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참 기쁨과 헌신을 아는 여인! (눅 7:36-50)

by 【고동엽】 2022. 2. 8.

참 기쁨과 헌신을 아는 여인! (눅 7:36-50)

 

전설적인 세계 제일의 갑부였던 '존 록펠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86세의 노령에 시카고 대학 안에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예배당을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을 했습니다. 그때 어떤 기자가 그에게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세계 제일의 갑부의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그 비결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때 록펠러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세계 제일의 갑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면 그것은 어머님이 내게 물려주신 신앙의 유산' 때문입니다. 제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제게 이런 말씀을 유언으로 남기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정녕 세계 제일의 갑부가 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주일 성수, 온전한 십일조 생활, 그리고 제일 멋진 교회를 지어서 하나님께 바쳐드려라. 그러면 네가 원하는 대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어머님의 유언에 따라서 그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멋진 교회를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을 했습니다. 바로 뉴욕의 허드슨 강변에 우뚝 서 있는 '리버사이드 처치'입니다. 그 교회는 지금도 세계적인 명소가 되어 있습니다. 그 후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그가 원하는 대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계속해서 교회를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을 했습니다. 일생토록 그가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한 교회의 수가 자그마치 4,982개입니다. 5,000개에서 불과 18개가 모자라는 수치입니다.
기자가 또 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세상에 많은 기업가들은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재투자를 해도 성공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나 많은 교회를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을 하는데도 어떻게 세계 제일의 부자 자리를 계속해서 지킬 수가 있습니까?' 그때 록펠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제학을 알지 못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씨앗을 부지런히 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씨앗은 반드시 풍요로운 결실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가 제게 물려주신 위대한 신앙유산입니다.' /할/ ◀제목 소개!▶

 

본문은 4복음서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26:6-13, 막14:3-9, 요12:1-11절에서 향유를 깨뜨린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남편이 모르는 아내만의 기쁨이 있고, 아내가 모르는 남편만의 기쁨이 있습니다. 또 자녀가 모르는 부모만의 기쁨이 있고, 아내가 모르는 자녀만이 갖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얻어지는 기쁨보다는 희생하는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누구를 지배하는 기쁨보다는 그에게 헌신에서 오는 기쁨이 더 큽니다.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을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기쁨의 일면을 알고 그 기쁨의 다른 면을 몰라서 삶의 막대한 자원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들을 얻는 기쁨보다는 그 아들을 위해 희생과 사랑으로 키우는 기쁨은 더 큽니다. ▶일찍이 남편을 사별하고 아들 하나만 데리고 사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그 아들 하나를 위해 새벽부터 밤12시가 넘도록 이것저것 가리지 아니하고 품을 팔았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마음을 알아주어서 공부를 잘해 서울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졸업식 하는 날 어머니는 너무 기뻐서 한 잠을 못 잤습니다. 아들이 대견스러웠습니다. 자기의 고생스러운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졸업식장에 가보니 아들이 어여쁜 여대생 애인과 사진을 찍습니다. 어머니는 자기의 초라한 모습이 행여나 아들의 인격에 누가 될까봐 먼발치에서 바라보고도 기쁨이 큽니다. 여러분, 자식을 얻는 기쁨도 크지만 그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고, 사랑으로 키우는 부모의 기쁨은 더 값진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내 생명의 구주로 영접한 기쁨보다도 그 예수님을 일평생 내 삶 속에 모시고 살기 위하여 남이 알지 못하는 눈물과 희생과 봉사와 기도로 씨를 심고, 심는 그 기쁨은 더 큽니다. 진리를 얻는 기쁨도 크지만 그 진리를 내 속에 지켜 나가는 기쁨이 더 큽니다.

 

