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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있는 내 아버지의 집! (요 14:1-6)

by 【고동엽】 2022. 2. 8.

천국에 있는 내 아버지의 집! (요 14:1-6)

어제는 민족의 대 명절인 추석이었습니다. 추석은 설날과 함께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명절입니다. 설날 때와 마찬가지로 추석 때가 되면 한 차례 민족대이동이 일어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각각 자기 고향을 찾아가느라고 보통 때는 서너 시간이면 가던 길이 여섯 시간, 열두 시간, 아니면 하루 종일 걸리기까지 합니다. 고속도로들이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귀성길은 고생길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오고 가는 길이 너무 힘들고 또 고생할 것 뻔히 알면서도 해마다 반복해서 찾아 나서는 것이 고향 가는 길입니다. 아무리 시간이 많이 걸리고 운전하기 짜증나도 즐겁고 행복하기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향에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멀리 떨어져 살던 가족들과 친척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이민 간 어느 부인이 고향을 떠난 지 3년 만에 자기가 사는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했습니다. 외신은 그가 자살한 이유가 향수병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향수병에도 약이 없습니다. 고향은 안식처요, 어머니의 품과 같습니다. 그래서 고향이 그립고 고향을 찾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장성하면 고향은 흘러간 추억에서 살아있을 뿐입니다. 저도 부모님이 안 계시고, 큰형님도 돌아가셨고, 이제 고향이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귀성객들이 차표를 구하기 위하여 며칠씩 노력하여 한 좌석을 얻습니다. 그러나 막상 고향을 찾아간 다음에는 허무함을 맛봅니다. 산은 산이로되 그때 그 산천이 아닙니다. 옛날 그 친구들은 모두 다 바람처럼 흘러갔으니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찾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고향을 찾는 행렬을 귀성객이라고 한다면 우리 성도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저 천국을 향하여 달려가는 신령한 귀성객들입니다. /믿/ ◀제목소개!▶

 

오래 전에 '한명희'라는 사극이 있었는데 세조는 왕위를 찬탈하려고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노들 강변, 지금의 노량진을 말하는데 거기서 목을 쳐죽이기도 하고 능지처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교의 대학자였던 성산문도 죽었는데 그는 그가 죽기 전에 이런 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북은 둥둥둥 하면서 생명을 재촉하는구나/목이 떨어지기 전에 고개를 돌려 서쪽 하늘을 바라보니/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구나/황천에는 집 한 칸도 없다던데 오늘밤에 내가 죽으면 누구 집에 가서 거하나 오늘밤에 누구 집에 가서 잠들지....>하는데 칼이 날아와 목이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대학자도 가는 길을 알지를 못해서 '내가 죽으면 누구 집에 가서 거하며 누구 집에 가서 잠들지...' 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가슴이 메어 집니다. 공자도 그 제자 '게로'가 '선생님 우리가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하는 말이 '우리가 살았을 때의 일도 다 모르는데 어떻게 죽은 후의 일을 알겠느냐?'라고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솔직한 말입니까? 공자도, 성삼문이도 '내가 어디로 가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했는데 우리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할/


