은 연일 타도에 나섰습니다. 마침내 그는 사표를 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으로 떠나 맨해튼 거리에서 음식장사를 했습니다. 아주 초라한 행색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 기자들이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왜 이런 초라함을 자초했는가?' 그때 그는 의연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현재의 평안을 위해서 우상에게 절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의 고백이 바로 이 고백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죽은 자 같으나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있는 자입니다.' 얼마나 당당한 고백입니까?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⑶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쯤 감옥에서 한숨쉬고 고민하고 근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감옥에서 한숨쉬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고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감옥을 마치 내 안방처럼 더 좋게 조용하게 앉아서 할 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 밖에서는 유대인들이 그를 잡아죽이지 못해 안달해서 언제나 위험이 상존했는데 감옥 안에서는 안전하게 앉아서 할 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 말이 '나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다'라고 말합니다.
⑷나는 가난한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말합니다.
오늘 부자들은 너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예년에 없던 불경기지만 그럼에도 고가 품은 언제나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답니다. 그런데 없는 사람은 또 철저하게 없습니다. 그래서 비관하고 자살해서 삶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너무 보이는 것에 집착합니다. 비교의식이 강합니다. 그래서 가졌으면서도 늘 빈곤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바울은 가진 것이라고는 전무했습니다. 가정도 없고 집 한 채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누구보다 만족해했습니다. 그래서 고백한 말이 '나는 가난한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신앙 인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가진 자입니다. 그 이름 속에 모든 인생문제의 해결의 키가 있습니다. /믿/할/
그러므로 이 고백은 영적인 풍부의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④세상 적인 기준에서 영적인 기준으로 돌아선 사람이 있습니다.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우리들이 어려서부터 너무 많이 듣고 읽어서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 지방을 지나실 때 삭개오를 만나게 됩니다. 삭개오는 '청결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 부모가 아들을 낳아놓고 큰 기대를 하고 그렇게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삭개오가 부모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세리로 입신을 해서 나중에는 세리 장까지 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지방의 세무서장 쯤 되었습니다.
여리고는 베레아 지방에서 요단강을 건너는 무역상인들이 지나는 길목입니다. 그래서 여리고에서 모든 상품의 통관세를 징수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막강한 공권력을 이용해서 세리가 자유롭게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세리는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는 '허가 낸 도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창녀와 죄인들과 같이 세리를 불결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이 삭개오가 마침내 예수를 만나고 변화를 받고 회개하여 세속에서 영적인 성공 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가 예수 만나 고백한 것이 참 자유인에 행복 선언입니다. 그는 '나는 죄인입니다, 그동안 떼먹은 것 4배로 갚겠습니다, 그리고 재산을 처분하여 동족에게 내 놓겠습니다' 그가 얼마나 기쁘고 감격하고 환희로 벅찼으면 전 재산을 내 놓고 떼먹은 것은 4배로 갚겠다고 회개를 했겠습니까? 그의 세속적인 욕망이 깨어지니까 영적인 부요가 그에게 찾아 온 것입니다. /할/
신앙생활은 자기 자아를 깨는 것이고, 욕망을 깨는 것입니다. 오늘 마라아가 옥합이 깬 것처럼, 기드온의 항아리가 깨어졌듯이, 내 욕망의 자아도 깨어져야 삭개오가 경험했던 그 환희가 찾아옵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의 영혼에 꿈과 환상을 심어 주시고 그분 나라를 꿈꾸며 인류구원에 대한 환상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
2. 참된 헌신이 아름다운 성공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복음서에서 동일하게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교훈이 크기 때문입니다. /할/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베다니라는 마을에 가셨을 때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다니에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사는 동네입니다.
막14장에 보면, 바로 이 베다니 동네에 전에 문둥병, 나병으로 앓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시몬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 시몬이 자기 집에 예수님이 초청하여 식사대접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때 한 여인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300 데나리온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리어 그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사건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 그 집에 모여 있는 구경꾼, 향유 부음을 받은 예수님'입니다. 셋으로 나누어 조명해 보겠습니다. /할/
①향유를 부은 여인, 마리아를 생각해 보자!