▶마21장에 보면 무명인의 헌신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3년 간의 공생애를 마감하고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지금 그 길은 죽음의 길로 가는 길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들어가십니다. 여기서 나귀의 주인이 등장하는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지시하시기를 마을에 내려가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주인이 왜 끌고 가느냐고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나귀 주인이 참 헌신의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름도 없는 충성 자입니다. 또한 그는 빛도 없는 충성 자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그는 보상도 없는 충성 자입니다. 이 사람은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는 말 한 마디에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상 없는 충성 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무조건의 충성 자입니다. 제자들이 가서 '주께서 쓰시겠다'하니 아무 말 없이 나귀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무조건의 충성 자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주를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이유가 많습니까? 바쁘고, 시간이 없고, 형편이 안 되고, 사람이 마음에 안 들고, 적성에 맞지 않고 이 핑계, 저 핑계하고 그럽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네 인생이 필요하다.'고 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도록 내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내 시간, 내 물질, 내 인생, 주님이 필요하다고 하면 내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요구라면 조건과 핑계가 없는 무조건의 충성, 이것이 신앙인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나귀 주인은 참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참 기쁨과 보람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주를 위해 봉헌하는데서 나옵니다. 순교자는 자기의 목숨을 하나님께 바칠 때 그 속에서 감격을 누리고 기쁨을 얻습니다. 헌신 자는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질 때 기쁨과 보람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과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줄 때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헌의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이 나귀의 주인은 자신이 귀하게 기른 나귀 한 마리를 주께 드림으로써 보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통해 마침내 슥8장에서, 사62장에서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리라'고 예언해 놓은 그 예언의 성취를 이뤄지게 했습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할/ 참 헌신의 기쁨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본문의 배경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시몬이라 하는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으셨는데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아 가시게 된 것은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일입니다. 시몬은 세상 적으로 얘기하면 출세한 당대 최고의 세도를 갖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훌륭한 랍비를 존경하기 때문에 그를 초청하여 식사를 나누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시몬도 당시에 랍비로 소문이 난 예수님을 초청해서 큰 잔치를 배설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잔치에 온 동네 사람들은 누구든지 와서 손님들이 먹고 간 다음 함께 식사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자선 행위였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이와 같은 잔칫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시몬이 예수님을 초청해 놓고 온통 자기 자랑만 하지 않았는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내가 신앙생활을 잘 했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저것도 보십시오' 온통 굉장한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그 집에 초청도 받지 않은 한 죄인인 여자가 들어왔습니다.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 창녀나 기생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죄인인 한 여자'란 '죄에 몸을 바친 여자'란 뜻으로 당시 유대 사회에서 죄인 취급받던 창녀인 듯합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신다는 말을 듣고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달려왔습니다. 당시 향유를 담은 옥합은 손잡이가 없었기에 속에 들어있는 향유를 사용하려고 하면 그 목 부분을 깨뜨려야 했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 전 재산을 들여서 준비한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다 쏟아 부어드렸습니다. 누구든지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헌신입니다. 바리새인인 시몬과 같이 자신의 출세와 남의 시선을 의식하여 잔치만 베풀 줄 아는 형식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이 여인과 같이 모든 것을 드릴 줄 아는 참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간혹 우리는 우리의 헌신을 다른 사람을 의식하여 외식하며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헌신이 아닙니다. 향유를 깬 그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십니다. 그리고 머리털로 발을 닦습니다. 발에 입을 맞추며 그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여자의 행동을 보고 좋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아주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여자가 창녀와 같이 더러운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가장 멸시 천대하는 네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창기, 세리, 이방인, 죄인'입니다. 특히 창녀와 세리는 아주 구제불능의 폐인으로 낙인찍혀 있었습니다.
그 여인의 행동에 아무 제재도 없는 예수님을 보고 집 주인인 시몬도 깜짝 놀라서 마음속으로 주님을 의심했습니다. '이 사람이 정말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떤 여인인 줄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 여인이 지금 당신을 유혹하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 놔둡니까?' 그런 얘기입니다.
예수께서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메시아이시기 때문에 바리새인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것까지 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세인 시몬 역시 하나님께 돌아와야 할 죄인임을 알고 계셨기에 그에 대한 영적 치료를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잘못을 바로 잡아주시려고 시도하고 계십니다.
시몬의 속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고 하시며 한 비유를 들여 주셨습니다. 41절 이하에 이야기입니다. ▶어떤 돈놀이꾼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500 데나리온을 졌고, 또 하나는 50 데나리온을 졌습니다. 그런데 둘 다 갚을 능력이 없어서 그 채주가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 중 누가 더 그 주인을 사랑하겠는가?'고 묻자, 이때 시몬이 대답하기를 '그야 500 데나리온 탕감 받은 사람이지요' 그럽니다. 예수님은 '그래 네 판단이 옳다!'고 하시면서 '이 여자가 이렇게 내게 행동하는 것은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바리새인이 그 여자보다 더 죄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두 사람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이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 받았고,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탕감 받았다고 말씀한 것은 바리새인이 죄를 덜 짓고 그 여자가 죄를 더 많이 지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느끼는 강도를 말하고 계십니다. 오히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에게 가장 신랄하게 정죄를 당한 그룹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바리새인과 여인의 차이는 여인은 자신이 엄청난 죄를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고, 바리새인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여자와 바리새인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느끼는 강도(强度)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 '자기 자신을 더 큰 죄인으로 느끼니 더 큰 사죄함의 은혜에 감격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마음속으로 '시몬아! 네가 지금 종교적으로는 온전한 것 같이 생각하고 있구나, 율법은 잘 지키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러나 너는 또 다른 기쁨의 세계로 잃어버리고 있구나!'라는 것이 오늘 본문 성경의 흘러가는 분위기이고 내용입니다.
여러분! 신앙을 어떤 자기 성취로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잘되고, 복 받는 것, 그것이 기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숨겨 있는 기쁨이 더 귀한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고, 수고하는 열심, 이것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 기쁨의 맛을 모릅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을 보면 서로 자기 성취 욕에 대한 불만이 많아 불편한 부부, 불편한 자녀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편이 자기를 위해 무엇을 안 해준다고 불평합니다. 아내가 나를 위해 무엇을 안 해준다고, 자식이, 부모가 무엇을 안 해준다고, 서로를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 삽니다. 피차 옥합을 깨는 인생의 기쁨을 모르는 것이 현대인의 삶의 비극이고, 현대문명의 비극입니다. /할/

