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기다리는 자의 행복! (시 40:1-7)
어느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게 되었답니다. 가장 큰 점수를 면접에다 두었습니다. 면접 약속시간이 되자 시험에 응시한 사람들이 면접 장소로 다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면접관도 나오지 않고 늦어지는 이유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면접하러 온 사람들끼리 막연히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10분, 20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걱정합니다. '무슨 일일까? 웬 일일까?' 30분이 지나고 40분이 옵니다. 그러더니 점점 사람들의 말이 거칠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놈의 회사가 이 모양이야?'하고 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중에서도 '좀 기다려봅시다'하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 사람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한 시간 30분 후에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습니다. '여러분! 우리 회사에 지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약속대로 우리는 한 시간 30분전부터 여러분을 면접했습니다. 다만 면접방법이 평소와 달랐을 뿐입니다. 면접은 다 끝났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회사에서 일부러 그렇게 면접을 한 겁니다. 비디오카메라를 딱 설치해 놓고 약속시간이 되자 '이 사람이 정확하게 들어왔는지, 기다리는 태도는 어떠한지, 회사에 대한 반응과 기대가 어떠한지, 늦어지는데 대하여 그들의 해결방법은 무엇인지'를 다 찍은 것입니다. 그 중에 화내고 성질 냈던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요? 무조건 불합격이죠. '뭔가 이유가 있겠지'하고 조용히 기다린 사람, 불평 없이 기다린 사람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합격이었습니다. /할/
여러분, 인생살이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십니다. 면접 카메라보다 훨씬 정확합니다. 그렇습니다. 인내 없는 성공은 없습니다. 모든 성공 자들의 공통점은 인내하고 참은 자들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여 년 전 대통령이 되겠다는 꿈을 꾼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20대 젊은 나이에 정치판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로부터 40여 년 동안 험준한 역사의 준령과 정치변동의 파도를 타면서도 그 꿈을 포기하지 않은 채 도전과 인내의 연단을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93년 2월 25일 목요일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지금은 무섭게 추락하고 있습니다만 민선시대를 연 김영삼 전 대통령입니다. 그분이 기다리고 참고 도전하는 그 용기는 우리가 배우고 또 닮아야 합니다.
▶구전에 내려오는 이야기를 보면, 어느 날 아브라함의 집에 노인 한 사람이 찾아와 지나가는 길손이라며 식사를 요청했습니다. 손님 대접을 잘 하는 아브라함은 그분을 기쁘게 맞아드려 정성껏 대접을 했습니다.
밥상을 받은 그 노인이 식사기도를 안하고 그냥 숟갈을 드는 것을 본 아브라함이 '왜 감사기도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우상을 믿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화가 난 아브라함이 그를 당장 내 쫓으려고 하자 하나님께서 말리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참의라, 그 노인을 내쫓지 말라! 나도 그 노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100년이 가도록 참고 기다리느니라.'는 음성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할/
오늘 본문 1절에서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면 반듯시 응답이 온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희망이 없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절대 소망이 있는 기다림이요, 응답이 있는 기다림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기다리다가 지치고 낙심하여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보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기다릴 때 임하게 됩니다. /믿/ ◀제목 소개!▶
본문은 하나님을 향하여 도움을 구하는 다윗의 기도 시입니다. 다윗이 본문을 기록하게 된 배경은 그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입니다. 그가 낳은 자식이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무려 4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다윗의 심복이었던 아히도벨까지 압살롬이 포섭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든 어느 날 갑자기 헤브론에서 혁명공약을 선포하고 질풍같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한 다윗은 그냥 있으면 죄 없는 백성들이 희생을 당할까 봐 예루살렘 궁궐을 그대로 두고 급히 피난을 떠납니다.
여러분! 도망가는 다윗의 신세가 얼마나 처량하겠습니까? 다윗은 기가 막힙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소망이 끊어진 것 같고 멸망의 길로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다윗은 낙심하지 않고 그렇다고 또 압살롬을 원망하지도 않고 자기 신복 아히도벨의 배신을 저주하지도 않고 묵묵히 하나님께 기도를 먼저 드리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그가 압살롬의 칼을 피하여 도망가는데 사울 왕의 친족이었던 시므이가 돌을 던지고 티끌을 날리면서 다윗을 향하여 '죽은 개'와 똑같은 처지가 되었다고 저주합니다. 이때 신하 한 사람이 '저놈이 감히 대왕을 저주하다니, 가서 한 칼에 목을 잘라오겠습니다.'라고 하자, 다윗은 '가만 두어라! 내 몸에서 나온 자식도 나를 죽이려고 반역을 일으켰는데 베냐민 족속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욕하는 것쯤 무슨 잘못이 되겠느냐?'라며 그 신하를 말립니다.