본문은 향유를 부은 여인은 나사로의 누이동생인 마리아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눅7:37절에서는 큰 죄인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어째든 그녀가 누구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행동입니다.
⑴마리아는 공개적으로 향유를 부었습니다.
2절에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잔치할 때'라고 나옵니다. 여기 시몬은 전에 문둥병자였으나 주님 앞에서 깨끗이 치료받은 사람으로서 주님을 모시고 식사대접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몬의 아내가 '마르다'라고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와 마리아가 그 집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가룟유다와 다른 제자들이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서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 일이 떳떳한 일이며 자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일은 드러내 놓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랑스럽고 착한 일이라면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과 교회를 위해서라면, 또 사회와 이웃을 위해 떳떳한 일이라면 여러분들 주저 마시고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서둘러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⑵값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막14:3절에 '값진 향유'라고 했습니다. 본문 5절을 보면 가룟유다는 이 향유의 값을 300데나리온으로 감정을 했습니다. 당시의 화폐가치를 보면 장정이 1년 동안 일해서 받은 노임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당시 장정의 하루 노임은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이 돈은 오병이어 때 빌립이 모인 무리를 먹일 양식을 계산한 금액이 200데나리온인데 비해 100데나리온이 더 많은 돈의 액수입니다.
마리아가 그 날 쏟아 부은 향유는 순전한 나드 한 근이라고 했습니다. 나드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나르드'라고 하는데 동방의 향유의 분량을 말합니다. 이 향유는 원산지가 동방이었습니다. 유대에서는 생산이 안 되기 때문에 수입해야 합니다. 그래서 향유가 고가 품이고 그 시대에는 명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향유는 상당히 귀한 물건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결혼 풍속가운데 혼수 준비물로서 가장 귀한 것이 옷과 향유라고 말합니다. 아마 마리아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딸에게 혼숫감으로 이 귀한 향유를 물려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부은 이 향유는 자신이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바친 것으로 사랑의 극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란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셨던 하나님께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그렇게 했다면 세상에서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하나님께 그런 행위를 했다면 그것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믿/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예배의 위기입니다. 진정한 예배가 없다고 뜻 있는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극장에 오듯이 성가대가 찬양을 얼마나 잘하나? 목사가 설교를 얼마나 잘하나? 내가 아는 사람이 왔나 안 왔나를 살핍니다.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보다 보러 오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무슨 사건이 이루어지고 어떤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백날 천 날 예배드려도 하나님은 끄덕도 안 하십니다. 이 여인이 드리고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최상의 존재에게 나의 최상의 것을 아낌없이 쏟아 바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기쁨과 감사와 감격을 이 여인만이 아는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값으로 칠 수 없는 은혜를 받고 살면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싸구려 향유를 부어서 갚노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지옥 갈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날까지 살고 있습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니다.
오늘 본문의 값비싼 향유는 단순한 물량적인 의미만을 지닌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드린 것은 그것보다 몇 천만 배 더 값비싼 사랑과 축복과 은혜를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헌신은 '저 영원한 천국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발견하고 깨달은 자'의 헌신입니다. /믿/
⑶순전한 나드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마리아가 드렸던 향유는 순전한 '나드 향'입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순전한 사랑과 마음을 의미합니다. '헬'어의 '순전한'이란 말은 '믿을 수 있는'이란 뜻을 가진 단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전이란 말은 믿음이란 말과 동의어로 해석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제 아무리 큰일을 하고 큰 봉사를 해도 그 동기가 순수해야 하고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할/
▶어느 신학 세미나에서 한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자기 교회 모 집사님은 새벽기도, 주일 낮 예배, 저녁 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 구역예배뿐만 아니라 십일조, 절기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특별 헌금도 앞장서 냈습니다. 그런데 장로 투표에서 그만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도와주지 않아서 떨어졌다면서 본전도 못 찾았다고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투덜대다가 어느 날 바람처럼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순전한 '나드 향'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에 감격도, 천국에 가치도 깨닫지 못한 불쌍한 영혼입니다. 우리가 정말 깨달아야 할 것은 천국의 가치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더 좋은 본향을 찾아가는 순례자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천국 가는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믿/
여러분, 우리 모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의 이름 석 자가 저 천국 하나님의 나라 생명 록에 새겨져 있고,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소속이 하늘나라 시민권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알고 천국의 소중한 가치를 바로 알 때 우리가 가진 가장 값비싼 나드 향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려고 그 고난과 수모를 당하시고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시고 사망권세를 깨뜨리신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믿/ 그러므로 정성을 다해 믿음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드려야 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⑷향유를 깨뜨렸습니다. 막14:3절에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깨뜨린 옥합은 이집트의 '알라바스트론' 지방에 있는 산에서만 나오는 돌로 만든 것으로 주로 향유 병을 만드는데 그 돌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병도 비싼 병이고 향유도 비싼 순전한 것인데 그것을 깨뜨렸습니다.