▶오늘 본문의 내용을 깊이 보면, 시몬은 예수님을 청해 놓고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초청은 했지만 귀한 손님으로 영접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훌륭한 랍비를 초청하여 식사 대접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때 동네 사람들은 그 입에서 나오는 지혜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 집에 모여들게 되는데 그때 귀한 손님에게 베푸는 세 가지 순서가 있다고 했습니다.
⑴집주인이 손님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서 '살롬!' 하면서 평안을 기원하면서 입을 맞춰준답니다.
⑵손님의 발을 씻어 주는데 당시 유대 나라에는 먼지가 많고 신발이 지금 쌘달 모양이어서 더러운 것이 많이 묻습니다. 그래서 귀한 손님이 오시면 종을 시켜서 발을 씻겨줍니다.
⑶향유를 손님의 머리에 한 방울 떨어 뜨려주므로 땀 냄새를 제거해 주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시몬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면서도 입을 맞추거나 향유는커녕 발 씻을 물도 주지 않는 것을 볼 때,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눈물로 씻고 머리카락으로 닦았습니다. 희생을 드리고 생명을 드린 것입니다. /할/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44-46절에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예수님은 시몬의 냉대를 꾸짖었습니다. '시몬아! 잘 들어 두어라, 이 여인은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느니라'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그 여인을 향하여 '내가 이 여인에게 평안을 주노라'고 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고 하시면서 주님께서 친히 메시아임을 친히 계시하셨습니다.
이 죄 사함의 선언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런 말씀도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언은 주님께서 자신이 죄를 사하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신 자기계시의 방법입니다. /할/
시몬의 집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 예수님은 오늘의 이 본문에서 '이 여인을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그 여인의 행동을 비웃던 시몬에 대해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을 향하여 묻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이 여인을 보느냐?' 그 여자가 누구입니까? 죄 많은 여인 버림받은 여인입니다. 가치 없는 인생이요, 쓸모 없는 계집이었습니다. 의지할 곳 없는 여인이요, 때묻은 인생입니다. 쉽게 말하면 희망이 없는 여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야말로 예수님을 필요로 했던 인생입니다. 병든 인생이 아니면 이 땅에 병원이 필요 없습니다.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여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할/
주님의 관심은 돈푼이나 있다고 산해진미를 예수님을 접대하고 그것으로 자기 체면의 닦는 시몬과 같은 바리새인보다는 차라리 죄인이면서 눈물을 흘리며 헌신하는 본문의 죄인을 찾아서 믿음의 주인공으로 삼으십니다. /믿/

 