▶흔히들 인생에는 세 가지 질문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내 본향이 어디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땅에 고향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향을 가지 못하는 사람을 실향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에도 고향은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생물은 본능적으로 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소 본능이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고향을 향한 향수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깊어져 간다고 합니다. 코끼리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본능적으로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을 때는 자기가 태어난 곳에 가서 죽는 다고 합니다. 연어는 태평양 그 넓은 천지를 돌아다니다가도 산란기가 되면 자기가 태어났던 개울인 소위 엄마의 강을 찾아서 돌아오는데 그것을 보면 참 신기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비도 죽을 때는 제자리로 돌아오고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을 향해 운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짐승들은 죽을 때 자기가 태어난 곳을 향해 머리를 두고 죽는다는 말을 옛 선인들이 하셨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이처럼 고향을 생각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 마음은 갈수록 깊어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본향은 어디입니까? 하늘나라입니다. /믿/ 때가 되면 우리 모두는 하늘 나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절을 보니까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두 번째는 '오늘 나는 여기서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살까?'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다가 소설을 한 권 썼습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땅을 많이 차지하기를 소망하는 땅만 찾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신이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기를 '네가 오늘 마음껏 걸어 다니라. 네가 걸어 다니는 곳을 다 너에게 주마. 다만 해가 지기 전에 네가 돌아와야 한다. 해지기 전에 돌아오지 않으면 오늘 너의 수고는 무효가 될 것이다.'
그 사람은 땅을 차지한다는 생각에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히, 쉬지 않고 걷기 시작했습니다. 종일토록 걷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어 돌아보니 '아이쿠, 내가 욕심을 부렸구나! 해지기 전에 돌아오라고 했는데, 이렇게 가다가는 안되겠다.'고 하면서 뛰기를 시작했습니다. 숨을 헉헉 몰아쉬며 죽을힘을 다해 도착한 후 너무 숨이 차서 심장이 터져 죽어버리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결국 그가 차지한 땅은 그의 육신이 묻힐 고작 반 평 땅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을 통해 톨스토이는 결국 사람이 사는 이유가 땅을 얻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세상의 명예를 위해서 인생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 고전10:31절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할/
세 번째 질문은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것은 영원한 철학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이 땅에서 답해줄 현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할/
잠27:6절 '본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무슨 말씀인가? 여기 '본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세상만을 얻기 위해 분주한 사람'을 말하는데 그런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처량합니까? 우리 모두 천국의 소망을 굳게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본문의 배경을 알아보자!
요14장은 일명 '위로 장'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위로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이었고, 장소는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서 유월절 만찬을 드셨습니다. 그 밤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섬김의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요13:15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십니다. 가롯유다를 지칭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충격적인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요13:36절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요12: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이름의 뜻대로 제자들 가운데서는 모든 면에서 으뜸이라고 생각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이 요13:38절에서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십니다.
상황적으로 보면 그들이 예루살렘에 올 때와는 정반대의 상황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 때만 하더라도 그들은 매우 들떠 있었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나와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떠받들고 환호하고 난리법석을 칠 때까지는 그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정치적인 자리욕심을 가지고 들떠 있었는데 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들의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로 가고 잇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도 지금 이별의 슬픔과 죽음의 두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12시간 후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게 되었고 그리고 곧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실 제자들 자신들도 조만간 모두 붙잡혀 채찍질과 능욕을 당하게 되어 있었고 하나 둘 모두 붙잡혀서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 중의 하나인 야고보는 몇 달 후 칼에 찔려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빙산에 부딪힌 타이타닉 호에 승선한 승객들이 2시간 후에는 거의 모두 바닷물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이별과 죽음의 운명에 처했던 것처럼, 지금 제자들은 이별과 죽음의 운명에 직면하고 있었고 슬픔과 근심과 두려움에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있는 제자들에게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할/
요13:1절을 보세요! 정말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할/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변함 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형편이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변함 없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염려, 근심, 걱정이 있습니까? 그의 해답이 1절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할/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이런 찬양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근심된 일이 많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세상 사람들이 근심하며 살아갑니다. 또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이 세상에는 곤고한 일이 많습니다. 욥은 졸지에 재산도 잃고 자녀도 잃고 건강도 잃은 다음 사는 것이 너무 곤고하고 괴로워서 자기의 생일을 저주까지 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슬픈 일이 많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동생 나사로가 죽었을 때 너무 슬퍼서 통곡을 했다고 했습니다.