▶왜 그가 옥합을 깨뜨렸을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깨뜨려 드리는 헌신의 상징입니다.
㈁너무나 고가의 향유이기 때문에 깨뜨리지 않으면 항상 그것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지닌 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죽음의 장사를 위해 미리 부어 드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머리에 기름을 붓는 몇 가지의 관습이 있습니다.
㈀자기 집을 방문한 손님의 머리 위에 향유 몇 방울을 떨어뜨리는 관습이 있고, ㈁왕이 즉위할 때, ㈂제사장의 성별의식을 위해, ㈃선지자를 세울 때, ㈄장례식 때 시신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마리아는 우물쭈물하면 마음이 변할지 모르므로 순식간에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오래오래 두고두고 생각하면 마음이 변합니다. 우리가 배운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보십시오! 신앙에는 결심과 결단이 절대 필요합니다. 봉사하는 일도, 기도하는 일도, 전도하는 일도, 헌금하는 일도, 주일 성수하는 일도 결단이 필요합니다. /아멘!/
아무리 좋고 귀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 뭘 합니까? 깨뜨려서 드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입으로만 오만가지 것을 깨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옥합을 깨뜨리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훗날 깨뜨린다고 상담하고 약속만 합니다. 그러나 실천을 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리아는 죄 사함의 은혜를 아는 자요, 구원의 감격을 가진 자요, 천국의 가치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미련 없이 그 귀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받쳤더니 주님이 이 여인을 축복하셨습니다.
막14:9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여기 '여자가 행한 일'이란 예수님에게 옥합을 깨뜨려서 '향유를 부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건으로 이 여인은 온 천하에 향수를 뿌린 여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기념될 만한 말'이 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한 이 말은 온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내 사전에는 불가능은 없다> '나폴레옹'이 한 이 말도 온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중이 한 말도 우리나라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또 우리나라 사람 치고 이 말을 모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대통령 못 해 먹겠다.> 이같이 온 천하를 휩쓸고 있는 '기념비적인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온 천하에 알려진 '기념비적인 행동'도 있습니다. ▶손 양원 목사님이 자기 아들을 죽인 공산당 청년을 아들로 삼았습니다. 이 행동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강재구 소령 이야기도 다 알고 있습니다. 훈련병들이 수류탄 훈련을 하다가 수류탄을 떨어뜨렸습니다. 다 죽게 되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엎어져 그 수류탄을 끼어 안았습니다. 그의 몸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혼자 죽었습니다. 육사 교정에 그의 동상이 우뚝 세워져 있습니다. 온 천하가 다 알고 있는 행동입니다. /할/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마리아의 헌신은 '온 세상이 기념'할만한 그런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 여인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이 함께 전파되어 이 여인의 믿음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할/
⑸마라아의 헌신은 어떤 헌신인가? 우리가 바로 배워야 합니다.