▶본문의 시몬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①자신을 볼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청해 놓고도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최고의 신앙가로 착각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한 번도 자기희생의 눈물이나 옥합을 깨어보지 못한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종교인에 불과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위하여 희생하고 눈물 뿌리는 사람들을 잘못된 사람으로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남이 나 자신을 바라본 듯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영적이 사람입니다. 시몬은 자신의 영적 무지를 볼 줄 모른 사람이었습니다.
②희생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물질적으로 어렵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전혀 시간적으로 주일을 지키기에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몸이 불편해서 교회를 나갈 수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핍박 때문에 힘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핍박을 이기며 믿는 것은 주를 위한 헌신의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할/
있다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어도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봉사할 수 없습니다. 없어도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헌신의 기쁨을 아는 사람입니다. /믿/
▶세계 백화점의 창시자 '존 워너 메이커'는 어려서 너무나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때 고향마을에 교회를 건축하는데 벽돌 한 마차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제목은 '더 많이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축복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어 그 후에 100만 불을 들여서 교회를 짓고 봉헌식을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곳에 선교를 했습니다.
그가 중국으로 선교시찰을 갔는데 한 고을에 아름다운 성전이 지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소 한 마리와 그 곁에 젊은 청년이 같이 쟁기를 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에는 노인이 쟁기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 두 마리가 쟁기를 끄는 것이 당연하건만 소 한 마리와 젊은 사람 하나가 쟁기를 끄는 것이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그 이유를 노인에게 묻자,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얼마 전까지 소 두 마리가 쟁기를 끌었는데 지난 주 한 마리를 팔았소. 저기 보이는 예배당을 지을 때 우리 부자는 헌금할 것이 없어서 염려를 했는데 내 아들이 소 한 마리를 팔자고 했소! 자기가 소 한 마리를 대신해서 일을 하고 소는 팔아서 헌금하자고 하기에 결국 그 소를 팔게 되었소. 그래서 지금 내 아들이 소를 대신하여 일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말을 들은 '워너 메이커'는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오! 하나님 이 충성스러운 청년에게 축복하여 주옵시고, 나로 하여금 저 청년과 같이 기쁨으로 멍에를 매게 하사 희생적인 헌신의 즐거움을 알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워너 메이커'는 그가 기도한 것처럼 많은 곳에 주의 일을 하면서 아낌없는 물질의 후원자가 되었고 헌신 자가 되었으며 그 속에서 감사와 기쁨을 누리면서 본문의 옥합을 깬 여인처럼 기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시몬은 옥합을 깨는 즐거움을 몰랐습니다. /할/

 