죽음도 이별도 무섭습니다. 내일의 불확실성도 무섭습니다. 세상은 온통 근심과 걱정으로 꽉 차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27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근심을 하거나 두려워한다고 해서 상황을 좋게 변화시키지는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근심과 걱정이 무서운 적이 되어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삶 전체를 파괴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6:25절을 통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어리석게도 매사에 근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근심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 문제가 크기에 다른 사람에게 전혀 관심을 갖지 못하고 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근심을 물리치는 길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어야'합니다. /아멘!/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견디기 힘든 40년의 긴 광야생활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붙드심에 의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할/
믿음의 반대는 근심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이 근심합니다. 근심을 이긴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근심의 시작은 믿음의 끝이요, 믿음의 시작이 근심의 끝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이 말씀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아멘!/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①하나님을 믿는 그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의 선한 섭리와 손길을 믿는 믿음입니다. 나의 한 평생이 전부 하나님의 선한 섭리와 손길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렘18:6절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안에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그분의 선한 섭리와 손길에 나 자신을 맡겨 버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윗은 시31:15절에서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고백했고, 욥은 욥23:10절에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에 자신을 전부 맡겨 버리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으면서도 할렐루야 찬양을 부를 수가 있게 됩니다. 근심 대신 평안을 두려움 대신 기쁨을 소유할 수가 있게 됩니다. /믿/
여기 '나를 믿으라' 이 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장담하고 보장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듯이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자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②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으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되 십자가를 통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믿는 믿음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굳게 믿을 때 우리는 모든 근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아멘!/
예수를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은 하나님이요,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이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시는 하나님이며, 오늘도 계속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할/
하나님만 바라보면 두려운 하나님이지만, 예수를 통하여 바라보면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 없이는 오늘 내가 여기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멘!/
③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신 성령을 믿는 믿음입니다. 성령을 믿되 우리를 위로하시고 감화하시고 변호하시는 보혜사 성령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를 참으로 위로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의 이름이 바로 위로자이십니다. 우리를 참으로 변호하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위로를 받고 성령님의 변호를 받을 때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 처해도 기뻐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할/
④그 진실한 약속을 믿으라는 뜻입니다(2-3). /할/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얼마나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말씀입니까? 이렇게 믿어지는 사람 많이 근심, 걱정에서 놓여나게 됩니다.
여기 '내 아버지 집'이란 특히 우리 동양 사람들에게는 '하늘나라'보다 더 친밀하게 느껴지는 말입니다. 나라보다 집이란 말의 어감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 집'은 하늘나라 곧 천국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경은 천국을 여러 가지 다른 말로서 표현을 합니다. 우선 천국이 곧 하늘나라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곳이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히11:16절에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할/ 고후12:2절에서 바울은 천국을 가리켜서 셋째 하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첫째 하늘은 대기, 둘째 하늘은 우주, 그리고 셋째 하늘은 천국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의 모든 사역을 마치신 후에는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막16:19절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이처럼 천국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천국이라고 불립니다. 또 천국은 하나의 성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하기 때문입니다. 히11:16절 하반부에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리고 계21:2절에서 천국을 가리켜서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 천국을 '낙원'이라고도 불립니다. 그곳이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눅23: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히브리서에는 두 종류의 본향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히11:15-16절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는 '나온바 본향'입니다. 아브라함의 갈대아 우르입니다. 땅에 있는 본향입니다. 즉 우리가 태어나서 부모님의 슬하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라난 육신의 고향입니다. 저희 고향은 전라도 정읍군 감곡면 계룡리 175번지입니다. 이 고향은 내 몸이 태어난 곳이고,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이 계신 곳입니다. 어릴 적 같이 자라난 친구들이 있는 곳이며, 나의 육신과 마음과 꿈이 함께 자란 곳입니다.
또 하나는 '더 나은 본향'입니다. 하늘에 있는 본향입니다. 이 땅의 교회는 이 하늘나라에 대한 모형이며, 그림자에 불과하지만 하늘나라는 이 땅 우리 인생들의 고향 그 실체입니다. 우리는 이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며 매일매일 세상을 살아가는 거룩한 순례자들입니다. /믿/