다윗은 마음이 괴로운 중에도 자비를 베풉니다. 그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다 자기를 버릴지라도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귀한 신앙을 가지고 다윗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하나님은 외면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의 기도를 응답해 주셔서 반란을 일으켰던 압살롬과 아히도벨이 비참하게 죽고 나서 그 쿠데타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며 다윗은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찬송을 드리며 자기의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 부탁하면서 부른 시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을 차례대로 상고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할/
①기다리는 자가 응답을 받습니다(1).
기도 생활에서 '믿습니다.'도 좋고 '주시옵소서'도 좋습니다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구한 다음에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다윗의 신앙 관입니다.
여기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기를,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한번 나타나면, 하나님의 능력이 한번 나타나면 해결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아멘!/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구하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하고 바라보면서 기다립시다. '내가 이 문제는 하나님께 기도했으니 하나님의 능력이 곧 나타나시리라!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곧 해결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한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라는 말은 '기대하고 기대했더니, 신임하고 신뢰했더니, 앙망하고 앙모했더니, 사모하고 사모했더니'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고난과 슬픔 속에서도 오래도록 참고 기대하고 앙모한 것을 의미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기다릴 줄을 모르고 조급해 합니다. 물론 또 기다리고 기다리노라면 초조하고 답답할 것입니다. 성질 급한 사람은 신경질이 치솟을 겁니다. 그래도 참고 기다리는 자가 승리합니다.
성도의 덕 중에 가장 귀한 것이 기다릴 줄 아는 신앙입니다. 구약에 하박국 선지자도 꾀나 성질이 급한 선지자였나 봅니다. 합1장을 보면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어찌하여, 어찌하여'하면서 몸살을 합니다.
오늘날도 성질 급한 성도들은 '하나님! 어찌하여 일이 이렇게 빨리 안 됩니까?' 조급한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조급한 성도들에게 한 번도 책망하지 않으시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합2:3절에 보면 보채고 있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고 하십니다. /할/
그리고 다음 주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왜 그렇게 급하냐? 기도했으면 주실 것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걸어가라! 걸어가면 하나님께서 그 열매를 주시리라!'는 그런 뜻의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할/
하나님의 은혜로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립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기다리십시오. 기도의 응답은 기다리십시오! /아멘!/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기다림이 행복입니다. 가장 큰 기다림은 다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행1:11절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기다림이란 소망과 믿음의 결과입니다. 농부는 가을의 풍작을 기다리며 무더운 여름동안 땀 흘리며 농사를 짓습니다.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보면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무엇인가를 기다림이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다림 속에서 삶은 진행되고, 기다림 속에서 인도되고, 기다림 속에서 성취되어 감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기다림이란 것도 연령과 환경에 따라 다양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⑴결혼 적령기에 접어들면 젊은 남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게 되고, ⑵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엄마들은 그 아이의 성장을 기다리게 되고, ⑶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은 빠른 시일 내에 회복을 기다리고, ⑷집 없는 설움 속에 살던 사람들은 자기의 새 집으로 이사 갈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⑸분단 된 우리에게는 통일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삶은 모든 면에서 기다림의 연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기다림은 곧 삶 자체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해 기다림이 없는 삶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그 자체가 우리의 삶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만큼 소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기다림 속에서 내일을 바라보며, 그 기다림 속에서 오늘의 어려운 고통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기다림이 없어질 때 그것을 절망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기다림이 없다면 얼마나 우리의 삶이 적막하겠습니까? 기다림이 있기에 꿈을 키워 가는 노력이 있고, 기다림이 있기에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소망은 더욱 더 무르익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군대에 보낸 모든 어머니는 그 아들이 제대하고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면서 힘든 줄 모르고 온갖 고생을 참고 이겨내며 살고 있고, 남편을 해외근로자로 보낸 아내는 그 남편이 돌아오는 날의 기쁨을 바라보면서 '기다림의 소망'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에서 기다림처럼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누구를 기다린다는 것! 무엇을 바라보고 기다린다는 것! 바로 그 자체가 삶이요, 소망이요, 은혜요, 행복입니다. /믿/