▶이제 본문의 여인의 신앙을 알아보겠습니다.
①이 여인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과거에는 동네 누구나 다 알도록 소문난 죄인이었으나 예수님 앞에 나온 이 여인은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섰다고 했습니다.
경건이란 외모를 꾸미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주교의 신부나 수녀들이 예쁜 예복을 입었다고 해서 경건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경건은 어떤 외적인 모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은 헬라어의 '유세베이아'인데, 크게 세 가지입니다.
⑴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⑵경외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⑶복종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외모야 어떠하든지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경외하는 마음과 하나님이 말씀에 복종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행10:2절에 보면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는 생활을 했다고 했습니다. 약1:27절에 보면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서 돌보아 주고 자기 자신을 항상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생활이라고 했습니다. /아멘!/
②이 여자는 눈물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38절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사람이 하루 흘릴 수 있는 눈물 량은 1입방 cm입니다. 생후 2-3개월 후부터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노년에는 눈물샘이 말라 눈물이 적게 흐른다고 합니다. 희로애락의 감정으로 눈물은 흐르게 됩니다. 눈물은 더러운 것들을 씻는 역할도 합니다. 그러나 눈물은 더러운 감정을 씻어 내는 역할도 합니다. 그래서 많이 우는 이들이 건강합니다.
어떤 의사는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사는 이유를 눈물에 두는 이도 있습니다. 남자들은 밖으로 돌면서 스트레스도 풉니다. 때로는 맛있는 것도 여자보다 잘 먹고 많이 먹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더 오래 사는 것은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더 눈물이 많다는 것입니다. TV에서 연속극을 보면서도 웁니다. 조금만 슬픈 일을 당하여도 웁니다. 그래서 여자의 무기는 눈물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아내가 TV 연속극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것, 꾸민 이야기이고 자기 이야기도 아닌 가지고 왜 눈물은 찔찔 짜고 있어?' 아내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당신은 왜 자기편도 아닌 축구팀이 꼬오링을 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요?'
▶눈물을 흘리면 영적으로도 축복이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흘려야 하는 눈물은 회개의 눈물입니다. 회개의 눈물을 많이 흘리면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나 비 그리스도인이나 다 같이 죄를 지으며 삽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 아픔을 가지고 자주 회개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지 않는 이들은 죄에 대하여 아픔을 느끼지 않습니다. 죄에 대하여 민감할수록 좋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당시 왕이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데려다가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자 침상이 눈물에 뜰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마도 성경에서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린 이는 다윗일 것입니다. 다윗은 시6:6절에서 탄식하기를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의 눈물은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좋은 눈물입니다. /믿/
오늘 본문의 이 여인의 눈물은 감격의 눈물이요, 참회의 눈물입니다. 죄인이 주님을 찾아가야 한 것인데, 주님이 찾아 오셨으니 감격의 눈물이요, 과거가 많은 더러운 죄인이 용서함을 받고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의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 과거의 죄악된 생활을 뉘우치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눈물은 진실의 표시오, 사랑의 표시오, 감격의 표시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눈물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본문의 여인은 옥합 속에 든 향유보다 더 값진 눈물을 쏟은 것입니다. /할/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생명의 역사는 눈물로 제단을 적시는 사건입니다. 다윗의 성군이 된 것은 그의 마음에 고귀한 눈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56:8절에서 다윗은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우치무라 간조'목사는 '눈물의 골짜기를 지냄이 없이는 하나님의 품에 이르는 길은 없다'고 했습니다. 성도의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믿/ 성도의 눈물은 은혜의 골짜기로 인도합니다. /아멘!/
③이 여인은 몸과 물질을 바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머리털로 발을 씻는다는 것은 헌신이요, 향유를 부은 것은 헌물을 드린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사회에서는 여성의 머리카락을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여성의 머리카락은 여성의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여성이 지니는 옥합은 결혼지참금의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요12장에 보면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을 보고 가롯 유다가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가롯 유다가 진심으로 가난한 자를 돌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돈이 탐이 나서 그런 것입니다.
어째든 옥합의 향유가 당시 삼백 데나리온이나 된다면 큰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6:6절에 보면 벳세다 광야에 모인 무리들에게 저녁 한 끼를 먹는 음식값이 이백 데나리온이나 필요하다고 했으니 삼백 데나리온은 칠천 오백 명이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그런 돈입니다.
이 여인은 최고의 것으로, 최상의 것으로 주님께 드릴 줄 아는 신앙 인이었습니다. 이런 귀한 손길을 우리 주님이 놓치지를 않으십니다. 붙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축복하십니다. 눅6: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아멘!/
④이 여인은 주님께 기념될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마26:1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기념될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은 모든 사람들이 기념하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를 기념하고 또 순교자들의 기념관을 세워 후손들에게 정신적인 교육을 주고 있습니다.
▶육군 사관학교에 가면 교정에 동상을 세우고 기념하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계급이 높아서 기념하는 것도 아니요, 참모총장을 했기 때문에 기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육군 소령 강재구 님의 기념동상이 세워져있습니다.
그가 계급이 높아 세운 것이 아니고, 그의 인격이 위대했고, 영원히 남을 행위가 있었기에 동상을 세운 것입니다. 그는 몸이라는 옥합을 깨뜨려 피를 쏟아 많은 생명을 살렸기 때문입니다. 월남의 파병 직전 훈련 중 부하가 수류탄을 오발하여 폭발이 되면 전 중대가 몰살 될 것을 생각하고 자기 한 몸 던져 전 중대 부하를 살렸습니다. 그 정신이 위대하여 후대에 그 정신을 기념하라고 동상을 세운 것입니다.