㈀능동적인 헌신입니다. 그 누구도 마리아에게 헌신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마리아의 헌신을 비방했습니다. 마리아는 능동적으로 자원하여 헌신했습니다. 이 헌신이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헌신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를 '임산부가 애를 낳을 때 쓰는 힘'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비방을 이긴 헌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보면 헐뜯고 비방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시험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가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는 헌신입니다. 오라비가 죽은 지 4일이나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마리아는 미래에 어떤 축복이나 은혜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 지난날에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 감사하여 헌신했습니다. 이 헌신은 어떤 조건을 내건 헌신이 아니라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여하는 순수한 헌신입니다. /할/
②구경꾼들의 반응을 보자!
⑴집 주인 시몬을 한번 생각해 보자!
막14장에서는 그를 문둥이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문둥병자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존재입니다. 격리되어 있어야 하고, 예배에도 참석을 못합니다. 집주인 시몬은 그런 문둥병에서 예수님께 치유 받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고 식사대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자기 집에 손님이 오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환영합니다. ▶평안을 기원하며 입을 맞춥니다. ▶발을 씻겨 주거나 발 씻을 물을 줍니다. ▶향을 피우거나, 향을 머리에 부어 발라 줍니다. 그런데 이 시몬은 예수님이 오실 때 위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 중에 그 어떤 한 가지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똑같은 배경의 눅7:44-46절에 보면 그 당시 예수님이 집주인 시몬을 책망한 말씀이 나옵니다.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런 사람은 천국의 가치를 모르는 불쌍한 영혼입니다. 믿음을 형식과 의식으로만 채워져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형식적인 믿음을 떠나야 합니다. /아멘!/
⑵제자들과 가롯유다를 조명해 보겠습니다.
각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제자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분을 내었습니다. 화를 내었습니다.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책망했습니다. 비난했습니다. 나무랐습니다. 막14:4절에 '어떤 사람들이 분 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가롯유다가 나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롯유다의 논리는 그럴 듯하고 교양적이고 설득력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일이지 왜 낭비하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롯유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죄에 빠져서는 아니 됩니다. ▶그럼 유다의 잘못이 무엇인가?
㈀다른 사람의 의로운 일을 시비하고 나셨습니다. 남의 일을 간섭하고 시비하는 사람은 자기 할 일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이 하는 좋은 일을 질투하는 사람은 그 질투심 때문에 늘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영적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롯유다의 발상은 지옥 갈 사람을 건져내는 교회의 선교를 '왜 돈을 쓰느냐? 우리 교회도 어렵지 않느냐?'와 같습니다. 여러분 지옥 갈 영혼들을 구원해 내는데 필요한 돈이라면 우리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물질입니다. 우리 모두 선교 비를 드립시다.
지금 세계는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사들이는 마약 때문에 썩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굴러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서 빨리 구원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롯유다같은 발상이나 정신으로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동기가 불순했습니다. 6절에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마리아는 순전한 마음으로 나드향을 깨뜨려 드렸습니다. 가롯유다는 불순한 마음으로 향유를 헌금화하여 구제하자고 불평했습니다. 문제는 그토록 구제 열이 불타고 이론이 정연했던 가롯유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은30에 눈이 어두워 스승 예수님을 팔아 넘겼고 결국 그는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유다의 논리대로라면 마리아의 옥합을 깨뜨리는 것은 낭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마리아의 낭비 때문에 그의 신앙을 본받은 무리가 많고 또 세상에는 그런 낭비 때문에 어둠이 걷히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낭비 자들은 동양에서도 있었고, 서양에서도 있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인도의 '무저항주의'를 부르짖은 '간디'였다고 봅니다. 그는 영국에서 최고의 학부를 나왔고, 자기만 원한다면 많은 재산을 모으고 법률가로서 일등 국민의 특권과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안일과 행복한 생활을 집어 던지고 냄새나고 문화의 혜택도 받을 수 없는 조국 인도로 돌아가 인생을 무명옷을 입고 굶으며 옥중에서 온갖 고초와 학대를 받으면서 인생을 허비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동족의 흉탄에 맞아 자신의 인생을 무참히 허비하고 낭비했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바보가 독일에서도 한 사람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다름 아닌 히틀러의 나찌 정권과 항거하여 싸우다 순교한 '본회퍼' 목사님입니다.