▶그런데 성경은 천국을 향하여 달려가는 거룩한 순례자들에게 '나그네 인생'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벧전2:11절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히11:13절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나그네라는 것은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해외여행을 많이 하는 분들은 자기 나라에 대한 소중함과 자기 가정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되고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나그네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 인생 모두는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서 낯 설은 인생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요 무덤을 향해 가는 행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의 행렬이 있습니다. 이는 하늘나라로 향해 가는 거룩한 순례 객들입니다. 이 행렬이 오늘 이 귀한 참 행복한 교회의 제단에 모였습니다. /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갔습니다. 그는 언제나 나그네로 살았고 외국인같이 살았습니다. 그 땅 어느 곳이든지 그가 영원히 영주할 땅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창23:4절 이하에 보면 아브라함은 그의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127세에 죽었을 때에 헷 족속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 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진실로 인생은 무상하고 허무합니다. 세월이 가노라면 인생 모두가 무덤을 남긴 채 떠나갑니다. 풍운아 다윗은 대상29:15절에서 인생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아브라함의 대를 이은 믿음의 족장 야곱이 요셉의 안내로 애굽 바로 왕과 대면을 합니다. 그때 야곱은 자신이 지나온 날을 회고하면서 이야기하기를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 라고 고백했습니다.
실로 우리의 인생은 나그네와 행인 같은 길을 가게 됩니다. 인생 길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만은 크게 보면 하룻밤을 여관에서 유숙하고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잘 살아도 한 세상이요, 못 살아도 한세상입니다. 인생은 한번 왔다 가는 인생입니다(히9:27).
누가 이 길을 거역할 수 있습니까? 권력을 쥔 자도, 재물을 쥔 자도 이 길을 막지 못합니다. 시90:3절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여기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누가 거역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나이 많으신 노인들은 70객, 80객이라고 하는데 이는 나그네로 7,80을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나그네 인생이란 '잠시 머무르고 가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천년만년 살 곳이 아닙니다. 잠시 머무르다가 가야 할 곳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이기에 나그네 철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⑴나그네는 어느 곳에 있든지 궁극의 목적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늘 고향을 그리워하는 본능을 귀소본능이라고 합니다. 여우는 죽을 때 꼬리를 자기 굴로 향하게 하고 죽는다고 합니다. 연어는 알에서 깨어 강에 놓으면 바다로 가서 살다가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반드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는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늘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며 본향을 그리워하는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⑵나그네는 항상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지금 있는 곳은 영원한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떠날 곳, 떠날 날이 있는 것이 나그네입니다. 떠날 때는 모든 것을 놓고 가야 합니다. 여기 저기 여행을 하면서 땅을 사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그네는 지나가는 곳에 애착을 갖지 않습니다.
야곱은 흉년을 피하여 애굽으로 70명 식구들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 곳에서 살면서도 고향 가나안 땅을 늘 그리워했습니다. 평생 나그네로 애굽에서 살면서 자기 시체를 고향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고 죽었습니다.
⑶나그네는 언제 떠날지 모릅니다. 나그네는 외롭습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나그네 인 것을 알고 나그네끼리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과부심정 과부가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그네 심정 나그네가 서로 알아주어야 합니다. 신10:19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우리 모두는 나그네이기에 나그네 된 모두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철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⑷나그네는 객지에 투자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고향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돈 벌어 가지고 객지에 투자하면 내 것 아닙니다. 떠나버리면 다 남의 것 됩니다. 지금 한국 사람들이 중국에 투자한다고 우리 것 되는 줄 아십니까? 몸만 다 빠져나갑니다. 이것이 뭘 의미합니까? 자기 고향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고향이 어디입니까? 하늘나라입니다. 내가 하늘나라 갈 때 어떤 존재로 하늘나라 갈 것인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땅에 다 탕진해 버리고 빈 손 들고 하늘나라 가면 우리 주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하늘나라 고향, 저 하나님 아버지의 세계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선한 일을 위해서 쓰여지는 우리의 헌신입니다.
⑸나그네는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벧전1:17절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나그네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이기에 늘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쓰러지기 쉽고 넘어지기 쉬운 것이 나그네입니다. 겸손하게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벧전2:11절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나그네는 항상 유혹이 많습니다. 시험도 많습니다. 싸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이 쪽 저 쪽으로 치우치지도 말고 육체의 정욕에 빠지지 않게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면서 넘어지지 않게 두려움으로 살아야 한다고 베드로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⑹이 땅의 나그네로서의 삶을 표본적으로 이루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나그네로, 나시고 나그네로 살다가, 나그네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 베들레헴 여관집 말구유에 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귀족의 저택이나 호화로운 별장에서 나지 아니하시고 여관집 말구유에 나신 의미가 뭡니까? 예수님은 인생은 나그네라고 하는 사실을 날 때부터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태어날 때 예수님은 나그네의 집에 태어난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사실 때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우리가 이렇게 나그네의 인생철학을 가지고 살면 욕심도, 원망도, 질투도 근심걱정도 다 없이 살게 됩니다. /믿/