▶사람은 임종시에 세 가지를 후회한답니다. '첫째가 좀 더 베풀 걸, 둘째가 좀 더 즐길 걸, 셋째가 좀 더 참을 걸'이랍니다. 참지 못한 것이 우리 마음을 임종시에 괴롭힌다고 합니다. 잘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대만의 역사가이자 사학자이자 작가인 '백양'이라는 분이 쓴 글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사람, 미국사람, 중국사람 세 사람이 돼지우리 속에 들어가서 '누가 오래 참나?' 상금을 걸고 인내심 경기를 하게 됐습니다. 먼저 일본사람이 들어가자마자 '아이고, 숨 막혀 못 견디겠다'하고 나왔고, 그 다음에 미국사람이 어지간히 견디더니 '아이고, 이제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고 나왔답니다. 그리고 중국 사람이 들어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옵니다. 심사위원들이 들어가 보니까 돼지를 떡 베개하고 누워 자고 있더랍니다.
이 중국작가는 말하기를 '이것이 중국 사람의 저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인내로서 승부가 결정이 됩니다. '얼마나 잘 참느냐, 얼마나 넉넉하게 느긋하게 참아내느냐'가 중요합니다. 야고보 장로님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할/
▶'하늘나라에는 되돌아온 소포가 많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만 더 참고 기도했으면 응답을 받았을 터인데 참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응답이 되돌아왔다는 뜻입니다.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응답이 옵니다. 그런데 참지 못하고 포기하면 응답은 없습니다. 얼마나 오래 참고 기다릴 수 있느냐에 따라 믿음이 좋다고도 할 수 있고 나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남보다 얼마나 오래 더 참을 수 있느냐에 따라서 그 만큼 큰 승리를 거두고 그만큼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과 인내는 쌍둥이와 같습니다. 강한 인내심이 없이 강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가 없고, 믿음이 없이 참된 인내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 하루 돌아도 무너지지 않고 두 번 돌아도 무너지지 않고 엿새 동안 돌아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참지 못하고 그만 두었다면 여리고 성은 함락되지 못했을 것이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끝가지 인내하면서 7일 동안, 일곱 번째 마지막 바퀴를 돈 다음에야 여리고 성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할/
남보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남보다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참고 인내한 사람입니다. '에머슨'은 말하기를 '사람이 영웅이 되는 것은 남보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남보다 1분 더 참는 인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전에 피부병 특효약 '606호'라는 주사약이 있었는데 왜 606호냐 하면 실패를 거듭해도 낙심하지 않고 605번까지 참고 계속했기 때문에 606번만에 성공했다고 해서 606호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루가 천년같이, 천년이 하루같이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악인을 심판하시는 것도 참고 기다리시며, 죄악이 관영한 이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것도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약5장에 보면 세 가지를 비유로 우리들에게 길이 참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⑴농부처럼 참으라! 약5:7절에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으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라고 했습니다. 농부는 풍성한 수확을 거두기 위하여 이른봄부터 씨를 뿌리고 여름에 땀을 흘려 가꿉니다. 그리고 가을을 기다립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입니다.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열매, 거두는 기쁨이 인내하는 자에게만 있는 계절입니다. 모든 것은 참아야 얻습니다. 참고 기다릴 때 잘 익은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참는 자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카뮈'는 '행복이란 그 자체가 긴 인내다'라고 했습니다. 금방 거둘 수 있는 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농부가 오랫동안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이 참고 기다려서 얻는 열매가 바로 행복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공은 인내로써 얻어진다고 했습니다. 뼈를 깎는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과 억울함과 굶주림과 고독을 오래오래 참아낸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멀리 바라보고 천천히 인내하면서 걸어갈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십니까? 봉사하십니까? 사랑하십니까? 인내를 통해서 기도의 열매, 봉사의 열매, 사랑의 열매를 기쁨으로 거두게 되는 줄 믿습니다. 농부의 인내로 열매 맺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⑵선지자의 본을 바라보라! 약5:10절에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선지자들의 고난과 오래 참음과 순교는 우리에게 위로와 힘이 되고 신앙의 본이 되고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애굽 옥중에 갇히는 모진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함으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온 가족을 가난에서 구했습니다.