그는 40이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노총각으로 약혼만 해 놓고 옥중에서 이리 끌리고 저리 끌려 다니다가 마침내 1945년 나치에 의해 사형 대에 올랐습니다. 만일 '본회퍼'가 당시 다른 지성인들이나 성직자들처럼 진실이나 정의를 말하지 않고 나치에 아부하고 협력만 했다면 그렇게 고생하고 처참하게 사형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역사는 이런 사람들 손에서 움직여지고 있고, 세워지고 빛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사람들의 삶을 낭비했다고 하겠습니까?
▶미국 뉴욕 항 앞 '리버티' 섬에는 유명한 '자유의 여신상'이 오른손에는 횃불을 들고, 왼손에는 미국 독립선언서를 들고 서있습니다. 이는 '자유는 세계를 비춘다.'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자유의 여인상은 프랑스 국민이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선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조각상은 'F. A. 바르톨디'라는 조각가가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여신상을 무려 20년 에 걸려 완성했다고 합니다.
이 조각상의 제작을 요청 받은 '바르톨디'는 '자유'라는 이미지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모델을 찾아 헤매는데 엄청난 세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델 감을 추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역사상 많은 영웅들을 사진들도 모조리 검토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다.'라고 부딪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몹시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그의 머리에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모델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그토록 찾았던 자유의 여신상 모델은 바로 그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 가장 훌륭한 모델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의 대상은 바로 내 곁에 있습니다. 옥합을 깬 마리아는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곁에 게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멀리 있는 가난한 자를 찾고 있었습니다. /할/
⑶마리아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인가? 막14:8절에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마26:10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그 여자가 한 일을 '아주 좋은 일'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좋은 일이란 무엇입니까?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참된 예배는 십자가를 향하여! 예배의 중심은 십자가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쓰고 남은 것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힘을 다해 준비한 향유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죽음을 위해 미리 부어 드렸습니다. 유대인은 장사 때 시체에 기름을 바르곤 합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행위로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비한 것으로 칭찬하셨습니다. /할/
▶어느 여 집사님이 하루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폐품을 모아 팔아서 성전 건축 헌금으로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폐품을 모아 팔았는데 상당한 액수의 헌금이 모아져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날밤 집사님의 꿈에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천사의 안내로 예수님 계신 천국을 찾았는데 온갖 폐품으로 지어진 거지같은 집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집에 들어가기가 망설여졌습니다. 천국은 황금보석으로 꾸민 집으로 알았는데 이런 거지 집이 천국이라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그때 천사가 말하기를 '그대가 정성으로 지은 천국의 집은 폐품으로 지은 집이니라'고 할 때, 창피하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다가 꿈을 깼답니다. 집사님은 잠자리에 일어나 무릎을 꿇고 회개했습니다. 값비싼 보화는 장롱 속에 두고 폐품을 모아 바친 인색한 마음을 회개하고 새롭게 믿음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가 가장 귀하게 여긴 물질과 금은보화를 주님께 드리지 않으면 황금보석의 집을 쳐다 볼 수가 없겠구나!' 생각하고 드렸답니다. 물론 예화입니다만 주님은 정성을 다해 최선의 것을 드릴 때, 아벨의 산 제사처럼 받으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이 마리아의 이야기는 지난 2천년동안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마26장에서 주님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이 행한 이 헌신도 전파되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사복음서에 기록이 됐는데 이 말씀을 읽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지난 2천년 동안 시공을 초월하여 이 여인의 헌신의 모습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헌신의 모습을 왜 그렇게 강하게 강조하셨는가 하면 이 여인의 헌신의 모습에 사랑과 믿음과 용기와 자기희생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신앙의 자질이나 헌신의 자질에는 이상의 섬김의 요소들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헌신의 모습은 가장 모범적인 모습으로 예수께서 추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헌신이 가장 아름다운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할/
여러분, 이 시간 옥합을 깨뜨립시다. 옥합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옥합을 깨어 드리면 우리 주님이 지금도 '저가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칭찬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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