▶주님은 본문에서 '이 여인을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기념하라고 하신 것은 신앙적 의미에서 상고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향유를 '내 장사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여인이 옥합을 깨뜨리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몸의 옥합을 깨뜨려 피의 향유를 흘린 것을 예표한 것이기에 예수님은 이 여인을 크게 칭찬하고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막14:8-8절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 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할/
여기에서 주님은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보혈의 향유를 흘릴 것을 계시한 것입니다. 주님의 그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에 찬란한 부활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주님이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⑤이 여인은 주님께 최고의 것으로 헌신했습니다.
옥합은 영적으로 볼 때,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옥합을 깨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애지중지 가지고 계신 옥합이 무엇입니까? 재물입니까? 지식, 건강, 권력, 명예, 인기, 혹 자식입니까? 모두 깨십시오! 그리고 주의 영광 위해 바치십시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오셔서 평안을 주신 줄 믿습니다. 믿음대로 되는 축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어느 자매님이 폐품을 모아 팔아 성전 건축 헌금을 바치기로 하고 몇 년 동안 모아 팔았는데 상당한 액수의 헌금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대견하게 여기고 잠이 들었는데 그 날 밤 그녀의 꿈에 천사의 안내로 예수님이 계신 천국의 자기 집을 찾았는데 온갖 폐품으로 지어진 거지같은 집이더랍니다.
그녀는 들어가기를 망설였습니다. 천국은 황금보석으로 꾸민 집으로 알았는데 이런 거지같은 집이 천국이라 생각하니 기가 막힌 것입니다. 그때 천사가 말하기를 '천국의 집은 살아생전에 신앙생활을 할 때 올려준 재료를 사용해서 짖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대가 정성으로 지은 천국의 집은 폐품 집'이라고 할 때,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한지 어쩔 줄을 모르다가 꿈을 깼다고 합니다.
그는 그 자리에 일어나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값비싼 보화는 장롱 속에 두고 폐품 모아 바친 인색한 마음은 회개하고 새롭게 믿음 생활을 시작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⑥'이 여자를 보느냐?' 우리도 이 여자를 한번 바라봅시다.
이 여자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신앙의 상태를 점검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종교적 지식꾼인 바리새인이 되지 말고 탕감의 은혜를 아는 눈물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여인은 어떻게 감사하고 있습니까?
⑴눈물로 감격한 감사입니다. 이 여인이 흘린 눈물은 탕감 받은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비밀스런 액체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죄를 사함 받은 탕감의 은총으로 인한 감격이 절대 필요합니다. /아멘!/
⑵입 맞추는 경배의 감사입니다. 주님의 발에 엎드려 입을 맞추었다는 것은 주님을 경배하는 표시입니다. 주님으로 인하여 속죄의 은혜를 경험한 이 여인은 그 분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소와 때가 문제가 아니라 겸손하게 그 분을 높이고 싶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우리의 가치 기준이 바뀌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말하든지, 나는 나를 속량하시고 나를 자녀 삼으신 그 주님을 높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 분을 경배하며 그분을 찬양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깊은 신앙의 마음입니다. /아멘입니까?/
⑶향유를 드리는 헌신의 감사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귀한 것을 아낌없이 주님 앞에 드리는 헌신의 감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 시몬처럼 입니까? 아니면 여인처럼 입니까? 누구와 닮은 것 같습니까? 지금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네가 이 여자를 보느냐?'고 물으십니다. 이 여인처럼 헌신의 기쁨을 알고 살라는 교훈인줄 믿습니다. /아멘!/
⑦주님은 이 여인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두 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향유를 부어 드렸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여인은 이미 죄 사함의 은혜를 입은 여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향유를 부어 드린 것입니다. '여자여, 네 향유가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가 아니고 '여자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입니다. 향유는 이 여인이 믿음으로 드린 구원받은 은혜, 죄 사함의 기쁨을 표현하는 보이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평안히 가라'는 이 말씀은 '평안을 향하여 가라'는 뜻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함께 나눈 우리들이 예배를 마치면 집으로 돌아갑니다. 내일부터는 직장의 일터로 나아갑니다. 여러분, 오늘 평안을 향하여 가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새기고 가시기 바랍니다. 은혜 받고 불평 촌에 가서 뒹굴지 마십시오. 은혜를 받고 감사 촌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할/ 오늘 예배에 나온 우리들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축복해주시는 음성은 '평안히 가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히 가라, 예배를 드린 자여 평안히 가라는 것입니다. /아멘!/
⑧이 여인은 진실로 주님을 사랑한 자였습니다. 그러기에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예수께 대한 진실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희생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에 불과합니다. 예수 십자가는 인간에 대한 뜨겁고 진실한, 그리고 희생적인 하나님 사랑의 자기 폭로입니다. /할/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진실한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막연한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수를 사랑하는 행동입니다. /할/ 그래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나를 믿느냐?'고 질문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따져 물었습니다(요21:16).
진실한 믿음이란 진실한 사랑으로만 표현되는 것입니다. 예수께 대한 여러분의 사랑과 진실을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이 여인처럼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어드리며, 값비싼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옥합을 깨는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에게, 옥합은 깨십시오, 부모에게 옥합을 깨십시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하나님 주시옵소서!'만 하지말고 이제 한번 높은 차원의 기쁨을 알아 '주님 무엇을 드릴까요, 저도 옥합을 깨기를 원합니다.'라는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소원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지금까지는 우리도 시몬처럼 살았습니다. 지금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을 하십니다. '시몬아 너는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는데 이젠 너도 눈물로 나의 발을 씻기고 머리카락으로 나의 발을 닦아 보라, 시몬아 너도 옥합을 깨어 나의 발에 향유를 발라 보아라' 이 말씀에 오늘 우리 모두에게 깨달음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