다니엘은 포로 중에도 끝까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 때문에 사자굴속에 던져지는 시련이 있었지만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 참는 인내로써 승리하고야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 받고 아들을 얻기까지 25년을 참고 기다렸습니다. 야곱은 20년을 참아 축복의 거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참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참고 기다렸습니다. 그 결과 온가족이 구원받았습니다.
다윗도 참았습니다. 사울의 추격 속에서도 끝까지 참아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인내로써 고난을 기꺼이 받을 때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인내를 바라보고 길이 참아 마침내 열매를 맺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할/
⑶하늘의 축복을 바라보라! 약5:11절에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욥은 당대의 의인으로써 원인 모를 시험을 받아 고난에 처하였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인내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고난 받기 전보다 배나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끝까지 인내하는 성도가 받을 축복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아멘!/
그럼 우리가 어떻게 인내해야 합니까? 약5:7절에서 '길이 참으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길이'는 '쉽게 분노하지 않는다. 참을성이 있다'는 의미로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오래 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약5:11절에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라고 했으며 약1:12절에서도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고난 중에도 길이 참았던 욥에게 주신 하나님의 갑절의 축복을 바라보며 길이 참고 고난을 축복으로 이끄는 여러분이 되시기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1절에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그 기다림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소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믿/ 여기서 '귀를 기울이사'라는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조금만 높아져도 무시하는 경우가 있고, 조금만 가졌어도 우습게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온 세상 만물의 주인이 되시면서도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해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다윗은 시39:12절에서도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라고 호소했는데 이제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갈6:9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할/
②응답의 결과는 무엇인가?(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할/
여기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은 인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을 의미하며 발붙일 곳이 없는 사면초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다윗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압살롬이 치밀한 계획가운데 특수부대를 이끌고 질풍같이 질주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황급히 도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도망가는 다윗은 그 상황에서 생명을 살았다 하나 죽은 생명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길이 기가 막힐 웅덩이요, 수렁입니다. '웅덩이요, 수렁이 무엇입니까?' 절망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큰 절망은 뭐니뭐니 해도 죽음입니다. 이 세상의 죽음의 공포가 제일 무섭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우리 소가 수렁에 빠져서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릴 때, 동네사람들이 나무와 밧줄을 이용해서 건짐이 내는 장면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웅덩이에 빠지면 밑바닥이 수렁입니다. 수렁은 밟으면 밟을수록 깊이 빠지는 곳입니다. 수렁에 빠진 사람은 혼자 힘으로 나오기 힘듭니다. 다윗이 지금 도망가는 곳이 바로 수렁과 같은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은 '절대 불가능, 절대 절망적인 상황'을 말합니다. '웅덩이와 수렁'은 한 번 빠지면 자꾸 빠져 들어가서 나올 수 없는 환난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감당치 못할 '웅덩이와 수렁'에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웅덩이와 수렁에 빠진 적도 있습니다. 한꺼번에 망하는 경우도 있고, 조금씩 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병들은 적도 있습니다. 한꺼번에 병든 적도 있고, 조금씩 병든 적도 있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도,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도 역사적으로 보면 '웅덩이와 수렁'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속국이 되어 정치, 경제적으로 도저히 자립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식인들은 다 친일파가 되어 누구 한 사람도 대한민국 주권에 대한 희망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되찾게 하셨습니다. 6·25전쟁도 우리 국군의 힘으로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UN을 통해서 주권을 되찾고 이기게 하셨습니다. IMF도 경제난국도 풀어주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시37:23-24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손이십니다. 우리가 볼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우리나라 속담에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절망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됩니다. 여러분, 어떤 어려움 속에 있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성 어거스틴'은 '폭풍이 칠 때에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곁에 계시면, 그 어떤 위험 중에서도 우리는 안전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린아이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엄마 품에서 젖을 빨고 있는 아이는 걱정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습니다. 엄마가 어려운 문제를 다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안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마다 도와주시고 축복하시고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발을 반석 위에 두어서 다시는 웅덩이와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주님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건국대학교 유태영 박사의 간증입니다. 그는 농촌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제들은 하나같이 초등학교도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유태형 박사는 그 중에 제일 똑똑했기 때문에 초등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학교 다니면서 교회에도 열심히 나갔습니다. 교회에 나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하나님 공부 좀 하게 하옵소서! 계속 공부하게 하옵소서!' 그의 기도의 제목입니다.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구두닦이를 했습니다. 집이 없어 길 구석에서 쪼그리고 자면서도 교회에는 열심히 나갔습니다. 낮에는 구두를 닦고, 새벽종이 울리면 새벽기도회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계속 공부하게 하옵소서!' 기도 할 때는 구두닦이 통이 보이지 않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자기를 꼭 붙들어 주고 도와줄 것만 같았습니다.