 

▶천국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은 세상 고향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향을 말합니다.
⑴위치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우리의 본향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그 위치부터가 세상 고향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⑵하나님께서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마25:34절을 보면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2절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했고, 계21:2절에서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라고 했습니다. 또 고후5: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라고 했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더 나은 본향'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곳입니다. ▶우리를 위해 만드신 곳입니다. ▶그곳은 영원한 곳이요, 그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곳입니다. /할/

 

▶주님이 준비한 천국은 어떤 곳이고 지옥은 어떤 곳인가? ▶지옥부터 알아보자!
⑴전체가 불입니다. 불 못이라고 합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하는 곳입니다. 불은 심판을 상징하고 저주를 뜻합니다. 구약 시대 때 큰 범죄인에게는 불로 태우는 심판을 하셨습니다.

⑵어두운 곳입니다. 마8:12절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⑶세세토록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영원한 고통입니다.
⑷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입니다.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이를 갈게 됩니다. 엄청난 괴로움을 참을 수 없어서 이를 갑니다. 마13:50절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⑸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입니다(막9:48).
⑹하나님이 없는 곳입니다. ⑺누가 그 지옥을 갑니까?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마10: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천국은 어떤 곳인가?
⑴밤이 없는 곳입니다. 밤은 죄악과 공포의 상징입니다. 밤은 위험합니다.
⑵질병과 고통이 없는 곳입니다. 과학이 발달한 문명한 나라에도 질병과 고통이 수없이 많습니다.
⑶죽음과 슬픔이 없는 곳입니다. 계21:3-4절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일러라'
⑷염려와 근심이 없는 곳입니다. 세상에는 근심과 걱정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사업 때문에, 자식들 때문에,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온갖 염려와 근심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 스위스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제일 많다고 합니다. 천국에는 염려와 근심이 없습니다.
⑸유혹과 죄가 없습니다. 즉 사단의 음모가 없는 곳입니다.
⑹바다가 없습니다. 계21장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바다가 없다는 것은 폭풍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인생의 풍랑이 없는 곳입니다.
⑺천국엔 예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으리라' /할/

 

▶천국에 있는 내 아버지의 집에 갈 수 있는 티켓이 무엇인가?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⑴천국 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입니다. 우리가 문제에 봉착했다는 말은 길이 막혔다는 의미입니다. 길이 있으면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인생 길에는 크고 작은 문제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문제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청천하늘에 잔별도 많고 우리네 인생살이 수심도 많다'는 옛 노래와 같이 우리네 인생살이는 고달픔 그 자체입니다.
어떤 이는 질병 때문에 어떤 이는 자녀 때문에, 어떤 이는 물질 때문에, 어떤 이는 가정문제로 , 어떤 이는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무거운 짐들을 지고 갑니다. 가다가 길이 막혀 버린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이 길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길을 찾기 위해서 학문을 합니다. 지식을 많이 가지면 문제를 해결할 듯합니다. 그러나 곧 한계에 이르고 맙니다. 종교를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나는 길'이라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 있게 '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천국의 길을 알고 있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무슨 문제로 길이 막혔든지 이 시간 길 되신 주님께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길입니다. 말씀이 길입니다. 그 말씀대로 따라가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인생 길에 모든 길손들에게 예수께서 자신 있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할/
속담에 '길이 아니면 가지말고 말이 아니면 듣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길은 보이는 길과 보이지 않는 길로 나눠집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은 눈에 보입니다. 등산객이 등산하는 길도 보입니다. 비행기가 다니는 하늘에도 항로가 있습니다. 배가 다니는 바다에도 뱃길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만든 길이 있는가 하면 본래부터 하나님이 내신 길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만물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내신 창조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을 창조의 법칙 혹은 창조의 질서라 표현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중요한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곧 길이다' '내가 영생의 길이다, 내가 천국 가는 길이다, 내가 구원의 길이다' 주님이 제자들 앞에 분명하게 선언해 주십니다. 행16:31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롬10: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할/
여기 내가 곧 '길'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하늘나라 가는 길은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행4: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천국에 가는 길은 다른 어떤 종교를 통해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천국에 갈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멘!/
⑵오직 예수 그 분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진리는 상대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가 있습니다. 상대적 진리란 인간이 발견한 학문적 진리나 과학적 진리를 말합니다. 이 진리는 영원하지 않고 다른 진리가 나올 때는 여지없이 그 자리를 내 줘야 합니다.
그러나 절대적 진리는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을 '절대적 진리'라고 합니다. 예수님 자신을 진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절대적 진리는 변치 않습니다. 진리는 자유 합니다. 진리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 있게 그 분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 안에 있으면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하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 안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⑶오직 예수 그 분이 유일한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 죽음이 이길 수 없는 생명입니다. 요11;2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합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게 복음의 힘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습니다. 죄는 죽이지만 예수님은 살립니다. 내가 곧 생명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영원히 삽니다. 아이고하고 곡하고 끝나는 인생이 아닙니다.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은 둘째 사망, 지옥에 떨어지지만 예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아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할/
하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아들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은 약동하는 힘입니다. 생명은 찬란한 희망입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예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절망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불안할 수가 없습니다. 산 물고기가 물살을 가르며 올라가듯이 생명이 있는 사람은 어떤 역경도 이기고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너무 강하기에 죽음까지도 그를 결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생명을 이 시간 여러분의 심령 속에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번 추석을 맞이해서 그저 한 번 지나가는 명절로 지내지 마시고 내 육신의 고향이 있다면 돌아갈 내 영혼의 본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빚지고 실패한 사람들은 고향에도 제대로 못 갑니다. 부모님을 어떻게 만날까 싶어서 못 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을 훗날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이번 추석을 보내면서 더욱더 천국 백성답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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