한번은 기도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유학도 좀 보내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나오더랍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 구두닦이 청년이 유학 간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마음속에 '나도 유학 갈 수 있다. 돈 없어도 갈 수 있다. 배고파도 갈 수 있다.'라는 믿음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하루는 하나님 앞에 편지를 쓰는 것처럼 덴마크에 있는 국왕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한국 농촌이 어렵습니다. 저는 덴마크에서 공부해서 한국 농촌을 위해서 일 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국왕이 그 편지를 받고 나서 청년 유태영을 초청했습니다. 그는 차비와 등록금 일체를 지원 받으며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박사학위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귀국해서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새마을 운동에 크게 공헌하고, 다시 이스라엘로 유학 가서 박사학위를 또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건국대학교 부총장까지 되었습니다.
여러분, 농촌 머슴의 아들에서 대학교 부총장까지 누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대부분의 청소년들 같으면 절망하고 포기하고 쉽게 죄악에 물들었을 상황에서 그는 오직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만을 믿었습니다. 가난과 절망, 어려움 속에서, 웅덩이와 수렁에서 하나님께서 건져주셔서 그 어린 소년의 꿈을 성취케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도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소원을 갖고 기도하는 자, 여호와를 기뻐하는 자에게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할/
우리도 때때로 이런 수렁을 만납니다. 건강의 수렁, 사업의 수렁, 가정의 수렁, 자녀문제의 수렁, 영적인 문제의 수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다리고 기다리면 하나님의 권능이 다윗을 수렁에서 건져내신 것처럼 우리 하나님이 우리들도 건져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믿음은 바라보고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위에 하나님이 다시 한 번 큰 역사를 이끌어 주실 것을 믿고 기대하며 기다리고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전 성도들의 축복을, 교회의 부흥을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수렁에서 건지시고 어디에 두십니까?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였도다!' /할/
여기서 수렁과 반석은 비교되는 단어입니다. 수렁은 깊은 낭떠러지지만 반석은 견고한 요새입니다. 수렁은 절망이지만 반석은 소망입니다. 여기 반석은 안전한 곳을 의미합니다. 반석은 평지보다 높은 곳입니다. 수렁에서 높은 곳으로, 사면초가 꽉 막힌 곳에서 확 트인 곳으로, 반석은 비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성을 의미합니다.
수렁에서 건져내어 이제 무너지지 않는 기반으로 우리는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걸음을 견고케 해 주십니다. 여기 걸음은 우리 인생행로인줄 믿습니다. 찬송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또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할/ 얼마나 감사합니까?
다윗은 절망 가운데 수렁 깊은 곳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⑴수렁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⑵반석 위에 세워 주셨습니다. ⑶인생의 길을 환하게 열어 주셔서 발걸음을 견고케 해주셨습니다. /할/
③기다리고 기다렸다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다윗의 고백은 무엇인가?(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하나님 앞에 축복 받은 사람, 하나님 앞에 응답 받는 사람,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셨는데,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 주셨는데,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입 딱 다물고 모른척하고 시치미 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다윗은 거룩한 노래로, 영혼을 불태워 부르는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3절은 세 가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⑴찬송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예배와 찬송과 기도는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천사도 황제도 대통령도 마리아도 경배나 찬송이나 기도를 받을 수 없습니다.
⑵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새 노래라는 것입니다. 유행가 대중가요 가곡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는 새 마음과 새로운 자세와 태도로 불러야 합니다. 새 노래는 새 사람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새사람이란 구습을 벗어버리고, 거듭난 사람을 말합니다.
⑶찬송은 힘이 있고 능력이 동반됩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 본문 3절의 교훈입니다.
빌립보 옥중에서 불렀던 바울과 실라의 찬송은 그 감옥 터를 움직였고, 마침내 감옥 문을 열어 젖혔습니다. 하나님은 찬양 중에 거하십니다. 찬양은 위대한 능력이 동반됩니다. 원수 마귀가 벌벌 떨며 떠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악귀 들린 사울 왕을 위해 어린 다윗이 제금을 치며 찬양했더니 사울의 악귀가 떠나갔습니다. /믿/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기독교는 찬송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이유가 바로 찬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사43: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아멘!/ 엡5:19-20절에도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독일의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찬양은 악마를 쫓아버리기도 하고 사람들 즐겁게도 한다. 모든 분노와 부정과 교만, 그리고 악한 것들을 다 잊어버리게도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부정적인 것들을 싹 씻어 내려면 입을 열어 하나님 앞에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 몇 가지 바른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⑴간절한 마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⑵힘있게 불러야 합니다.
⑶가사를 음미하면서 불러야 합니다.
⑷음정이나 박자 그리고 태도도 바르게 불러야 합니다.
⑸믿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이 찬송이 능력이 있어서 역사 한다는 믿음으로 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고백처럼 찬송은 하나님께 올리는 노래이므로 진실하게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찬송을 듣는 사람들이 은혜 받고 하나님을 의지할 마음이 일어나도록 불러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성가대의 역할과 책임은 중요하고 큽니다. /할/
④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인가? (4)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다윗의 삶은 한 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었습니다. 기다리는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자신을 의지하고 거짓된 자는 거짓을 일삼고 살아갑니다.
의지한다는 말은 '믿을 수 있는 대상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까? 시37:5-6절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기 '맡기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꼬올'이라는 말로 '굴린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즉 큰돌을 산에서 지고 내려가지 않고 굴려서 내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쉽게 내려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내 인생을 주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믿/ 그래서 맡기라는 것입니다.
우리인생을 우연에 맡기려고 하지 마세요. 점쟁이나 사주 팔자에 맡기지 말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맡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잠16:3절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인생을 창조하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우주를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주 공간을 지금도 경영하고 계십니다. 그런고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복된 삶 인줄 믿습니다.
누가 신앙 인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할/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지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는 돌아보지도 아니하겠다고 했습니다.
여기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를 의지하며 거침없이 악을 행하는 자입니다. '거짓에 치우치는 자'란 '거짓되고 헛된 일에 치우치는 자'를 가르칩니다. 이런 자들은 돌아보니 아니한다는 것은 그들과 상대를 안 한다는 의미요, 또한 그들의 성공이나 출세도 부러워하거나 존경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교만한 사람은 상대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거짓된 사람은 상종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만한 사람, 거짓에 치우친 사람 옆에 있으면 전염이 되고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전염병 걸린 사람은 말만해도 병이 옮습니다. 교만한 사람, 거짓된 사람과 가까이 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⑤오늘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현대인들은 기적을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과학과 컴퓨터는 믿어도, 하나님은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종교의 능력과 종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추구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진리, 신령한 것, 고차원의 세계,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기적은 현재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과거에도 있었을 뿐 아니라,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이 기적을 허락하시고 역사 하시기 때문입니다. /믿/
일본의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는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가 있는 곳에는 기적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라 할지라도 기독교가 들어가는 곳,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믿는 곳에서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기적을 볼 수도, 체험할 수도 없지만, 하나님 앞에 나와서 겸손하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현실로 나타납니다. /아멘!/
⑥하나님은 예배 자들을 찾으십니다(6-7).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하나님은 나 자신을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나 예물이나 번제나 속죄제사보다 '나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왔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내가 주께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가라는 명령보다는 오라는 명령이 더 많습니다. 가라는 것은 복음을 듣고 전하라는 경우이고 오라는 것은 하나님과 대면을 위해서입니다.
'내가 왔나이다.' 이 고백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내가 다가서 있다는 고백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주님 곁에 제가 있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보고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요4:23). 여러분!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가장 강한 자입니까? 바로 주님 곁에 있는 사람입니다. /아멘!/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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